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를 들으라 (롬14:17)
본문
지금 온 나라가 민주화의 시련을 겪고 있다. 민주화란 궁극적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사회체제에 목적을 둔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민주화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추구되고 있다는데 우리의 비극이 있다. 학생들의 항의데모는 젊고 아직 경험이 부족한 탓으로 과격하다고 할 찌라도 그들이 결코 정권도전세력인 것도 아니요 전투력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민의에 의해 선출된 정권이 그토록 완벽한 전투병력을 투입하여 전쟁을 방불할 정도의 잔인한 진압에 나서는가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데모의 진압에도 최소한의 윤리가 있을 것이다. 도망자는 방치해 두어 야 할텐데 끝까지 쫓아가서 쇠파이프로 때리고 구두발로 짓이겨야 할 이유 가 어디 있는지 우리네 소시민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최류탄도 공격무기가 아니고 데모군중을 해산시키는 데 목적이 있을 터인데 어쩌자 고 눈알이 튀어나오고 뒤통수에 맞아 죽게 하고 영원한 불구자로 만드느 냐 하는 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학생데모가 학내문제에 있다면 학내에서 해결토록 해야 한다. 학내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대학이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 한다. 경찰력, 그것도 전투경찰의 힘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는 대학이라면 그 대학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세상을 배운 사람들이 과연 이 땅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들의 시위가 사회의 부정과 불의에 대한 항의에서라면 마땅히 우리 사회의 관리를 책임진 당국 은 자신들을 성찰해 보며 좀 더 성의있는 태도로 국민과의 공감대를 형성하 도록 노력해야 하고 과감한 개혁의지를 보여 주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최 근의 개혁 입법문제만 하더라도 선거공약이었으니 벌써 정부 스스로가 민 주시대에 부응토록 개정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어째서 보통사람들의 시대 의 사회분위기가 국민사찰 차원에서의 통치로 느껴지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통일문제만 하더라도 7.7 선언의 정신이 거짓이 아니라면 명실상부 동 반자 관계의 수립을 위한 몸짓이 가시화되어야 할텐데 우리네 시민들 생각 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반자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 이 살겠다는 뜻일텐데 요새 같으면 통일문제에 잘못 끼어들었다간 일생일대 의 돌이킬 수 없는 액운을 맞이할 것 같은 의구심마저 들고 있다. 전투경찰에 의한 학생의 죽음은 많은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침묵하는 대중을, 외면하는 대중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게 될 어리석음이다.
시민들은 모여 앉으면 분노를 삭이느라 몸부림 치고 있다. 어느 시절에나 제 살 궁리나 하는 기회주의자들이나 이기적인 사람들만 보아서는 큰 변을 겪게 된다. 동료학생의 죽음을 본 혈기넘치고 의분에 사는 학생들의 투신자살, 분 신자살을 보는 데도 너무나 현실도피적이고 안이할 넋두리들을 일삼고 있다 고 본다. 생명은 하나 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분 명히 어리석다. 생명은 조물주의 선물이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조물주에 대한 반역행위이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어리석고 조물주에 대한 반역행위를 유 발하게 한 자가 누구인가 그들의 부모가 아니다. 그들의 동료학생들도 아니다. 그들은 결코 염세주의자여서 자살한 것이 아니다. 가난이나 질병의 고통을 못이겨 죽은 것은 더욱 아니다. 그들이 죽은 것은 그릇된 현실을 바 로잡는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항의하지 않고 몸으로 산 제사를 바치지 않는 우리사회의 집단이기주의로 말미암은 죽음이다. 이제 당국은 이들의 연쇄적 죽음에 대해 그 배후를 수사한다고 나섰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어떤 죽음이든 죽음 앞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 앞에 조의를 표해야 하고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하는 것이 사람으로 서의 예의인데 그 죽음의 배후를 수사한다니 이와 같은 세상의 비정함에 오직 놀라워할 뿐이다. 교회는 더 이상 교리문제로 시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로마 14:17)이라 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좋으냐 안되느냐 하는 시비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자살이 신성모독이냐 사회불안의 요인이 되느냐 하는 시비를 벌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과 그 역사에 현존하시며 그리스도의 진리와 자유 안 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님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먹고 마시는 일 보다 먼저 정의와 평화를 성취하여 참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라고 부르고 계신다. 정의를 위한 십자가를 지고, 평화를 위해 제사를 그 몸으로 드리는 것으로 생의 낙을 삼아야 우리시대의 죽고 죽이는 악순환 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이 글을 모일간지의 긴급청탁을 받고 보낸 것이다.
그런데 상당 한 해명도 없이 데스크에서 보도제한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에도 민주화 로 가는 길목에 걸림돌이 되어서인가 이러고도 어찌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를 구현하겠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는가 나는 지난 5월 7일 한국 N.C.C 주관 시국기도회에서 설교했다. 스스로 신도라 자처하는 사람으로부터 N.C.C권에 붙어 살지 말고 김일성의 정체에 눈을 돌리라는 약간은 야비한 충고성의 편지도 받았다. 주소도 명확히 밝히 지 않은 60대의 노인이라는 공산주의의 희생자로서의 뼈아픈 경험이 아직 도 그를 억누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민주화운동, 특히 학생운동은 결코 김일성에게 나라의 구원을 기대하여 일어난 절규라고 생각지 않는다. 일부 그와 같은 불순한 사람들이 섞여 있을찌는 단언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학생 들은 결단코 그와 같은 어리석은 판단에서 몸을 불사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북간의 대립상황에서는 어디엔가 간첩이 숨어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 사회를 전복하거나 산업시설을 파괴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듣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사회는 적으로부터의 방위에는 만전을 기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 국내문제는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것 같이 안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가 지금 국무총리가 새로 임명되었다. 그만한 경륜과 사회적 신뢰도가 있 어서 선임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기상천외의 행정력으로 나라 살림을 살찌게 하겠다는 때가 아니다.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대결과 불신 의 대외적 이미지 쇄신으로 새 얼굴의 민주시민사회를 보여 주는데 우선 과제를 삼아야 한다.
그런데 새로 임명된 국무총리가 상의하달에는 명수요 행정경험은 풍부 할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지난 몇년간 겪은 그분은 민심의 동향을 바르 게 통찰하고 최고통치권자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보통사람 통치자로 부각시 키는데 실패한 책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아직까지 국민은 자신들의 신성한 투표권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을 보호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 보호 막이 두터워지는 길은 대통령과 침묵하는 대중과의 거리가 가까와져야 한다. 그 통로를 넓히고 예비하는 역할이 바로 국무총리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시중에서는 벌써부터 소위 공안통치의 연장선상 에서 선정된 인사라는 평들이 강하다. 공안통치, 말이야 이 보다 더 좋은 통치가 또 달리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공안통치는 국내 정치문제에 있어 서 무소부재한 존재이지만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을 비롯, 아웅산 사건, 김현희 KAL기 폭파사건등에 있어서 속수무책이었음이 드러났다. 수사경찰의 명예가 걸렸던 김근태 고문사건의 주범 이근안 경감은 아 직 그 소재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고, 화성지역에서 열번에 걸친 연쇄살인사건도 오리무중이다. 이러니 국민들은 공안통치를 민생을 보호하는 경찰행위 로 보기 보다 정치적 이해수단으로 오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비판하는데도 진력이 나서 신명이 나지 않는다. 모두가 될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방관자가 되어 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국민의 파국적 정신상황이라 여기며 모두가 자기갱신의 마음을 다져야 할 때라 생각한다.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방패를 들라, 구원의 투구를 쓰라, 성령님의 검을 가지라. 그리고 마음에는 이익 보다 정의감을, 불의 보다 진리를, 미움 보다 평화를 품어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방관자 되기를 원하는 어둠의 세력과 악령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에베소 6:10-)
그런데 이 땅에서의 민주화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추구되고 있다는데 우리의 비극이 있다. 학생들의 항의데모는 젊고 아직 경험이 부족한 탓으로 과격하다고 할 찌라도 그들이 결코 정권도전세력인 것도 아니요 전투력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민의에 의해 선출된 정권이 그토록 완벽한 전투병력을 투입하여 전쟁을 방불할 정도의 잔인한 진압에 나서는가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데모의 진압에도 최소한의 윤리가 있을 것이다. 도망자는 방치해 두어 야 할텐데 끝까지 쫓아가서 쇠파이프로 때리고 구두발로 짓이겨야 할 이유 가 어디 있는지 우리네 소시민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최류탄도 공격무기가 아니고 데모군중을 해산시키는 데 목적이 있을 터인데 어쩌자 고 눈알이 튀어나오고 뒤통수에 맞아 죽게 하고 영원한 불구자로 만드느 냐 하는 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학생데모가 학내문제에 있다면 학내에서 해결토록 해야 한다. 학내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대학이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 한다. 경찰력, 그것도 전투경찰의 힘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는 대학이라면 그 대학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세상을 배운 사람들이 과연 이 땅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들의 시위가 사회의 부정과 불의에 대한 항의에서라면 마땅히 우리 사회의 관리를 책임진 당국 은 자신들을 성찰해 보며 좀 더 성의있는 태도로 국민과의 공감대를 형성하 도록 노력해야 하고 과감한 개혁의지를 보여 주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최 근의 개혁 입법문제만 하더라도 선거공약이었으니 벌써 정부 스스로가 민 주시대에 부응토록 개정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어째서 보통사람들의 시대 의 사회분위기가 국민사찰 차원에서의 통치로 느껴지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통일문제만 하더라도 7.7 선언의 정신이 거짓이 아니라면 명실상부 동 반자 관계의 수립을 위한 몸짓이 가시화되어야 할텐데 우리네 시민들 생각 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반자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 이 살겠다는 뜻일텐데 요새 같으면 통일문제에 잘못 끼어들었다간 일생일대 의 돌이킬 수 없는 액운을 맞이할 것 같은 의구심마저 들고 있다. 전투경찰에 의한 학생의 죽음은 많은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침묵하는 대중을, 외면하는 대중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게 될 어리석음이다.
시민들은 모여 앉으면 분노를 삭이느라 몸부림 치고 있다. 어느 시절에나 제 살 궁리나 하는 기회주의자들이나 이기적인 사람들만 보아서는 큰 변을 겪게 된다. 동료학생의 죽음을 본 혈기넘치고 의분에 사는 학생들의 투신자살, 분 신자살을 보는 데도 너무나 현실도피적이고 안이할 넋두리들을 일삼고 있다 고 본다. 생명은 하나 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분 명히 어리석다. 생명은 조물주의 선물이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조물주에 대한 반역행위이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어리석고 조물주에 대한 반역행위를 유 발하게 한 자가 누구인가 그들의 부모가 아니다. 그들의 동료학생들도 아니다. 그들은 결코 염세주의자여서 자살한 것이 아니다. 가난이나 질병의 고통을 못이겨 죽은 것은 더욱 아니다. 그들이 죽은 것은 그릇된 현실을 바 로잡는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항의하지 않고 몸으로 산 제사를 바치지 않는 우리사회의 집단이기주의로 말미암은 죽음이다. 이제 당국은 이들의 연쇄적 죽음에 대해 그 배후를 수사한다고 나섰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어떤 죽음이든 죽음 앞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 앞에 조의를 표해야 하고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하는 것이 사람으로 서의 예의인데 그 죽음의 배후를 수사한다니 이와 같은 세상의 비정함에 오직 놀라워할 뿐이다. 교회는 더 이상 교리문제로 시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로마 14:17)이라 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좋으냐 안되느냐 하는 시비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자살이 신성모독이냐 사회불안의 요인이 되느냐 하는 시비를 벌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과 그 역사에 현존하시며 그리스도의 진리와 자유 안 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님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먹고 마시는 일 보다 먼저 정의와 평화를 성취하여 참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라고 부르고 계신다. 정의를 위한 십자가를 지고, 평화를 위해 제사를 그 몸으로 드리는 것으로 생의 낙을 삼아야 우리시대의 죽고 죽이는 악순환 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이 글을 모일간지의 긴급청탁을 받고 보낸 것이다.
그런데 상당 한 해명도 없이 데스크에서 보도제한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에도 민주화 로 가는 길목에 걸림돌이 되어서인가 이러고도 어찌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를 구현하겠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는가 나는 지난 5월 7일 한국 N.C.C 주관 시국기도회에서 설교했다. 스스로 신도라 자처하는 사람으로부터 N.C.C권에 붙어 살지 말고 김일성의 정체에 눈을 돌리라는 약간은 야비한 충고성의 편지도 받았다. 주소도 명확히 밝히 지 않은 60대의 노인이라는 공산주의의 희생자로서의 뼈아픈 경험이 아직 도 그를 억누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민주화운동, 특히 학생운동은 결코 김일성에게 나라의 구원을 기대하여 일어난 절규라고 생각지 않는다. 일부 그와 같은 불순한 사람들이 섞여 있을찌는 단언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학생 들은 결단코 그와 같은 어리석은 판단에서 몸을 불사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북간의 대립상황에서는 어디엔가 간첩이 숨어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 사회를 전복하거나 산업시설을 파괴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듣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사회는 적으로부터의 방위에는 만전을 기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 국내문제는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것 같이 안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가 지금 국무총리가 새로 임명되었다. 그만한 경륜과 사회적 신뢰도가 있 어서 선임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기상천외의 행정력으로 나라 살림을 살찌게 하겠다는 때가 아니다.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대결과 불신 의 대외적 이미지 쇄신으로 새 얼굴의 민주시민사회를 보여 주는데 우선 과제를 삼아야 한다.
그런데 새로 임명된 국무총리가 상의하달에는 명수요 행정경험은 풍부 할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지난 몇년간 겪은 그분은 민심의 동향을 바르 게 통찰하고 최고통치권자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보통사람 통치자로 부각시 키는데 실패한 책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아직까지 국민은 자신들의 신성한 투표권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을 보호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 보호 막이 두터워지는 길은 대통령과 침묵하는 대중과의 거리가 가까와져야 한다. 그 통로를 넓히고 예비하는 역할이 바로 국무총리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시중에서는 벌써부터 소위 공안통치의 연장선상 에서 선정된 인사라는 평들이 강하다. 공안통치, 말이야 이 보다 더 좋은 통치가 또 달리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공안통치는 국내 정치문제에 있어 서 무소부재한 존재이지만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을 비롯, 아웅산 사건, 김현희 KAL기 폭파사건등에 있어서 속수무책이었음이 드러났다. 수사경찰의 명예가 걸렸던 김근태 고문사건의 주범 이근안 경감은 아 직 그 소재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고, 화성지역에서 열번에 걸친 연쇄살인사건도 오리무중이다. 이러니 국민들은 공안통치를 민생을 보호하는 경찰행위 로 보기 보다 정치적 이해수단으로 오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비판하는데도 진력이 나서 신명이 나지 않는다. 모두가 될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방관자가 되어 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국민의 파국적 정신상황이라 여기며 모두가 자기갱신의 마음을 다져야 할 때라 생각한다.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방패를 들라, 구원의 투구를 쓰라, 성령님의 검을 가지라. 그리고 마음에는 이익 보다 정의감을, 불의 보다 진리를, 미움 보다 평화를 품어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방관자 되기를 원하는 어둠의 세력과 악령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에베소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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