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제자인가 (눅6:12-19)
본문
우리 교회에서는 금주부터 제2기 디모데 훈련 과정을 시작합니다. 명칭만으로는 어떤 것을 하는 것인지 파악되지 않는다면 제자 훈련 과정이라고 쉽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들은 여럿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아버지와 자녀, 주인과 종, 친구와 친구, 스승과 제자 등등. 이 중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제자 훈련이란 용어가 사용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승으로서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을 배우고 그분께서 전해주신 가르침을 배우고 그분께서 지시하신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 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 였노라”(요13:12-15) 이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 바로 디모데 훈련입니다. 본문은 제자 훈련을 앞두고 있는 우리 모두가 염두에 두어야 할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 훈련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특히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일을 여러 차례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기도가 본문 12절에 언급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년 남짓한 그분의 짧은 공생애 기간에 전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제자 훈련 사역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제자 훈련의 성패는 선택된 사람에 좌우됩니다. 자연히 그분께서는 이 문제를 놓고 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된 주님의 철야기도로는 이 경우를 제외하면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하신 기도(마14:23-25)를 꼽을 수 있을 뿐입니다. 잠을 거부하면서까지 철야 기도를 하신 것은 주님께서 마음에 큰 부담이 있으셨음을 나타내 줍니다.
둘째로, 제자라고 해도 다 같은 제자는 아닙니다. 본문 말씀은 저 유명한 산상수훈(山上秀訓)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 주위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제자의 허다한 무리(17절), 그 중에서 막 사도로 택함 받은 열 두 제자(13절), 그리고 제자는 아니나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온 많은 사람들(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아온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로 나아오는 것 자체만으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당에 앉아 성경 말씀을 듣는 것 자체만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아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 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2:40-41)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반 제자들과 열 두 제자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기 위해서 열 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막3:14-15). 모든 그리스도인이 특별한 의미에서 주님과 함께 거하며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도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 훈련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디모데 훈련은 전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디모데 훈련은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열 두 제자들 안에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 외에도 마태복음 10:2-5, 마가복음 3:16-19, 사도행전 1:13에 사도들의 명단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름 순서가 각기 다르지만 시몬 베드로는 항상 명단의 처음에 위치하고 배반자 가룟 유다는 마지막에 위치합니다. 주님을 좇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파는 가룟 유다와 같은 제자가 오늘날도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더 깊은 영적 영역으로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신 기준이 무엇인지는 본문에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 기준이 개인적인 능력이나 학식이나 재산이나 언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열 두 사람 중 적어도 7명은 갈릴리 어부 출신이었습니다(요21:2-3 참조). 한 사람은 민족의 반역자 세리였고 또한 사람은 과격한 혁명가였습니다. 열 두 사도를 선택하기에 앞서 주님은 먼저 많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이들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삶, 전도하는 삶, 능력 있는 삶, 즉 더 깊은 영적 영역으로 초청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 초청에 도전받고 믿음으로 응답한 사람들을 택하신 것이 아닐까요 결국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개인적인 재능보다도 믿음을 더 중요시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사도들은 원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보통 이하의 사람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훈련 과정을 통해서 빚어짐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귀하게 쓰여졌고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훈련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밟아 갈 때 우리는 보다 성숙하고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직업 훈련을 마친 사람이 숙련공이 되는 것입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 뛰어난 운동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편한 생활만을 원하십니까 어떤 스승이 게으름만 익히는 제자를 질책한 말이 있습니다. “뛰는 것보다 걷는 것이, 걷는 것보다 서는 것이 편하다. 서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것이, 앉아 있는 것보다 누워 있는 것이 편하며 누워 있는 것보다 잠자는 것이 편하다. 그러나 그 이상 편하려면 죽어야 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 훈련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특히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일을 여러 차례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기도가 본문 12절에 언급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년 남짓한 그분의 짧은 공생애 기간에 전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제자 훈련 사역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제자 훈련의 성패는 선택된 사람에 좌우됩니다. 자연히 그분께서는 이 문제를 놓고 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된 주님의 철야기도로는 이 경우를 제외하면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하신 기도(마14:23-25)를 꼽을 수 있을 뿐입니다. 잠을 거부하면서까지 철야 기도를 하신 것은 주님께서 마음에 큰 부담이 있으셨음을 나타내 줍니다.
둘째로, 제자라고 해도 다 같은 제자는 아닙니다. 본문 말씀은 저 유명한 산상수훈(山上秀訓)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 주위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제자의 허다한 무리(17절), 그 중에서 막 사도로 택함 받은 열 두 제자(13절), 그리고 제자는 아니나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온 많은 사람들(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아온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로 나아오는 것 자체만으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당에 앉아 성경 말씀을 듣는 것 자체만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아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 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2:40-41)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반 제자들과 열 두 제자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기 위해서 열 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막3:14-15). 모든 그리스도인이 특별한 의미에서 주님과 함께 거하며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도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 훈련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디모데 훈련은 전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디모데 훈련은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열 두 제자들 안에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 외에도 마태복음 10:2-5, 마가복음 3:16-19, 사도행전 1:13에 사도들의 명단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름 순서가 각기 다르지만 시몬 베드로는 항상 명단의 처음에 위치하고 배반자 가룟 유다는 마지막에 위치합니다. 주님을 좇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파는 가룟 유다와 같은 제자가 오늘날도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더 깊은 영적 영역으로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신 기준이 무엇인지는 본문에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 기준이 개인적인 능력이나 학식이나 재산이나 언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열 두 사람 중 적어도 7명은 갈릴리 어부 출신이었습니다(요21:2-3 참조). 한 사람은 민족의 반역자 세리였고 또한 사람은 과격한 혁명가였습니다. 열 두 사도를 선택하기에 앞서 주님은 먼저 많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이들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삶, 전도하는 삶, 능력 있는 삶, 즉 더 깊은 영적 영역으로 초청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 초청에 도전받고 믿음으로 응답한 사람들을 택하신 것이 아닐까요 결국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개인적인 재능보다도 믿음을 더 중요시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사도들은 원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보통 이하의 사람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훈련 과정을 통해서 빚어짐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귀하게 쓰여졌고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훈련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밟아 갈 때 우리는 보다 성숙하고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직업 훈련을 마친 사람이 숙련공이 되는 것입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 뛰어난 운동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편한 생활만을 원하십니까 어떤 스승이 게으름만 익히는 제자를 질책한 말이 있습니다. “뛰는 것보다 걷는 것이, 걷는 것보다 서는 것이 편하다. 서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것이, 앉아 있는 것보다 누워 있는 것이 편하며 누워 있는 것보다 잠자는 것이 편하다. 그러나 그 이상 편하려면 죽어야 한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