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를 부르는 탐욕 (롬13:6-7)
본문
세익스피어(Shakespearea)는 인물 창조에 뛰어났다고 인정받는 영국의 유 명한 극작가입니다. 세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인물 가운데, "오델로"라는 인물은 그야말로 질투의 화신이라고 불려도 좋을 인물입니다. 영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명성과 인기를 모으고 있던 한 연극 배우가 오 델로 역을 맡아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을 맡고 나서, 처음에는 오 델로가 느꼈을 불타는 질투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답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다가, 무릎을 탁 내리치면서 소리쳤답니다. "그렇다.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가 햄릿 역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내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가 내 인생에서 그때만큼 강렬 하게 질투를 느꼈던 적은 없었다." 질투란 보통, 다른 사람의 것으로 여겨 지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죄악된 욕구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질투 를 다른 말로 하면, 곧 탐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질 투의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타난 심각한 질투의 장 면을 기억해 보십시오. 창세기 30장 1절입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 이러한 종류의 질투심은 바 르게 해결되지 않으면, 끝에 가서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낳게 됩니다. 라헬 의 질투심은 결국, 아기를 낳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격 적이고 옳지 않은 해결책을 제안하게 됩니다. 창세기 30장 3절입니다. "라 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 라헬의 질투심 은 후에 그녀가 낳은 아들, 요셉이 다른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 예로 팔려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떤 것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과,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인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램은, 얼마든지 품 어도 좋을 건강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시기 하고 질투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가족을 괴롭히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질 투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넘어뜨림으로써 자신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함께서있을 때, 자신이 서있는 그 자리가 훨씬 더 견고 하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도 누군가를 향해 질투의 마음을 품음으로써, 함께 넘어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좋은 것들에 감사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질투가 낳은 분노 갈 5:16-26 질투의 감정은 언제나, 질투의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행 동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질투가 그 사람에게 그저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때로 질투 의 감정을 품은 사람이, 극단적으로 파괴적인 분노를 터뜨리는 경우가 있 기 때문입니다. 정신 의학계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살인 죄목으로 기소된 사람의 12퍼센트에 해당하는 많은 숫자가, 단지 질투 때문에 다른 사람 의 생명을 빼앗는, 심각한 죄를 범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질투의 감정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설명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 쟁과 사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 등등의 죄를 나열하 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죄가, 우리 주위에서 거침없이 행해지 고 있습니까 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것은, 바울 사도가 이렇게 문제를 나 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문제의 해결책을 함께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의 그릇됨을 극 복하는 길은, 성령님의 권능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로 25절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오직 성령님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 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 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님으로 살면 또한 성령님으로 행 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누 군가를 향해 화를 내고 계십니까 그러면 조심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 21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성령님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이 땅에 서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령님의 열 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먼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십시오. 그리고 우리 삶에 간섭하셔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신뢰하고 배우며 기도하고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분명히 성령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육체의 욕심에 따르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질투 요 2:13-17 어느 저명한 신학자가, 여러분의 교회를 방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로 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런데 이 분이 설교하시다가 갑자기, 회중으로 뛰어나와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외치면서, 성가대 석(席)에 있는 책 상을 부수면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쓸어 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예수님 께서 바로 이런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15절로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 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 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 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 신약 성경은 열심을 나타내는 형용사 (zeal)와 질투를 나타내는 형용사(jealousy)를 똑같은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보이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주의 성전을 사랑하는 그분의 질투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성전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습니다만, 주님은 여전히 이 땅에 그분 의 집을 세우고 계십니다.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집은 무엇입니까 베 드로전서 2장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 땅에 있는 거룩한 집은 곧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 를 세우려는 열심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현대의 많은 교회들 이 이단이나 죄악에 대해서는 커다란 관심과 열심을 가지고 대응하지만, 주께서 그토록 열심으로 나타내셨던, 교회의 사명과 도덕적인 순결성에 대 해서는 무감각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가 말씀에 따라, 말씀이 가 르치는 그 표준에 따라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행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따르는 교회만이, 세상을 향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능 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고 행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또 다른 한 사람 전 5:22-23 어느 부인이 남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무척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론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부인은 이 런 남편의 시큰둥한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또 질문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남편은 대답하기 귀찮은 듯이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이랑 결혼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래도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내 말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냐는 뜻이라고 중얼거리는 겁니다. 이것은 중년에 이른 부부들 사이에서 충분히 오갈 수 있는 대화 내용입니다. 이렇 게 질문하는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이 부부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부부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아내가 남편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대화 가운데 명백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시무룩한 대답을 하는 남편 에게도 아내의 관심과 돌봄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부부가 서로를 돌보기 위해서는, 서로 대화해야 합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 고 느끼게 되면,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서 사랑과 존경을 느낄 수 없을 것 입니다. 물론 남편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상대방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서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때로 부부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있다는 만족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고르는 것,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 그리고 마치 화난 사람처럼 입을 꼭 다문 채 신문만 바라보지 않는 것, 또 가끔씩 좋아하는 음식을 즐 기기 위해 함께 외출하는 여유까지, 이것은 모두 상대에 대한 관심의 표현 이자, 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 모(某) 회사의 세탁기 선전은 아 내를 위해 빨래를 하자고 외치기도 합니다. 부부가 서로 이해하고 대화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부부가 서로 돌보기를 원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교회를 돌보는 것과 같이, 부부가 서로 돌볼 것을 요구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 28절과 29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남 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 오늘도 아내와 남편이, 주께서 보이신 본을 따라,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창조주 예수께 향한 경배 (요 1:1-3) 창조주 예수께 향한 경배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 작됩니다.
그런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천지를 만드셨다는 말이나, 천지를 지으셨다, 또는 세우셨다는 말과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면 창조는, 단순한 작업 과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과정은 손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담기는 것 을 의미합니다. 보통 우리가 "창조"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종이 위에 끄적거린 짧은 글귀나 하나님 앞에 정성껏 드린 기도의 말. 그 것이 근사한 한 편의 싯구처럼 느껴질 때,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 생활 속에서 흥얼거려보는 음율과, 어지럽던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난 뒤의 상쾌함. 이런 것들이 어쩌면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망끽하는, 작은 창조의 기쁨일지 모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그리고 창조하시는 과정마다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 더라고 기록합니다(창 1:31).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담아, 만물을 창조하시고 나서 느끼신, 만족과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심히 좋았다'고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진 아름다운 기도들을 보십시 오. 대부분,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주님 역시,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 함께 하셨다고 명백하게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주님을 소개하면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골로새 서 1장 16절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 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 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형체가 있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그리고 우리 자신까지도, 주님이 아니시면,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물을 지으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 게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필요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더구나 주님은 우리를 우리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지금도 그분의 뜻 안에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주님 안에서 언제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피조물 안에 나타내신 창조주의 형상 (시 19편) 프란시스 쉐퍼(Frances Schaeffer)는 주님은 언제나 거기 계시며, 침묵하 지 않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주님이 침 묵하지 않으신다면, 왜 나는 여지껏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느 냐 고 질문합니다. 물론 주님은 아무 때나, 우리 귀에 들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귀에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에도, 여전히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분명 히 나타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 그 세계를 통 해, 우리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을 보십시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 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 계치 못할지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삶에 묻어있는 주님의 섬세한 손길을 통해,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분의 능력이 크신 것과, 또 그분이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주님이신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마지막 심판날에, 주님을 알지 못한 것을 불순종의 변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주님은 이미 그분이 창조하신 만물 안에, 주님의 능력과 존귀를 명백히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턴가 주님을 향한 우리 믿음의 불길이 사그라드는 것같은 위기감을 느끼고 계십니까 신앙 생활이 건조해지는 듯한 느낌을 갖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이제까지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신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그 리고 그 일에 감사하십시오. 또 주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돌아보고,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를 찬양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세계를 알아 감으로써,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한 방법입니다. 오늘도 창조된 모든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모든 피조물이 신음할 때 (롬 8:18-25) 세상이 처음 창조되던 날, 창조된 모든 것들은 그 주인이신 하나님이 보시 기에 심히 좋았습니다(창 1:31).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심 히 만족하시며 안식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빚으신 처음 두 사람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을 향해 불순종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세상은 말할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계에, 타락의 악한 결과가 섞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주 님의 모든 피조물이 고통당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로마서 8장 20절과 22 절은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 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 통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인간의 불순종 으로 인해 파괴되기 시작한 창조의 질서가, 이제는 모든 피조물의 탄식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피조물의 세계에는 아무 희망도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모든 피조물이 고통받아야 하는 이유를 아는 것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아무 유익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피조물의 탄식을 고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 고, 곧바로 우리에게 있는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8장 21절을 보십시 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퇴색해가는 피조물 의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아직 소망이 있음을 확신하는 이유는, 창조의 근 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고통당하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의 자유함에, 함께 이르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창조 세계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으로, 피조 물의 신음과 고통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죄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을 향한 창조 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소망 가운데에서 힘있게 생활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피조물의 표시 (마 10:32-42) 영국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는 아마 쉐익스피어(Shakespeare)일 겁니다. 그 리고 쉐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인물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인물은, 햄릿(H amlet)입니다. 햄릿은 지극히 우유부단한 인물의 전형으로 꼽히는데, 햄릿 이라는 인물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독백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 로다"라는 대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햄릿을, 쉐익스피어가 창조해낸 인 물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창조 된 모든 인물이 그렇듯이, 햄릿 역시 극작가인 쉐익스피어의 상상의 프리 즘을 통과해서 창조된 인물이기 떠문입니다. 햄릿의 인물과 성격에 생명 력을 불어넣는 그의 모든 대사와 행동은, 오직 쉐익스피어의 손 끝에서 나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햄릿 특유의 인물과 성격은, 작가인 쉐익스피어가 의도한 대로 구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햄릿을, 작가 쉐익스피 어가 창조해낸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 우리들 역시, 마 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손으로 빚어지고 있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쉐익스피어라는 천재 작가에게서 탄생한 햄릿과, 전능하신 주 님의 작품인 우리들 사이에는, 크게 두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햄릿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이지만, 우리는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현실적인 존재입니다.
둘째, 햄릿이 작가의 선택에 의해 일방적으로 존재하는 수동적인 피조물이 라면, 우리는 삶의 주인이신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능동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은, 주님의 피조물에게 허락된 특권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과 풍성하게 교제하는 특권을, 제대로 누리고 있습니까 성경은, 주님의 피조물로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는지, 도전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을 보십시 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 이다." 이것은 천국의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주님 앞에 경배하 며 드리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 앞에, 같은 고백을 드 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주의 뜻대로 지으심을 받았노라고 고백하는 삶을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명성과 인기를 모으고 있던 한 연극 배우가 오 델로 역을 맡아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을 맡고 나서, 처음에는 오 델로가 느꼈을 불타는 질투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답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다가, 무릎을 탁 내리치면서 소리쳤답니다. "그렇다.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가 햄릿 역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내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가 내 인생에서 그때만큼 강렬 하게 질투를 느꼈던 적은 없었다." 질투란 보통, 다른 사람의 것으로 여겨 지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죄악된 욕구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질투 를 다른 말로 하면, 곧 탐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질 투의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타난 심각한 질투의 장 면을 기억해 보십시오. 창세기 30장 1절입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 이러한 종류의 질투심은 바 르게 해결되지 않으면, 끝에 가서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낳게 됩니다. 라헬 의 질투심은 결국, 아기를 낳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격 적이고 옳지 않은 해결책을 제안하게 됩니다. 창세기 30장 3절입니다. "라 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 라헬의 질투심 은 후에 그녀가 낳은 아들, 요셉이 다른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 예로 팔려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떤 것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과,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인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램은, 얼마든지 품 어도 좋을 건강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시기 하고 질투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가족을 괴롭히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질 투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넘어뜨림으로써 자신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함께서있을 때, 자신이 서있는 그 자리가 훨씬 더 견고 하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도 누군가를 향해 질투의 마음을 품음으로써, 함께 넘어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좋은 것들에 감사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질투가 낳은 분노 갈 5:16-26 질투의 감정은 언제나, 질투의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행 동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질투가 그 사람에게 그저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때로 질투 의 감정을 품은 사람이, 극단적으로 파괴적인 분노를 터뜨리는 경우가 있 기 때문입니다. 정신 의학계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살인 죄목으로 기소된 사람의 12퍼센트에 해당하는 많은 숫자가, 단지 질투 때문에 다른 사람 의 생명을 빼앗는, 심각한 죄를 범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질투의 감정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설명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 쟁과 사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 등등의 죄를 나열하 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죄가, 우리 주위에서 거침없이 행해지 고 있습니까 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것은, 바울 사도가 이렇게 문제를 나 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문제의 해결책을 함께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의 그릇됨을 극 복하는 길은, 성령님의 권능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로 25절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오직 성령님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 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 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님으로 살면 또한 성령님으로 행 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누 군가를 향해 화를 내고 계십니까 그러면 조심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 21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성령님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이 땅에 서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령님의 열 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먼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십시오. 그리고 우리 삶에 간섭하셔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신뢰하고 배우며 기도하고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분명히 성령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육체의 욕심에 따르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질투 요 2:13-17 어느 저명한 신학자가, 여러분의 교회를 방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로 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런데 이 분이 설교하시다가 갑자기, 회중으로 뛰어나와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외치면서, 성가대 석(席)에 있는 책 상을 부수면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쓸어 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예수님 께서 바로 이런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15절로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 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 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 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 신약 성경은 열심을 나타내는 형용사 (zeal)와 질투를 나타내는 형용사(jealousy)를 똑같은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보이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주의 성전을 사랑하는 그분의 질투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성전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습니다만, 주님은 여전히 이 땅에 그분 의 집을 세우고 계십니다.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집은 무엇입니까 베 드로전서 2장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 땅에 있는 거룩한 집은 곧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 를 세우려는 열심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현대의 많은 교회들 이 이단이나 죄악에 대해서는 커다란 관심과 열심을 가지고 대응하지만, 주께서 그토록 열심으로 나타내셨던, 교회의 사명과 도덕적인 순결성에 대 해서는 무감각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가 말씀에 따라, 말씀이 가 르치는 그 표준에 따라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행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따르는 교회만이, 세상을 향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능 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고 행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또 다른 한 사람 전 5:22-23 어느 부인이 남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무척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론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부인은 이 런 남편의 시큰둥한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또 질문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남편은 대답하기 귀찮은 듯이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이랑 결혼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래도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내 말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냐는 뜻이라고 중얼거리는 겁니다. 이것은 중년에 이른 부부들 사이에서 충분히 오갈 수 있는 대화 내용입니다. 이렇 게 질문하는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이 부부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부부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아내가 남편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대화 가운데 명백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시무룩한 대답을 하는 남편 에게도 아내의 관심과 돌봄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부부가 서로를 돌보기 위해서는, 서로 대화해야 합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 고 느끼게 되면,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서 사랑과 존경을 느낄 수 없을 것 입니다. 물론 남편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상대방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서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때로 부부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있다는 만족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고르는 것,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 그리고 마치 화난 사람처럼 입을 꼭 다문 채 신문만 바라보지 않는 것, 또 가끔씩 좋아하는 음식을 즐 기기 위해 함께 외출하는 여유까지, 이것은 모두 상대에 대한 관심의 표현 이자, 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 모(某) 회사의 세탁기 선전은 아 내를 위해 빨래를 하자고 외치기도 합니다. 부부가 서로 이해하고 대화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부부가 서로 돌보기를 원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교회를 돌보는 것과 같이, 부부가 서로 돌볼 것을 요구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 28절과 29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남 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 오늘도 아내와 남편이, 주께서 보이신 본을 따라,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창조주 예수께 향한 경배 (요 1:1-3) 창조주 예수께 향한 경배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 작됩니다.
그런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천지를 만드셨다는 말이나, 천지를 지으셨다, 또는 세우셨다는 말과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면 창조는, 단순한 작업 과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과정은 손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담기는 것 을 의미합니다. 보통 우리가 "창조"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종이 위에 끄적거린 짧은 글귀나 하나님 앞에 정성껏 드린 기도의 말. 그 것이 근사한 한 편의 싯구처럼 느껴질 때,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 생활 속에서 흥얼거려보는 음율과, 어지럽던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난 뒤의 상쾌함. 이런 것들이 어쩌면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망끽하는, 작은 창조의 기쁨일지 모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그리고 창조하시는 과정마다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 더라고 기록합니다(창 1:31).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담아, 만물을 창조하시고 나서 느끼신, 만족과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심히 좋았다'고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진 아름다운 기도들을 보십시 오. 대부분,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주님 역시,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 함께 하셨다고 명백하게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주님을 소개하면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골로새 서 1장 16절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 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 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형체가 있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그리고 우리 자신까지도, 주님이 아니시면,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물을 지으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 게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필요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더구나 주님은 우리를 우리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지금도 그분의 뜻 안에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주님 안에서 언제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피조물 안에 나타내신 창조주의 형상 (시 19편) 프란시스 쉐퍼(Frances Schaeffer)는 주님은 언제나 거기 계시며, 침묵하 지 않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주님이 침 묵하지 않으신다면, 왜 나는 여지껏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느 냐 고 질문합니다. 물론 주님은 아무 때나, 우리 귀에 들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귀에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에도, 여전히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분명 히 나타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 그 세계를 통 해, 우리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을 보십시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 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 계치 못할지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삶에 묻어있는 주님의 섬세한 손길을 통해,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분의 능력이 크신 것과, 또 그분이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주님이신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마지막 심판날에, 주님을 알지 못한 것을 불순종의 변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주님은 이미 그분이 창조하신 만물 안에, 주님의 능력과 존귀를 명백히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턴가 주님을 향한 우리 믿음의 불길이 사그라드는 것같은 위기감을 느끼고 계십니까 신앙 생활이 건조해지는 듯한 느낌을 갖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이제까지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신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그 리고 그 일에 감사하십시오. 또 주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돌아보고,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를 찬양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세계를 알아 감으로써,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한 방법입니다. 오늘도 창조된 모든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모든 피조물이 신음할 때 (롬 8:18-25) 세상이 처음 창조되던 날, 창조된 모든 것들은 그 주인이신 하나님이 보시 기에 심히 좋았습니다(창 1:31).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심 히 만족하시며 안식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빚으신 처음 두 사람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을 향해 불순종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세상은 말할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계에, 타락의 악한 결과가 섞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주 님의 모든 피조물이 고통당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로마서 8장 20절과 22 절은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 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 통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인간의 불순종 으로 인해 파괴되기 시작한 창조의 질서가, 이제는 모든 피조물의 탄식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피조물의 세계에는 아무 희망도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모든 피조물이 고통받아야 하는 이유를 아는 것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아무 유익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피조물의 탄식을 고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 고, 곧바로 우리에게 있는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8장 21절을 보십시 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퇴색해가는 피조물 의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아직 소망이 있음을 확신하는 이유는, 창조의 근 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고통당하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의 자유함에, 함께 이르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창조 세계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으로, 피조 물의 신음과 고통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죄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을 향한 창조 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소망 가운데에서 힘있게 생활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피조물의 표시 (마 10:32-42) 영국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는 아마 쉐익스피어(Shakespeare)일 겁니다. 그 리고 쉐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인물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인물은, 햄릿(H amlet)입니다. 햄릿은 지극히 우유부단한 인물의 전형으로 꼽히는데, 햄릿 이라는 인물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독백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 로다"라는 대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햄릿을, 쉐익스피어가 창조해낸 인 물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창조 된 모든 인물이 그렇듯이, 햄릿 역시 극작가인 쉐익스피어의 상상의 프리 즘을 통과해서 창조된 인물이기 떠문입니다. 햄릿의 인물과 성격에 생명 력을 불어넣는 그의 모든 대사와 행동은, 오직 쉐익스피어의 손 끝에서 나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햄릿 특유의 인물과 성격은, 작가인 쉐익스피어가 의도한 대로 구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햄릿을, 작가 쉐익스피 어가 창조해낸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 우리들 역시, 마 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손으로 빚어지고 있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쉐익스피어라는 천재 작가에게서 탄생한 햄릿과, 전능하신 주 님의 작품인 우리들 사이에는, 크게 두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햄릿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이지만, 우리는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현실적인 존재입니다.
둘째, 햄릿이 작가의 선택에 의해 일방적으로 존재하는 수동적인 피조물이 라면, 우리는 삶의 주인이신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능동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은, 주님의 피조물에게 허락된 특권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과 풍성하게 교제하는 특권을, 제대로 누리고 있습니까 성경은, 주님의 피조물로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는지, 도전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을 보십시 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 이다." 이것은 천국의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주님 앞에 경배하 며 드리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 앞에, 같은 고백을 드 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주의 뜻대로 지으심을 받았노라고 고백하는 삶을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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