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마를 타라 (약3:1-12)
본문
우리나라의 제주도는 말을 키우는데 매우 적절한 곳입니다. 제주도에 가면 푸른 초원에서 말들이 꼴을 먹고 있는 여유롭고 평화로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에 보면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제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말에게 재가를 먹여 순종케 할 때에 훌륭한 말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는 월리엄 제임즈의 인간의 마음의 문제를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고, 인간의 마음이 성적 욕망이나 충동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프로이트의 주장도 읽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칼 융이 말하는 인간의 무 의식층의 세계가 인간을 지배하고 영적인 갈등을 일으킨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야고보서 4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 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요즘 우리나라의 범죄 속성을 보면 과거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동물보다도 못한 야생마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인륜이나 돋거이나 양심의 지배 를 받지 아니하고 동물적인 충동의 지배를 받는 현대사회의 수많은 범죄들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지난 약 90년간 종교, 철학, 윤리학, 일반심리학에서 심지어는 법학에 이르 기까지 인간 내부에 있는 야생마적인 충동과 정욕을 어떻게 다스려서 바른 사 회를 이루어나갈 것인가를 연구해오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성서에 있는 말씀을 중심해서 "야생마를 타라"는 제목으로 누구 에게나 도사리고 있는 이 야생마를 어떻게 다스려 나갈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 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자기의 본능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는 태도입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굴레를 쓸 필요가 뭐 있느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 능과 충동과 정욕대로 살자.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내가 싫으면 싫은 것이다. 새 것은 다 좋고 낡은 것은 다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의 세속적인 생활태도입니다. 죄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부 끄러움을 모릅니다. 이미 도더적인 자명종이 고장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도 덕이나 윤리, 철학이나 가치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 속 에 있는 야생마를 풀어 놓은 채 그 세력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서 날이 갈수록 탐욕과 음욕과 폭력과 반항과 약물중독과 같은 동물적이고 사 악한 범죄의 요소들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니이체 철학에서의 최고의 선은 인간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리비도(libido)를 주장했던 프로이드의 심리학도 인간은 충동대로 살아가는 것이지 자아(ego)나 초자아(superego) 같은 것에 제약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오늘도 야생마가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삼손은 원래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부정한 일을 하지 않는 절제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감동한 사람입니다. 힘이 센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속에 있던 야생마를 풀어놓고 보니까 블레셋 여인인 들릴라 의 유혹에 빠져 머리카락을 다 잘리고 눈알을 다 빼앗긴 채 깊은 감옥 속에서 멧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야생마대로 살다보면 판단력과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시 야가 흐려집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제한 없는 자유주의는 결국 윤 리와 도덕과 철학과 종교 없이 무질서하게 살게 하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 아야 되겠습니다. 칼 융이 말하기를 "우리 속에 야생마적인 속성을 다 가지고 있는데 오직 기독교만이 이것을 점검해서 바로 잡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에 무관심 하면 인간은 죄악의 홍수에 밀려 몰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자기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태도입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을 무조건 무시해 버리고 금욕주의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통과 질병이 찾아오는 것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니 이것을 무시해 버리 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지경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결국 니르바나(nirvna)에 이르게 되어 우리는 모 든 욕망없이 극락에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머리가 아플 때 아예 그 머리를 잘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자기 완성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아니하고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부정만 하고 억압만 해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완성을 위해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이것을 온전히 성화시키고 변화시켜야 됩니다. 니이체주의나 자기방임주의 나치주의나 공산주의 가지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똑똑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 힌두이즘이나 불교와 같이 내 욕망 만 죽여가지고도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요망과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야생마와 제갈 을 물리고 안장을 메이고 그 위에 올라타고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은 많지만 훈련을 받지 못해 남에게 밀려 날 수 밖에 없는 것을 생각할 때에, 아직도 거칠고 다음어지지 않은 우리의 야생마 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다스려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서 창조 적인 삶을 살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 때문에 자기를 완성시켜 나아가는 이 진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는 거칠은 사람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성품입니다. 아주 신경질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변화시켜서 수제자를 삼으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를 거꾸로 매달려 죽을 만큼 영감있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재물에 탐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세리의 책상을 내버리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명예욕이 있어서 예수님이 왕의 자리에 앉으실 때 좌우에 우리를 앉게 해 달라고 말했던 사람이로되 그 명예욕을 다스릴 때에 순교자가 되고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정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를 변화시킬 때에 성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약점과 거칠고 신경질적이고 다듬어지지 아니한 못된 성품 을 잘 아시면서도 우리를 부르시사 야생마와 같은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으로 다스리셔서 하나님의 선과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도가 되게 하시는 줄 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격을 아십니다. 못된 성격, 감정적이고 참을 줄 모르 고, 교만하고, 약점투성이를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변화시키셔서 우리로 하 여금 이 야생마를 타고 승리의 개선문을 향해 가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야고보서 4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 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요즘 우리나라의 범죄 속성을 보면 과거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동물보다도 못한 야생마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인륜이나 돋거이나 양심의 지배 를 받지 아니하고 동물적인 충동의 지배를 받는 현대사회의 수많은 범죄들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지난 약 90년간 종교, 철학, 윤리학, 일반심리학에서 심지어는 법학에 이르 기까지 인간 내부에 있는 야생마적인 충동과 정욕을 어떻게 다스려서 바른 사 회를 이루어나갈 것인가를 연구해오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성서에 있는 말씀을 중심해서 "야생마를 타라"는 제목으로 누구 에게나 도사리고 있는 이 야생마를 어떻게 다스려 나갈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 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자기의 본능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는 태도입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굴레를 쓸 필요가 뭐 있느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 능과 충동과 정욕대로 살자.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내가 싫으면 싫은 것이다. 새 것은 다 좋고 낡은 것은 다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의 세속적인 생활태도입니다. 죄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부 끄러움을 모릅니다. 이미 도더적인 자명종이 고장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도 덕이나 윤리, 철학이나 가치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 속 에 있는 야생마를 풀어 놓은 채 그 세력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서 날이 갈수록 탐욕과 음욕과 폭력과 반항과 약물중독과 같은 동물적이고 사 악한 범죄의 요소들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니이체 철학에서의 최고의 선은 인간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리비도(libido)를 주장했던 프로이드의 심리학도 인간은 충동대로 살아가는 것이지 자아(ego)나 초자아(superego) 같은 것에 제약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오늘도 야생마가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삼손은 원래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부정한 일을 하지 않는 절제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감동한 사람입니다. 힘이 센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속에 있던 야생마를 풀어놓고 보니까 블레셋 여인인 들릴라 의 유혹에 빠져 머리카락을 다 잘리고 눈알을 다 빼앗긴 채 깊은 감옥 속에서 멧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야생마대로 살다보면 판단력과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시 야가 흐려집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제한 없는 자유주의는 결국 윤 리와 도덕과 철학과 종교 없이 무질서하게 살게 하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 아야 되겠습니다. 칼 융이 말하기를 "우리 속에 야생마적인 속성을 다 가지고 있는데 오직 기독교만이 이것을 점검해서 바로 잡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에 무관심 하면 인간은 죄악의 홍수에 밀려 몰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자기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태도입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을 무조건 무시해 버리고 금욕주의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통과 질병이 찾아오는 것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니 이것을 무시해 버리 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지경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결국 니르바나(nirvna)에 이르게 되어 우리는 모 든 욕망없이 극락에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머리가 아플 때 아예 그 머리를 잘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자기 완성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아니하고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부정만 하고 억압만 해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완성을 위해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이것을 온전히 성화시키고 변화시켜야 됩니다. 니이체주의나 자기방임주의 나치주의나 공산주의 가지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똑똑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 힌두이즘이나 불교와 같이 내 욕망 만 죽여가지고도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요망과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야생마와 제갈 을 물리고 안장을 메이고 그 위에 올라타고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은 많지만 훈련을 받지 못해 남에게 밀려 날 수 밖에 없는 것을 생각할 때에, 아직도 거칠고 다음어지지 않은 우리의 야생마 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다스려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서 창조 적인 삶을 살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 때문에 자기를 완성시켜 나아가는 이 진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는 거칠은 사람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성품입니다. 아주 신경질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변화시켜서 수제자를 삼으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를 거꾸로 매달려 죽을 만큼 영감있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재물에 탐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세리의 책상을 내버리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명예욕이 있어서 예수님이 왕의 자리에 앉으실 때 좌우에 우리를 앉게 해 달라고 말했던 사람이로되 그 명예욕을 다스릴 때에 순교자가 되고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정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를 변화시킬 때에 성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약점과 거칠고 신경질적이고 다듬어지지 아니한 못된 성품 을 잘 아시면서도 우리를 부르시사 야생마와 같은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으로 다스리셔서 하나님의 선과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도가 되게 하시는 줄 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격을 아십니다. 못된 성격, 감정적이고 참을 줄 모르 고, 교만하고, 약점투성이를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변화시키셔서 우리로 하 여금 이 야생마를 타고 승리의 개선문을 향해 가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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