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삶 (약3:13-4:3)
본문
구약의 지혜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야고보서는 올바른 삶에 대 한 광범위한 일련의 권고를 포함하고 있다. 교훈에 교훈이 연이 어 나온다. 그러나, 한 단락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분명하지 않다. 오늘의 본문은 그릇된 말의 위험성에 관한 강론 (3:3-12)에 연결될 수도 있고, 정욕에 탐욕과 속세성(俗世性)과 교만과 두 마음을 품는 것과 형제를 판단하는 것에 대한 경계 (4:1-12)에 연결될 수도 있다. 이 서신에 자주 보이는 기법이지 만 야고보는 본문에서도 수사학적인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prautes, 프라우테스)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 고 교훈하고 있다(참조:2:14-18). 야고보는 지혜를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위로부터" 난 지혜인데, 이것은 성결하 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 벽이나 거짓(anupokritos, 아뉘포크리토스, "위선적이 아닌")없는 지혜이다(17절). 그렇게 처신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에 확고히 서 있을 뿐, 자랑하거나 남을 끌어내리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온유한 자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에 합당 한 자로 칭찬하신바 있다(마 5:5). 그리고, 부드러움 곧 온유함 (prautes)은 바울과 그 이후의 신약 저자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마땅한 특성들 가운데 하나로 그 목록이 올라 있다(예:갈 5:23, 6:1, 엡 4:2=골 3:12, 벧전 3:15). 또, 한 가지는 "위로부터" 나지 않은 지혜로서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혹은 "생래적"'生來的. psuchikos, 프쉬키코스') 마귀 적"인 것이다(3:15).
"psuchikos"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한 예는 고린도전서 2:14과 유다서 19절에서도 발견된다. 그러한 지혜를 내세우는 자들은 마치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 교회의 소위 "신령 한 자들"처럼 시기와 교만이 가득한 자들이다. 시기와 다툼(즉 이기심'eritheia, 에리데이아')이 그들의 행위의 동인(動因)이다 (3:14, 16. 참조:롬 2:8, 고후 12:20, 갈 5:20, 빌 1:15-17, 2:3). 그러한 지혜의 결과는 고작해야 "요란" 곧 무질서 (akatastasia, 아카타스타시아. 참조:고전 14:33, 고후 12:20) 와 "모든 악한 일"(3:16) 뿐이다. 그러나, 화평케 하는 자(참조:마 5:9)는 화평으로 '그들의 지혜를'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 (3:18, 참조:빌 1:11, 히 12:11). 마치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신령주의자들로 하여금 지혜와 지식을 비롯한 그 들의 은사들을 교회에 도움을 끼치고 덕을 끼치고 교회를 세우는 사랑의 시금석으로 시험해 보도록 역설하고 있듯이, 여기에서 야 고보는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화평과 자비와 온 유함을 증진시키고 그럼으로써 진리에 따라 행동할 것을 촉구하 고 있다. 4:1-3에서도 역시 자기 중심주의가 주요 문제이다. 싸움과 다 툼과 살인은 자신의 정욕(즉 쾌락, hedonai, 헤도나이)과 탐욕의 노예가 됨으로써 생겨난다.
1절 하반절은 로마서 7:23, 그리고 2 절 하반절과 3절은 마태복음 7:7-11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올바 로 구한다는 것은 "선한 은사들"을 구하는 것이지 자기의 정욕을 살찌우기 위한 은사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제 2주제:야고보서 3:13-18 주제상으로 볼 때, 우리는 본문을 교사들과 가르침에 관한 야 고보의 교훈(3:1-2)이나, 혀의 길들이기 힘든 성격(3:3이하)이 나, 혹은 4장에 나오는 여러 가지 경고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 며, 또한 물론 그 자체로서 완전한 하나의 독립된 단락으로 취급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종류의 지혜에 관한 야고보의 비교는 분명히 고대 지혜문학 과 일치하고 있으며, 본문과 잠언 9:1-6, 13-18("오순절 후 열 세째 주일")과의 유사성이 그 한 증거가 된다. 히브리 지혜 문학 에서와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 곧 "위로부터" 오는 지혜라고 이해하고 있다(17절). 그렇다 고 그는 이것에 대해 사변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사람들과 사람들이 서로 상호 반응을 보일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 에 그의 눈을 요지부동 고착시키고 있다. 야고보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역동적인 관계와 또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유대 크리스천들(그 자신도 포함 해서) 개개인 사이에서도 발생되는 불가피한 양극화 현상들을 알고 있었음은 물론, 매우 민감했을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러한 또는 그와 유사한 양극화 현상들을 어떻게 다 루고 있는가 양측이 다 같이 자기네들이 올바로 이해하고 있으 며 따라서 지혜롭다고 주장한다. 그렇게되면, 경합이 벌어지고 시기심이 개인적인 욕망을 먹으며 서서히 자란다. 각자 자기의 입장을 과장해서 말하게 되며, 그러면 자연히 그 입장을 변호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고, 이런 식으로 나가다 보면 급기야는 바로 "마귀적인 것"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결국, 진리는 쓸모없는 것 으로 밀려나고 만다. 개인적인 승리가 진리를 대신하게 되고, 진리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그 승리는 기여이 따내야 하기 때문이다. 지혜와 마찬가지로 진리도 "위로부터"온다. 그것은 어느 일개 인이나 어느 일당의 소유물이 아니다. 아무도 "진리"를 갖고 있 지 않다. 모든 사람이 그저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양측이 대화를 해나가는 중에 진리의 보다 많은 면모를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들은 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은 서로 화평을 이루었으며, 서로에 대한 새로운 존경심(의'義')을 그 수확으로 거두고 있으며, 진리에 대한 보다 깊은 존중과 아울러(바울처럼) 우리가 지금은 다만 희미하게 보 고 부분적으로 알 뿐이라는 사실(고전:13:12)을 인정하는 데서 연유되는 겸손의 수확을 거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결합될 때, 그것이야말로 지혜가 아 니고 무었이겠는가! 우리는 야고보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위로부터 난 지 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편벽이 없나니."이 특성들을 면밀 히 연구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고, 또 우리가 얻게 되는 진리의 면모들과 또한 공공사회에서의 화법(話法)을 시험해 보는 척도를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야고보처럼 우리의 상호 반응과 대화의 역동적인 관계를 예의(銳意) 주시해야 한다. 만일 그것들이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을 초래한다면, 화평을 심 지도 의의 열매를 거두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 것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와 인간 사회를 향하신 그의 바램에 배 치되고 만다. 그것은 또한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 신 분에게도 반(反)하는 것이다.
"psuchikos"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한 예는 고린도전서 2:14과 유다서 19절에서도 발견된다. 그러한 지혜를 내세우는 자들은 마치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 교회의 소위 "신령 한 자들"처럼 시기와 교만이 가득한 자들이다. 시기와 다툼(즉 이기심'eritheia, 에리데이아')이 그들의 행위의 동인(動因)이다 (3:14, 16. 참조:롬 2:8, 고후 12:20, 갈 5:20, 빌 1:15-17, 2:3). 그러한 지혜의 결과는 고작해야 "요란" 곧 무질서 (akatastasia, 아카타스타시아. 참조:고전 14:33, 고후 12:20) 와 "모든 악한 일"(3:16) 뿐이다. 그러나, 화평케 하는 자(참조:마 5:9)는 화평으로 '그들의 지혜를'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 (3:18, 참조:빌 1:11, 히 12:11). 마치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신령주의자들로 하여금 지혜와 지식을 비롯한 그 들의 은사들을 교회에 도움을 끼치고 덕을 끼치고 교회를 세우는 사랑의 시금석으로 시험해 보도록 역설하고 있듯이, 여기에서 야 고보는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화평과 자비와 온 유함을 증진시키고 그럼으로써 진리에 따라 행동할 것을 촉구하 고 있다. 4:1-3에서도 역시 자기 중심주의가 주요 문제이다. 싸움과 다 툼과 살인은 자신의 정욕(즉 쾌락, hedonai, 헤도나이)과 탐욕의 노예가 됨으로써 생겨난다.
1절 하반절은 로마서 7:23, 그리고 2 절 하반절과 3절은 마태복음 7:7-11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올바 로 구한다는 것은 "선한 은사들"을 구하는 것이지 자기의 정욕을 살찌우기 위한 은사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제 2주제:야고보서 3:13-18 주제상으로 볼 때, 우리는 본문을 교사들과 가르침에 관한 야 고보의 교훈(3:1-2)이나, 혀의 길들이기 힘든 성격(3:3이하)이 나, 혹은 4장에 나오는 여러 가지 경고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 며, 또한 물론 그 자체로서 완전한 하나의 독립된 단락으로 취급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종류의 지혜에 관한 야고보의 비교는 분명히 고대 지혜문학 과 일치하고 있으며, 본문과 잠언 9:1-6, 13-18("오순절 후 열 세째 주일")과의 유사성이 그 한 증거가 된다. 히브리 지혜 문학 에서와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 곧 "위로부터" 오는 지혜라고 이해하고 있다(17절). 그렇다 고 그는 이것에 대해 사변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사람들과 사람들이 서로 상호 반응을 보일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 에 그의 눈을 요지부동 고착시키고 있다. 야고보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역동적인 관계와 또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유대 크리스천들(그 자신도 포함 해서) 개개인 사이에서도 발생되는 불가피한 양극화 현상들을 알고 있었음은 물론, 매우 민감했을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러한 또는 그와 유사한 양극화 현상들을 어떻게 다 루고 있는가 양측이 다 같이 자기네들이 올바로 이해하고 있으 며 따라서 지혜롭다고 주장한다. 그렇게되면, 경합이 벌어지고 시기심이 개인적인 욕망을 먹으며 서서히 자란다. 각자 자기의 입장을 과장해서 말하게 되며, 그러면 자연히 그 입장을 변호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고, 이런 식으로 나가다 보면 급기야는 바로 "마귀적인 것"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결국, 진리는 쓸모없는 것 으로 밀려나고 만다. 개인적인 승리가 진리를 대신하게 되고, 진리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그 승리는 기여이 따내야 하기 때문이다. 지혜와 마찬가지로 진리도 "위로부터"온다. 그것은 어느 일개 인이나 어느 일당의 소유물이 아니다. 아무도 "진리"를 갖고 있 지 않다. 모든 사람이 그저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양측이 대화를 해나가는 중에 진리의 보다 많은 면모를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들은 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은 서로 화평을 이루었으며, 서로에 대한 새로운 존경심(의'義')을 그 수확으로 거두고 있으며, 진리에 대한 보다 깊은 존중과 아울러(바울처럼) 우리가 지금은 다만 희미하게 보 고 부분적으로 알 뿐이라는 사실(고전:13:12)을 인정하는 데서 연유되는 겸손의 수확을 거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결합될 때, 그것이야말로 지혜가 아 니고 무었이겠는가! 우리는 야고보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위로부터 난 지 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편벽이 없나니."이 특성들을 면밀 히 연구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고, 또 우리가 얻게 되는 진리의 면모들과 또한 공공사회에서의 화법(話法)을 시험해 보는 척도를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야고보처럼 우리의 상호 반응과 대화의 역동적인 관계를 예의(銳意) 주시해야 한다. 만일 그것들이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을 초래한다면, 화평을 심 지도 의의 열매를 거두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 것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와 인간 사회를 향하신 그의 바램에 배 치되고 만다. 그것은 또한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 신 분에게도 반(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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