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에서 형제로 (몬8-21)
본문
최근 철산동과 광명시 거리에 이런 포스터가 붙어있습니다.“남편을 죽이는 서른가지 방법”이것은 연극의 제목입니다.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섬뜻하고 무서운 포스터가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엄마 아빠를 최고로 생각하는 어린이들이 다니는 거리에 현수막과 함께 붙어있습니다.내용이야 어떻든 평범하고 순수한 것보다 자극적인 광고를 해야만 하는 이 시대와 사회의 현실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의 우리 시대의 사회와 문화는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지난 역사 가운데 시대 시대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세웠듯이 영적 지도자들을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어두운 시대의 영성을 깨우셨습니다.루터,웨슬레,즈빙글리,어거스틴,존 번연,위클립,무디.월리암케리,죠지뮬러,바운즈,웥치만 리,죤 스타트,로이드 죤스,빌리그래함,우리나라의 주기철,손양원 한경직 목사 등 많은 지도자들이 역사와 시대의 횃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태어나서 부터 남다른 어떤 특별한 지도력을 가졌거나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모두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참으로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 스스로 변화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 시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변화시킨 한 사람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그는 모든 사람들보다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그러나 이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요,유익을 주는 사람이요,바울의 심복이요,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사는 겸손한 사람 이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14-16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변화된 오네시모와 함께 있고 싶지만 그는 현재 그는 도망자이기 때문에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면서 몇 가지 당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다 사실 바울이 바라는 것은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싶은 것이었습니다.물론 목회자인 바울의 입장에서는 얼마후 골로새로 갈 두기고에게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을 것이니 그리 알라고도 명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 선한 일이 억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빌레몬이 자의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도대체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바울이 자신의 곁에 두고 함께 있고 싶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무엇이 위대한 사도인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하는 것입니다.그는 명예도,권세도,물질도,지식도 없는 평범한 사람보다도 더 보잘것 없는 도망한 종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했으며 이 토록 진지하게 그를 변호하는 것일까요.한번 여러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다.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여러분 곁에 두고 함께 인생의 문제들을 나누고 싶습니까. 물론 바울이 오네시모와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저는 성경을 근거로 인격적인 면에서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오네시모는 신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사랑했던 것입니다.골로새서 4:9을 보십시다.바울이 오네시모를 향해서 뭐라고 합니까.“그는 신실하다”라고 했습니다.신실하다라는 말은 충성스럽다.성실하다라는 말과 같습니다.다시 말하자면 그는 크든 작든 어떤 일이든지 맡은 일에 책임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어떻습니까.이런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어떤 일을 할 때 대개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는 시작은 거창하게 하는 사람입니다.무슨 큰일을 낼 것 만 같습니다.굉장한 일을 벌일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중간 쯤 가서는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막상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가고 없습니다.그 일을 마칠 인내력이 없습니다.시작을 좋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적당히 끝내는 사람입니다.꾸중듣지 않을 정도로 일을 마칩니다.그렇다고 칭찬들을 만큼 하는 것도 아닙니다.눈치껏 알아서 대충해버립니다.그래서 늘 아리송합니다.열심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하는 것 같기도한 인상을 줍니다. 세 번째는 어떤 일이든 열심을 다해서 그 일을 끝내는 사람입니다.일을 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인내와 끈기가 있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책임을 끝까지 완수 합니다.완벽하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선을 다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할 때 어떤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네시모는 이런 인격을 가졌습니다.성실한 사람은 분명 사람을 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여러분 모두 신실한 인격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두번째 오네시모는 어려움을 함께 할 줄 아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진정한 친구를 알려면 어려움을 당해보아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정말 좋은 친구는 고난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친구일 것입니다.바울에게 있어서 오네시모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아무 보상도 없는 뒷바라지를 하며 바울을 섬기며 차가운 감옥속에서 격는 외로움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가 한없이 고마웠던 것입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었습니다.그의 모든 재산이 하루 아침에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그의 자녀도 죽고 말았습니다.급기야 그의 온몸에는 부스럼이 돋았습니다.가려움의 고통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어려움 속에서 함께 할 줄로 알았던 그의 아내가 그를 버리고 떠났습니다.그의 친구들도 그를 이해하기보다 책망하며 나무랐습니다. 풍악 속에서 찬치를 벌일 때 축배의 잔을 함께 들던 친구들은 이제 그를 외면해 버렸습니다.진정 그를 이해하고 그 어려움을 함께 혜쳐나갈 사람이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탕자라고 불리는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들고 도시로 갔을 때는 많은 친구들이 그와 함께 하며 우정과 사랑을 속삭였지만 그의 돈이 다 떨어지고 빈손이 되어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들판을 헤멜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고 병자를 고치며 환영 인파에 쌓였을 때는 많은 군중들이 따랐습니다.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고통의 길에 함께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그토록 애정을 주었던 제자들도 다 도망해 버렸던 것입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그러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기쁜 일이 있을 때 같이 있어 주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그러나 자칫 내가 희생해야 하며,혹 손해 볼지도 모르는 것을 알면서 어려운 곤경에서 함께 있어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습니까.여러분 곁에는 누가 있습니까.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함깨해 줄 어떤 친구가 있습니까.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여러분을 도와줄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바울이 어쩌면 이 감옥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그날까지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싶은 것은 그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섬기는 인격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서로에게 이런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부부간에도,친구간에도 이렇게 진정으로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형제간에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는 콩한 조각도 나누어 먹을 정도로 우애가 깊다가도 성장하여 출가해서 가정을 이루게 되어 현실에 바쁘다 보면 형제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는 지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이제는 네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무관심 할 때도 있습니다.그래서 그런지 어쩌다 명절에 모이면 왠지 서먹서먹합니다.하지만 동기간에 서로를 도우며 함께 하지 않는다면 누가 돕겠습니까.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서로의 어려움을 위하여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격려하고 위로하는 교제가 있어야합니다. 15절을 보십시다. 하지만 바울은 오네시모를 보내기로 작정하면서 빌레몬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권고 하고 있습니다.사실 주인인 빌레몬의 입장에서 보면 괘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다른 주인들같이 악으로 대한 것도 아닌데 한 마디 말도 없이 도망하여 소식이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오네시모를 좋게 보아줄 수 없는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빌레몬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잠시 네곁을 떠난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나를 만나서 더 온전하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오래토록 너의 곁에 머물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이다.그러니 그를 나무라지 마라 ”.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불신자들은 모든 일들을 이성과 상식의 현실의 잣대로만 바라봅니다.그러나 믿음이 있는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케네디라는 목사님이 시무 하는 교회에서 큰 화재가 났습니다.그 때 이웃사람들은 이제 교회는 망했다며 목사님을 위로 하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그 때 목사님은 오히려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도 마침 교회를 수리할 생각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예 다시 지으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아무 걱정 마십시오”결국 모든 성도들이 힘을 합하여 이전 보다 훨씬 큰 새 교회를 지었답니다. 어쩌다 직장을 잃게 되었을 때를 예로 들어 생각해 봅시다.볼신자들의 입장에서는 당장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아이쿠 큰일났다 이제 어떻게 살지.나는 왜 이렇게 무능할까.요즈음 불경기라는데.이젠 뭐하나”그러나 똑같은 현실이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다고 했는데 더 나은 직장을 이미 준비하신 줄로 믿습니다.모든 것이 합력하여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또 다른 길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낙심과 실망은 커녕 오히려 감사하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여기 있는 어떤 전도사님도 믿음으로 그 동안 기도했었는데 실제로 하나님께 더 나은 직장을 준비해 주셔서 금주에 출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결코 현실의 눈만으로 바라보지 않기를 바랍니다.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망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과정에는 혹 어려움이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축복의 그릇을 준비시키는 과정일 뿐입니다.
16절을 보십시다 바울이 가장 하고 싶었던 부탁입니다.“이제 그를 대하되 종으로 대하지 마라.나도 지금 오네시모를 종으로 대하지 않고 있다.전에는 종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와 같은 한 형제로 대하고 있다.내가 그러하다면 당연히 그렇게 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이제 종이 아니니 사랑 받는 형제로 여겨다오”.참으로 아름다운 부탁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여기에 있습니다.“처음보다는 나중이 좋은 것”“시작보다 끝이 좋은 것”이 기독교 입니다.시작은 노예이며 종이었지만 나중은 사랑 받는 형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가 그렇습니다.창세기의 시작은 에덴동산의 추방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계시록의 마지막은 잃어버린 낙원을 찾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으로 마칩니다.우리는 역사를 보면서 이런 것을 느낍니다.그렇게 권세있고, 인격적이고,존경받던 사람이 끝에 가서는 불명에로 마치는 경우들입니다.시작도 과정도 좋았지만 끝이 복되지 않아서 브끄러움을 당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나라 굵직한 재벌의 총수들이 앞을 다투어 자서전적인 책을 낸 일이 있습니다.저도 사보았고 한 때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지금 그 책들은 서점 한쪽 구석에 쓸쓸히 꽃혀 있습니다.왜 그렇습니까.마지막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분들 중 바로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은 뇌물사건으로 불명에의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출발이 아무리 좋고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마지막에 선두자리를 내어 준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가 좋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시작은 갈 곳없는 떠돌이 나그네 였습니다.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야곱의 시작은 빈털털이 도망자 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그 아들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요셉의 시작은 형들에게 배신당하여 이웃나라로 팔려간 종이었습니다.그러나 마지막은 최대강국인 애굽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다윗의 시작은 단지 양을 치는 조그만 목동이었습니다.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이스라엘의 가장 뛰어난 왕이 되었습니다.베드로의 시작은 가난한 초라하고 어부였습니다.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초대교회의 기독교 역사를 만드는 위대한 산파의 역할을 하였습니다.바울의 시작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조롱거리였습니다.모두가 그를 미워했고 믿지 않았습니다.그래서 그는 다소라는 곳에 숨어서 낙심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성경을 13권이나 썼으며 기독교회사의 가장 핵심인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작은 어떻습니까.어떤 과정에 있습니까.그러나 시작이 어떻든 과정이 어떻든 우리의 마지막은 이렇게 승리로 마칠 것입니다.영광으로 마칠 것입니다.축복으로 마칠 것입니다. 우리의 시작이 골고다 언덕과 같아도 그 언덕 넘어 에는 눈부신 부활의 아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영원한 축복의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그러나 세상 불신자들은 잠깐 있다 가는 이 땅에서 날마다 산해진미를 먹고 부귀영화를 누려도 마지막에는 심판의 영원한 지옥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의 과정도 축복하시지만 마지막에는 더 많은 축복과 영광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장례식 예배가 거행되고 있었습니다.목사님은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고 청중을 향해서 말했습니다.“여기 누워 있는 이 사람은 세상에서 죄를 많이 진 사람입니다.아마 이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자 모두 한 사람씩 나와서 이 사람의 얼굴을 봅시다”관을 열자 그 속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시체 대신 커다란 거울이 있었습니다.결국 사람들은 관 속에 비친 죄인인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목사님은 청중을 향해서 외쳤습니다.“여기 관 속에 죽어야 할 죄인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롬3:23에서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우리도 과거에는 오네시모와 같이 노예였습니다.세상의 법에 매인 노예가 아닙니다.죄와 율법으로 매인 사단의 종이며 죄의 노예였습니다.그래서 사단이 시키는 대로 세상에서 범죄하며 살았었습니다.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몸 값을 사단에게 주셨습니다.사단이 요구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값은 돈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피였습니다.주님은 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온 몸의 피를 흘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고 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맺어진 오네시모와 바울과 같은 한 형제입니다. 그리스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을 가져야합니다.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신실한 사람이 됩시다.어려움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인격을 가진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미래를 바라봅시다.우리는 자꾸 보이는 현재의 환경과 현실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스스로 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곤 합니다. 만일 어떤 큰 나라의 왕자와 결혼을 약속한 가난한 시골 처녀가 지금 당장 가난하다며 나는 불행하다고 비관하며 슬퍼한다면 여러분은 그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그녀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까 오늘 여러분의 환경은 어떻습니까.혼자 넘어가기 힘겨운 문제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아무리 계산하고 따져봐도 풀리지 않는 문제로 답답해 하지는 않습니까. 이제 그 문제를 나의 이성과 경험과 현실의 안경를 벗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지혜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이제 주님의 선하신 인도에 맡기시고 지금 부터 그 문제로 부터 자유하십시요.우리의 현재가 비록 힘들지라도 우리리 미래는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시작과 과정은 힘들어도 우리의 마지막은 축복으로 마칠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14-16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변화된 오네시모와 함께 있고 싶지만 그는 현재 그는 도망자이기 때문에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면서 몇 가지 당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다 사실 바울이 바라는 것은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싶은 것이었습니다.물론 목회자인 바울의 입장에서는 얼마후 골로새로 갈 두기고에게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을 것이니 그리 알라고도 명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 선한 일이 억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빌레몬이 자의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도대체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바울이 자신의 곁에 두고 함께 있고 싶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무엇이 위대한 사도인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하는 것입니다.그는 명예도,권세도,물질도,지식도 없는 평범한 사람보다도 더 보잘것 없는 도망한 종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했으며 이 토록 진지하게 그를 변호하는 것일까요.한번 여러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다.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여러분 곁에 두고 함께 인생의 문제들을 나누고 싶습니까. 물론 바울이 오네시모와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저는 성경을 근거로 인격적인 면에서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오네시모는 신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사랑했던 것입니다.골로새서 4:9을 보십시다.바울이 오네시모를 향해서 뭐라고 합니까.“그는 신실하다”라고 했습니다.신실하다라는 말은 충성스럽다.성실하다라는 말과 같습니다.다시 말하자면 그는 크든 작든 어떤 일이든지 맡은 일에 책임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어떻습니까.이런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어떤 일을 할 때 대개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는 시작은 거창하게 하는 사람입니다.무슨 큰일을 낼 것 만 같습니다.굉장한 일을 벌일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중간 쯤 가서는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막상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가고 없습니다.그 일을 마칠 인내력이 없습니다.시작을 좋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적당히 끝내는 사람입니다.꾸중듣지 않을 정도로 일을 마칩니다.그렇다고 칭찬들을 만큼 하는 것도 아닙니다.눈치껏 알아서 대충해버립니다.그래서 늘 아리송합니다.열심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하는 것 같기도한 인상을 줍니다. 세 번째는 어떤 일이든 열심을 다해서 그 일을 끝내는 사람입니다.일을 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인내와 끈기가 있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책임을 끝까지 완수 합니다.완벽하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선을 다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할 때 어떤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네시모는 이런 인격을 가졌습니다.성실한 사람은 분명 사람을 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여러분 모두 신실한 인격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두번째 오네시모는 어려움을 함께 할 줄 아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진정한 친구를 알려면 어려움을 당해보아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정말 좋은 친구는 고난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친구일 것입니다.바울에게 있어서 오네시모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아무 보상도 없는 뒷바라지를 하며 바울을 섬기며 차가운 감옥속에서 격는 외로움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가 한없이 고마웠던 것입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었습니다.그의 모든 재산이 하루 아침에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그의 자녀도 죽고 말았습니다.급기야 그의 온몸에는 부스럼이 돋았습니다.가려움의 고통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어려움 속에서 함께 할 줄로 알았던 그의 아내가 그를 버리고 떠났습니다.그의 친구들도 그를 이해하기보다 책망하며 나무랐습니다. 풍악 속에서 찬치를 벌일 때 축배의 잔을 함께 들던 친구들은 이제 그를 외면해 버렸습니다.진정 그를 이해하고 그 어려움을 함께 혜쳐나갈 사람이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탕자라고 불리는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들고 도시로 갔을 때는 많은 친구들이 그와 함께 하며 우정과 사랑을 속삭였지만 그의 돈이 다 떨어지고 빈손이 되어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들판을 헤멜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고 병자를 고치며 환영 인파에 쌓였을 때는 많은 군중들이 따랐습니다.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고통의 길에 함께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그토록 애정을 주었던 제자들도 다 도망해 버렸던 것입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그러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기쁜 일이 있을 때 같이 있어 주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그러나 자칫 내가 희생해야 하며,혹 손해 볼지도 모르는 것을 알면서 어려운 곤경에서 함께 있어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습니까.여러분 곁에는 누가 있습니까.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함깨해 줄 어떤 친구가 있습니까.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여러분을 도와줄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바울이 어쩌면 이 감옥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그날까지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싶은 것은 그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섬기는 인격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서로에게 이런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부부간에도,친구간에도 이렇게 진정으로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형제간에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는 콩한 조각도 나누어 먹을 정도로 우애가 깊다가도 성장하여 출가해서 가정을 이루게 되어 현실에 바쁘다 보면 형제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는 지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이제는 네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무관심 할 때도 있습니다.그래서 그런지 어쩌다 명절에 모이면 왠지 서먹서먹합니다.하지만 동기간에 서로를 도우며 함께 하지 않는다면 누가 돕겠습니까.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서로의 어려움을 위하여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격려하고 위로하는 교제가 있어야합니다. 15절을 보십시다. 하지만 바울은 오네시모를 보내기로 작정하면서 빌레몬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권고 하고 있습니다.사실 주인인 빌레몬의 입장에서 보면 괘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다른 주인들같이 악으로 대한 것도 아닌데 한 마디 말도 없이 도망하여 소식이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오네시모를 좋게 보아줄 수 없는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빌레몬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잠시 네곁을 떠난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나를 만나서 더 온전하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오래토록 너의 곁에 머물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이다.그러니 그를 나무라지 마라 ”.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불신자들은 모든 일들을 이성과 상식의 현실의 잣대로만 바라봅니다.그러나 믿음이 있는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케네디라는 목사님이 시무 하는 교회에서 큰 화재가 났습니다.그 때 이웃사람들은 이제 교회는 망했다며 목사님을 위로 하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그 때 목사님은 오히려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도 마침 교회를 수리할 생각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예 다시 지으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아무 걱정 마십시오”결국 모든 성도들이 힘을 합하여 이전 보다 훨씬 큰 새 교회를 지었답니다. 어쩌다 직장을 잃게 되었을 때를 예로 들어 생각해 봅시다.볼신자들의 입장에서는 당장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아이쿠 큰일났다 이제 어떻게 살지.나는 왜 이렇게 무능할까.요즈음 불경기라는데.이젠 뭐하나”그러나 똑같은 현실이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다고 했는데 더 나은 직장을 이미 준비하신 줄로 믿습니다.모든 것이 합력하여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또 다른 길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낙심과 실망은 커녕 오히려 감사하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여기 있는 어떤 전도사님도 믿음으로 그 동안 기도했었는데 실제로 하나님께 더 나은 직장을 준비해 주셔서 금주에 출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결코 현실의 눈만으로 바라보지 않기를 바랍니다.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망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과정에는 혹 어려움이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축복의 그릇을 준비시키는 과정일 뿐입니다.
16절을 보십시다 바울이 가장 하고 싶었던 부탁입니다.“이제 그를 대하되 종으로 대하지 마라.나도 지금 오네시모를 종으로 대하지 않고 있다.전에는 종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와 같은 한 형제로 대하고 있다.내가 그러하다면 당연히 그렇게 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이제 종이 아니니 사랑 받는 형제로 여겨다오”.참으로 아름다운 부탁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여기에 있습니다.“처음보다는 나중이 좋은 것”“시작보다 끝이 좋은 것”이 기독교 입니다.시작은 노예이며 종이었지만 나중은 사랑 받는 형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가 그렇습니다.창세기의 시작은 에덴동산의 추방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계시록의 마지막은 잃어버린 낙원을 찾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으로 마칩니다.우리는 역사를 보면서 이런 것을 느낍니다.그렇게 권세있고, 인격적이고,존경받던 사람이 끝에 가서는 불명에로 마치는 경우들입니다.시작도 과정도 좋았지만 끝이 복되지 않아서 브끄러움을 당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나라 굵직한 재벌의 총수들이 앞을 다투어 자서전적인 책을 낸 일이 있습니다.저도 사보았고 한 때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지금 그 책들은 서점 한쪽 구석에 쓸쓸히 꽃혀 있습니다.왜 그렇습니까.마지막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분들 중 바로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은 뇌물사건으로 불명에의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출발이 아무리 좋고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마지막에 선두자리를 내어 준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가 좋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시작은 갈 곳없는 떠돌이 나그네 였습니다.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야곱의 시작은 빈털털이 도망자 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그 아들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요셉의 시작은 형들에게 배신당하여 이웃나라로 팔려간 종이었습니다.그러나 마지막은 최대강국인 애굽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다윗의 시작은 단지 양을 치는 조그만 목동이었습니다.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이스라엘의 가장 뛰어난 왕이 되었습니다.베드로의 시작은 가난한 초라하고 어부였습니다.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초대교회의 기독교 역사를 만드는 위대한 산파의 역할을 하였습니다.바울의 시작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조롱거리였습니다.모두가 그를 미워했고 믿지 않았습니다.그래서 그는 다소라는 곳에 숨어서 낙심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성경을 13권이나 썼으며 기독교회사의 가장 핵심인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작은 어떻습니까.어떤 과정에 있습니까.그러나 시작이 어떻든 과정이 어떻든 우리의 마지막은 이렇게 승리로 마칠 것입니다.영광으로 마칠 것입니다.축복으로 마칠 것입니다. 우리의 시작이 골고다 언덕과 같아도 그 언덕 넘어 에는 눈부신 부활의 아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영원한 축복의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그러나 세상 불신자들은 잠깐 있다 가는 이 땅에서 날마다 산해진미를 먹고 부귀영화를 누려도 마지막에는 심판의 영원한 지옥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의 과정도 축복하시지만 마지막에는 더 많은 축복과 영광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장례식 예배가 거행되고 있었습니다.목사님은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고 청중을 향해서 말했습니다.“여기 누워 있는 이 사람은 세상에서 죄를 많이 진 사람입니다.아마 이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자 모두 한 사람씩 나와서 이 사람의 얼굴을 봅시다”관을 열자 그 속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시체 대신 커다란 거울이 있었습니다.결국 사람들은 관 속에 비친 죄인인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목사님은 청중을 향해서 외쳤습니다.“여기 관 속에 죽어야 할 죄인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롬3:23에서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우리도 과거에는 오네시모와 같이 노예였습니다.세상의 법에 매인 노예가 아닙니다.죄와 율법으로 매인 사단의 종이며 죄의 노예였습니다.그래서 사단이 시키는 대로 세상에서 범죄하며 살았었습니다.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몸 값을 사단에게 주셨습니다.사단이 요구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값은 돈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피였습니다.주님은 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온 몸의 피를 흘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고 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맺어진 오네시모와 바울과 같은 한 형제입니다. 그리스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을 가져야합니다.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신실한 사람이 됩시다.어려움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인격을 가진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미래를 바라봅시다.우리는 자꾸 보이는 현재의 환경과 현실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스스로 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곤 합니다. 만일 어떤 큰 나라의 왕자와 결혼을 약속한 가난한 시골 처녀가 지금 당장 가난하다며 나는 불행하다고 비관하며 슬퍼한다면 여러분은 그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그녀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까 오늘 여러분의 환경은 어떻습니까.혼자 넘어가기 힘겨운 문제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아무리 계산하고 따져봐도 풀리지 않는 문제로 답답해 하지는 않습니까. 이제 그 문제를 나의 이성과 경험과 현실의 안경를 벗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지혜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이제 주님의 선하신 인도에 맡기시고 지금 부터 그 문제로 부터 자유하십시요.우리의 현재가 비록 힘들지라도 우리리 미래는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시작과 과정은 힘들어도 우리의 마지막은 축복으로 마칠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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