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운동장에서 (히12:1-2)
본문
1. 인생의 삶은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은 생존을 위한 싸움이요,경쟁입니다. 경기장에 선수들에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이기기를 겨루고 있습니다. 어느 선수이든지, 지려고 운동장에 나가는 선수는 한명도 없습니다. 모두가 승리의 기대를 가지고 유니폼을 입고 나섭니다. 그러나 경기에는 반듯이 또한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승자에게는 영광이지만 패자에게는 침묵일 뿐입니다. 그래서 적자생존이니, 자연도태니, 하는 말이 생겨난 줄 압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삶은 이긴 자들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줄 압니다.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삶의 운동장에서는 지금도 부단한 싸움과 경쟁에서 이긴 자와 패자의 희노외락의 반복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24절에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자들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4년마다 고린도에서 열렸던 당시의 오림픽을 연상하면서 한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하여 달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오림픽에서 승리한 선수에게는 월계수 나뭇가지로 엮은 월계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그 월계관은 얼마못가서 다 시들어 말라 버리거나, 없어질 것들이지만, 우리들 신앙인이 받아 쓸 면류관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썩지 않는 면류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경기장에 나선 선수들처럼,"이기기를 다투는자 마다 절제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려면 절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과연 나의 인생을 어떻게 달려 왔는가 나의 현재의 삶의 경기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를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뛰어왔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뛰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모두가 그 어떤 막연한 승리를 위하여 달려온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오늘도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정신없이 뛰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사이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가 하는 것 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분주한 인생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런 의미도 못 느끼면서도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 어떤 이기기를 위한 노력들일 것입니다. 남과의 경쟁에서 하나라도 더 앞서고, 더 얻으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사이없이 뛰는 인생들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삶의 운동장에는 끊임없는 승자와 패자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의 운동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달려야 하겠습니까
2. 인생의 삶의 운동장에서는 반듯이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모든 경기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인생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계에는 자연법칙이 있습니다. 이 자연법칙을 모르거나 어겨서는 과학기술을 발전 시킬 수 없습니다. 정신세계에는 도덕법칙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양심의 법칙을 무시하거나, 어기고는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영적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우리의 영혼이 살 수 가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영역에 기본적인 법칙이 있어, 이것을 거역하는 곳에 언제나 판정이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서 사람들은 변칙(變則) 과 반칙(反則)으로 삶의 승부를 걸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어쩌면 현재 세상에서는 통하는 것같이 보입니다아예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반칙으로 성공한 것을 보면서 자랐기에 그것이 정도(正道)인 것같이 생각 된 세상입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도리어 반칙을 하는 사람들이 앞서가는 것을 봅니다. 우직스럽게 자기 혼자만 규칙을 지키는 것이 바보 스럽게 보일 때 가 많습니다. 모두가 다 그렇게 사는 세상이기에 그런 것에 익숙해 진 사람들이라야 성공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오늘의 우리의 세태(世態)는 정의로운 눈을 가지고 살피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느 분야인들 변칙과 반칙이 없는 분야가 없습니다. 정치계도 수단이야 어떻든 당선만 되면 된다는 그런 풍조가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권모술수에 능하고, 반칙을 해서라도 상대방을 넘어뜨리면 승자가 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태입니다. 그런가 하면 경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당한 노력과 투자에서 얻는 이윤보다 적당히 반칙을 범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경우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계에 까지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적당하게 슬적 슬적 반칙을 범하여야 요령 있는 사람이요, 처세술에 능한 사람이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짜들 보다 거짓되고 가짜들이 도리어 인기를 누리며, 출세와 성공의 가도(架道)에서 뽐내고 있는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순간 자신이 걸어온 삶의 운동장에서 얼마나 반칙 인생을 살아 왔는가 하는 것을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내가 누리고 있는 성공과 승리가 진정 정당한 룰(Rule)를 지켜서 얻은 것인가 우리의 삶의 경기의 마지막 타임아웃의 휘슬이 울릴 때, 참으로 심판주 앞에서 잘 싸워 왔다고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를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3. 그러므로 삶의 운동장에서 푯대를 세워 달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한번 밖에 없는 삶입니다. 인생의 경주는 일회적 경기입니다. 반복되는 리그께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푯대가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푯대는 두말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과 같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뛰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같은 동등된 자리를 버리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스스로 육신을 입고 이 땅위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반칙으로 얼룩진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친히 나무에 달려 속죄의 제물이 되신 분입니다. 바로 그분을 푯대로 삼고 달려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진리요, 진실이요, 참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거짓과 허위로 뒤덮여진 세상에서, 불신과 증오로 굳어진 세상에서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요1서3:16).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분이기 그 분만을 푯대로 삼고 달려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다음에 두가지를 기억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무거운 것' 과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 버려야 하겠습니다. 운동장에 나선 선수들을 보면 모두 다 벗고 가벼운 몸으로 달립니다. 거추장 스러운 모든 것을 벗어버립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를 무겁게 매어 두고, 얽어매어 두는 것이 지금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즉 주님 앞에 나오는 길에 그렇게 무겁게 얽어매는 것들이 무엇이냐 입니다. 어떤 사람은 술담배 때문에 이 자리에 까지 나아 오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육체의 향락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놈의 돈 버는재미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좋다고 하는 것들을 얻기 위하여 반칙 투성이로 얻은 재물과 성공, 그리고 변칙으로 성취한 명예와 출세들! 그것이 과연 주님 앞에서 몇 푼의 가치가 있다고 보십니까 죽어서 장례식 때,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관이 남보다 좀더 화려하다 해도 주 앞에 서는 날! 모두가 검부러기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이 무엇이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생을 얼마나 진실 되게 살아 왔는가 얼마나 정직하게 룰을 지키며 달려 왔는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누가 판결합니까 우리의 의로우신 재판장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달렸습니다. 그가 베스도 총독 앞에 섰을 때, 만장한 사람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나의 이 매인 것을 제외하고는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의로우신 재판장인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서 뛰어온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인내의 경주를 해야 하겠습니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란 말입니다. 마라톤 경주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삶의 운동장에서 너무나 쉽게 성공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욱이 우리 한국 민족의 끊기가 오늘날 점점 쇠퇴해 지는 것 같습니다. 쉽게 돈도 벌려고 하고, 쉽게 성공도 할려고 합니다. 특히 학문의 세계에서 쉽게 학위를 얻으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도 반칙으로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세상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모름즉이 인내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불신 세상에서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간곳마다 조롱과 부딪치는 것들입니다. 조그마한 잘못에도 관용이 없습니다. 자기들은 몇 갑절 더 더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내의 경주가 힘겨워서, 집사도, 장로도 안할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좀더 늙은후에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그렇게 어려운 인내의 경주를 할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경기는 반드시 상(賞)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상같은 것 안 받아도 좋으니.그런 것 안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25:30). 이 말은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았던 자에게 한 말입니다. 남들은 다 자신의 달란트를 배나 남겼는데 주인에게 본전만 가지고 간 종과 같이, 자신의 믿음 하나만 겨우 지키며 생활하다가, 봉사 생활과 전도 생활은 전혀 못하고 죽었다면, 바로 그런 사람이 이에 해당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 한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슬피 운다'는 것은 서러워 운다는 뜻일 것이고, '이를 간다'는 것은 억울해서 분해서 이를 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아! 나도 교회 생활에서 좀더 봉사할 껄! 아, 나도 그때 좀더 열씸히 신앙생활을 할껄!" 하면서 억울해서 이를 박박 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억울했으면 이를 갊이 있겠다고 했겠습니까 우리 모두 삶의 운동장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삶의 운동장에서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끝.
그러므로 경기장에 나선 선수들처럼,"이기기를 다투는자 마다 절제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려면 절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과연 나의 인생을 어떻게 달려 왔는가 나의 현재의 삶의 경기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를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뛰어왔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뛰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모두가 그 어떤 막연한 승리를 위하여 달려온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오늘도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정신없이 뛰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사이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가 하는 것 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분주한 인생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런 의미도 못 느끼면서도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 어떤 이기기를 위한 노력들일 것입니다. 남과의 경쟁에서 하나라도 더 앞서고, 더 얻으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사이없이 뛰는 인생들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삶의 운동장에는 끊임없는 승자와 패자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의 운동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달려야 하겠습니까
2. 인생의 삶의 운동장에서는 반듯이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모든 경기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인생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계에는 자연법칙이 있습니다. 이 자연법칙을 모르거나 어겨서는 과학기술을 발전 시킬 수 없습니다. 정신세계에는 도덕법칙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양심의 법칙을 무시하거나, 어기고는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영적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우리의 영혼이 살 수 가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영역에 기본적인 법칙이 있어, 이것을 거역하는 곳에 언제나 판정이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서 사람들은 변칙(變則) 과 반칙(反則)으로 삶의 승부를 걸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어쩌면 현재 세상에서는 통하는 것같이 보입니다아예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반칙으로 성공한 것을 보면서 자랐기에 그것이 정도(正道)인 것같이 생각 된 세상입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도리어 반칙을 하는 사람들이 앞서가는 것을 봅니다. 우직스럽게 자기 혼자만 규칙을 지키는 것이 바보 스럽게 보일 때 가 많습니다. 모두가 다 그렇게 사는 세상이기에 그런 것에 익숙해 진 사람들이라야 성공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오늘의 우리의 세태(世態)는 정의로운 눈을 가지고 살피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느 분야인들 변칙과 반칙이 없는 분야가 없습니다. 정치계도 수단이야 어떻든 당선만 되면 된다는 그런 풍조가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권모술수에 능하고, 반칙을 해서라도 상대방을 넘어뜨리면 승자가 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태입니다. 그런가 하면 경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당한 노력과 투자에서 얻는 이윤보다 적당히 반칙을 범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경우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계에 까지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적당하게 슬적 슬적 반칙을 범하여야 요령 있는 사람이요, 처세술에 능한 사람이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짜들 보다 거짓되고 가짜들이 도리어 인기를 누리며, 출세와 성공의 가도(架道)에서 뽐내고 있는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순간 자신이 걸어온 삶의 운동장에서 얼마나 반칙 인생을 살아 왔는가 하는 것을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내가 누리고 있는 성공과 승리가 진정 정당한 룰(Rule)를 지켜서 얻은 것인가 우리의 삶의 경기의 마지막 타임아웃의 휘슬이 울릴 때, 참으로 심판주 앞에서 잘 싸워 왔다고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를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3. 그러므로 삶의 운동장에서 푯대를 세워 달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한번 밖에 없는 삶입니다. 인생의 경주는 일회적 경기입니다. 반복되는 리그께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푯대가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푯대는 두말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과 같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뛰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같은 동등된 자리를 버리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스스로 육신을 입고 이 땅위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반칙으로 얼룩진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친히 나무에 달려 속죄의 제물이 되신 분입니다. 바로 그분을 푯대로 삼고 달려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진리요, 진실이요, 참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거짓과 허위로 뒤덮여진 세상에서, 불신과 증오로 굳어진 세상에서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요1서3:16).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분이기 그 분만을 푯대로 삼고 달려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다음에 두가지를 기억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무거운 것' 과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 버려야 하겠습니다. 운동장에 나선 선수들을 보면 모두 다 벗고 가벼운 몸으로 달립니다. 거추장 스러운 모든 것을 벗어버립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를 무겁게 매어 두고, 얽어매어 두는 것이 지금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즉 주님 앞에 나오는 길에 그렇게 무겁게 얽어매는 것들이 무엇이냐 입니다. 어떤 사람은 술담배 때문에 이 자리에 까지 나아 오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육체의 향락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놈의 돈 버는재미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좋다고 하는 것들을 얻기 위하여 반칙 투성이로 얻은 재물과 성공, 그리고 변칙으로 성취한 명예와 출세들! 그것이 과연 주님 앞에서 몇 푼의 가치가 있다고 보십니까 죽어서 장례식 때,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관이 남보다 좀더 화려하다 해도 주 앞에 서는 날! 모두가 검부러기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이 무엇이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생을 얼마나 진실 되게 살아 왔는가 얼마나 정직하게 룰을 지키며 달려 왔는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누가 판결합니까 우리의 의로우신 재판장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달렸습니다. 그가 베스도 총독 앞에 섰을 때, 만장한 사람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나의 이 매인 것을 제외하고는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의로우신 재판장인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서 뛰어온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인내의 경주를 해야 하겠습니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란 말입니다. 마라톤 경주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삶의 운동장에서 너무나 쉽게 성공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욱이 우리 한국 민족의 끊기가 오늘날 점점 쇠퇴해 지는 것 같습니다. 쉽게 돈도 벌려고 하고, 쉽게 성공도 할려고 합니다. 특히 학문의 세계에서 쉽게 학위를 얻으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도 반칙으로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세상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모름즉이 인내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불신 세상에서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간곳마다 조롱과 부딪치는 것들입니다. 조그마한 잘못에도 관용이 없습니다. 자기들은 몇 갑절 더 더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내의 경주가 힘겨워서, 집사도, 장로도 안할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좀더 늙은후에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그렇게 어려운 인내의 경주를 할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경기는 반드시 상(賞)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상같은 것 안 받아도 좋으니.그런 것 안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25:30). 이 말은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았던 자에게 한 말입니다. 남들은 다 자신의 달란트를 배나 남겼는데 주인에게 본전만 가지고 간 종과 같이, 자신의 믿음 하나만 겨우 지키며 생활하다가, 봉사 생활과 전도 생활은 전혀 못하고 죽었다면, 바로 그런 사람이 이에 해당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 한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슬피 운다'는 것은 서러워 운다는 뜻일 것이고, '이를 간다'는 것은 억울해서 분해서 이를 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아! 나도 교회 생활에서 좀더 봉사할 껄! 아, 나도 그때 좀더 열씸히 신앙생활을 할껄!" 하면서 억울해서 이를 박박 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억울했으면 이를 갊이 있겠다고 했겠습니까 우리 모두 삶의 운동장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삶의 운동장에서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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