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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굼 (막5:35-43)

본문

성경에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 이야기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 2=절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동네에 살고 있던 어느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그 아이를 살렸고, 열왕기하 4장 S1절을 보면 수 동네에 살고 있던 어느 여인의 아들이 죽은 것 돌 엘리사 선지자가 살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행전 9장 4o절을 보면 베드로도 죽은 사람을 살렸고. 사도행전 20장 9-12절을 보면 바울도 죽은 사람을 살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주님 자신도 여러 차례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누 가복음 7장11-17절을 보면 나인성에 살고 있던 어느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장례를 치루기 위해 장지로 가는 도중에서 그를 살리셨고 요한 복음
11장올 보면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열두 살된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은 기독교가 절망과 죽음을 지향하는 종교가 아니라 희망과 생명을 지향하는 종교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란 절망과 비애와 죽음을 바라보는 종교가 아니 라 희망과 기쁨과 영원과 생명을 바라보고 얻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방종교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큼 확실하게 사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과 영원한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유대인들이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드리는 회당 의 관리 책임자인 열두 살난 딸이 증병으로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와 발 아래 드리어 간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문제를 주님께 알리면서 겸손하게 무 릎을 었던 젓입니다, 2S절에서 그는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라고 간청 했습니다. 열두 살난 어린 소녀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비극 증에 비극입니다. 그 소녀가 고 있던 병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관해선 언급이 없읍니다만 그러나 고칠 수 없는 병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최후로 죽어가는 어린 딸의 가쁜 숨소리를 차마 듣 지 못하고 예수님에게로 쫓아 왔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착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약먹고 운동하 고 정기적으로 건강진단하고 병원다니고 유능한 주치의만 있으면 건 강문제는 걱정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건강과 죽고 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할 일은 다 해야 합니다. 적당한 섭생과 예방과 관리는 사람이 해야 하는 책임입니다. 덮어놓고 하나님이 다 알아서 건강을 주신다는 맹신으로 무리를 한다든지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 인간의 육체는 상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문의 과(칼)라는 글자의 의미는 매우 깊습니다. 과 로. 과음, 과욕. 과속, 과식, 과민등 모두가 좋은 것들이 못됩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조급중에서 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둘러서 어떤 문제를 해치우려고 한다든지 분수에 맞지 않게 욕심 을 부리는 것은 모두가 정신건강과 육체건강을 해치는 결정적인 원인 이 되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죽어가는 딸을 살려 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딸이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예수를 붙잡고 사정할 필요도 없어졌고 귀찮 게 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고 슬픈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말했읍니다. 열두 살 소녀의 죽음을 놓고 행동하신 예수님의 처신을 살펴보 겠습니다.
1. 슬픔의 현장으로 가셨습니다. 36-37절을 보면 소녀가 죽었다는 말올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두려 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신 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 리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본문 25-34절을 보면 회당장의 딸 이 죽어가고 있다는 급보를 들으신 주님께서 그 집으로 직행하지 않 으시고 가는 도중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 있던 여자를 고쳐 주셨 습니다. 그러니까 직행하지 않고 길에서 지체하는 동안 소녀가 죽고 만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갔어야 하는 건데 죽은 다음에 갔으니 까 패를 놓친 셈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슬픔과 죽음의 현장으로 가셨습니다. 가시면서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옵니다. 이 점이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고통과 절망과 슬픔과 죽음의 현장으로 부터 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기쁨이 있고 행복 이 있고 소망이 있는 곳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 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슬픔과 절망의 현장만을 찾아 가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 자체가 절망과 좌절의 역사 속에 찾아오신 사건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는 자들 곁에계셨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합께 계셨고 병든 자들과 함께 계셨고 고 통받는 사람들 속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참 좋은 나의 친구가 되시는 것입니다. 프 사람들을 다 내 보냈습니다. 38-을 보면 주님께서 그 집에 도착하셨을 때 그 집은 온통 슬픔 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함께 울어 주고 피리를 블어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돈을 주고 우는 사람들과 피리 부는 사람을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그 집은 가족들의 통곡소리, 피리소 리. 고용된 여자들의 울음소리로 소란스러웠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다 내 보냈습니다. 이유는 운다고 죽은 소녀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피리를 분다고 해서 열두 살난 딸을 잃은 슬픔이 가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경가 벵겔은 슬픔당한 그 집의 참 주인은 예수였기 때문에 그들 을 내보다'고 했습니다. 물론 위로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함께 울어 주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슬픔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사t람들은 아닙니다. 문제가 크면 클수록 슬픔이 크면 끌수록 행복이 크면 클수록 주님 이 계셔야 합니다. 주님은 슬플 때만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행복할 째도 필요한 분입니다. 주님이 계셔야 내가 누리는 행복도 지켜 주시 고 슬픔도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2.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이란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그건 마치 잠자는 딸을 아침에 깨우며 부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잠자는 딸을 흔들어 깨 우며 그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는 죽은 시체의 손을 잡았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시체를 함부로 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통념 을 깨뜨리고 시체의 손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한 생명을 살리시려는 주님의 사랑의 극치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는 실체. 그 누구도 잡아 주지 않는 그 절망의 손을 주님은 잡아 주 신 것입니다.
둘째는 '달리다굼'이라는 한마디에 죽은 소녀가 살아났다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부황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나는 부이요 생명이] 나 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 부활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생명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교우 한 분이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읍니다. 주치의의 말이 환자의 특수성 때문에 혈액은행에 보관되어 있는 이 계석야 합니다. 주님은 슬플 때만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행복할 때도 필요한 분입니다. 주님이 계셔야 내가 누리는 행복도 지켜 주시 고 슬쯤도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3.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이란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그건 마치 잠자는 딸을 아침에 깨우며 부르는 것과도 강습니다. 잠자는 딸을 흔들어 깨 우며 그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는 죽은 시체의 손을 잡았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시체를 함부로 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통념 을 깨뜨리고 시체의 손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한 생명을 살리시려는 주님의 사랑의 극치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는 실체, 그 누구도 잡아 주지 않는 그 절망의 손을 주님은 잡아 주 신 것입니다.
둘째는 달리다굼'이라는 한마디에 죽은 소녀가 살아났다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부활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 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 부활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생명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교우 한 분이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읍니다. 주치의의 말이 환자의 특수성 때문에 혈액은행에 보관되어 있는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이며 생명입니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 인칸이 금수와 다르다는 것은 영흔이 있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영흔이 죽어가고 있 거나 죽어 버린다면 눈에 보이는 것들은 아무 가치도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영혼이 달리다굼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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