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에담긴 보배 (고후4:7-10)
본문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분파를 만들어 자신을 비방하자 사도의 권위를 가 지고 직법 방문까지 하였으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마게도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때에 디도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어느정도 문제가 수습 이 되자 다시 고린도를 방문하기 전에 다시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고자 하 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처음부터 복음을 위하여 받은 환란을 강조하고 사도직의 영광을 그약의 직분과 비교하여 나타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공 로를 자랑하거나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키 위한 사도로서의 권위를 강조하여는 데 있었습니다. 마치 사회에서 어떤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누가 더 수난의 경력 이 있느냐에 따라 그의 권위가 인정되듯이, 일부의 유대인들로부터 방해를 받고 있는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환란과 고난이 있 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1.질그릇과 인간의 육체 렘18:4절에 보면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 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슴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을 이야기 하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을은 질그릇 이야기를 꺼집어 냄으로서 지금까지의 사 도적 권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나약성과 인간됨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질그릇은 인간의 나약한 육체를 가리킵니다. 이 육체의 나약함은 곧 인간의 보잘것 없음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고(창2:7), 이 같은 흙과 질그릇으로 육체를 비유하는 것은 흙이 흔하고 별로 귀중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바로 그렇게 무 익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욥10:9절에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 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하였고, 욥33:6절에는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이렇게 질그릇이란 별로 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자신의 육체를 비유하면서 인간을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에 비유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아무리 물질과 명예와 권세로 당당하게 걸치고 뽐내보지만 역 시 그 육체는 쉬이 피곤해지고 넘어지면 깨어지고 다치며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덧없어지고 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2.질그릇에 담긴 보배. 그렇게 결국에는 보잘것 없는 질그릇 같은 육체가 무었때문에 귀하에 되 느냐 하면 그 속에 담겨진 보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믿지아니 하는 불신 자들이보기에는 보잘것 없을지 모르나 사실은 감추어진 보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벧전2:7절에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하였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보잘것 없지만 이 속에 담겨진 것은 바로 보배입니다. 다 시말해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통틀어서 영광스럽게 바꾸어 놓고야 마는 복음이 우리 질그릇 같은 육체 속에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이 보배였습니다. 이 것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였던 것입니다. 이 복음과 그 사명을 위해서는 자신의 가문의 명예와 많은 학식과 과거의 꿈과 포부를 다 포기 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보화인 복음을 담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에 그의 나머지의 전 생 애를 걸었습니다. 주님께 날마다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딤후2:21절에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구별됨)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여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도록"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거룩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더러운 죄로서는 복음을 담고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으로 정결함을 얻어 복음으로 말미암아 쓰임받고 살아갈 성도는 죄와 부정한 행위에서 자신을 거룩하고 구별되게 지켜야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쓰임받는 그릇은 여러가지 입니다. 혹은 사도로서 혹은 목사로서 혹은 장로로서 집사로서 권서로서 구역장으로서 권찰로서 교사로서 혹은 평신도로서 등등의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직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직분을 따라서 제대로 쓰임을 받느냐 하는 문제 입니다. 쓰임 받으려면 자신을 정결케하여 구별된 삶을 살므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3.승리케 되는 질그릇 본문 8-9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 니하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며"하였습니다. 어찌하여서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 속소에 보 배되신 예수와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환란과 고난이 엄습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 속에 있는 보배로 말미암아 능히 이길 수 있는 믿음과 인내와 희생을 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있는 이 보배는 결코 망하지 않고 꺼꾸러뜨림을 당하지 않을 것 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절망하지 않고 어려움 중에서도 기뻐하며 고난을 감 당하고 괴로움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 말씀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것과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함께 부활의 영광에도 동참할 것이라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핍박을 피하고 무서워하기 보다 오히려 정면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랬듯이 고난 없이 영광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결론' 우리 속에 담긴 이 보배 예수는 우리의 힘이요, 소망이요, 능력이요, 인 내입니다. 이같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입니다. 왜냐면 신앙 생활이란 꽃피고 새 지저기는 어느 포근한 봄날같은 분위기라기 보다 여름날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폭풍우와 같은 환 란과 겨울날의 살을 에이는 듯한 고통과 어려움이 대부분의 코오스라고 할 수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고난과 아픔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길이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피난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운명적으로 침통하고 비장한 마음을 가 진다고 잘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절망과 환란과 시련중에서도 감사 찬송의 기쁨으로 이 길을 가는 것 만이 참된 자세입니다. 이것은 오직 보배가 어디에 담겨져 있는가를 확인 하고 살아갈 때에라야만 가능해 지는 승리인 것입니다. 어떠한 악조건에서라도 승리할 수 있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질그릇과 인간의 육체 렘18:4절에 보면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 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슴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을 이야기 하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을은 질그릇 이야기를 꺼집어 냄으로서 지금까지의 사 도적 권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나약성과 인간됨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질그릇은 인간의 나약한 육체를 가리킵니다. 이 육체의 나약함은 곧 인간의 보잘것 없음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고(창2:7), 이 같은 흙과 질그릇으로 육체를 비유하는 것은 흙이 흔하고 별로 귀중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바로 그렇게 무 익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욥10:9절에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 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하였고, 욥33:6절에는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이렇게 질그릇이란 별로 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자신의 육체를 비유하면서 인간을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에 비유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아무리 물질과 명예와 권세로 당당하게 걸치고 뽐내보지만 역 시 그 육체는 쉬이 피곤해지고 넘어지면 깨어지고 다치며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덧없어지고 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2.질그릇에 담긴 보배. 그렇게 결국에는 보잘것 없는 질그릇 같은 육체가 무었때문에 귀하에 되 느냐 하면 그 속에 담겨진 보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믿지아니 하는 불신 자들이보기에는 보잘것 없을지 모르나 사실은 감추어진 보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벧전2:7절에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하였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보잘것 없지만 이 속에 담겨진 것은 바로 보배입니다. 다 시말해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통틀어서 영광스럽게 바꾸어 놓고야 마는 복음이 우리 질그릇 같은 육체 속에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이 보배였습니다. 이 것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였던 것입니다. 이 복음과 그 사명을 위해서는 자신의 가문의 명예와 많은 학식과 과거의 꿈과 포부를 다 포기 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보화인 복음을 담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에 그의 나머지의 전 생 애를 걸었습니다. 주님께 날마다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딤후2:21절에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구별됨)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여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도록"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거룩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더러운 죄로서는 복음을 담고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으로 정결함을 얻어 복음으로 말미암아 쓰임받고 살아갈 성도는 죄와 부정한 행위에서 자신을 거룩하고 구별되게 지켜야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쓰임받는 그릇은 여러가지 입니다. 혹은 사도로서 혹은 목사로서 혹은 장로로서 집사로서 권서로서 구역장으로서 권찰로서 교사로서 혹은 평신도로서 등등의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직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직분을 따라서 제대로 쓰임을 받느냐 하는 문제 입니다. 쓰임 받으려면 자신을 정결케하여 구별된 삶을 살므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3.승리케 되는 질그릇 본문 8-9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 니하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며"하였습니다. 어찌하여서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 속소에 보 배되신 예수와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환란과 고난이 엄습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 속에 있는 보배로 말미암아 능히 이길 수 있는 믿음과 인내와 희생을 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있는 이 보배는 결코 망하지 않고 꺼꾸러뜨림을 당하지 않을 것 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절망하지 않고 어려움 중에서도 기뻐하며 고난을 감 당하고 괴로움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 말씀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것과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함께 부활의 영광에도 동참할 것이라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핍박을 피하고 무서워하기 보다 오히려 정면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랬듯이 고난 없이 영광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결론' 우리 속에 담긴 이 보배 예수는 우리의 힘이요, 소망이요, 능력이요, 인 내입니다. 이같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입니다. 왜냐면 신앙 생활이란 꽃피고 새 지저기는 어느 포근한 봄날같은 분위기라기 보다 여름날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폭풍우와 같은 환 란과 겨울날의 살을 에이는 듯한 고통과 어려움이 대부분의 코오스라고 할 수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고난과 아픔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길이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피난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운명적으로 침통하고 비장한 마음을 가 진다고 잘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절망과 환란과 시련중에서도 감사 찬송의 기쁨으로 이 길을 가는 것 만이 참된 자세입니다. 이것은 오직 보배가 어디에 담겨져 있는가를 확인 하고 살아갈 때에라야만 가능해 지는 승리인 것입니다. 어떠한 악조건에서라도 승리할 수 있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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