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섬기는 일 (딤후1:15-18)
본문
어느 누구도 자기의 소리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모두가 하나의 커다란 조화를 이루는 합창은 우리에게 하나의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서로를 섬기는 일”에대한 것입니다. 다른 이의 소리를 생각하지 않고, 전체의 조화를 생각하지 않은 독단적인 태도는 함께하는 일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큰 목소리를 줄이며, 강약을 조절하며, 다른 사람의 곡조를 도와주며 섬기는 일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화음을 이루게 되고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고서는, 자신의 큰 목소리를 뽐내지 않고서는 달리 노래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합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실로 합창하는 일은 섬기는 일이며, 섬김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의 독선이 불쑥거리며 서로를 사로잡는 모습이 아니라, 모이며 합치며 조화를 이루는 섬김의 원리가 너무도 필요합니다. 모두가 연극의 주연으로 뽑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중의 어떤 사람은 대사가 많지않은 단역을 맡을 수도 있습니다. 주연에 골몰하며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지거나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연이 따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함께하는 모든 일에는 주연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서로 서로 섬기는 역할 만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섬김을 근거로하여 움직이며 힘을 받아가는 모습이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섬기는 일에 익숙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열중함으로 화음과 조화 보다는 자기의 목소리에 연연하는 경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함께하는 일의 파괴적인 결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한 인물에게서 받은 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는 자주 나의 용기를 북돋고, 유쾌케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마음의 활력을 잃어버리고 실망감에 잠겨 있을 때 그는 “바울의 마음을 유쾌케” 즉 “마음을 싱싱하게하고 의미를 갖게”하였습니다. 그는 물론 화려한 자신의 경력을 갖고있지도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사역을 감당한 일도 없으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며, 이로써 그는 중요한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만나기 위하여 몇일을 로마의 감옥을 일일히 돌아다니며 애쓴 모습을 전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오네시포로’의 성실성을 옅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름에는 이러한 성실하고 마음이 싱싱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리말하면 바울을 거론하려 한다면 이들의 섬김을 또한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그 혼자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느곳에 있든지 그가 서있는 곳에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싱싱한 마음을 전해주는 형제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첫째가되려고 하고 지배자가 되어 군림하려고 하지만, 먼저 섬기며 손해보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업적을 깃발처럼 흔들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먼저 땀흘리며 소금처럼 스며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섬기기 위해서 왔다”(마태 20:28)는 예수의 말이 오늘 이기적이고 냉담한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종종 우리 대회의 주제로 삼고, 이따금씩 예수의 말을 지산의 입술에 올려놓는 취미생활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일상적인 움직임 속에서 “섬기는 삶”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의 신앙고백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섬김이 땅에 떨어진 세대. 저마다 잘난자신만 드러내려고 벌버둥이고, 서로를 끌어내리고,비난하고,비평하고, 자기 아래에 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세대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살아있음”과 “우리 공동체의 생명”을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못갖춘 꼴이고, 우리의 공동체가 또한 그러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가 되며 서로의 섬김과 봉사가 “시작의 발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이렇게 모여있다는 것이 주는 의미를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모두 누구 하나라도 제외됨 없이 우리 공동체 속에서 지켜내야할 섬김의 몫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섬김일하는 것은 누구 누구에게 집중되어 있는 하나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함께하는 일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모두가 서로를 섬기며 세워줌으로서 서로가 싱싱한 생명으로 서며,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연이 따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함께하는 모든 일에는 주연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서로 서로 섬기는 역할 만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섬김을 근거로하여 움직이며 힘을 받아가는 모습이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섬기는 일에 익숙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열중함으로 화음과 조화 보다는 자기의 목소리에 연연하는 경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함께하는 일의 파괴적인 결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한 인물에게서 받은 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는 자주 나의 용기를 북돋고, 유쾌케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마음의 활력을 잃어버리고 실망감에 잠겨 있을 때 그는 “바울의 마음을 유쾌케” 즉 “마음을 싱싱하게하고 의미를 갖게”하였습니다. 그는 물론 화려한 자신의 경력을 갖고있지도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사역을 감당한 일도 없으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며, 이로써 그는 중요한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만나기 위하여 몇일을 로마의 감옥을 일일히 돌아다니며 애쓴 모습을 전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오네시포로’의 성실성을 옅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름에는 이러한 성실하고 마음이 싱싱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리말하면 바울을 거론하려 한다면 이들의 섬김을 또한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그 혼자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느곳에 있든지 그가 서있는 곳에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싱싱한 마음을 전해주는 형제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첫째가되려고 하고 지배자가 되어 군림하려고 하지만, 먼저 섬기며 손해보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업적을 깃발처럼 흔들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먼저 땀흘리며 소금처럼 스며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섬기기 위해서 왔다”(마태 20:28)는 예수의 말이 오늘 이기적이고 냉담한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종종 우리 대회의 주제로 삼고, 이따금씩 예수의 말을 지산의 입술에 올려놓는 취미생활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일상적인 움직임 속에서 “섬기는 삶”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의 신앙고백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섬김이 땅에 떨어진 세대. 저마다 잘난자신만 드러내려고 벌버둥이고, 서로를 끌어내리고,비난하고,비평하고, 자기 아래에 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세대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살아있음”과 “우리 공동체의 생명”을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못갖춘 꼴이고, 우리의 공동체가 또한 그러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가 되며 서로의 섬김과 봉사가 “시작의 발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이렇게 모여있다는 것이 주는 의미를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모두 누구 하나라도 제외됨 없이 우리 공동체 속에서 지켜내야할 섬김의 몫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섬김일하는 것은 누구 누구에게 집중되어 있는 하나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함께하는 일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모두가 서로를 섬기며 세워줌으로서 서로가 싱싱한 생명으로 서며,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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