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십자가를 아십니까? (고전1:18)
본문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읍시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쥐어짜면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가 흐르고, 신약에서는 예수의 피가 흐릅니다. 구약의 놋제단은 신약의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노예를 처형할 때 사용하는 살상무기로써 수치와 치욕과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는 은혜와 구원과 사랑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성경에 나타난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신은 주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세인의 그룹에 속합니까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한 성도의 반열에 속합니까 가룟 유다 그룹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 살고 있다면 이 그룹에 속합니다. 유다는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돈궤를 맡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배은망덕자요, 배신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마태복음 26:15-16). 돈에 눈이 어두워 노예의 몸값인 은 삼십에 선생을 판 자입니다. 당신도 혹시 세상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예수를 등지고 살지는 않습니까 본디오 빌라도 그룹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권력에 눈이 어두워 살고 있다면 이 그룹에 속합니다. 빌라도는 세속적인 인기와 명예와 권세가 두려워서 생명의 주를 못박는 자리에 내어 주고 말았습니다(요한복음 19:12, 마가복음 15:15). 가이사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구레네 시몬 반열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억지로라도 구원의 십자가를 졌다면 다행스럽게도 당신은 이 반열에 참여한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고가는 골고다 현장에 동참하여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마가복음 15:21, 마태복음 27:32). 그러나 억지로 지고가는 십자가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이 없습니다. 아리마대 요셉 반열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존귀한 공회원으로써 당돌히 제사장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와서 한번도 사용치 않은 새 무덤에 주님을 장사했습니다. 당시 예수님 편에 선다는 것은 세상적인 모든 유익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돌히 나아간 것은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하면 이 반열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도 성경에서 십자가를 발견하지 못하면 영적인 장님입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작정했습니다(갈라디아서 6:14). 성경에 나타난 구원역사는 시대마다 다양하게 나타났으나 그 구원의 중심사상은 십자가입니다. 그 중에 너무도 확실하고 중요하고 분명한 십자가의 도를 몇 가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아담이 입은 가죽옷이 십자가입니다. 범죄한 인생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저주였습니다(창세기 2:17). 저주받은 인생은 에덴동산에서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창세기 3:23). 하나님은 다시금 에덴동산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천사들을 동원하여 화염검으로 지키게 했습니다(창세기 3:24). 이러한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힌 것은 범죄한 인생은 이 옷을 입어야 만이 공의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죄를 가리우는 옷입니다.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 위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워 보려고 했습니다(창세기 3:7).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는 무용한 것입니다. 속죄의 피흘림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히브리서 9:22). 심령에 평안을 주는 옷입니다. 아담이 만든 나뭇잎은 계약을 파괴한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공의의 가죽옷이 아니고는 심령에 잃어버린 평안을 찾을 수 없습니다(요한복음 14:26-27). 세상의 고통을 이기는 옷입니다. 에덴에서 버림을 받은 아담은 가시와 엉겅퀴에 걸려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는 수고의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범죄 함으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창세기 3:18). 인생에 불행과 비극은 하나님을 떠남에서 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치유하는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둘째:유월절 어린양이 십자가입니다.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죄와 사망과 저주의 권세 아래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바로와 애굽의 권세에서 빠져 나오는데는 당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당신이 애굽에 있는 이상 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 설주에 바름으로만이 가능합니다(출애굽기 12:7). 강퍅한 바로의 권세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바로(출애굽기 1:8)란 요셉이 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어떠한 권력도 부패하게 되며, 하나님 없는 어떠한 보좌도 허물어지고 맙니다. 하나님 없는 바벨탑이 무너짐 같이 하나님 없는 바로는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로의 강력한 권세도 팔순 노인이 짚고 다니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지팡이 하나를 당하지 못했습니다. 애굽의 재앙을 건너가게 하십니다. 애굽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재주로 사는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곳입니다. 이 곳은 언젠가는 멸망 받을 장막성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임할 때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를 피하는 유일한 길이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 심판의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출애굽기 12:7, 13).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홍해는 세상인 애굽과 광야교회를 구별짓는 구원의 경계선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출애굽기 14:30) 하나님은 바다와 구름 사이에서 세례를 베풀고(고린도전서 10:1-2), 이제 이후로 애굽에 미련을 두지 말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했습니다(출애굽기 12:2). 바로적인 가치관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광야의 아사셀이 십자가입니다. 이스라엘은 대속제일에 두 마리의 염소를 바칩니다. 이는 곧 대속의 죄짐을 진 주님의 모습입니다. 한 마리는 성막에서 속죄의 제물로 지성소에서 드리고, 한 마리는 아사셀로 광야에 버려지게 됩니다(레위기 16:8). 바로 광야에 버려진 아사셀이 버림받은 주님의 모습니다. 이는 죄책에서 자유하는 해방선언입니다. 죄와 죄책과 저주를 짊어진 염소입니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레위기 16:21) 주님이 세상의 모든 죄짐을 지고 십자가를 지심 같이 아사셀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죄와 죄책과 저주를 한 몸에 짊어졌습니다. 광야 무인지경에 버림받은 염소입니다. 무인지경은 주님이 지신 갈보리입니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위기 16:22) 주님은 이 일을 위하여 독생자로 오셨으며, 한알의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요한복음 3:16, 12:24).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버리받은 염소입니다. 아사셀은 죽을 때 골짜기가 떠나가는 고통의 울음을 웁니다. 상하고 찢긴 상처받은 피투성이가 된 고통의 몸이 당하는 최후의 탄식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시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하는 아사셀 된 주님의 탄식에 아사셀의 절규에 천지는 빛을 잃고, 의로운 피가 떨어질 때 죄악으로 물든 땅은 그 피를 받을 수 없어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 문이 열리고, 천지가 진동하는 뇌성벼락이 치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됩니다.
넷째:갈보리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한복음 1:29) 갈보리 십자가 사건은 주님이 한 순간에 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성민 사이에 가로막힌 성막의 휘장이 이 날에 찢어진 것입니다(마가복음 15:38). 율법의 완성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고 외침으로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다가 터지고”(마태복음 27:51)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죄악의 담을 허물어 버렸다(이사야 59:2).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요한복음 3:16).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십자가는 그 사랑의 극치인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화목의 열쇠가 된 것입니다(로마서 5:10). 승리의 개가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요,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십자가를 통과한 자 만이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주와 함께 죽은 자 만이 주와 함께 부활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20).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권세가 사망권세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가 사망 앞에 무릎을 다 끓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린도전서 15:4)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정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기독교를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보고 듣고 알고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 이 땅 위에서 가장 불쌍한 자이며, 어리석은 자이며, 무지한 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예수를 만나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도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아담이 입은 가죽옷이 십자가입니다. 범죄한 인생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저주였습니다(창세기 2:17). 저주받은 인생은 에덴동산에서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창세기 3:23). 하나님은 다시금 에덴동산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천사들을 동원하여 화염검으로 지키게 했습니다(창세기 3:24). 이러한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힌 것은 범죄한 인생은 이 옷을 입어야 만이 공의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죄를 가리우는 옷입니다.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 위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워 보려고 했습니다(창세기 3:7).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는 무용한 것입니다. 속죄의 피흘림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히브리서 9:22). 심령에 평안을 주는 옷입니다. 아담이 만든 나뭇잎은 계약을 파괴한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공의의 가죽옷이 아니고는 심령에 잃어버린 평안을 찾을 수 없습니다(요한복음 14:26-27). 세상의 고통을 이기는 옷입니다. 에덴에서 버림을 받은 아담은 가시와 엉겅퀴에 걸려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는 수고의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범죄 함으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창세기 3:18). 인생에 불행과 비극은 하나님을 떠남에서 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치유하는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둘째:유월절 어린양이 십자가입니다.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죄와 사망과 저주의 권세 아래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바로와 애굽의 권세에서 빠져 나오는데는 당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당신이 애굽에 있는 이상 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 설주에 바름으로만이 가능합니다(출애굽기 12:7). 강퍅한 바로의 권세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바로(출애굽기 1:8)란 요셉이 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어떠한 권력도 부패하게 되며, 하나님 없는 어떠한 보좌도 허물어지고 맙니다. 하나님 없는 바벨탑이 무너짐 같이 하나님 없는 바로는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로의 강력한 권세도 팔순 노인이 짚고 다니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지팡이 하나를 당하지 못했습니다. 애굽의 재앙을 건너가게 하십니다. 애굽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재주로 사는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곳입니다. 이 곳은 언젠가는 멸망 받을 장막성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임할 때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를 피하는 유일한 길이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 심판의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출애굽기 12:7, 13).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홍해는 세상인 애굽과 광야교회를 구별짓는 구원의 경계선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출애굽기 14:30) 하나님은 바다와 구름 사이에서 세례를 베풀고(고린도전서 10:1-2), 이제 이후로 애굽에 미련을 두지 말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했습니다(출애굽기 12:2). 바로적인 가치관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광야의 아사셀이 십자가입니다. 이스라엘은 대속제일에 두 마리의 염소를 바칩니다. 이는 곧 대속의 죄짐을 진 주님의 모습입니다. 한 마리는 성막에서 속죄의 제물로 지성소에서 드리고, 한 마리는 아사셀로 광야에 버려지게 됩니다(레위기 16:8). 바로 광야에 버려진 아사셀이 버림받은 주님의 모습니다. 이는 죄책에서 자유하는 해방선언입니다. 죄와 죄책과 저주를 짊어진 염소입니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레위기 16:21) 주님이 세상의 모든 죄짐을 지고 십자가를 지심 같이 아사셀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죄와 죄책과 저주를 한 몸에 짊어졌습니다. 광야 무인지경에 버림받은 염소입니다. 무인지경은 주님이 지신 갈보리입니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위기 16:22) 주님은 이 일을 위하여 독생자로 오셨으며, 한알의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요한복음 3:16, 12:24).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버리받은 염소입니다. 아사셀은 죽을 때 골짜기가 떠나가는 고통의 울음을 웁니다. 상하고 찢긴 상처받은 피투성이가 된 고통의 몸이 당하는 최후의 탄식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시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하는 아사셀 된 주님의 탄식에 아사셀의 절규에 천지는 빛을 잃고, 의로운 피가 떨어질 때 죄악으로 물든 땅은 그 피를 받을 수 없어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 문이 열리고, 천지가 진동하는 뇌성벼락이 치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됩니다.
넷째:갈보리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한복음 1:29) 갈보리 십자가 사건은 주님이 한 순간에 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성민 사이에 가로막힌 성막의 휘장이 이 날에 찢어진 것입니다(마가복음 15:38). 율법의 완성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고 외침으로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다가 터지고”(마태복음 27:51)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죄악의 담을 허물어 버렸다(이사야 59:2).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요한복음 3:16).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십자가는 그 사랑의 극치인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화목의 열쇠가 된 것입니다(로마서 5:10). 승리의 개가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요,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십자가를 통과한 자 만이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주와 함께 죽은 자 만이 주와 함께 부활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20).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권세가 사망권세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가 사망 앞에 무릎을 다 끓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린도전서 15:4)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정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기독교를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보고 듣고 알고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 이 땅 위에서 가장 불쌍한 자이며, 어리석은 자이며, 무지한 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예수를 만나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도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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