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방법을 택하신 하나님 (고전1:18-31)
본문
지난 한해 세계적으로 WTO의 강풍이 있었습니다만 그 기구가 미국과 EU만 이득보는 거라고 말이 많습니다. 잘난 대국에서 패를 좋게 만들어 놓고 쌍피만 든 제3세계에다 대고 이제부터 정확하게 계산하자 이겁니다. 국내에서는 어떠습니까 국내에서는 몇몇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미꾸라지가 되어 흐려놓은 물의 여파로 고생한 한 해가 아니었씁니까 그게 다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유물이 아니고 5공 6공때 잘난 놈들이 판치던 때 배운 졸개들의 여파입니다. 역사는 엘리뜨들이 이끌어간다고 하지만 그 엘리뜨의식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엘리뜨들이 난리치고 간 자리를 뒤치닥거리하는 사람들이 민중이고 잘못돼도 덮어주는 것이 민중입니다. 민중이 어리석은 것 같아도 민중이 있기에 그들이 잘난 척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옆에 목회비만 1천 500만을 뿌리는 교회가 있는데 작은 교회 전도사 누가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저 반말하기 다반사고 뻥치기 일쑤입니다. 교회가 자그만 하니까 말을 하는데 있어서도 신용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교회가 되지 않는다고 면전에 놓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 다 인간의 그 잘났다고 하는 지혜에 의존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어리석은 방법을 택하시고 약자를 들어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의 약자의식 본문에서 바울은 약자의식을 자랑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오고 있는 그 다음세대를 통해 세계와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라고 권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기의 지혜로 보기에는 가장 어리석은 방법같더라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법한 것이 사회적 정황으로 봐서 그렇게 복음을 전할 만한 한가한 시대가 아니었고 조직도 기구도 제도도 모든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 방법만이 하나님의 선교, 인류구원, 사회구원에 있어 유일한 방법으로 보이더라는 말이지요.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세도있는 자들 편에 붙었었고 강한 것이 무언가 사회를 바꾸고 인간에게 희망을 줄 것 같았는데 예수 만나고 부터는 그들이 얼마나 불의하고 썩었는가를 알게 되고 모든 것이 인간의 가능성 안에 놓여 있다고 하는 인간낙관주의가 얼마나 미련한 생각인가를 깨달았다는 이야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미련한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권세도 없습니다. 다만 한사람 한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회구조를 창조하기 위하여 줄기차고 용기있게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엘리뜨를 쓰지 않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계획과 방법을 구사하셨습니다.
첫째,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여 지혜있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으며,
둘째,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여 강하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으며, 세째, 이 세상의 천한 사람들, 멸시받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있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미련한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죄도 없는데 미련하게 죽은 횡사였다고 생각했겠지요.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미련한 것입니다. 과학을 믿을 수 없다면 기술을 믿고 기술을 믿을 수 없다면 자기의 경험을 믿지 하필이면 먼 옛날 사람의 하나인 예수 를 믿다니요. 어리석게 생각하겠지요. 예수가 뭐 4차원 세계로 가는 열려라 참깨입니까 예수를 부르짖게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여러분이나 나도 미련한 사람들이지요. 예수는 근원이요, 생명의 이름이요, 진정한 자기인 것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바울은 하나님의 어리석은 결정이지만 자기를 택한 목적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에게는 지혜를 찾았으나 바울은 그들의 결과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이 신앙을 줄 수 없으며, 자기에게 얻어진 지식이 신앙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에게 있어 신앙은 엉뚱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만이 강하고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도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 이사야의 약자의식 이사야는 구약에서 약자의식이 가장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인들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말라. (사 41:14) 지렁이라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라고 했습니다.(사 42:3) 보잘것 없다는 이야기지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이 간사하기나 하고 파란 만장한 고난의 삶을 살았지 않나요 예수 믿고 보람있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약하고 힘을 없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인간적인 지혜로 보기에는 도저히 가망성이 없는 이스라엘인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거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사43:1) 부르셨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사람의 지혜를 뛰어 넘으시더라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루었다고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지진 맥진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들어 쓰셨습니다. 교회는 인간구원을 위한 전초기지, 사회구원을 위한 영원한 등대인데 심자가 군병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나라, 이 사회가 진리와 정의가 최후 승리가 되도록 하는데 자신을 바쳐 십자가의 부담을 걸머질 수 있는 나라, 고난을 겪고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을 성숙한 나라, 하나님은 그런 나라를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이집트와 앗수르,바빌론의 전쟁에 쌍피터진 나라지요. 청일전쟁,노일전쟁에 쌍피터진 우리나라 아닌가요 지렁이와 같이 칠전팔기하는 나라 아닌가요 하나님은 이런 미련한 나라를 택하신다는 말입니다. 지금 경제성장율 세계 2위가 되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기독교 강국이 된 나라, 하나님은 약한 족속을 들어서 강한 나라를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너무 돈이 많아 레저하기 바빠 예배를 10분만에 드리고 성전을 아파트나 화실로 쓰는 나라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강한 하나님의 방법 지금 성령님의 촛대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그리고 신대륙에서 다시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돌아와 있습니다. 지금 성령님의 촛대는 한국에서 중국을 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될때 이 지구는 하나님의 다 이루심이 될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1세계 국가들은 정체되어 있는 반면, 아시아,남미,아프리카라고 하는 이른바 제3세계에서 급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나라들을 들어 쓰시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은 건물만 크게 지어 놓으면 교인들이 꾸역꾸역 모여 들었습니다. 있는 교인들이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살려고 하는 교인들이 많아서지요.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제 중심이 된 서울은 다시 분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이 땅에서 택함받은 교인들이 자기의 각 처소에서 작은 교회에서 영성을 발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권력자들에게만 의존하고 자기이익, 자기편의, 자기 향락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어디를 가서도 부끄럽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이적을 베풀던 성령님을 따라 양적으로 성장해온 교회가 치유의 성령님을 따라 질적으로 사회의 아픔을 걸머지고 나가는 교회로 탈바꿈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은 이제 약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함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영성으로 한 심령 새로운 인간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위해 치유의 영성으로 새롭게 독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Kahril Gibran)은 그의 시 인자 예수 에 등장하는 구레뇨 시몬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고 묻는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어찌 그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또 다시 질 수 있는가고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처음 십자가를 질 때엔 무겁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고통에 못이겨 쓰러지려던 순간 나를 뒤돌아 보신 예수께서 그 오른 손으로 나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신비하게도 그 손이 닿는 순간부터 자기 어깨에는 날개가 달린 것처럼 십자가가 무겁지도 않고 고통스럽게도 느껴지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앞으로 얼마든지 또 다시 그 십자가를 지겠노라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이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은 사실은 강한 사람이 남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확실히 더 힘겹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이 역사를 구원하시려는 예수 그리스도는 남을 위해 고통을 당하며 희생을 감수하며 사는 약한 사람인 우리들의 어깨에 그 손을 얹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남을 위해 선을 행한다는 것은 지혜있는 사람이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행하는 것 보다 확실히 더 어렵고 답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이 사회를 구원하시기를 위해 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남을 위해 살아보려는 미련한 우리들의 넘어지며 엎드러지는 몸을 일으켜 그 어깨를 어루만져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약합니다. 그리고 가난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방법을 택하시고 약한 자를 택한 하나님께서 1995년의 새 날의 주역이 되도록 힘주심을 믿습니다. 이 민족의 역사 위에도 함께하셔서 희년의 궁극적인 성취, 통일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아멘'
그런데 바울이 자기의 지혜로 보기에는 가장 어리석은 방법같더라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법한 것이 사회적 정황으로 봐서 그렇게 복음을 전할 만한 한가한 시대가 아니었고 조직도 기구도 제도도 모든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 방법만이 하나님의 선교, 인류구원, 사회구원에 있어 유일한 방법으로 보이더라는 말이지요.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세도있는 자들 편에 붙었었고 강한 것이 무언가 사회를 바꾸고 인간에게 희망을 줄 것 같았는데 예수 만나고 부터는 그들이 얼마나 불의하고 썩었는가를 알게 되고 모든 것이 인간의 가능성 안에 놓여 있다고 하는 인간낙관주의가 얼마나 미련한 생각인가를 깨달았다는 이야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미련한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권세도 없습니다. 다만 한사람 한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회구조를 창조하기 위하여 줄기차고 용기있게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엘리뜨를 쓰지 않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계획과 방법을 구사하셨습니다.
첫째,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여 지혜있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으며,
둘째,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여 강하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으며, 세째, 이 세상의 천한 사람들, 멸시받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있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미련한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죄도 없는데 미련하게 죽은 횡사였다고 생각했겠지요.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미련한 것입니다. 과학을 믿을 수 없다면 기술을 믿고 기술을 믿을 수 없다면 자기의 경험을 믿지 하필이면 먼 옛날 사람의 하나인 예수 를 믿다니요. 어리석게 생각하겠지요. 예수가 뭐 4차원 세계로 가는 열려라 참깨입니까 예수를 부르짖게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여러분이나 나도 미련한 사람들이지요. 예수는 근원이요, 생명의 이름이요, 진정한 자기인 것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바울은 하나님의 어리석은 결정이지만 자기를 택한 목적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에게는 지혜를 찾았으나 바울은 그들의 결과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이 신앙을 줄 수 없으며, 자기에게 얻어진 지식이 신앙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에게 있어 신앙은 엉뚱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만이 강하고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도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 이사야의 약자의식 이사야는 구약에서 약자의식이 가장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인들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말라. (사 41:14) 지렁이라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라고 했습니다.(사 42:3) 보잘것 없다는 이야기지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이 간사하기나 하고 파란 만장한 고난의 삶을 살았지 않나요 예수 믿고 보람있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약하고 힘을 없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인간적인 지혜로 보기에는 도저히 가망성이 없는 이스라엘인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거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사43:1) 부르셨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사람의 지혜를 뛰어 넘으시더라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루었다고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지진 맥진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들어 쓰셨습니다. 교회는 인간구원을 위한 전초기지, 사회구원을 위한 영원한 등대인데 심자가 군병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나라, 이 사회가 진리와 정의가 최후 승리가 되도록 하는데 자신을 바쳐 십자가의 부담을 걸머질 수 있는 나라, 고난을 겪고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을 성숙한 나라, 하나님은 그런 나라를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이집트와 앗수르,바빌론의 전쟁에 쌍피터진 나라지요. 청일전쟁,노일전쟁에 쌍피터진 우리나라 아닌가요 지렁이와 같이 칠전팔기하는 나라 아닌가요 하나님은 이런 미련한 나라를 택하신다는 말입니다. 지금 경제성장율 세계 2위가 되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기독교 강국이 된 나라, 하나님은 약한 족속을 들어서 강한 나라를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너무 돈이 많아 레저하기 바빠 예배를 10분만에 드리고 성전을 아파트나 화실로 쓰는 나라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강한 하나님의 방법 지금 성령님의 촛대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그리고 신대륙에서 다시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돌아와 있습니다. 지금 성령님의 촛대는 한국에서 중국을 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될때 이 지구는 하나님의 다 이루심이 될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1세계 국가들은 정체되어 있는 반면, 아시아,남미,아프리카라고 하는 이른바 제3세계에서 급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나라들을 들어 쓰시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은 건물만 크게 지어 놓으면 교인들이 꾸역꾸역 모여 들었습니다. 있는 교인들이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살려고 하는 교인들이 많아서지요.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제 중심이 된 서울은 다시 분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이 땅에서 택함받은 교인들이 자기의 각 처소에서 작은 교회에서 영성을 발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권력자들에게만 의존하고 자기이익, 자기편의, 자기 향락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어디를 가서도 부끄럽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이적을 베풀던 성령님을 따라 양적으로 성장해온 교회가 치유의 성령님을 따라 질적으로 사회의 아픔을 걸머지고 나가는 교회로 탈바꿈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은 이제 약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함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영성으로 한 심령 새로운 인간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위해 치유의 영성으로 새롭게 독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Kahril Gibran)은 그의 시 인자 예수 에 등장하는 구레뇨 시몬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고 묻는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어찌 그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또 다시 질 수 있는가고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처음 십자가를 질 때엔 무겁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고통에 못이겨 쓰러지려던 순간 나를 뒤돌아 보신 예수께서 그 오른 손으로 나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신비하게도 그 손이 닿는 순간부터 자기 어깨에는 날개가 달린 것처럼 십자가가 무겁지도 않고 고통스럽게도 느껴지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앞으로 얼마든지 또 다시 그 십자가를 지겠노라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이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은 사실은 강한 사람이 남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확실히 더 힘겹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이 역사를 구원하시려는 예수 그리스도는 남을 위해 고통을 당하며 희생을 감수하며 사는 약한 사람인 우리들의 어깨에 그 손을 얹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남을 위해 선을 행한다는 것은 지혜있는 사람이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행하는 것 보다 확실히 더 어렵고 답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이 사회를 구원하시기를 위해 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남을 위해 살아보려는 미련한 우리들의 넘어지며 엎드러지는 몸을 일으켜 그 어깨를 어루만져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약합니다. 그리고 가난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방법을 택하시고 약한 자를 택한 하나님께서 1995년의 새 날의 주역이 되도록 힘주심을 믿습니다. 이 민족의 역사 위에도 함께하셔서 희년의 궁극적인 성취, 통일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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