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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사람 (겔22:30,벧전2:9)

본문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가장 문제 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성도들의 대부분이 형식화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형식화된 신앙 생활을 하다보니까 이 땅위에 또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실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상의 어느 하늘에나 계신 분으로. 혹은 교회 안에나 계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가대의 우렁찬 찬양과 파이프 올겐 소리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에는 하나님께서 내 맘 속에 들어와 계신 분으로 생각이 들다가도 교회의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그 하나님을 교회에 모셔두고 나만이 세상으로 다시 나가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 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고백을 하고 나왔으면서도 말씀을 들을 때의 감격과 결단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게도 많이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 말씀 듣는데 익숙해있지 행하는 것은 전혀 나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단지 그 교파의 교리나 법칙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함을 입었으면서도 매일 매일의 삶에서 율법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모든 교회들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여 생동력이 있으며, 살아계시는 성령의 활동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이 변화되고 이 사회가 정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의 상태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은 그 원인이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그 원인이 먼저 주를 믿는 나 때문이라고 하는 생각은 안해 보셨습니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를 위해서 들려 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 말은 우리 옆집 개똥이네 엄마에게 하시는 말씀, 저 말씀은 내 남편, 시어머니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고 있지나 않으셨습니까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모든 상태는 우리들의 믿음 없음과 전폭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람들이 없음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1. 인간은 자신의 교만과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고자 하는 것 말입니다. 지금 월세로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서 전세로 옮기게 될까를 생각하게 되고, 전세로 있는 사람은 자기집, 자기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집으로 옮길 것을 생각합니다. 어떤 초호화 빌라는 한 달 월세가 560만원까지 한다고 하는 것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어제 걸어다녔던 사람은 오늘은 버스라도 타고 다니기를 원할 것이고 내일은 자가용을 타고 다닐 수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 끊임없는 인간의 욕심은 인간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과 욕심을 갖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전적인 인간의 타락입니다. 모든 인류가 이 죄 속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은 가장 큰 교만입니다. 더이상 누구의 힘으로도 구제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간절하게 외친다고 하더라도 누구하나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하는 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2. 인간이 이렇게 암흑과 고통 속에서 부르짖고 있을 때에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줄 수 있는 중재자입니다. 이 중재자가 바로 구약에서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이 있으면 그들은 그 범죄에 적당한 속죄제물을 준비하여 가지고 제사장을 찾아왔습니다. 이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릴테니 나의 죄를 책망하지 마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이 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면서 간구합니다. 하나님 이 불쌍한 백성이 당신 앞에 죄 지은 것을 안타까와하여 속죄의 제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용서해 주셔야 이 백성이 앞으로 더욱 당신 앞에서 의롭게 살아갈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인간을 위해서 제사장은 간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대한히 진노하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땅에서 씨도 남기지 아니하고 모두 없이 하리라! 그 때에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간구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이 워낙에 못나서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도 아프게 해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살아가게 하신 이 백성 제발 좀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당신이 당신의 백성들을 모두 없애 버리시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얼마나 놀리겠습니까 그들은 비웃을 것입니다. 저들의 하나님은 저들에게서 떠났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한번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백성들은 제사장의 중재로 인하여 재앙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사람을 몇 사람 알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기 전에 그 성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주여! 주님께서 그들 중에 있는 의인들을 죄인들과 함께 멸망시키심은 옳지 않습니다. 그 성중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45인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40인이 있으면, 30인, 20인, 10인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그 숫자를 줄여가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위한 중재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내가 의인 10인을 인하여도 그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은 결국 의인 10인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2) 또한 모세와 바울이 중재의 사람이었습니다. 출 32장에 보시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가 있을 때에 백성들은 모세가 더디 내려옴으로 인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산에서 이 사실을 안 모세가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서 금송아지를 섬겼던 자들을 레위 자손을 시켜서 죽이게 합니다. 그런 후에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슬픕니다. 하나님,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려거든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시옵소서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동족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한 것이었습니다. 바울 역시도 모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롬 9장에서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내가 원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희생을 각오하면서라도 자기 동족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기를 간절히 원한 것입니다. 우리중의 대부분은 생명책에 나의 이름이 기록된 것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것의 기쁨을 잘 알고 있지 못한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에 큰 감격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취미 생활의 일부분으로, 혹은 부모님때부터 믿어왔으니까 나도 따라서 믿는다고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는 것은 매우 큰 일입니다. 여러분의 일생에 있어서 이 것보다 더 큰 일이 있다면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일은 여러분의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많은 재산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지금 죽음 앞에 서 있다면 여러분은 그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자신의 생명을 살리려 할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생명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와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버려서까지 동족의 생명을 구하려 하였습니다. 얼마나 동족을 사랑하였으면 그러한 사랑에까지 이르렀을까요 이러한 사랑은 부모의 사랑에서만 가능합니다. 부모는 자신을 죽여서라도 자식이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어느 양로원에 아나운서 한 사람이 찾아가서 그 양로원에 기거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물었답니다. 할머니! 아드님이 살아계신가요 암 살아있지!
그런데 할머니는 왜 이곳에 와 계십니까 아들아이가 불편해해서 내가 이곳에 보내달라고 하였어! 아드님 이름이 어떻게 되죠! 그걸 난 말못해!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아들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는 그 어머니의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죽여서라도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부모님의 심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몸을 죽여서 자식을 살리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못난 우리들 때문에 수많은 욕을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물어 버리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이 새롭게 발견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에서 보배피와 물까지도 다 쏟으신 것입니다. 참다운 중재는 이와같이 목숨까지도 요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선지자 중에 요나 선지자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방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멸망이 가까왔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멸망시키고자 하는 백성들이 자기 나라의 백성들이 아니었으므로 니느웨로 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는 니느웨 성에 대한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그 나라는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의 이러한 행동을 그대로 두시지 않습니다. 그가 탓던 배가 풍랑을 만나게 하고, 배의 선원들이 그 원인이 누구 때문인가를 알기 위하여 제비를 뽑게 될 때에 요나가 뽑히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바다 가운데 던져지게 되고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킵니다. 이 때서야 요나는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물고기에게서 요나를 구해내십니다. 요나가 니느웨성으로 가서 외칩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이 성은 무너집니다 이 소리를 듣고서 니느웨 왕으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금식을 하고 베 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에 대한 진노를 그치십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러실줄 알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성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기 위하여 요나가 초막을 짓고 그 곳에 앉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셔서 요나에게 좋은 그늘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요나는 그것을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에 벌레가 나타나더니 그 박넝쿨을 다 씹어서 그만 박넝쿨이 시들고 말았습니다. 그늘이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날씨는 더욱 더워져 요나는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왜 박넝쿨은 거두어가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는데 내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진실로 이방 백성들 까지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에 있다고 자만하며 계십니까 저 세상에 있는 백성들은 구원받지 못한 백성이라고, 저주의 백성들이라고 말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는 때때로 너무나 거룩한 것이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다지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구원하려하신 그 세상을 우리는 멸망과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나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과도 같이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하나님께서 성을 멸하려 하실 때에 그것을 못하게 할 사람을 하나님은 우리 중에서 찾고 계십니다. 그러한 사람이 바로 제사장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또 다른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직분이 어느 누구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민족의 멸망 앞에서 우리는 모세와 바울과도 같이 주여! 이 백성을 멸하시려거든 차라리 나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제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는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주인이 수년 동안 열매를 얻기 위하여 기다려온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자 종에게 그 나무를 잘라 버리라고 합니다. 그 때 종은 말합니다. 주인이여! 한 해만 더 두고 보십시요. 제가 물도 주고 걸음도 주고 열심히 가꾸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제사장이 우리 사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까 요즘 92년 종말론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비밀의 예언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그날을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게되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리라고 합니다. 저는 그들이 그러한 자세로 복음을 증거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올바른 제사장들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하며, 이 심판의 날을 하나님께서 늦추어주시기를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복음이 완전하게 전파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만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자세는 올바르지 못한 자세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범죄하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한 선지자입니다. 회개하라고 그렇게 외쳤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한 끝에 그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저같으면 아마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것봐라! 이 녀석들아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 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것 참 잘 되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동족의 멸망을 안타까와하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 좀 보세요. 얼마나 더럽고 추한 세상인가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더러운 세상을 사랑하실 수가 있으시죠 이렇게 말하는 제사장, 성도를 우리는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모세와 바울과 같이 자신을 죽여서라도 죄악에 빠진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들로 만들고자 하는 제사장, 성도를 필요로 합니다. 선한 목자, 선한 제사장은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와 일치의 다리를 놓아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죄악 가운데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과 하나님과 화해케 하는 일이 바로 우리의 일입니다. 서로 연합하여 일치하게 하는 일이 바로 우리의 일입니다. 주의 복음에 순종하여 말씀들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모든 족속에게 주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삶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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