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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됩시다 (약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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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첫 목회지로 경남 합천읍에 있는 한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최고 높은 어른이 그 지역 출신이었을때 였습니다. 따라서 제가 그 지역에 있으면서 들었던 말은 합천에서 근 경찰서 장이 업무를 수행하기가 가장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합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 지역 출신의 최고 높은 분과 관계가 맺혀지기 때문입니다. 하다 못해 그 어른과 사돈에 팔촌이라도 되기 때문에 어떤 민원이 생기면 그것을 저들이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문민시대가 아니 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라는 짐작이 갑니다. 우리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말씀을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서 1장 1절의 말씀을 봉독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중에서 앞에 제가 말씀드린 부분과 비교가 되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그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는 부분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오늘의 말씀의 주제이자 본론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 우리는 이 말씀을 기도중에 사용하는 것을 많이 들어왔고, 또 우리 역시도 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쉽게 사용되어질 수 있는 말이 왜 그렇게 중요하게 오늘의 말씀 에서 두각을 나타낼가요 그것은 오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을 한 그 야고보가 예수님의 ' 육신의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그가 예수님의 친 동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서 공생애의 시절을 보내면서 복음 사역을 했을때 자기의 형님인 예수를 구세주로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요 7:1-5에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 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 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 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더라" 이 부분에서 3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면 "당신이 메시야이면 왜 집안에 만 파 묻혀 있습니까 나가서 한번 드러내 보시오"라는 말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 형님 당신이 그처럼 위대하고 똑똑한 스승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나사렛에서 살지 마시고 저 큰 베들레헴에 가셔서 유대의 위대한 랍비들 처럼 제자를 키우소서. 왜 이곳에서 우리까지 망신을 줍니까 "라는 말로 표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기는 커녕 오히려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지 못하던 야고보가 어떻게 예수님를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였을 까요 고전 15:4-8의 말씀과 행 1:14의 말씀을 통해 야고보가 예수님을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인 사유를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고전 15:4-8 , "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 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 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 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행 1:14 ,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야고보가 예수님을 그의 구세주로 영접하기까지는 크게 두가지 요인이 있음을 시 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첫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을 접했던 것 입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했고 이랬던 저랬던 간에 육신의 형님 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아픔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기에게 나타났으니 그것은 참으로 놀라 운 일이었을 것이고 그 만나는 싯점이 바로 예수님이 단순히 자신의 육신의 형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더 나아가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 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부터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120문도와 함께 모여 서 전혀 기도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받고 능력을 받아서 초대교회시절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감독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억지이고 실제로 성경상으로는 야고보가 초대 감독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초대 감독이 된 야고보는 어떤 삶을 살았을 까요 바로 이 부분이 오늘 말씀의 요지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야고보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그 당시 야고보 주위의 사람들은 다 알았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속에 있었던 야고보는 오늘 말씀의 서론에서 제가 말씀드린 합 천의 상황이었다면 그 기세가 굉장했을 것입니다. 엄청났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동생인데 적어도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굉장히 우 쭐거렸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야고보가 오늘 본문에서 자기를 어떻게 소개를 하고 있습니까 자기는 예수님의 동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종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말하는 짐승의 대우를 받는 노 예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종이 자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와 그래도 30년을 같이 지내면서 희노애락을 같이 나누었던 형님의 종이라고 자기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말로만 끝난것이 아니라 야고보는 순교를 함으로서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자기의 동생 유다도 순교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제 동생들이 저의 장점을 다 알고 단점을 다 아는 동생들이 제가 하나님 이라고 저를 믿고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면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제보고 아마 정신차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더 심하면 그래도 형님이기에 정신 병 원에 입원을 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자기의 육신의 형이었지만 그 분은 그런 육신의 관계를 떠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 예수님을 목숨을 바치기까지 부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감독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의 미움을 받고 가혹한 핍박을 받습니다. 저들은 성전 꼭대기에 야고보를 세워 놓고 예수가 구세주임을 부인하라고 욱박질 렀을때 야고보는 예수의 구세주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말했다고 합니다. "저기를 보라,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렇게 외치는 야고보를 저들은 밀어버렸습니다. 땅에 떨어진 야고보는 그래도 숨이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겨우 숨이 붙어있는 야고보에게 저들은 돌을 던지고 몽둥이질을 하면서 핍박을 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런 참혹한 상황을 당하면서 죽는 순간 외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외쳤던 것입니다. 철저하게 주님을 위해 죽어가는 야고보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더 이상 자기의 육신의 형님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구세주였 기에 또 그런 사실을 믿었기에 이런 목숨을 바치는 순교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교훈하심을 마음속에 새겨 봅시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종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종인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말로만 종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전 인격을 다 동원한 종입니까 실로 이 문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종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행동은 종과는 거리가 먼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종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종은 섬김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의 경우는 그가 비록 예수님의 육신의 친 동생이었지만 철저하게 종의 자 세를 가졌습니다. 그런 야고보의 모습을 본 야고보서 전체를 통해 한가지 살펴보자면 흔히들 야고보서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야고보서 서신 자체를 통하여 '예수'라는 말이 두 군데(1:1,2;1)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비판을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뱅겔이라는 성서학자의 주장을 들어보면 야고보의 겸손함이 바로 이 부분을 통해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가 았습니다. 벵겔에 의하면 야고보는 그 자신이 예수님의 육신의 친 동생이기에 '예수'하면 곧 '형님'하는 것과 같아서 될 수 있는대로 예수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한 것같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야고보 사도의 평소의 성품으로 보아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야고보의 성품은 그가 평생을 통하여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과묵했습니다. 그는 실천의 사람이었고 검소한 사람이었고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높이 존경을 받 은 사람으로 알리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야고보였기에 벵겔의 그 주장이 아주 타당성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아뭏던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 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 세워서 이용하 지 않고 그런 사실을 오히려 숨기면서 자기 자신은 종으로 생각하면서 신앙생활 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이점 깊이 마음속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나는 교회에 섬기러 왔는가 섬김을 받으러 왔는가 나는 교회에 사랑을 받으러 왔는가 사랑을 주기 위해 왔는가 혹 나는 이 교회에서 인간적인 그 어떤것을 내 세우는 부분이 있지 않는가 늘 점검해 보아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철저하게 야고보 처럼 섬김의 종의 신분으로 신앙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혈연관계, 인간관계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야고보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 라보면서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내것은 아무것도 없 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내 목적도, 내 능력도, 내 지혜도, 내 생명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됩니다. 오직 절대 순종과, 절대 충성을 다짐하고 맹세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종으로 자처한 야고보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사로 잡힌 야고보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초원교회성도들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철저하게 낮아진 야고보를 큰 일군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낮아진 우리 부산초원교회와 성도님들을 동일하게 사용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부산초원교회 오직 종으로서의 낮아짐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 시는 모든 부산교회의 사명과 한국교회의 사명과 더 나아가서는 세계교회의 사명 을 감당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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