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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의 면류관 (살전2:17-20)

본문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이 복음으로 인한 고통이 매우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입을 통하여 증거된 복음이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진 일과 그 복음이 듣고 믿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한 일로 인하여 쉬지 않는 감사를 드렸다. 거의 모든 경우에 신자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로 인하여 감사할 뿐이다.하나님의 뜻이 이뤄졌는가,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감사하기 보다는 자신의 육적인 삶에,현실적인 환경에 얼마만큼 좋은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감사는 그와같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감사가 아니다.그야말로 영 적인 감사다.자신들은 무수한 고난과 손실을 당했지만 자신들의 입술을 통하여 증거된 말씀이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진 것과 그 말씀이 계속하여 그들의 삶에 역사하는 것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골1:3이하에서도 말하 기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의 감사도 그런 감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우리 자신들에게는 고통스럽고 싶패가 되었고 손실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자신을 경성시키고 겸손케 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함을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그리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알리는 기회가 된 것도 감사해야 한다. 영적인 감사야 말로 진정한 믿음의 능력이다.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감사할 수 있 기 수준에 이를 때에야 우리는 진정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을 진정으 로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바울은 그런 감사와 더불어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고난 당한 일에 대하여 언급했다.바울은 그들의 고난이 그들만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는 했다.즉 유대에 있는 성도들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한 것처럼 너희들은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고난 을 당했다고 한다(14).즉 복음은 그 고유한 특성 곧 은혜성 때문에 어디서나 어떤 사람들에게서나 동일한 반응을 불러온다는 것이다.즉 너희들만 그런 일을 당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역시 같은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때 어떤 삶의 현장에서도 여러가지 모양의 고난을 당하는 것은 마땅한 일인데도 내가왜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지 말라는 것이다.그것은 세상과 복음의 특성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의문이다.세상은 언제 나 하나님을 대항하는 체제이다.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으려 한다.복음을 믿는 다는 것은 그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하여 기꺼이 그 앞 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류의 자연적인 성품은 그것을 거부한다.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받고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나 다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 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고 했습니다(벧전4:13,14).하나님께서 악한 자들,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을 속히 멸하 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도 말아야 한다.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까지도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사랑 때문에 인내하신다.우리는 이상히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런 사랑에 동참하여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예수님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고 하셨다(마5:44).
또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예수와 그 선지자들을 죽이고 핍박한 유대 인들이 당한 심판에 관하여 언급했다(15,16).바울은 역사 가운데 나타난 유대인 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끝까지 복음을 대적하는 그들의 종말론적인 심판을 보고 있는 것이다.과거에도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핍박하다가 바 벨론 종살이등 크고 작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했던 것을 잘 알고 있다.그것은 무 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받을 종말의 대심판의 전조이다.과거 에 그들이 받은 심판은 장차 받을 심판의 대한 예고이다.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 이 심판을 받았다고 말한다(16). 이것은 또한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로와 소망이다.지금은 핍박을 당하며 세상에서 멸시와 조롱거리와 버림을 당하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우리에게 있을 것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바울은 로마서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했다(롬8:18).세상에서도 그런 것들을 본다.성공이라는 영광 때문에 오늘 당하는 가난과 시련과 어려움들 을 꿋꿋하게 견디는 사람들이 있다.지금은 아무리 사람들이 자기를 향하여 이런 저런 말을 한다해도 자신은 그런 사람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 기에게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자신의 일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기 때문 이다.그래서 참고 견디며 그 일에 열심을 가진다.그래서 후에는 그를 비웃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탄하게 하는 일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그 순간 그 가 받던 모든 수모와 멸시와 오해는 영광으로 변하고 만다.그와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의 심판과 더불어 모든 것이 드러나며 그 때 우리들에게 주어질 영광을 생각할 때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로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 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고 한다(약5:7,8) 이렇게 말함으로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준 바울사도는 이제자 신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왜냐하면 데살로니가에서는 복음의 방해자들이 바울이 그곳에 오지 않고 것에 대하 여 여러가지 오해될 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바울을 무책임한 사감으로.혹은 비겁한 겁장이로,혹은 자신의 복음에 대하여 확신이 없는 사람으 로 비난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다른 서신에서도 그런 경우를 볼 수 있기 때 문이다.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데살로나가를 떠난 것은 얼굴 뿐이지 마음은 아니라고 한다.떠나고 싶어서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타 의에 의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서 분리되어졌다는 뜻으로 말한다.
사도행전17 장에서 보듯이 바울은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것이 아니라 극심한 핍박자들에게 위 험한 지경까지 몰리게 되었을 때 바울을 사랑하는 자들이 바울과 실라를 빼내어 밤에 베뢰아로 보냈다(행17:10). 사실 바울은 원치 않았지만 그렇게 베뢰아로 떠밀려 온 것이다.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임을 생각하고 베뢰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고,그 사람들이 의외로 신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많이 믿음으로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는 계속된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의 반대자들은 바울의 부재를 이용하여 그를 흠잡고 복음을 방해했던 것이다.그래서 바울은 행여라도 그런 모함에 성도들이 넘어가서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버리는 일이 일어날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왜 그 곳을 떠났는가 그리고 왜 그들 곁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가를 말한 것이다.이 모 두가 복음과 성도들을 사랑하는 이유 때문이다.하나님의 복음이 손실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성도들의 신앙과 사기가 저하되지 않게 하기 위하 마음 때문에 이렇 게 자상한 편지를 쓰는 것이다. 그야말로 바울의 교회를 향한 마음의 깊이는 그 누구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는 가운데서 자신의 무수한 고난에 대하여 기록한 후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 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8).
자신이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보다도 더 비할데 없는 고통은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가 잘못되면 어찌될까 하는 염려였다는 말이다. 자신은 죽더라도 복음과 교회만은 온전히 보존되기를 소원한 것이다. 살든지 죽 든지 내 몸에소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함이라 고 한 말과 같은 것이다.자 신의 환경이 호전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교회가 보존되는 것 이 바울의 가장 큰 관심이었던 것이다.그들을 못잊어 그들에게 가고자 면밀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사단이 바울의 데살로니가 진입을 막았다고 말한다(18).사 단이 어떤 식으로 막았는지 알 수 없지만 바울은 사단의 방해하는 역사를 감지했 던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생명을 걸고라도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려는 것을 막는 것은 사단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결코 겁이 나서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지 않는 것임을 역설한 것이다.지금 도 바울의 마음은 변함없다는 것이다.3:10에서는 그 일을 두고 계속 기도하고 있 다고 말한다.디모데를 보내어 안부를 전하고 소식을 받아 왔다(3:6)그러나 바울 은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자신이 직접 그 사랑하는 성도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우리가 다 이와같이 성도를 사랑하고 사모해야 할 것이다.특별히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자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전도자의 자격이라고 할 수 있다.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은 사랑으로 열려 있을 때에만 진정한 복음의 능력 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20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야말로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말한다.아비 의 면류관은 좋은 자식이며 스승의 면류관은 훌륭한 제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사랑의 열매들이기 때문이다.농부가 수고의 열매를 볼 때 모든 지나간 고 통을 잊고 기쁨으로 충만하듯이 잘 된 자식과 제자들을 볼 때 부모와 스승으로서 감수해야 했던 지난날의 고통들이 잊혀지고 기쁨으로 가득차게 된다.그와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정결한 삶으로 돌아온 사람들 을 볼 때 자신의 전도자로서의 고통과 괴로움들을 잊고 즐거워 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들이 주님의 강림하실 때 함께 영광 가운데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는 복음을 믿음으로 천국의 영광 가운데 들어왔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완전한 영광 가운데 들어갈 성도들을 생각할 때 가슴이 떨리고 기쁨과 소망으 로 충만한 상태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수고로 한 알의 밀알이 결실하는 것을 보는 것도 기쁨이요 그것을 먹고 자라는 자식들을 보는 것도 그렇게 가슴 벅찰 일인데 하물며 자신의 수고로 말미 암아 한 영혼이 사단에게 해방되어 하나님께 돌아와 그 영광 가운데 들어갈 것을 생각할 때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바울의 기쁨과 소망은 곧 종말론적인 것이다.지금도 와 있지만 장차 완전하게 드러난 그 영광을 인하여 소망중에 기뻐하는 것이다.그래서 요한사도도 말하기를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가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 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2:28)고 합니다.땅의 결실을 인하여 기뻐하는 기쁨보 다 하늘의 열매들을 인하여 기뻐하는 기쁨과 소망이 늘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들 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우리 모두가 그런 삶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하자.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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