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다시 나타나실때 (히9:24-28)
본문
그리스도께서는 참 성소와 모형에 불과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지상의 성 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하늘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자기의 피가 아닌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해마다 지성소에 들어갔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주 자기를 드릴 필요 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자주 고난 을 받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자기를 제물로 드려 죄를 없애려고 역사의 끝에 단번에 나타나셨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지만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려고 단번에 희생의 제물 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때에는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두 번째 나타나실 것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두번째 나타나시는 데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본문을 논하기 전에 히브리서의 독자들에 대해 말함으로 본문의 연관성을 알아보는 것이 우선일 것같다. 이 히브리서는 유대인 기독교인들 게 보내어진 서신으로 간주되었으나 최근가에는 아직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 들이지 않은 엣세네 사제들 혹은 쿰란 공동체의 초기 회원들에게 보내는 서 신으로 본다. 그러나 그들이란 것도 명백히 지시해 주는 것은 아니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종말론적인 절박감 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그의 독자들에게 만연된 권태로움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의 본문은 이 두번째의 오심 ,즉 재림, 심판, 구원등에 대하여 촛 점을 맞추었다. 예수님은 과거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현재 함께 계시 며, 미래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 식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눈먼 자에게 눈뜨임을, 눌린자를 놓아주는 분 이라고 한다. 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심판의 주로 오시기에 1 세기때의 그리스도인들 은 무서운 핍박 가운데도 살고 있었고, 멸시와 천대,차별과 가난, 불안정과 절박한 위험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소망과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은 현실이 안전하고 자유롭고 편안하면서 예수님의 긴박한 재림이 없다고 보기에 애타게 기대하지도,기다리지도,기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히 있고 그것은 심판과 진노의 주라 기 보다는 우리에게 큰 기쁨으로 오시는 구원의 주의 재림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쁨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라는 것이다. 이 설교는 요즘 의 열풍이 부는 이때 심판과 절박함에서 바라본 재림의 선포가 아닌, 억눌리고 가난하고 나그네되고 목마른 자들에게 나타 나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는 소외된 자들이고 예수님 은 그러한 자들을 위하여 다시오심으로 소망을 주신다. 그래서 고통과 고난속에 사는 자들을 구해주시고 새하늘과 새땅으로 인 도하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기쁨으로 오시기에 이 구원의 사건에 기대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종말, 재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수 많은 재림 설과 환란설을 외치며 다니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때만이 하나님이 선택하고 계시해 주신 때라고 말한다. 자신들만이 예비되고 나머 지는 자신들이 모를때 갑자기 그 때가 온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주님의 재림의 때가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다고 한다면 , 그들은 갑자기 증발한 것이 아니었다. 노아의 시대에 멸망과 진노의 경고 를 받고 그 경고의 예언에 마음과 행동으로 예비하여 방주에 들어갈 것인가 안들어 갈 것인가를 선택하게 하였으며 롯의 시대도 소돔성에서 광야로 도망할 것인가 의 선택이 그들에게 주어졌듯이 이제 역사의 마지막으로 지닫는 이 시대에게도 마지막 대환난에 대한 경고와 선택이 주어진다. 본 설교에서는 종말의 때가 있다고 선포하기는 하지만 그 선포에 힘을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때는 곧 오는 긴박한 때로 선포되어 진 것이 아닌 먼 미래에 언젠가 오는 때로 선포되어졌기 때문이고,또 그 때는 깨어서 기도하라는, 종말론적인 절박함에 언급한 히브리 저자의 의도대로 설교되어진 것이 아 닌 사랑으로 오는 주를 강조하여 압박 당하는 자들에게의 구원만 강조하다 보니 어떻게 보면 종말 자체도 그 메세지의 힘이 사라져버린 듯 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안일무사한 방식의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의 신 앙처럼 영적인 혼미상태에서 그대로 머물러있게 될 위험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지금은 노아와 롯의 경고를 사람들이 오히려 비웃고 무시하였듯이 마지 막때에도 시대의 경고를 무시하여 천사의 경고를 무시해 버린 롯의 처처럼 밖에 버리어져 밟히는 쓸모없는 소금기둥이 될 가능성이 있는 시기이다. 그러나 반대로 때와 시간을 선포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외치는 그런 일을 함으로써 수 많은 사람을 혼란으로 빠뜨리거나 근심하게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이 마지막 때에 대한 표현이 거의 나와 있지 않으나 몇 장면 을 통하여 몇가지 학설로 나뉘어진다. 이 마지막 때는 보통 휴거를 전후 해서 나타나는데 홀린세이,콜린데이,스코필드등이 주장하고 한국의 많은 목 회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세대주의의 견해로 환난전 휴거설,또 노먼 헤리슨 과 매리 스트워트 랠프여사등이 발표한 중간기 휴거설,또 루이스뻘콥,박형 룡 박사등이 언급하고 로버트군드리,죠지레드,월터 마틴,멕케버 등이 주장 한 환난 통과 후 휴거설등이 있다. 위의 세가지 학설은 어느것이 맞는다 하더라도 그 결론은 환난을 통과해 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본 설교의 사랑과 화평의 주님이 강조되는 것도 필 요하지만 이렇게 마지막 때에는 그들이 견디어야 할 인내가 필요하다. 예수님도 마24:4-9에서 환난에 넘기라고 했고 29-31절에도 환난후에 택하신 자를 모으신다고 하며, 10-13에 보면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택하신 자 (그가 가난한 자이던, 소외당한 자이던, 눌린자이 던,포로된 자이던, 눈 먼 자이던)는 먼저 환난의 때를 넘겨야 하는 것이 옳 은 것이다. 비록 본 설교의 의도가 그것이 아닐지라도 (그러나 그 의도임) 마지막 때를 강조하는 , 말세를 맞이하는 자로서의 신앙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유형적인 재림의 소망 을 가지고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 말씀을 오류없는 최종적인 진리로 믿으 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구주로 신망하여 주기도와 신앙고백이 일치하는 성도들로 인도하여 가는 것이 목회자의 자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본 설교가 의도하는 종말을 기대하는 민중들에 대해서 도 쉽게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즉 현대의 모순과 부조리가 거듭나지 못하고 다시 옛 역사로 돌아가는 이때 종말이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의미 할 것이다. 그것은 이전의 죽음이며 새로운 종말이다. 즉 인간의 자유를 외치다 부당한 악법과 독재권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탄압받고 인권이 짖밟힘 당하는 역사현실은 분명히 정치적 죽음이다. 그러나 독재와 억압이 물러나고 인 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역사의 일대변혁이 생기는 사건은 바로 정치적 종말 이다.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가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자본의 착취로 신성한 노 동권의 탈취는 물론 비인간적 착취로 신응하는 불우한 역사현실은 분명히 경제적 죽음이다. 그러나 불의한 지배와 착취가 물러나고 공정한 분배와 정의로운 경제질서가 자리잡히면 그것은 경제적 종말이다. 또 가난하다는 이유로,약자라는 이유로, 학식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천디받고 공 동체적 삶에서 소외당하는 현실은 분명히 사회적 죽음의 역사현실이다. 그러나 물질적 부나 이론적 학식이나 외형적 출신 성분이 아닌 인간다움과 인격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대우해주는 사회로 변모하는 현실은 분명히 사회적 종말이다. 이러한 자들에게 마25:31-4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최후의 심판은 기대 되고 희망이 되며 기쁨이 되는 종말이다. 이 사건은 양이 되는 사람과 염 소가 되는 사람 둘다 엄청나게 놀라는 사건이다. 고난 받는 민중, 그러나 서로 돕고 사는 삶 속에서 예수님은 계시고 , 그 예수님은 다시 종말을 통 하여 우리 소외된 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시는 기대라는 것도 본 설교를 통하여 강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설교의 본문은 이 두번째의 오심 ,즉 재림, 심판, 구원등에 대하여 촛 점을 맞추었다. 예수님은 과거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현재 함께 계시 며, 미래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 식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눈먼 자에게 눈뜨임을, 눌린자를 놓아주는 분 이라고 한다. 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심판의 주로 오시기에 1 세기때의 그리스도인들 은 무서운 핍박 가운데도 살고 있었고, 멸시와 천대,차별과 가난, 불안정과 절박한 위험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소망과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은 현실이 안전하고 자유롭고 편안하면서 예수님의 긴박한 재림이 없다고 보기에 애타게 기대하지도,기다리지도,기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히 있고 그것은 심판과 진노의 주라 기 보다는 우리에게 큰 기쁨으로 오시는 구원의 주의 재림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쁨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라는 것이다. 이 설교는 요즘 의 열풍이 부는 이때 심판과 절박함에서 바라본 재림의 선포가 아닌, 억눌리고 가난하고 나그네되고 목마른 자들에게 나타 나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는 소외된 자들이고 예수님 은 그러한 자들을 위하여 다시오심으로 소망을 주신다. 그래서 고통과 고난속에 사는 자들을 구해주시고 새하늘과 새땅으로 인 도하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기쁨으로 오시기에 이 구원의 사건에 기대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종말, 재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수 많은 재림 설과 환란설을 외치며 다니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때만이 하나님이 선택하고 계시해 주신 때라고 말한다. 자신들만이 예비되고 나머 지는 자신들이 모를때 갑자기 그 때가 온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주님의 재림의 때가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다고 한다면 , 그들은 갑자기 증발한 것이 아니었다. 노아의 시대에 멸망과 진노의 경고 를 받고 그 경고의 예언에 마음과 행동으로 예비하여 방주에 들어갈 것인가 안들어 갈 것인가를 선택하게 하였으며 롯의 시대도 소돔성에서 광야로 도망할 것인가 의 선택이 그들에게 주어졌듯이 이제 역사의 마지막으로 지닫는 이 시대에게도 마지막 대환난에 대한 경고와 선택이 주어진다. 본 설교에서는 종말의 때가 있다고 선포하기는 하지만 그 선포에 힘을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때는 곧 오는 긴박한 때로 선포되어 진 것이 아닌 먼 미래에 언젠가 오는 때로 선포되어졌기 때문이고,또 그 때는 깨어서 기도하라는, 종말론적인 절박함에 언급한 히브리 저자의 의도대로 설교되어진 것이 아 닌 사랑으로 오는 주를 강조하여 압박 당하는 자들에게의 구원만 강조하다 보니 어떻게 보면 종말 자체도 그 메세지의 힘이 사라져버린 듯 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안일무사한 방식의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의 신 앙처럼 영적인 혼미상태에서 그대로 머물러있게 될 위험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지금은 노아와 롯의 경고를 사람들이 오히려 비웃고 무시하였듯이 마지 막때에도 시대의 경고를 무시하여 천사의 경고를 무시해 버린 롯의 처처럼 밖에 버리어져 밟히는 쓸모없는 소금기둥이 될 가능성이 있는 시기이다. 그러나 반대로 때와 시간을 선포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외치는 그런 일을 함으로써 수 많은 사람을 혼란으로 빠뜨리거나 근심하게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이 마지막 때에 대한 표현이 거의 나와 있지 않으나 몇 장면 을 통하여 몇가지 학설로 나뉘어진다. 이 마지막 때는 보통 휴거를 전후 해서 나타나는데 홀린세이,콜린데이,스코필드등이 주장하고 한국의 많은 목 회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세대주의의 견해로 환난전 휴거설,또 노먼 헤리슨 과 매리 스트워트 랠프여사등이 발표한 중간기 휴거설,또 루이스뻘콥,박형 룡 박사등이 언급하고 로버트군드리,죠지레드,월터 마틴,멕케버 등이 주장 한 환난 통과 후 휴거설등이 있다. 위의 세가지 학설은 어느것이 맞는다 하더라도 그 결론은 환난을 통과해 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본 설교의 사랑과 화평의 주님이 강조되는 것도 필 요하지만 이렇게 마지막 때에는 그들이 견디어야 할 인내가 필요하다. 예수님도 마24:4-9에서 환난에 넘기라고 했고 29-31절에도 환난후에 택하신 자를 모으신다고 하며, 10-13에 보면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택하신 자 (그가 가난한 자이던, 소외당한 자이던, 눌린자이 던,포로된 자이던, 눈 먼 자이던)는 먼저 환난의 때를 넘겨야 하는 것이 옳 은 것이다. 비록 본 설교의 의도가 그것이 아닐지라도 (그러나 그 의도임) 마지막 때를 강조하는 , 말세를 맞이하는 자로서의 신앙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유형적인 재림의 소망 을 가지고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 말씀을 오류없는 최종적인 진리로 믿으 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구주로 신망하여 주기도와 신앙고백이 일치하는 성도들로 인도하여 가는 것이 목회자의 자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본 설교가 의도하는 종말을 기대하는 민중들에 대해서 도 쉽게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즉 현대의 모순과 부조리가 거듭나지 못하고 다시 옛 역사로 돌아가는 이때 종말이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의미 할 것이다. 그것은 이전의 죽음이며 새로운 종말이다. 즉 인간의 자유를 외치다 부당한 악법과 독재권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탄압받고 인권이 짖밟힘 당하는 역사현실은 분명히 정치적 죽음이다. 그러나 독재와 억압이 물러나고 인 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역사의 일대변혁이 생기는 사건은 바로 정치적 종말 이다.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가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자본의 착취로 신성한 노 동권의 탈취는 물론 비인간적 착취로 신응하는 불우한 역사현실은 분명히 경제적 죽음이다. 그러나 불의한 지배와 착취가 물러나고 공정한 분배와 정의로운 경제질서가 자리잡히면 그것은 경제적 종말이다. 또 가난하다는 이유로,약자라는 이유로, 학식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천디받고 공 동체적 삶에서 소외당하는 현실은 분명히 사회적 죽음의 역사현실이다. 그러나 물질적 부나 이론적 학식이나 외형적 출신 성분이 아닌 인간다움과 인격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대우해주는 사회로 변모하는 현실은 분명히 사회적 종말이다. 이러한 자들에게 마25:31-4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최후의 심판은 기대 되고 희망이 되며 기쁨이 되는 종말이다. 이 사건은 양이 되는 사람과 염 소가 되는 사람 둘다 엄청나게 놀라는 사건이다. 고난 받는 민중, 그러나 서로 돕고 사는 삶 속에서 예수님은 계시고 , 그 예수님은 다시 종말을 통 하여 우리 소외된 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시는 기대라는 것도 본 설교를 통하여 강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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