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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겨레,야훼의 백성 (벧전2:1-10)

본문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 여간 쉽지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이를 찾아 나서기는 하지만 되돌아 제자리에 오기가 일쑤 입니다. 아니, 제자리라면 오히려 다행일 테지만 대부분 더 나빠진 상태인 경우가 믾습니다. 빈손으로, 그것도 힘겹도록 흐트러진 몰골로 더는 출발도 하지 못할 행세를 하며 절망의 눈빛을 내두르는 겁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나는 끝을 보았다. 존재의 끝을! 그것은 다름아닌 허무!” 그러나 대부분 모르고들 있습니다. “허무”라고 불리우는 바로 그 자리가 진정 시작해야 할 지점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허무’는 끝이 아니야 “시작”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본문은 색다른 방법으로 이러한 사람의 행태를 파헤치고, 그 너절한 실체를 향해 가지고 있는 압바 여호와 하나님의 의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형편없이 뒤엉킨 너절함이 있을 뿐인 인간과 그의 역사가 끝내 다다를 수 밖에 없는 언덕은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2:1).
이를테면, “파행적인 의도”,“꾸며댄 행태”,“이웃을 등쳐먹는 말과 태도”,“남을 깍아내리며, 도려내며 생채기를 내는 온갖 술수”. 이러한 존재와 그의 역사를 향하여 할 수 있는 말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오호라 가련할 손, 더는 나아질 수 있으리란 기대는 말라버렸고, 너무나도 분명해진 파멸의 역사여!” 그런대 어찌된 일인가 “갓난아이의 순결함”(2:2)이라니. “순진무구한 삶짓”이라니. 어림도 없습니다. 어림이 반푼어치도 없는 일입니다. 너절함은 너절함을 낳는 법이고, 그 끝은 너무도 자명한데, “청명함”은 또 무엇이며, “깨끗하고 푸른 영성”은 또 무엇입니까 그렇지만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압바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방식은 다른데 있습니다. “허무”나 “파멸”이라 불리우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시작지점”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처절하도록 너절한 모습에서 “갓난아이의 순수와 가능성”을 읽으시는 것입니다. 부숴진 파멸의 가루에서 새로운 “건축자재”를 보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고 “끝장”난 마당에서 新도시를 설계하시고, 야훼 하나님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놀라운 작업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작업은 “있음의 혁명”입니다. “있음”이 너무나도 놀랍도록 놀라운 의미를 갖게되는 살림의 혁명 ! 하나님께서 그림그리신 것은 “거룩한 겨레”이고, 그분이 절망과 허무의 분진으로 끝내 이루신 것은 “거룩한 나라”인 것입니다. 사람은 허무의 분진을 허망하게 바라볼 뿐 이지만, 야훼 하나님이 사물을 바라보시 방식으로 바라보며, 그분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을 깨우쳐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살림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허무를 빚어 떡을 만들고, 절망의 가루로 전을 붙이며, 허망한 가슴을 자기연민의 빗자루로 쓸어내리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합니다. 이제 야훼의 나라는 분명해 졌으니 말입니다. 온갖 너절함을 “거룩한 겨레”로 삼으신 하나님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빛을 사람 앞에 비추어 살림의 삶짓을 보고 하늘 아버지를 찬양하게”해야 합니다. 오늘은 일흔 세번째 맞는 삼일절 입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우리 겨레가 걷고있던 역사는 “파멸의 역사”였고, 비굴과 절망의 “막다른 길목” 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며 어짜된 일인가를 돌아보며 물어볼 사이도 없이 열강의 칼에 베이고 또 베여 죽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파멸과 허무의 가루 속에서 새로운 건축자재를 발견하시는 야훼의 눈매”를 닮은 깨어있는 이땅의 아들 딸들은 질곡의 역사 한 복판에서 해방을 기정사실화 하며 새로운 겨레의 역사를 향하여 눈을 떴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날의 함성과 그 뜨거웠던 겨레의 가슴에 주위를 돌려야 합니다. 모두가 끝장난 역사이며
그러므로 적당히 악수하며 사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하여도, 고집스럽게 겨레의 새날을 꿈꾸었던 살아있는 이들의 함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암담한 조국의 현실을 야훼의 눈매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죽은 것에서 오히려 생명을 바라보며 파멸의 자리에서 시작지점을 보시는 그분의 눈매를 소유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살아있는 생각과 가슴을 가지고 있는 삶의 방식 입니다. 이것이 야훼의 생각을 이어받아 살아가려는 신앙인의 걸음걸이 입니다. 이러한 시각이 바로 “신앙의 눈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대와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점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매는 어디에 고정되어 있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또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절망의 가루를 만들어 내거나, 후회의 조각이나 주워담고 있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아픔이 됩니다. 야훼 하나님의 눈매로 우리와 겨레의 새날을 꿈꾸며 기도하고 움직이는 한주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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