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교회를 위한 기도 (살전3:11-13)

본문

바울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보낸 것은 환란과 시험 가운데 있는 교회에 대한 사랑의 염려 때문이었다.즉 두 가지를 염려한 것이다.
첫째는 복음,혹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입은 성도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바울은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조금이라도 왜곡되거나 손상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또한 자신의 수고를 통하여 증거된 복음을 듣고 거룩함을 입은 성도들이 믿음에서 떠나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그래서 바울은 여러가지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파송한 것이다.하나님은 그러한 바울에게 기쁜소식을 전해 주었고
(6),바울은 그 로 인하여 위로를 얻었으며
(7),말할 수 없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9).그렇다고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식어버리지 않았다.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을 얼굴로 대면하여 위로하며 권면하는 것보다 더 좋은 교제는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만날 수 있기를 계속 기도한 다고 했다(10). 11-13은 그렇게 식을 줄 모르는 열망으로 드리는 바울의 기도의 내용이다.바울 은 오랫동안 반복하여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바울은 그러한 자신의 기도를 요 약하여 기룩하고 있는 것이다.그러기에 이 기도에는 수많은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했던 바울의 기도가 응집되어 있다.그리고 이 기도에는 복음과 교회를 생명 으로 사랑하는 바울의 심장소리가 들리고 있는 것이다.
1.만날 수 있기를 기도함(11) 우리는 이 기도에서 바울이 얼마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만나보기 원하는가를 알 수 있다.이미 디모데를 통하여 상세한 소식을 들었다.보통 사람들 같으면 안 심하게 되었을 것이고,그래서 이제 보고 싶어하는 열망이 덜하여 지기도 할 것이다.그러나 바울은 전혀 그렇지를 않는다.어찌보면 더욱 강렬해진 느낌이 든다.왜 그럴까 바울의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과 같기 때문이다(2:7-12을 보라).적지에 보낸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보라.편지를 통하여,혹은 동 료를 통하여 자식이 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자식을 그리워 하지 않겠는가 그런 소식을 들을수록 더 그리워지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어서 속히 얼굴을 보 고 얼싸안고 부모와 자식간에만 나눌 수 있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때를 고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은 부모의 기업이기 때문이다.자식의 심장 속에 부모의 피가 뛰고 있다.자식의 숨소리는 부모의 호흡이다.일심동체라는 말이다.한 몸이다.그래서 나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러했다.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생명을 걸었다. 그들은 복음의 열매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바울에게는 생명의 열매들이 며 영적인 자식들이었다.그러니 바울이 아무리 디모데를 통하여 소식을 들었다해 도 그들을 보고자 하는 열정이 식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시편기자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그 열매는 태의 상급이로다 라고 했는데 바울은 그들을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 이라고 불렀다(2:19).부모들에게 자식없는 부모의 존재는 생각할 수 없다.자식은 부모의 분신이요 한 몸이기 때문이다.그와같이 바울에게서도 데살로니가 성도들 없는 바울 자신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들 은 둘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교회의 실체인 것이다.교회는 그리스도께 심겨진 성도들의 연합체이 기 때문이다.너 없는 나도 의미가 없고 나 없는 너도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안에 서 나는 너의 의미요 너는 나의 의미다.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러한 교회의 실체 를 심도있게 말한다(2:11-22).이런 한 몸의 사상이 구제를 위한 연보를 가능케 한다.구약교회와 같이 법적으로 십일조를 바치게 함으로 교회가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된 지체에 대한 사랑의 헌신인 연보를 통하여 교회 를 보존하게 하는 것이다. 마게도냐 교회가 왜 극한 가난 가운데서 풍성한 연보를 드립니까(고후8:1,2). 축복 받기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한 몸에 대한 마땅한 봉사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여러분의 몸에 병이 났을 때 왜 그것을 치료하기 위하여 많은 돈도 고생 도 마다하지 않습니까 그 병이 어디에 났든 그것이 내 몸이기 때문 아닙니까 그와같이 교회가 연보로 가난한 성도들을 돌아보며 구제해야 하는 것은 축복 받 기 위하여가 아니라 한 몸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구제가 계속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보존하시기 위하여 구제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역자들의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도 한 몸의 정신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목사는 하나님의 사자고,성도는 그보다 못한 종이여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목사도 성도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그런데 목사는 몸된 교회를 영적 으로 먹이고 기르기 위하여 다른 일들을 못하기 때문에 같은 몸의 지체된 성도들 이 연보하여 사역자들의 육신의 생활비를 책임지는 것입니다.한 쪽 손이 일을 못 하면 다른 손이 더 많이 수고하여 그 손의 약점을 보충하여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한 손이 다른 손을 대신하여 수고하는 것은 곧 자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자신의 몸에 대한 봉사입니다.자랑할 것이 없는 마땅한 일입니다.사명입니다.그러기에 사역자는 성도들의 생활비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성경적입니다(고 전9장). 그러나 바울 당시의 교회들은 성숙하지 못하여 바울의 생활을 책임지지도 못했 고,또 그런 것들을 요구할 수도 없었습니다.그러면 바울은 물질을 탐하는 자로 오해될 소지가 있었습니다.그래서 바울은 그런 오해로 말미암아 자신의 복음이 막히지 않게 하려고 스스로 일하여 생활비를 보충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2:9).오늘날도 그렇습니다.교회가 성숙되기 전까지 사역자들이 다른 일들을 한 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그것은 약한 몸과 같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임시적인 방편이기 때문입니다.교회가 성숙하면 그런 일이 중단되어야 합니다.성 숙한다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교인수가 많자지고 연보가 많이 나와야 한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사역자와 성도들이 한 몸의 정신으로 서야 한다는 말입니다.그것이 되기 전에는 아무리 연보가 많이 나와도 사역자의 생활비를 책임지지 못합니다.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생활비를 주는 것이 아니라 봉급을 주려고 합니다.그러면 복음에 장애가 발생합니다.그러기에 교회는 언제나 한 몸으로 서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거기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진정한 섬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교회는 종교단체의 모습을 벗지 못합니다.가난한 지체들을 돌 아보는 구제가 한 몸에 대한 마땅한 봉사가 아니라 어떤 정책이 되고 맙니다.사 역자와 성도들이 은사를 따라 한 몸의 봉사자로 서는 것이 아니라 사용주와 고용 인이 되어 버립니다.그것이야말로 교회의 비극입니다.오늘날 교회들을 보십시오. 비참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으로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우리 자신들이 교회를 바로 알고 바른 자세로 봉사해야 합니다.종교단체가 아닌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져 생명의 교통으로 살아야 합니다.그런 교회를 통 하여 세상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 세워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435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