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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운동 (마28:18-20,딤후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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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올해 우리 교회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 보았고, 오늘은 그 첫번째 소제목인 제자 훈련에 대하여 함께 살펴 보시겠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있어서 기독교가 자기 자신의 역할을 올바로 감당한 때는 평신도들이 올바로 깨어 있었던 때입니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구가 1000만이 넘는다고 말하지만 그 대부분은 평신도들이고 교역자는 체 1%가 되지 못합니다. 이 평신도들이 올바로 깨어 있어야 기독교는 부흥하게 되어 있으며, 또한 올바른 자리잡음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서제에 가면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평신도를 깨우라. 일으키라. 훈련하고 무장시켜라. 그래서 추수터로 내보내라. 이것이 바로 제자훈련입니다. 평신도가 잠들어 있는데 그것을 깨우는 일, 또한 훈련하고 무장시키는 일, 결론적으로 추수터로 내보내는 일이 바로 제자훈련입니다. 오늘의 평신도를 가리키는 말은 lay(레이)라는 말인데 그것은 무식하다. 학문분야에서 비판할 자격이 없는 자 란 뜻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평신도라고 하지 않고 병신도 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바람이 이리 불면 이것이 다 인줄 알고 그리로 가보고, 또한 남들이 이것이 인기라고 하면 그것이 좋은 것인줄 알고 그것을 쫓아 나가고, 복받는다고 하면 그것 쫓아 다니고, 병고친다고 하면 그것 쫓아 다니고 도무지 중심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평신도들이 된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질문해 본다. 왜 그렇게 자기 중심없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평신도가 되어야 합니까 배우기 싫어하고, 훈련받기 싫어하고, 성경읽기 싫어하고, 기도하기 싫어하다보니,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지 못하니까 오늘날 한국의 평신도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lay(평신도)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의 laikos에서 나온 말인데 이 말의 뜻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백성 안에 선택된 특권층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성도 즉 하나님 백성의 총체 인 믿는 자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이 중세를 거치면서 로마 교회의 지도 밑에서 성례전과 수도원 제도의 잘못된 발전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계급에는 둘이 있다 고 잘못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 전체 를 뜻하던 교회의 주체인 이 laikos들이 성직자들에 의해서 완전히 교회의 객체가 되어 버리고 교회 밖에 쫓겨나서 세속에 속한 무식한 무리 로 변질되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고 성직자들만이 교회요, 교회의 주체로서 거룩한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의 유명한 크리스찬 귀족에게 라는 성명서 가운데서 말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제사장들이며, 사무에 관한 일을 제외하고는 그들 사이에 하등의 구별이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평신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직무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교회 안에서 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직자는 여전히 지배적인 통치적 자리에 있어야만 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헨드릭 크레머는 다음의 세가지 이유를 찾았습니다.
1. 이미 교회 안에 중생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음으로 성도들 속에 참된 하나님의 제사장들(거듭난 자)과 아닌 자들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2. 교인들의 영적인 미성숙 때문에 평신도들이 그들이 되찾은 원리에 따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3. 순수한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를 길러야 하고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계급인 설교자격자라는 특수 그룹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교회의 조직은 일반 성도들에게 적극적인 책임을 갖도록 하는 위치를 전혀 줄 수가 없었고, 평신도들은 비록 종교개혁 이전과는 다른 상황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교회의 새로운 지배 대상으로 머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참된 평신도를 잃어버린 교회는 중세 암흑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릅니까 그 때는 양적으로 교인들의 수가 많았으며, 성직자의 권위는 교회의 종탑 끝까지 높여졌었는데 왜 암흑기라고 부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참된 평신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평신도를 잃은 교회는 마치 머리와 다리가 마비된 교회와 같으며, 감독과 종들로 구성된 가족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양적인 교회의 팽창, 혹은 성장은 일시적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 운동이나 진정한 부흥이 아니고도 교인들은 얼마든지 사회적인 붐을 탈 수 있습니다. 또한 감상적인 위로처를 찾아서 구름떼처럼 군중들은 몰려 올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일제시대, 6.25 전쟁, 오늘날의 남북이 대치되어 있고, 사회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분히 우리는 그러한 현상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50년전만 하더라도 영국의 교회는 한국의 교회들처럼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설교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무력한 교회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금 영국의 교회는 비어 있습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곳에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의 신앙이 그들의 생활에 뚜렷한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감상적인 주일행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만일 여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지금 한국의 교회도 영국의 교회와 같이 비게 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부터 중생하도록 도우며, 영적인 기반을 닦아 주는 일에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합니다. 일본의 경우 3번의 놀라운 기독교 부흥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어떤 선교사는 일본은 머지 않아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다. 곧 선교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이다 라고 고국의 선교부에 보고서를 띄울 만큼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 들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선교하기가 가장 힘든 나라가 일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대답은 너무 자명한 것이 아닙니까 교회의 주체인 평신도를 깨우고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째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지금 한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무엇에 관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선거철에 교계 신문을 받아보면 정신이 아찔합니다. 세상 선거에서나 볼 수 있는 금권 타락 선거가 어느덧 교계의 선거에 더욱 거세게 휘몰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참된 사역은 교회 정치나 강단 위에서의 요지부동한 권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사역은 성도를 온전히 훈련하고 무장시키는 일입니다. (엡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세우신 것은 봉사의 일에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성도를 온전케 하도록 무장하기 위해서라 고 기록합니다. 즉 성도를 교회의 주체로서 봉사와 증거의 일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완전해지도록 목회자를 훈련자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최대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에 손님으로 왔다 갔다 하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깨워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주체가 되어서 봉사의 일에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완전해지도록 성도를 훈련하고 무장하는 일입니다. 매 주일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갑니까 왜 그들은 교회에 남지 못하며, 거듭나서 자라고 양육되지 못합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은 때때로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수는 있지만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며 인도한 사람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양육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교회에 다른 사람을 무장하고 훈련시킬 수 있는 신자들이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들은 이제 병신도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작은 목자들이 되어 목회자를 돕고, 또한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치는 사역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허드슨 테일러라고 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훈련 받지 않은 병사가 쓸모없는 것처럼 훈련받지 않은 선교사는 쓸모가 없다 고 하였습니다. 작은 목자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자기를 훌륭하게 굽는 사람이 어디 저절로 나옵니까 아닙니다. 먼저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그 밑에서 수 많은 훈련을 거친 후에야 스스로도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됩니다.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훌륭한 부흥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유명한 부흥사 쫓아다니면서 찬송인도하고, 잡일 해가면서 그 사람의 스타일을 배우며, 연단받고 훈련받은 후에 훌륭한 부흥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마태복음 본문에 보면 여기에는 4가지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가 있습니다. 간다 , 제자를 삼으라 , 세례를 준다 , 가르친다 . 어떤 사람은 이 4가지 동사가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희랍어 원문을 보면 한 가지만 명령형 동사이고 나머지 3가지는 그 명령형 동사를 수식해주는 분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령형 동사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신 간절한 부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최대의 사역은 제자를 삼는 사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교회당을 건축하느냐 하는 것도, 얼마나 많은 신자를 확보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월등히 중요한 것은 제자 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제자 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거듭나게 하는 것을 봄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의 사역이 아닙니다. 가르쳐서 순종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장하여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또 다시 가르쳐 순종하게 할 수 있는 제자를 재생산 할 수 있는 제자삼는 목표가 우리의 목표인 것입니다. 재생산할 수 있는 제자 삼는 일을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우리세대에 끝나버릴지도 모릅니다. 20세기에 아무리 많은 40억의 신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재생산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양육하는 사역을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21세기에는 단 한사람의 신자도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계속 전해지고 있는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고 또한 양육하도록 제자삼는 사역을 계속해 왔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전도법에는 안드레식 전도법과 바울식 전도법이 있습니다. 요 1:40-42에 보면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서 예수님께 데리고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하고) 오는 것을 봅니다. 또한 46절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 그냥 와 보라는 말로 나다나엘을 예수께 데리고 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와 보라 고 그냥 데리고 오는 것 그리고 그이상 없는 전도방식은 오늘날 신자가 교회에 그냥 한번쯤 인도하는 것과 비교되어 안드레나 빌립식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양육을 포함하지 않은 전도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의 또 다른 본문인 딤후 2:2에서 우리는 바울의 전도법을 보게 됩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헤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바울은 그가 영적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를 양육하였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그리고 양육한 디모데에게 또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며 또 그에게 양육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게 되면 양육받은 자가 또 다른 사람을 인도할 뿐만 아니라 다시 양육할 수 있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바울은 디모데에게 재생산을 위한 양육이 있는 전도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비극이 바로 이것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에 나아 오기를 수없이 원하고 바라고 있는데 좀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 싶고 신앙생활 철저하게 하고 싶은데 양육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도중에 떨어지고 마는 이 안타까운 현실. 더욱 슬픈 것은 신자들이 전도하라는 권고를 들으면 데리고 오지만 다니다 그만두는 걸 어떻게 해. 전도사님이 책임을 져야지 이것이 전도사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고 거듭난 자들마다 누구나 다 새로운 신자를 양육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와 보라! 고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이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양육이 문제입니다. 거듭남으로 이끌고 성장하도록 돕고 열매가 맺히도록 훈련하는 사역이 문제인 것입니다. 즉, 제자삼는 사역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자들은 속히 빌립과 안드레의 전도학교를 졸업하고 바울의 전도학교, 제자삼는 사역의 전도학교에 입학하여야만 합니다. 이 제자삼는 사역을 우리는 교회 성장의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질적인 성장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최고의 질적이고, 영적인 성숙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성숙은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각 지체들인 한사람 한사람의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받은 은사와 직분을 최대한 잘 활용하여 몸을 위한 봉사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케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교회에서 외롭거나, 할 일이 없거나, 봉사할 일터가 없거나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은사를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우리 한국 교회들은 100명의 신자들이 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뛰어다니는 사람은 4,5명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직 제자가 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제자가 되어서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와 헌신의 사역에 자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질적인 성장은 반드시 양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2. 양적인 성장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안드레식 전도방법으로 내가 매주 1명씩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하면 나는 1년에 52명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16년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52명 (곱하기) 16= 832명이 될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전도하여 매일 한명씩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할지라도 365 (곱하기) 16년 = 5840명 입니다. 그러나 내가 제자를 훈련하는 자가 되어 6개월만에 한사람을 전도하여 또 다른 제자를 양육할 수 있는 제자로 양육 훈련을 한다면 나는 6개월 후에 나를 포함해서도 오직 둘밖에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이 나가서 다음 6개월 동안에 둘을 얻고 훈련한다면 1년 뒤엔 4명의 제자가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해가 지나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1년 뒤-4명의 제자, 2년 뒤-16명의 제자, 3년 뒤-64명의 제자, 4년 뒤-256명의 제자, 5년 뒤-1024명의 제자, 6년 뒤-4,096명의 제자, 6년 6개월 뒤-8,192명의 제자가 되어 결국 16년 동안 매일 한 사람씩 전도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적 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드레식 전도는 재생산할 수 없는 영적 불임의 그리스도인을 낳게 되지만, 이 제자삼는 사역을 통한 전도는 모두가 영적인 자녀를 잉태하여 기르는 제자를 엄청나게 생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열매맺는 재생산의 사역의 동기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간곡한 부탁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 28:18-20 말씀을 주님의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 21:15-17의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3번 동일한 질문을 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 고 3번 거듭 하신 동일한 부탁은 주님의 지상최대의 유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베드로와 일곱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로 나는 고기잡이 가노라 고 전직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들은 성숙한 재생산의 열매맺는 제자도를 포기하고 세상길로 되돌아 갔습니다. 주님은 새벽에 오셔서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 내 양을 먹이라 . . 이것은 그의 제자들에게 향하신 최후의 재생산의 부탁입니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작은 목자가 되라는 유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제자의 조건, 작은 목자의 조건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네가 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학력이나, 충성심이나, 지식이나, 가문, 돈과 직업, 남녀의 구별도 아닙니다. 오직 나를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훈련 받고 작은 목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봉사의 일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작은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작은 목자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랑입니다. 참 주의 제자는 실패와 좌절과 자기 실망을 자주 고백하고 자랑할 것이 설사 없다 할지라도 단 한가지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작은 목자가 되라. 양육하는 자가 되라. 재생산의 제자가 되라! 이 제자 훈련은 생명 운동입니다. 죽은 것 같은 나무들이 이 겨울을 지나고 나면 새 봄을 맞이하면서 이 세상 어떤 색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순결한 연두색의 잎사귀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간에 내어 놓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록 죽은 것 같으나 추운 겨울에도 생명있는 생물은 결코 생명의 활동을 쉬지 않습니다. 계속 움직입니다. 생명의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을 먹이라는 양육의 명령, 목양의 부탁은 주님 제자의 최고의 목표요, 선생의 지상 유언입니다. 제자 훈련 = 생명 운동임을 깨달으시고 이 일을 위하여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 또한 이것이 우리의 최후, 최고의 목표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3월부터 시작될 제자훈련에 미리 기도하시면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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