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사도여! (엡2:11-18)
본문
제 38회 장로회 청년대회에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빕니다.우리 70만 장로회 청년들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것은 참된 평화에 대한 애 절한 절규일 것입니다. 이 평화는 우리 청년들 뿐만 아니라 온 겨레의 염원이요, 나아가서는 온 인류의 소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평화는 전 인류와 연계되어 있으므로 한 민족이나 한국가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 만큼 평화에 신경을 쓰는 종교도 없는 줄 로 압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를 평화의 종교라고 부르는 줄로 압니다. 일반적으로 평화는 증오심이 없어지거나 적대관계가 중지 혹은 해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는 보통 통속적인 평화의 개 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6.25가 휴전되었다고 해서 평화되었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미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화해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평온할지 모르지만 평화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본래 평화라는 것은 인간적인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5:7에 "나는 빛도 지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 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을 떠나서 믿음을 저버리니까 사랑해야 할 구국의 소년 영웅 다윗을 끝까 지 미워하고 결국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윗 을 미워한 사울 왕은 10여년 동안 그 마음이 절대 평안치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말 한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웃과 더불어 불화하고 원망들을 만한 잘못을 그대 로 두고 불편한 관계로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드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죄의 용서와 사랑으로 융화되고 조화 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 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 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1-42)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교훈을 제쳐놓고 평화를 쟁취하려고 하니 평화가 곧 눈앞에 잡힐 듯하면서도 평화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악당들에게 잡히실 때 이 광경을 목격한 제자 중 하나가 분을 참지 못하여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떨어뜨렸습니다. 그때 우리 예수님께서 "네 검을 도로 집에 꽃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하셨 습니다. 이 만고의 진리가 그대로 역사의 현장에서 입증된 것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이런 방법으로 절대로 평화가 달성될 수 없습니다. 외 혀려 더 역효과가 나타나 더 무서운 폭력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스텐리 존슨 선교사는 "무엇이든지 폭력으로 빼앗는 것은 폭 력에 의해서 잃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공산 주의가 결국 부딪쳐서 가루가 될 진리의 비유이다. 그리스도는 수단 방법에 있어 쓰는 유혹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으셨다. 그분은 광야에서 사단에게 "내 방법을 채택하고, 폭력을 쓰고 나를 경배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나라들을 내게 주리라."는 유혹을 받았으나 이를 다 거절하셨습니다. "만일 그 나라가 이런 폭력적 방법으로 온다면 그것은 그 나라가 아닐 것이며, 필경은 그 방법의 모습으로 변질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저항주의자였던 인도의 간디는 "비폭력은 폭력보다도 훨씬 남자답다. 부드럽게 용서하는 것은 무사도를 빛나게 꾸미는 것이다. 처벌할 수 있는 힘이 있을지라도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이 부드럽게 용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힘으로는 상대방을 굴복시 키려 했던 모든 영웅 호걸들이 과연 이 지상에 평화를 가져왔습니까 아닙니다. 더 무서운 공포를 가져왔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의 사도였 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 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라고 하셨습니다. 평화는 아무런 노 력이나 수고 없이 자연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고통과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배가 다른 이복 두 아들, 즉 이삭과 이스마엘이 있었 습니다. 두 아들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를 못하고 불화했습니다. 부모 의 마음의 얼마나 아팠겠습니까그래서 함께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브라함 생존시 재산을 분배해서 이스마엘을 멀찍이 살게 했 습니다.
그런데 연로하신 부친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야 두 형제가 부 친께 불효한 것을 깊이 회개하면서 장사를 같이 지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 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 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아브라함의 향 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 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벧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창 25:5-9)라고 하였습니다. 부친 생존시에 이런 화해가 이루어졌다면 부친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 깨닫고 같이 장사를 지냈다는 것도 사실인즉 귀한 것입니다. 아마 서로 화해하려고 벼루다가 기회를 놓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라고 하였습니다. 부모가 별세한 후에도 형제간에 서로 우애하지 못하고 불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들은 너그럽고 화목한 중에 대사를 마친 후 복을 받았습니다. "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창 25:11)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형들이 부친 야곱이 죽은 후 에 동생 요셉으로부터 무서운 복수를 받을까 심히 근심했습니다. 물론 요셉은 형들이 지난날 어린 자기를 애굽으로 팔아 버린 것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머슴살이 하던 일, 시험을 이겼는데도 2년동안이나 옥고를 치룬 일들, 분한 면을 생각한다면 한이 없 었을 것입니다. 형들은 복수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동생 요셉이 연로 하신 부친 야곱 때문에 손을 못쓴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불 안하고 초조한 형들에게 요셉은 "두려워 마소소.내가 하나님을 대신하 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 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 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분명 히 화평케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요셉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희생적인 신앙이 없으면 진정한 평화를 수립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리빙스턴 선교사는 "나는 평화를 위해 싸우는 일을 빼놓고는 어떠 다 일이든 평화를 위해 일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평화스럽지 못한 원수된 관계가 예수님이 십자가상 위에서 죽으시므로 이 모든 죄 가 도말되었습니다.멀어졌던 사이가 예수님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화목케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케 되고 이 웃과 더불어 평화롭게 되어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유명한 성화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때의 일입니다. 남달리 예민한 감정을 가진 그가 자 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람과 심힌 논쟁을 벌였습니다. 아무리 참 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어서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다빈치가 그에게 퍼붓는 말은 아주 원색적이고 거칠었습니다. 호랑이같이 사나운 얼굴 과 신경질을 내면서 심하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논쟁이 끝난 후에 다빈치는 화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몸이 굳어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의 그 화평화고 인자하 신 얼굴을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 했습니다. 마침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 습니다. 아무리 창피하고 부끄러워도 그가 마음을 상하게 한 그 사람 을 찾아가서 회개하고 용서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 하여 돌아왔습니다. 기도하는 심중에서 침착하게 예수님의 얼굴을 잘 그렸다고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저력이 있는 우리 장청 여러분! 믿음의 깊이가 있는 여러분은 교회와 사회의 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화평을 심는 장청이 되어야 합니다. 불편하고, 갈등이 있고, 불화한 곳에는 주님은 계실 수 없습니다. 믿음과 성령의 충만한 장청이 있는 곳에는 평화의 결실이 있을 것입니다. 평화는 우리 교단의 바램이요, 우리 교계와 온 세계 인류의 염 원도 이 평화입니다.이 평화가 신앙의 위력으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 만큼 평화에 신경을 쓰는 종교도 없는 줄 로 압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를 평화의 종교라고 부르는 줄로 압니다. 일반적으로 평화는 증오심이 없어지거나 적대관계가 중지 혹은 해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는 보통 통속적인 평화의 개 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6.25가 휴전되었다고 해서 평화되었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미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화해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평온할지 모르지만 평화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본래 평화라는 것은 인간적인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5:7에 "나는 빛도 지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 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을 떠나서 믿음을 저버리니까 사랑해야 할 구국의 소년 영웅 다윗을 끝까 지 미워하고 결국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윗 을 미워한 사울 왕은 10여년 동안 그 마음이 절대 평안치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말 한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웃과 더불어 불화하고 원망들을 만한 잘못을 그대 로 두고 불편한 관계로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드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죄의 용서와 사랑으로 융화되고 조화 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 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 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1-42)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교훈을 제쳐놓고 평화를 쟁취하려고 하니 평화가 곧 눈앞에 잡힐 듯하면서도 평화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악당들에게 잡히실 때 이 광경을 목격한 제자 중 하나가 분을 참지 못하여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떨어뜨렸습니다. 그때 우리 예수님께서 "네 검을 도로 집에 꽃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하셨 습니다. 이 만고의 진리가 그대로 역사의 현장에서 입증된 것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이런 방법으로 절대로 평화가 달성될 수 없습니다. 외 혀려 더 역효과가 나타나 더 무서운 폭력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스텐리 존슨 선교사는 "무엇이든지 폭력으로 빼앗는 것은 폭 력에 의해서 잃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공산 주의가 결국 부딪쳐서 가루가 될 진리의 비유이다. 그리스도는 수단 방법에 있어 쓰는 유혹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으셨다. 그분은 광야에서 사단에게 "내 방법을 채택하고, 폭력을 쓰고 나를 경배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나라들을 내게 주리라."는 유혹을 받았으나 이를 다 거절하셨습니다. "만일 그 나라가 이런 폭력적 방법으로 온다면 그것은 그 나라가 아닐 것이며, 필경은 그 방법의 모습으로 변질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저항주의자였던 인도의 간디는 "비폭력은 폭력보다도 훨씬 남자답다. 부드럽게 용서하는 것은 무사도를 빛나게 꾸미는 것이다. 처벌할 수 있는 힘이 있을지라도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이 부드럽게 용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힘으로는 상대방을 굴복시 키려 했던 모든 영웅 호걸들이 과연 이 지상에 평화를 가져왔습니까 아닙니다. 더 무서운 공포를 가져왔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의 사도였 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 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라고 하셨습니다. 평화는 아무런 노 력이나 수고 없이 자연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고통과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배가 다른 이복 두 아들, 즉 이삭과 이스마엘이 있었 습니다. 두 아들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를 못하고 불화했습니다. 부모 의 마음의 얼마나 아팠겠습니까그래서 함께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브라함 생존시 재산을 분배해서 이스마엘을 멀찍이 살게 했 습니다.
그런데 연로하신 부친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야 두 형제가 부 친께 불효한 것을 깊이 회개하면서 장사를 같이 지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 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 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아브라함의 향 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 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벧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창 25:5-9)라고 하였습니다. 부친 생존시에 이런 화해가 이루어졌다면 부친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 깨닫고 같이 장사를 지냈다는 것도 사실인즉 귀한 것입니다. 아마 서로 화해하려고 벼루다가 기회를 놓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라고 하였습니다. 부모가 별세한 후에도 형제간에 서로 우애하지 못하고 불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들은 너그럽고 화목한 중에 대사를 마친 후 복을 받았습니다. "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창 25:11)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형들이 부친 야곱이 죽은 후 에 동생 요셉으로부터 무서운 복수를 받을까 심히 근심했습니다. 물론 요셉은 형들이 지난날 어린 자기를 애굽으로 팔아 버린 것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머슴살이 하던 일, 시험을 이겼는데도 2년동안이나 옥고를 치룬 일들, 분한 면을 생각한다면 한이 없 었을 것입니다. 형들은 복수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동생 요셉이 연로 하신 부친 야곱 때문에 손을 못쓴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불 안하고 초조한 형들에게 요셉은 "두려워 마소소.내가 하나님을 대신하 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 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 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분명 히 화평케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요셉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희생적인 신앙이 없으면 진정한 평화를 수립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리빙스턴 선교사는 "나는 평화를 위해 싸우는 일을 빼놓고는 어떠 다 일이든 평화를 위해 일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평화스럽지 못한 원수된 관계가 예수님이 십자가상 위에서 죽으시므로 이 모든 죄 가 도말되었습니다.멀어졌던 사이가 예수님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화목케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케 되고 이 웃과 더불어 평화롭게 되어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유명한 성화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때의 일입니다. 남달리 예민한 감정을 가진 그가 자 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람과 심힌 논쟁을 벌였습니다. 아무리 참 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어서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다빈치가 그에게 퍼붓는 말은 아주 원색적이고 거칠었습니다. 호랑이같이 사나운 얼굴 과 신경질을 내면서 심하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논쟁이 끝난 후에 다빈치는 화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몸이 굳어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의 그 화평화고 인자하 신 얼굴을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 했습니다. 마침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 습니다. 아무리 창피하고 부끄러워도 그가 마음을 상하게 한 그 사람 을 찾아가서 회개하고 용서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 하여 돌아왔습니다. 기도하는 심중에서 침착하게 예수님의 얼굴을 잘 그렸다고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저력이 있는 우리 장청 여러분! 믿음의 깊이가 있는 여러분은 교회와 사회의 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화평을 심는 장청이 되어야 합니다. 불편하고, 갈등이 있고, 불화한 곳에는 주님은 계실 수 없습니다. 믿음과 성령의 충만한 장청이 있는 곳에는 평화의 결실이 있을 것입니다. 평화는 우리 교단의 바램이요, 우리 교계와 온 세계 인류의 염 원도 이 평화입니다.이 평화가 신앙의 위력으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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