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터전인 그리스도 (고전1:17-25)
본문
우리 학생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고민이 생긴다. 때때로 마음을 걷잡을 수 없도록 방황하기도 한다. 산다는 것이 귀찮아지고 매일의 일상생활이 무의미해지고 보람을 못 느낀다. 그것은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의 눈이 열려지기 시작하기 때 문이다. 무조건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웃어른들의 교훈과 지도를 받 으면서 살다가 이제는 점차 그들 생활 속에 나타나는 모순들을 발견하 면서 반항하기 시작하는것이다. 따라서 부모들이 요구하는 물질, 며 예, 지식만이 인생의 최고 가치가 아님을 점차 의식하고 회의에 빠진다. 그리고 신체적, 정신적 급성장으로 인하여 여학생은 남학생,남학생은 여학생에대해 점차 관심을 가지는 이성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다. 호기 심으로 가득찬 마음은 때때로 우리를 번뇌케 한다. 내가 죽으면 어떻 게 될까 죽고 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번은 죽게 되는 인생이 무엇 때문에 애써 투쟁하면서 살 필요가 있을까 라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흔들고 있다. 이성 (理性), 異性, 죽음(死)등의 문제들이 우리의 삶의 터전을 흔들 리게 하고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가졌던 적극적이고 모험적인 생활자세가 점차 사라져 간다. 그것은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염세적인 모 습으로, 또하나는 낙천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열등의 식에 사로잡혀서 매사에 용기를 잃어 자살까지 기도하는가 하면, 될대 로 돼라!는 식으로 실컷 놀고 향락하는 경향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신문 사회면에 십대 청소년의 죽음을 보도한 두 기사가 함께 실 린 적이 있었다. 하나는 D여학교 학생이 부모님과 용돈 문제로 몇번씩 말다툼을 했는데 그날도 큰 충격을 받았던지, 연탄 화덕을 독방에 들 여 놓고 잡으로써 연탄까스로 중독 자살하였다. 이는 염세적인 생활자 세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또하나의 사건은 7명의 남.여학생들이 야영캠프를 갔다가 돌아오는 중,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세명의 여학생들이 익사한 것이다. 이들은 낙천적인 생활자세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모두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활자세가 결여된 것이다. 올바른 최고의 가치를 생활 속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혹은 죽음으로 혹은 향락으로 도피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생을 도피하려는 비 열하고 나약한 학생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파멸에 로 이끌어서는 안된다. 이런 도피하는 인간들을 찾으러 주님은 오셨다. 그 주님을, 그리스도 를 만난 자들은 변화되었다. 그가 삶의 반석이 되셔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설계하게 하시고, 집을 짓게 하셨다.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 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은 바로 반석 위 에 집을 짓는 자들이다. 도피하는 생에서 창조하는 교회는 세워진 것이다. 그리스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자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첫째,과거가 용서받는다. 소극적이고 퇴폐적인 생활을 했던 창녀들과 세리들을 모두 용서하셨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찾는 위대한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둘째, 현재를 위한 힘을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과 용기를 주신다. 도망치는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자세로 살도록 힘 주신다.
셋째, 장래에 대한 희망이 샘솟게 하신다. 죽음은 곧 종말이 아니라 보다 큰 영광을 위한 서곡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기쁘게 산다. 이성의 눈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생의 최고 가치로 믿고 받아 들이며, 이성 을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하는 비결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집을 잘 짓고 잘 짓게 된다. 돈,은,금,보석 그리고 세상 것 위에 세운 집은 마지막 모두 불타버리 지만,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인생을 집지은 자는 주님의 심판날에도 영원히 불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확실히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다. 고민하고 있는 나, 방황하고 있는 나, 흔들리고 있는 나를 바로 알 자. 더 이상 도피하는 생활자세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과거는 잊어 버리고 현재의 새힘을 얻어 값진 미래를 창조 하는 생활이 되자.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가 아니라 반석 위에 집짓는 자가 되자! 먼훗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불타버리는 공력이 아니라, 영원히 불타지 않는 공력을 남기는 값있는 삶을 살도록 하자.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터전으로 삼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가졌던 적극적이고 모험적인 생활자세가 점차 사라져 간다. 그것은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염세적인 모 습으로, 또하나는 낙천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열등의 식에 사로잡혀서 매사에 용기를 잃어 자살까지 기도하는가 하면, 될대 로 돼라!는 식으로 실컷 놀고 향락하는 경향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신문 사회면에 십대 청소년의 죽음을 보도한 두 기사가 함께 실 린 적이 있었다. 하나는 D여학교 학생이 부모님과 용돈 문제로 몇번씩 말다툼을 했는데 그날도 큰 충격을 받았던지, 연탄 화덕을 독방에 들 여 놓고 잡으로써 연탄까스로 중독 자살하였다. 이는 염세적인 생활자 세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또하나의 사건은 7명의 남.여학생들이 야영캠프를 갔다가 돌아오는 중,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세명의 여학생들이 익사한 것이다. 이들은 낙천적인 생활자세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모두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활자세가 결여된 것이다. 올바른 최고의 가치를 생활 속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혹은 죽음으로 혹은 향락으로 도피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생을 도피하려는 비 열하고 나약한 학생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파멸에 로 이끌어서는 안된다. 이런 도피하는 인간들을 찾으러 주님은 오셨다. 그 주님을, 그리스도 를 만난 자들은 변화되었다. 그가 삶의 반석이 되셔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설계하게 하시고, 집을 짓게 하셨다.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 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은 바로 반석 위 에 집을 짓는 자들이다. 도피하는 생에서 창조하는 교회는 세워진 것이다. 그리스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자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첫째,과거가 용서받는다. 소극적이고 퇴폐적인 생활을 했던 창녀들과 세리들을 모두 용서하셨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찾는 위대한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둘째, 현재를 위한 힘을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과 용기를 주신다. 도망치는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자세로 살도록 힘 주신다.
셋째, 장래에 대한 희망이 샘솟게 하신다. 죽음은 곧 종말이 아니라 보다 큰 영광을 위한 서곡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기쁘게 산다. 이성의 눈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생의 최고 가치로 믿고 받아 들이며, 이성 을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하는 비결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집을 잘 짓고 잘 짓게 된다. 돈,은,금,보석 그리고 세상 것 위에 세운 집은 마지막 모두 불타버리 지만,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인생을 집지은 자는 주님의 심판날에도 영원히 불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확실히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다. 고민하고 있는 나, 방황하고 있는 나, 흔들리고 있는 나를 바로 알 자. 더 이상 도피하는 생활자세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과거는 잊어 버리고 현재의 새힘을 얻어 값진 미래를 창조 하는 생활이 되자.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가 아니라 반석 위에 집짓는 자가 되자! 먼훗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불타버리는 공력이 아니라, 영원히 불타지 않는 공력을 남기는 값있는 삶을 살도록 하자.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터전으로 삼을 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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