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고전5:17)
본문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재봉씨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군복무중 부대장 관사에 가서 자주 사역을 했습니다. 어느 날 부대장의 서재에 들어가서 물건 하나를 훔쳐 나오다가 가정부에게 발각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가정부가 “지난번에 잃어버린 군화도 자네가 훔쳤구나”하고 몰아 붙이자 홧김에 옆에 있는 도끼로 가정부를 위협한 것이 죄가 되어 살인미수죄로 7개월간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服役)을 하게 되었습니다. 옥중에 있으면서 얼마나 분했던지 형기 동안에 복수를 결심한 그는 출감이 되자 부대장 집으로 갔습니다. 그 당시 부대장은 다른 곳으로 전출하여 가고 그곳에는 다른 부대장(이덕주 중령)이 들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모르고 이중령 가족 6명을 모두 살해했습니다. 그로 인해 고재봉씨는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며, 당시 신문들은 그의 기사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때 영락교회 안국선 집사가 이 기사를 읽고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강도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기억하고 고재봉씨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안집사가 찾아갔을 때 8명의 간수에게 호위되어 나온 고재봉씨에게 검찰관은 “새벽마다 너를 위하여 기도하는 분이신 데 좋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바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안집사의 구령(救靈)에 불타는 간절한 심령은 강퍅한 고재봉씨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며, 그때까지 묵비권을 행사하여 입을 열지 않던 그가 자신의 범행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안집사가 넣어 준 성경을 여러 번 읽고 후에 고백하기를 “나는 성경이 이렇게 귀한 책인 줄 몰랐습니다. 이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내 인생도 변했을 것을… ” 그 후에 그는 구치소에서 만나는 자마다 전도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지독한 물질주의자 였습니다. 이러한 그가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나니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누가복음 19:8)하고 삶의 대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수가성의 바람난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향락주의자 였습니다. 남편 다섯을 갈아치울 정도이니 대단한 여자입니다. 그러한 여자도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한복음 4:28-29)하고 예수 신랑을 맞이한 이후에 그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다소 사람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인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나 금식하고 세례를 받아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사도행전 9:20) 듣는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수전노도 변하고, 쾌락주의자도 변하고, 율법주의자도 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고 했습니다. 당신도 예수 안에 있으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첫째:이전의 세속적인 가치관이 변합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창세기 1:26-28).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에 신(神)만이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을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인생이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부패하여 그 자리에 물질과 권세와 이성을 두기도 하고, 혹은 세속종교인 미신과 우상숭배와 사단권세로 채우고자 하니 끝없는 혼돈과 공허와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간의 불행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이 인간 최대의 비극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인간 최대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그 인생 노년에 고백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합니다. 그는 지혜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자이며, 그 보좌를 누가 당할 자가 없었으며, 그는 세인들이 추구하는 쾌락을 한 몸에 누렸던 자입니다. 그러한 자가 전도서에서 그 생의 삶을 고백하기를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도서 1:2-3)라고 말씀했습니다. 해 위의 소망이 없는 해 아래의 삶은 허무한 삶입니다. 그래서 그는 최후에 고백하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도서 12:13)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 인생의 삶의 목적과 가치관이 변하여 이전의 유대교적 율법에 묶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린도전서 10:31-33)고 했습니다.
둘째:이전의 세속적인 안목이 변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선견(先見)과 정견(正見)의 안목(眼目)을 가져야 합니다. 영의 사람은 세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앞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에 얽매이지 않고 내일에 사는 꿈과 소망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열왕기하 6:17) 이것이 범인이 보지 못하는 선지자의 안목입니다. 우리는 언약에 의한 믿음의 안목을 가진 아브라함과 세속 물질의 정욕에 눈이 어두운 롯의 안목을 기억합니다. 롯은 물질의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요단 들만 보았지 그 속에 감추인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를 보지 못했습니다(창세기 13:12). 그래서 최후에 그는 자신이 얻은 그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으며(창세기 14:11-12), 최후에는 부끄러운 수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창세기 19:30-38), 그러나 아브라함은 세인들의 눈에는 다 잃은 것 같으나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세기 13:14-15)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영적인 계약이요, 아브라함은 이를 보는 영적 안목이 열린 자 였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영안이 밝아져서 겉 사람과 속사람을 구별할 줄 압니다. 세인들은 날마다 후패할 겉사람에 생을 투자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가꾸고 단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잠시 받을 환난과 영원히 누릴 영광을 볼 줄 압니다. 그러나 세인들의 삶에는 내일과 미래와 영원히 사는 삶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오늘에 살지 않고 내일에 살고 영원한 내세와 영생에 그 삶의 가치를 둡니다. 오늘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후일에 받을 영광을 보는 안목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히 여깁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로마서 1:20, 히브리서11:3).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후서 4:16-18)고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셋째:이전에 세속적인 관심사가 변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시고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분명한 결단을 내리도록 권면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기도를 많이 합니다. “주여 이 모든 것을 주소서 그리하면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살겠나이다” 이것은 주님이 보실 때 순서가 뒤바뀐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가 복음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투자하면 하나님은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중생한 이후에 그의 삶은 너무도 철저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삶의 관심사는 복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립보서 1:20-21) 예수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었습니다. 예수 십자가만이 그의 유일한 힘이요, 능력이요, 권세였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라디아서 6:14)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그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서 십자가 지는 연습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라디아서 2:20)고 했습니다. 십자가만이 그리스도인이 사는 길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에게 드러낼 의가 많았습니다(빌립보서 3:5-6). 그러나 이젠 자신을 위하여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린도후서 12:5) 왜 그가 약한 것을 자랑하는가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2:9)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길임을 깨닫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 자기에게 유익했던 것이 오히려 복음에 거추장스러운 해로운 것인 줄로 알고 주님을 발견한 이 후에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립보서 3:7-9)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그 인생이 변합니다. 강도도 예수님을 만나면 변합니다. 세상 일락에 취해 있던 자도 예수를 만나면 그 인생이 변합니다. 낭패와 좌절에 빠져 있는 인생도 예수를 만나면 그 인생이 변합니다. 인생은 누구나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어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하나님은 당신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지독한 물질주의자 였습니다. 이러한 그가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나니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누가복음 19:8)하고 삶의 대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수가성의 바람난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향락주의자 였습니다. 남편 다섯을 갈아치울 정도이니 대단한 여자입니다. 그러한 여자도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한복음 4:28-29)하고 예수 신랑을 맞이한 이후에 그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다소 사람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인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나 금식하고 세례를 받아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사도행전 9:20) 듣는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수전노도 변하고, 쾌락주의자도 변하고, 율법주의자도 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고 했습니다. 당신도 예수 안에 있으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첫째:이전의 세속적인 가치관이 변합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창세기 1:26-28).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에 신(神)만이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을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인생이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부패하여 그 자리에 물질과 권세와 이성을 두기도 하고, 혹은 세속종교인 미신과 우상숭배와 사단권세로 채우고자 하니 끝없는 혼돈과 공허와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간의 불행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이 인간 최대의 비극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인간 최대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그 인생 노년에 고백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합니다. 그는 지혜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자이며, 그 보좌를 누가 당할 자가 없었으며, 그는 세인들이 추구하는 쾌락을 한 몸에 누렸던 자입니다. 그러한 자가 전도서에서 그 생의 삶을 고백하기를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도서 1:2-3)라고 말씀했습니다. 해 위의 소망이 없는 해 아래의 삶은 허무한 삶입니다. 그래서 그는 최후에 고백하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도서 12:13)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 인생의 삶의 목적과 가치관이 변하여 이전의 유대교적 율법에 묶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린도전서 10:31-33)고 했습니다.
둘째:이전의 세속적인 안목이 변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선견(先見)과 정견(正見)의 안목(眼目)을 가져야 합니다. 영의 사람은 세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앞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에 얽매이지 않고 내일에 사는 꿈과 소망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열왕기하 6:17) 이것이 범인이 보지 못하는 선지자의 안목입니다. 우리는 언약에 의한 믿음의 안목을 가진 아브라함과 세속 물질의 정욕에 눈이 어두운 롯의 안목을 기억합니다. 롯은 물질의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요단 들만 보았지 그 속에 감추인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를 보지 못했습니다(창세기 13:12). 그래서 최후에 그는 자신이 얻은 그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으며(창세기 14:11-12), 최후에는 부끄러운 수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창세기 19:30-38), 그러나 아브라함은 세인들의 눈에는 다 잃은 것 같으나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세기 13:14-15)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영적인 계약이요, 아브라함은 이를 보는 영적 안목이 열린 자 였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영안이 밝아져서 겉 사람과 속사람을 구별할 줄 압니다. 세인들은 날마다 후패할 겉사람에 생을 투자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가꾸고 단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잠시 받을 환난과 영원히 누릴 영광을 볼 줄 압니다. 그러나 세인들의 삶에는 내일과 미래와 영원히 사는 삶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오늘에 살지 않고 내일에 살고 영원한 내세와 영생에 그 삶의 가치를 둡니다. 오늘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후일에 받을 영광을 보는 안목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히 여깁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로마서 1:20, 히브리서11:3).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후서 4:16-18)고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셋째:이전에 세속적인 관심사가 변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시고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분명한 결단을 내리도록 권면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기도를 많이 합니다. “주여 이 모든 것을 주소서 그리하면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살겠나이다” 이것은 주님이 보실 때 순서가 뒤바뀐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가 복음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투자하면 하나님은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중생한 이후에 그의 삶은 너무도 철저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삶의 관심사는 복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립보서 1:20-21) 예수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었습니다. 예수 십자가만이 그의 유일한 힘이요, 능력이요, 권세였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라디아서 6:14)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그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서 십자가 지는 연습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라디아서 2:20)고 했습니다. 십자가만이 그리스도인이 사는 길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에게 드러낼 의가 많았습니다(빌립보서 3:5-6). 그러나 이젠 자신을 위하여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린도후서 12:5) 왜 그가 약한 것을 자랑하는가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2:9)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길임을 깨닫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 자기에게 유익했던 것이 오히려 복음에 거추장스러운 해로운 것인 줄로 알고 주님을 발견한 이 후에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립보서 3:7-9)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그 인생이 변합니다. 강도도 예수님을 만나면 변합니다. 세상 일락에 취해 있던 자도 예수를 만나면 그 인생이 변합니다. 낭패와 좌절에 빠져 있는 인생도 예수를 만나면 그 인생이 변합니다. 인생은 누구나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어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하나님은 당신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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