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이겨내는 마음 (히11:24-27)
본문
몇일 누워서 쉬거나 약을 먹거나 해서 회복되는 아픔은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신체적 통증을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정한 해결의 통로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무지 출구를 찾을 길 없는,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낼 수 없는 막막한 때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이러한 상황은 심각한 고통을 가져옵니다. 바로 “단절의 경험” 입니다. 이런 경우에 “고통을 이겨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말같이 여겨집니다. 마치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절망적인 고통에 빠져들어 있는 상황 속에서 무엇을 시작하거나 해결점을 찾는다는 것이 어색한 일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운명인듯 여기는 것이 고상한 태도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에 고통은 ‘좌절’이 되고 ‘절망’이 되곤 합니다. 고통을 이기적인 영역 속에 가두어둘 때는 그러합니다. 그것을 자기 가슴폭에 묻어두거나 자신의 이해관계, 이해타산에 연관지어 고통의 무게를 달아내는 경우에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고통을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가져올 때, 그것은 이미 고통이기를 그칩니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경험이 됩니다.
몇일전이 ‘삼일절’이었고, 우리는 오늘 ‘삼일절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신음하는 질곡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겨레가 당했던 경험을 우리는 다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표현조차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지않는 처참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 이러한 우리 겨레의 아픔을 개개인의 이해타산에 근거해서 고통의 무게를 달았던 것이 아니라, 한 많은 땅을 박차고 일어나 겨레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공동체적인 경험으로 끌어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봅니다. 삼일절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피흘리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결코 감추어둘 수 없었던 온겨레의 해방 함성은 차라리 이 땅의 울음이며, 조선의 통곡이었습니다”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민족적 용기가 되어 되살아 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이 공동체적인 경험으로 바뀔 때 “고통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 지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엄살부리거나 비명지르며 안절부절하는 통증”은 결코 아닐 것이고, “땅이 꺼져나간 듯이 절망하며 괴로움의 수렁 속에 빠져버린 모습”도 아닐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미 “고통”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움직임이 되고 새로운 영향력이 되지만 아픔이 절망으로 굴러떨어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성서는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경험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 한다면 파라오의 채찍과 학대에 대해서도 함께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느정도의 기쁨이며 감격이었는지, 어느정도의 용기 였는지를 알수 있는 근거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은 한마디로 “울부짖음”이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들은 고역에 견디다 못하여 신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개개인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느끼는 공동체적 아픔으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바닥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 그들의 울부짖음을 야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귀담아 들으셨다고 전합니다.
이제 야훼는 그들의 고통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꾸어 주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고통”이 절망이나 삶의 수렁이 아니라 ‘새로운 움직임이 움트는 곳’임을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노예출신 모세가 히브리 노예들의 아픔을 마음에만 묻어두거나 해서 “개인적인 고민”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히브리 노예들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다”는 대목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의 고통이나 고민이 아니라 같은 히브리 노예의 고통이며, 울부짖음이 되었을 때 새로운 차원의 생각과 움직임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후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 역사는 이러한 “공동체적 고통의 경험”에서 시작되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가 용기를 내고 하나의 마음을 모아내고 확신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의미심장하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통”이 공동체적인 경험으로 바뀔 때 “고통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그러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명지르며 안절부절하는 동안”, “땅이 꺼져나간 듯이 절망하며 괴로움의 수렁 속에 갇혀있는 동안” 고통은 더욱 커져만 가고 여러가지 단절의 경험만 깊어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아픔도 “고통”이라고 말하며 절망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것을 어떻게 함께함으로 공동체적으로 풀어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고민속에 갇혀있는 이기적인 습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함께하는 고통의 경험은 “새로운 움직임이 되고 새로운 영향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어수선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절의 한복판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얼만큼의 고민과 얼마만한 고통이 우리의 몫으로 주어져 있는지 조차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개인의 부담이나 개개인의 고민에 머물지 않는 적극적이고 공동체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아집이나 경직된 생각에 연연하여 더 이상의 것을 바라보게 못하는 대책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지 않도록 우리가 지금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몇일전이 ‘삼일절’이었고, 우리는 오늘 ‘삼일절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신음하는 질곡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겨레가 당했던 경험을 우리는 다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표현조차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지않는 처참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 이러한 우리 겨레의 아픔을 개개인의 이해타산에 근거해서 고통의 무게를 달았던 것이 아니라, 한 많은 땅을 박차고 일어나 겨레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공동체적인 경험으로 끌어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봅니다. 삼일절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피흘리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결코 감추어둘 수 없었던 온겨레의 해방 함성은 차라리 이 땅의 울음이며, 조선의 통곡이었습니다”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민족적 용기가 되어 되살아 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이 공동체적인 경험으로 바뀔 때 “고통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 지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엄살부리거나 비명지르며 안절부절하는 통증”은 결코 아닐 것이고, “땅이 꺼져나간 듯이 절망하며 괴로움의 수렁 속에 빠져버린 모습”도 아닐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미 “고통”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움직임이 되고 새로운 영향력이 되지만 아픔이 절망으로 굴러떨어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성서는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경험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 한다면 파라오의 채찍과 학대에 대해서도 함께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느정도의 기쁨이며 감격이었는지, 어느정도의 용기 였는지를 알수 있는 근거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은 한마디로 “울부짖음”이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들은 고역에 견디다 못하여 신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개개인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느끼는 공동체적 아픔으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바닥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 그들의 울부짖음을 야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귀담아 들으셨다고 전합니다.
이제 야훼는 그들의 고통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꾸어 주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고통”이 절망이나 삶의 수렁이 아니라 ‘새로운 움직임이 움트는 곳’임을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노예출신 모세가 히브리 노예들의 아픔을 마음에만 묻어두거나 해서 “개인적인 고민”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히브리 노예들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다”는 대목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의 고통이나 고민이 아니라 같은 히브리 노예의 고통이며, 울부짖음이 되었을 때 새로운 차원의 생각과 움직임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후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 역사는 이러한 “공동체적 고통의 경험”에서 시작되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가 용기를 내고 하나의 마음을 모아내고 확신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의미심장하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통”이 공동체적인 경험으로 바뀔 때 “고통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그러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명지르며 안절부절하는 동안”, “땅이 꺼져나간 듯이 절망하며 괴로움의 수렁 속에 갇혀있는 동안” 고통은 더욱 커져만 가고 여러가지 단절의 경험만 깊어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아픔도 “고통”이라고 말하며 절망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것을 어떻게 함께함으로 공동체적으로 풀어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고민속에 갇혀있는 이기적인 습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함께하는 고통의 경험은 “새로운 움직임이 되고 새로운 영향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어수선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절의 한복판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얼만큼의 고민과 얼마만한 고통이 우리의 몫으로 주어져 있는지 조차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개인의 부담이나 개개인의 고민에 머물지 않는 적극적이고 공동체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아집이나 경직된 생각에 연연하여 더 이상의 것을 바라보게 못하는 대책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지 않도록 우리가 지금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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