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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적인 신앙생활 (벧전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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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의 처신의 특징은 어떤 것들이어야 할까요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할까요 우리는 베드로가 소수에 속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기독교 신자들은 소수입니다. 비록 세상에 교회가 많고 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적지 않지만 참으로 거듭난 주님의 백성들은 결코 수효가 많지 않습니다. 본 항목에서 베드로는 신자들의 개별적인 생활 처신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가져야 할 교제에 관해 권면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수신자들에게 이 세상은 언젠가 끝이 날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현 세상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 주변의 세상이 항상 지속될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들이 신자들인데도 그런 착각 속에서 산다면 우리들의 생각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를 보면 이 세상 사람들이 그런 사고방식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3:4)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아는 자들이라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세상 일은 창조 이후로 그대로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로써 이 세상을 무섭게 심판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안전한 방주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자들은 모두 수장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안일한 생각에 젖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다시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만인이 심판을 받을 날이 온다고 말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심판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4:6). 베드로는 본문에서 그의 대표적인 주제를 재 강조합니다. 만물의 끝이 가까웠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각 속에는 주님의 다시 오심이 항상 앞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에 비추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주께서 다시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만인의 재판자로서 오실 것을 압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4:7). 이 말은 베드로 서신의 수신자들이 구원의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현대의 우리들도 이와 동일한 마지막 시대에 삽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단계를 거쳐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 세상의 창조 때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때까지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계획이 시해되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경이롭게 펼쳐지는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룬 사역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완성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새 이스라엘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벧전2:9-10). 이런 의미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언제 이 세상의 끝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압니다.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편지에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벧후3:11)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벧후3:12)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권면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4:7). 기도와 사랑 베드로는 신자들이 기도를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고 격려하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를 하나의 의무나 의식처럼 여깁니다. 기도를 그냥 행하는 것과 실제로 기도를 드리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방의 천장 높이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기도가 정말 하늘에 닿기를 바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는 하나의 장벽이 있는 듯합니다. 이 방해물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요 그 원인은 흔히 우리들의 내적인 문제들에서 기인됩니다. 우리들의 정신이 맑지 못하거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모릅니다. 또 다른 장애물은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자신을 통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이 이러저리 방황하면 하나님의 일들에 마음을 집중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마 사탄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서 혼란을 일으키도록 허락하기 때문에 기도할 때 정신이 산만한지도 모릅니다. 기도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들은 기도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마다 오래 기도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다는 질책을 받는다고 느낍니다. 그런 설교가 가져다주는 결과는 기도를 더 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기도 생활을 더욱 더 침체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시간씩 기도를 했다는 위인들에 대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들의 기도 생활에 회의를 품고 걱정합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씩 기도하지는 못한다. 내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스펄천(C.H. Spurgean)은 한번에 10분 이상을 기도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기도할 때에 정신 집중의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스펄전은 짧게 그리고 자주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길고 잘 짜여진 기도만 들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짧은 한 마디라도 맑은 정신으로 방황하지 않고 올리는 기도를 잘 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 회의 한숨 소리를 한 방울 흐르는 눈물을 단 한번 위를 향한 눈짓을 하나님은 가까이에서 다 듣고 보십니다. 우리들의 수직적인 관계(하나님과의 기도 생활)가 바르지 못하면 우리들의 수평적인 관계(다른 교우들과의 관계)도 바로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서로 깊이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들이 피차 깊이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성도들의 결함만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는 인간들로 짜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이 거듭나면 성도들이 됩니다. 그렇지만 성도가 된 날부터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닌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교인이 된 후에도 때때로 드러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들이 중생된 후에도 계속 인간으로 남아있으며 제각기 서로의 신경을 거스르는 행위들을 행하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참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4:8)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1:22) 뜨겁게 피차 사랑하면 다른 교우들의 허물이나 신경을 거스르는 행위들을 포용할 수 있는 은혜를 받습니다. 그럼 신자 상호간의 사랑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일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례를 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관심을 가장 실증적으로 드러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접”이란 손님이나 나그네를 친절하고 융숭하게 영접하는 것입니다. 대접은 음식을 잘 차려놓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음식상에 신경이 쓰여서 좀처럼 다른 교우들을 초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나 음식의 대소(大小)가 아니고 주인이 다른 형제들에게 베푸는 사랑과 관심의 표현입니다. 베드로 당시에는 주막이 위험한 곳이었고 때로는 부도덕한 장소로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집을 지나가는 다른 교인들에게 개방하는 일은 퍽 중요한 봉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집을 개방하다 보면 가족들에게 불편한 점도 있고 때로는 손님들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못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손님들은 다른 성도의 신세를 지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본문에서 “원망 없이” 대접하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권면입니다. 때로는 반가운 손님도 있고 때로는 무례한 손님도 있습니다. 대접받는 것을 마치 자신의 권리라도 되는 듯이 요구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이쪽에서 불편하고 어려운 줄 알면서도 꾸역꾸역 찾아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 예수님의 친구들이 주님을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기억하고 원망없이 다른 형제들을 섬겼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베드로는 우리들이 영적 은사들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목적은 다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신약은 신자들이 받을 수 있는 갖가지 영적 은사들의 목록을 열거해 줍니다. 로마서 12:4-8절과 고린도전서 12:7-11절을 보십시오. 이러한 은사들은 중생될 때 영적으로 향상된 천부적인 소질들일 수도 있고 혹은 신자가 구원을 받고서 특별히 부여받은 은사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각 신자들마다 모든 은사들을 다 가진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은사들에 따라서는 눈에 잘 띠는 것들도 있지만 그 중요성에는 차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영적 은사들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사들은 그 소유자 개인의 인기나 영달을 끌기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목적을 위해서 영적 은사들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영적 은사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도록 힘써야 합니다(엡4:12).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들을 가지고 격려하며 돕기 위해 세상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4:11). 신자들이 온전한 성경 말씀을 가르치거나 전달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놓고 말할 때에는 그 내용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전체적인 교훈과 원리에 맞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살아 있는 말씀’을 강론할 때에 성령의 내적 역사를 체험합니다. 교회 생활의 일부로서 주님을 섬기는 자들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합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활동들은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비추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 특히 믿음의 가족들의 복지를 위한 사랑의 관심을 쏟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일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4:11절처럼 본 항목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송영으로 끝맺습니다.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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