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신앙 (고전15:1-34)
본문
여러분! 부활 신앙의 중요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교리는 지식으로 아는 데만 그쳐서는 안되고 진실되게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진정 자신이 죽은 후에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의 몸이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감격하며 그러한 부활 신앙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성도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바른 부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신앙 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 생활을 뜨겁게 하던 앞서 간 성도들은 다 이 부활 신앙을 바로 가졌기 때문에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열심과 충성과 기쁨과 담대가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사건과 부활의 사건이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이런 질문은 쓸 데 없는 질문 같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대속을 이루는 죽으심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사죄와 칭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해도,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부활이 없었다고 하면 영생이 없었을 것이요, 우리의 대속도 완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부활 사건은 십자가 사건 같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교는 죽은 종교로서, 여전히 사망선 이하에 있는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이루신 대속이 예수님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빈 무덤 종교입니다.모든 종교가 다 죽음의 선을 넘지 못하고 그들의 교주의 무덤이 있습니다.그들은 죽은 종교인 것을 증거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무덤이 없는 것은 생명의 기독교 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 신앙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먼저 알 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다음에는 제자들에게 보이셨고, 승천하시기 전,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 많은 도마도 후에는 믿게 되었고, 십자가 지실 때에 도망 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보다 더 부활의 확실한 증거는 그 때 성도들이 예수 부활을 증거하고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거짓을 증거하고, 따라 갈 수는 있습니다. 얼마든지 꾀우고, 거짓을 위해 열심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숨까지 거짓을 위해서 내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예수 부활의 진실성을 증거했습니다. 기독교에 예수 부활의 증거가 이렇게 중요합니까 그리스도의 부활하셨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은,
1.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구주가 되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죄와 사망과 싸우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에 약하셔서 그것들에게 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완전 순종을 이루신 주님을, 대속을 다 이루신 주님을 성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부활로 사망, 죄악, 마귀, 세상을 다 이기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 승리가 우리를 위함입니다. 승리하심으로 예수님의 대속이 완성이 된 것을 우리에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명되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 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이 있음을 보이시고, 죽음 너머 영원한 내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인생은 영원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로서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인생에게는 한 번 죽는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너머 다시 사는 부활이 있고,그 다음에 영원한 내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인생은 영원불멸의 존재입니다. 내세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믿고 죽은 자에게는 영원한 하늘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믿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영원한 지옥에 던지시기 위해서 부활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이 신실하신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3. 우리들을 부활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앞선 성도들이나 사도 바울도 그렇게 자랑하던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릴 수 있음도,그 많은 박해를 견디면서 이 복음을 전한 것도 이 부활 신앙을 바로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려 한다 했습니다. 죽음이 그들을 해할 수 없었음은 그들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로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의 소망을 내세에 두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것들을 두려워하지도,부러워서 탐을 내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서도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는 넘어지지 않습니다.그래서 이 소망은 영원한 투구라고 했습니다.어떤 사지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이 세상의 어떤 것에 미혹을 받아 살지 않습니다. 세상의 죄와 타협하지 않고 죄와 싸워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합니다.예수님의 승리를 힘입어서 이기는 생활을 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생활을 무시하거나 현세 도피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삶이 허무로 돌아 가는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의 삶이 영원의 준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허비 낭비하지 않고,선용해서 구원을 바로 이루어 나가게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 가운데도 이 부활신앙에 확실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이 부활을 확실히 믿지 못하는 두 마음을 가진 의심하는 사람이 있고, 아직 믿지 않는 부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이 교회 밖 세상에 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아직 그 사람은 온전한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두개인들이 그러했고,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이 사람은 보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사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과학, 물질을 더 의지하고,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이 사람은 보이는 세상의 생활에 만족을 하려합니다. 내세를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는 삶이 그들의 철학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오히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을 어리석다고 조롱합니다. 이 사람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2.또 어떤 사람은 확실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도 하지 못하겠고, 확실히 있다고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제 눈으로 본 것만 믿겠고, 제가 만져 본 것만 믿겠다는 야무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적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많은 제자들이 증거를 했고, 십자가 전에 예수님께서도 부활을 말씀하였으나, 더디 믿는 자입니다.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히 믿지 못했을 때에 성경을 더디 믿는 자라고 책망했습니다. 자기의 주관에서 세상의 합리적인 생각에서 머물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을 이해하려고 하니 이해 안되어 못믿습니다.
3.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 자라고 하면 없는 가운데서 창조도 하셨는데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는 능력이 하나님께 없겠습니까 하고 확실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있다고 하시면 있는 것으로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의 부활도 약속된 것으로 믿는 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인 기적,이것들을 좁은 세상 지식으로 과학으로 따져서 맞다고 여겨지면 그때야 믿는 사람은 항상 확신하는 믿음으로 나가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의 좁은 지식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전능자신 것을 믿는다면, 그 다음에 그 능력이 나타난 것은 다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의 부활을 어떻게 믿습니까 믿는 자의 부활이 있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부활이 있음을 증거하시고,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그 후에는 부활이 있다고 하셨으니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부활에 대한 확신한 신앙이 있는가,없는가 하는 것으로 내가 믿음에 있는가 없는가 시험해 볼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믿는 것 같으나,환난이 오고 핍박이 오고,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질 때에는 불안하고 두렵게 되고,어떤 사람은 신앙의 걸음을 포기하고 맙니다. 이런 사람은 부활을 의심하는 믿음입니다. 내세를 믿지 못하는 거짓 믿음입니다. 내세를 믿고, 부활을 믿는 사람은 땅에 있는 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사망 이하의 것 때문에 울고 웃고 하지 않습니다. 내일이 있는 자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세의 소망을 가진 믿는 가정에 장례가 나면 오히려 소망이 있고 기쁨이 넘쳐야 하는데, 그 가족이 주 안에서 죽은 자로 인하여 슬픔과 낙망과 절망에 있다면 아직 확실한 부활의 신앙, 내세의 신앙을 가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자가 예수 믿고 천국 간 사람이라면 남아 있는 자들이 부활,내세,구원을 받은 것을 믿을 때에는 기뻐해야 합니다. 윤리와 덕을 위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표현을 못하나, 중심에는 넘치는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 부활 신앙을 확고히 가져야 합니다.이 부활 신앙은 다른 말로 내세 신앙입니다. 부활을 못 믿으면서 내세는 있다고 믿는다는 말은 모순입니다. 내세가 있는 것을 믿는다면서 부활을 못 믿는다면 이 사람 말도 거짓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의 걸음이 바른 교리의 기초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성도에게 세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1.그 첫째가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세가 되면 속이는 자는 더욱 속이는 때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남을 속여서도 안되지만 또 남에게 속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누가 속입니까 악한 동무가 나를 속여서 선한 행실을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악한 동무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사는 것, 세상 위주로 사는 자가 바로 악한 사람입니다. 마귀의 사람입니다. 꾀우는 영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인데, 세상 소망 뿐이요, 자기 육신을 위한 삶 뿐입니다. 이 사람이 우리를 미혹케 합니다. 이 악한 동무가 우리에게 원수인데, 이 원수는 교회 밖에 있기도 하지만, 교회 안에도 이런 악한 동무가 있다는 말씀이고, 또 이 원수가 내 몸 밖에 있을 뿐 아니라, 내 몸 안에 이 원수가 있어서 나를 미혹케 합니다. 자기 안의 이 옛 사람은 이 세상만 보게 하고, 자기만 보게 하고, 자기의 육신 중심으로 살게 합니다. 이래서 자기의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방종과 방탕으로 사람을 파멸시킵니다. 선한 행실은 부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 위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세를 바라보면서 살고, 경건과 거룩을 이루는 생활인데, 악한 친구가 이것을 더렵혀서 이 생활을 못하도록 합니다. 이 원수를 발견해야 하는데 “이 원수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내 안과 밖에 가득합니다. 속지 맙시다.
2.두번째
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자는 것은-이 세상의 음녀의 포도주에 취하여 먹고 마시는 술 취한 생활, 영적으로 신앙에 잠든 생활, 중생하여 살았으나,성화면에는 죽은 자로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가 깨어야 합니다. 이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가 두번째
로 할 일은 이 세속에 취하지 말고, 신앙의 잠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이 정신 없이 환각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 같이 이 세상의 문화,취미,즐거움에 정신 잃은 생활을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 언제까지 안일과 나태의 신앙의 잠을 자지 말고, 이제 깨어서 성도의 할 일인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옛 사람으로 살 자가 아닙니다. 우리 옛 사람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함께 못을 박은 자요,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에 함께 살아난 새 사람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
셋째로는 네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잠깐 당하는 고난의 경한 것과 영원 무궁의 세계에서의 영광의 중하고 큰 것을 비교하고 삽니다. 이 세상에서 당하는 잠간의 고난이 영원한 내세에서의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것을 알기 때문에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고난을 자취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참으로 복음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당하는 성도의 고난입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수가 없고, 오히려 맹수에게 찢기는 고난을 당해도 부활이 있기에, 내세가 있기에 담대하며,기쁨으로 이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부활의 신앙을 가졌기에 이삭을 바치라 하실 때에 아낌없이 단 마음으로 바치려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준비된 영원한 세계가 있기에 오늘에 우리의 진력하는 수고도 헛되지 않고, 복음 전한것도 헛되지 않고, 믿음의 싸움도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사는 殉生과 주를 위해 죽는 殉敎의 걸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신앙을 확고히 합시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내세가 있습니다. 내세가 없는 소망 없는 자 같이 말고,소망 있는 자로 살아 갑시다. 속지 맙시다.악한 동무를 조심해야 합니다. 깨어 삽시다.깨어 복음에 합당하게 의를 행하고, 옛사람의 행위를 버립시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읍시다.이를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 신앙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먼저 알 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다음에는 제자들에게 보이셨고, 승천하시기 전,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 많은 도마도 후에는 믿게 되었고, 십자가 지실 때에 도망 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보다 더 부활의 확실한 증거는 그 때 성도들이 예수 부활을 증거하고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거짓을 증거하고, 따라 갈 수는 있습니다. 얼마든지 꾀우고, 거짓을 위해 열심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숨까지 거짓을 위해서 내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예수 부활의 진실성을 증거했습니다. 기독교에 예수 부활의 증거가 이렇게 중요합니까 그리스도의 부활하셨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은,
1.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구주가 되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죄와 사망과 싸우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에 약하셔서 그것들에게 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완전 순종을 이루신 주님을, 대속을 다 이루신 주님을 성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부활로 사망, 죄악, 마귀, 세상을 다 이기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 승리가 우리를 위함입니다. 승리하심으로 예수님의 대속이 완성이 된 것을 우리에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명되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 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이 있음을 보이시고, 죽음 너머 영원한 내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인생은 영원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로서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인생에게는 한 번 죽는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너머 다시 사는 부활이 있고,그 다음에 영원한 내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인생은 영원불멸의 존재입니다. 내세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믿고 죽은 자에게는 영원한 하늘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믿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영원한 지옥에 던지시기 위해서 부활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이 신실하신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3. 우리들을 부활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앞선 성도들이나 사도 바울도 그렇게 자랑하던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릴 수 있음도,그 많은 박해를 견디면서 이 복음을 전한 것도 이 부활 신앙을 바로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려 한다 했습니다. 죽음이 그들을 해할 수 없었음은 그들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로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의 소망을 내세에 두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것들을 두려워하지도,부러워서 탐을 내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서도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는 넘어지지 않습니다.그래서 이 소망은 영원한 투구라고 했습니다.어떤 사지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이 세상의 어떤 것에 미혹을 받아 살지 않습니다. 세상의 죄와 타협하지 않고 죄와 싸워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합니다.예수님의 승리를 힘입어서 이기는 생활을 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생활을 무시하거나 현세 도피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삶이 허무로 돌아 가는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의 삶이 영원의 준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허비 낭비하지 않고,선용해서 구원을 바로 이루어 나가게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 가운데도 이 부활신앙에 확실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이 부활을 확실히 믿지 못하는 두 마음을 가진 의심하는 사람이 있고, 아직 믿지 않는 부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이 교회 밖 세상에 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아직 그 사람은 온전한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두개인들이 그러했고,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이 사람은 보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사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과학, 물질을 더 의지하고,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이 사람은 보이는 세상의 생활에 만족을 하려합니다. 내세를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는 삶이 그들의 철학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오히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을 어리석다고 조롱합니다. 이 사람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2.또 어떤 사람은 확실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도 하지 못하겠고, 확실히 있다고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제 눈으로 본 것만 믿겠고, 제가 만져 본 것만 믿겠다는 야무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적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많은 제자들이 증거를 했고, 십자가 전에 예수님께서도 부활을 말씀하였으나, 더디 믿는 자입니다.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히 믿지 못했을 때에 성경을 더디 믿는 자라고 책망했습니다. 자기의 주관에서 세상의 합리적인 생각에서 머물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을 이해하려고 하니 이해 안되어 못믿습니다.
3.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 자라고 하면 없는 가운데서 창조도 하셨는데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는 능력이 하나님께 없겠습니까 하고 확실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있다고 하시면 있는 것으로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의 부활도 약속된 것으로 믿는 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인 기적,이것들을 좁은 세상 지식으로 과학으로 따져서 맞다고 여겨지면 그때야 믿는 사람은 항상 확신하는 믿음으로 나가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의 좁은 지식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전능자신 것을 믿는다면, 그 다음에 그 능력이 나타난 것은 다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의 부활을 어떻게 믿습니까 믿는 자의 부활이 있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부활이 있음을 증거하시고,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그 후에는 부활이 있다고 하셨으니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부활에 대한 확신한 신앙이 있는가,없는가 하는 것으로 내가 믿음에 있는가 없는가 시험해 볼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믿는 것 같으나,환난이 오고 핍박이 오고,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질 때에는 불안하고 두렵게 되고,어떤 사람은 신앙의 걸음을 포기하고 맙니다. 이런 사람은 부활을 의심하는 믿음입니다. 내세를 믿지 못하는 거짓 믿음입니다. 내세를 믿고, 부활을 믿는 사람은 땅에 있는 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사망 이하의 것 때문에 울고 웃고 하지 않습니다. 내일이 있는 자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세의 소망을 가진 믿는 가정에 장례가 나면 오히려 소망이 있고 기쁨이 넘쳐야 하는데, 그 가족이 주 안에서 죽은 자로 인하여 슬픔과 낙망과 절망에 있다면 아직 확실한 부활의 신앙, 내세의 신앙을 가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자가 예수 믿고 천국 간 사람이라면 남아 있는 자들이 부활,내세,구원을 받은 것을 믿을 때에는 기뻐해야 합니다. 윤리와 덕을 위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표현을 못하나, 중심에는 넘치는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 부활 신앙을 확고히 가져야 합니다.이 부활 신앙은 다른 말로 내세 신앙입니다. 부활을 못 믿으면서 내세는 있다고 믿는다는 말은 모순입니다. 내세가 있는 것을 믿는다면서 부활을 못 믿는다면 이 사람 말도 거짓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의 걸음이 바른 교리의 기초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성도에게 세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1.그 첫째가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세가 되면 속이는 자는 더욱 속이는 때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남을 속여서도 안되지만 또 남에게 속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누가 속입니까 악한 동무가 나를 속여서 선한 행실을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악한 동무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사는 것, 세상 위주로 사는 자가 바로 악한 사람입니다. 마귀의 사람입니다. 꾀우는 영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인데, 세상 소망 뿐이요, 자기 육신을 위한 삶 뿐입니다. 이 사람이 우리를 미혹케 합니다. 이 악한 동무가 우리에게 원수인데, 이 원수는 교회 밖에 있기도 하지만, 교회 안에도 이런 악한 동무가 있다는 말씀이고, 또 이 원수가 내 몸 밖에 있을 뿐 아니라, 내 몸 안에 이 원수가 있어서 나를 미혹케 합니다. 자기 안의 이 옛 사람은 이 세상만 보게 하고, 자기만 보게 하고, 자기의 육신 중심으로 살게 합니다. 이래서 자기의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방종과 방탕으로 사람을 파멸시킵니다. 선한 행실은 부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 위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세를 바라보면서 살고, 경건과 거룩을 이루는 생활인데, 악한 친구가 이것을 더렵혀서 이 생활을 못하도록 합니다. 이 원수를 발견해야 하는데 “이 원수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내 안과 밖에 가득합니다. 속지 맙시다.
2.두번째
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자는 것은-이 세상의 음녀의 포도주에 취하여 먹고 마시는 술 취한 생활, 영적으로 신앙에 잠든 생활, 중생하여 살았으나,성화면에는 죽은 자로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가 깨어야 합니다. 이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가 두번째
로 할 일은 이 세속에 취하지 말고, 신앙의 잠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이 정신 없이 환각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 같이 이 세상의 문화,취미,즐거움에 정신 잃은 생활을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 언제까지 안일과 나태의 신앙의 잠을 자지 말고, 이제 깨어서 성도의 할 일인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옛 사람으로 살 자가 아닙니다. 우리 옛 사람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함께 못을 박은 자요,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에 함께 살아난 새 사람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
셋째로는 네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잠깐 당하는 고난의 경한 것과 영원 무궁의 세계에서의 영광의 중하고 큰 것을 비교하고 삽니다. 이 세상에서 당하는 잠간의 고난이 영원한 내세에서의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것을 알기 때문에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고난을 자취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참으로 복음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당하는 성도의 고난입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수가 없고, 오히려 맹수에게 찢기는 고난을 당해도 부활이 있기에, 내세가 있기에 담대하며,기쁨으로 이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부활의 신앙을 가졌기에 이삭을 바치라 하실 때에 아낌없이 단 마음으로 바치려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준비된 영원한 세계가 있기에 오늘에 우리의 진력하는 수고도 헛되지 않고, 복음 전한것도 헛되지 않고, 믿음의 싸움도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사는 殉生과 주를 위해 죽는 殉敎의 걸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신앙을 확고히 합시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내세가 있습니다. 내세가 없는 소망 없는 자 같이 말고,소망 있는 자로 살아 갑시다. 속지 맙시다.악한 동무를 조심해야 합니다. 깨어 삽시다.깨어 복음에 합당하게 의를 행하고, 옛사람의 행위를 버립시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읍시다.이를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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