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과 이방인 (롬11:11-27)
본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서로 두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들이 많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고, 낮과 밤이 있으며, 전기에는 +,-가 있고 자석에도 N극과 S 이 있으며, 육지가 있으면 바다가 있고,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울음이 있으면 웃음이 있고,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는 법입니다. 사회 경제에서도 호경기가 있으면 불경기의 때가 있는 법입니다. 이러한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적당하게 잘 조화가 되어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는 바울이 썼습니다.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서로 다른 인종으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스데반의 박해로 인하여서 흩어진 유대인들이 로마까지 와서 처음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이방인인 로마 사람들도 점점 복음을 듣고 교회로 들어와서 이제 교회 구성원이 유대인 반 로마 이방인 반정도가 되었습니다. 서로 대비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같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 교회 내에서 충돌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서로가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기에 정 반대의 이질성이 교회 내에서 같이 조화를 이루는 문제가 아주 심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만 칭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방인만을 편들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서로 다른 이 두 집단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해야 가장 적당한 말이 되겠습니까 로마서라는 바울의 편지를 보면서 우리는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오묘한 말씀의 지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주시는 것도 아니요,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이 버리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믿으면 누구든지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이 더 예수를 잘 믿을 것 같은데 거꾸로 됐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상하게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 당시에 더욱더 복음을 잘 받아들여서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러한 묘한 현상이 벌어지자 정말 로마 교회는 심각한 갈등을 내부적으로 겪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예수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흉을 보고 괄시를 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자기 동족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은 사실에서 소외감과 낙심과 절망을 하면서 나름대로 괴로워하면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구약 율법에 명시된 할례 같은 것도 지켜야 참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억지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주 시원하게 두 집단에 대하여 말씀을 합니다. 구원은 반드시 믿음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할례와 같은 행위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 혼자 힘만으로는 건너편 언덕에 절대로 오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사닥다리,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강한 일침을 놓았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예수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약적 전통이 오히려 걸림돌이 많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런 걸림돌이 전혀 없는 이방인들에게 더욱더 전도가 잘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방인들의 숫자가 교회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방인들은 점점 교회 안에서 의기양양하게 되었습니다.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커져 갔습니다. 그런 반면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낙심되고, 자기 동족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심히 고민하면서 괴로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예견한 바울이 이제 로마서 10:11절에서 놀라운 지혜로운 말씀으로 두 집단에 대해서 경고를 합니다.
첫째로, 이방인들에게 너무 자긍하지 말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유대인들에게는 너무 낙심해서는 안되며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히 이방인을 구원시키는 사도로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8절에 보면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고자 함이라”하면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인 것을 증거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에 대한 전도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복음을 특히 이방인에게 전도하게 하십니까 유대인인 바울 자신을 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십니까 아니, 자기 동족들도 안 믿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벌리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오히려 믿지 않고 핍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이 흩어져서 이제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바울은 그렇게 가고 싶었던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후 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 백성들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다. 그런즉 하나님이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로 알라 저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구원의 문을 이방인에게로 돌려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집중하게 되었고 지금은 이방인이 본격적으로 구원을 받는 전도의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으나 오기를 싫어하거늘” 첫 번째 유대인들을 구원의 자리에 초청했으나 유대인들이 싫어했습니다. “그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이제 저 사거리 길가로 가서 아무나 구원의 잔치에 만나는 대로 초청해 오라”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이 거부하자 이방의 전체 민족에게 복음의 문이 열어 지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어쩌면 어부지리를 얻고 있는 셈입니다. 국회 위원 당선자가 있는데 그가 무슨 사정으로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차점자가 다시 당선이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이방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방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절대로 자긍하지 말고 이것이 자기 공로인줄로 생각하고 으시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순전히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지 무슨 행동이 유대인들보다 나아서 구원받는 것이 절대로 아니요 지금은 유대인들이 마음 문을 닫고 있어서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전도의 초점이 맞춰진 상태라 이렇게 이방인들에게 전도가 잘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자기의 공로인줄 생각하지 말고 자긍하지 말라고 바울은 이 사실을 본문에서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참 감람나무가 있는데 그 가지가 고약해서 몇 가지를 꺾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저쪽에 있는 돌감람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대신 이 꺾여진 참 감람나무 그 꺾이운 자리에 접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접붙임 받은 이 가지는 하나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제 가지가 뿌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가지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8절에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 또 20절에 “…높은 마음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18절에 “…네가 뿌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존하는 것이라.” 21절에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절에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결국 찍히움을 받으리라”고 엄청난 경고를 주면서 겸비할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 내에서 의기양양해 있는 이방인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입니까 그럼 한편 유대인들에게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위축되어 있는 유대인들에게 11:1에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이방인들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좋은 감람나무의 것으로 접붙임을 얻었으므로 원가지인 유대인들은 더더욱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니요,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바울은 자기가 이 비밀을 25절에서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이방인의 어떤 일정한 구원받은 숫자가 들어오면 그 때에는 이방인의 대한 전도의 문이 닫혀 버리고 유대인에게 전도하는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대다수가 지금 예수를 부인하고 전도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런 어려움에는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비밀이 있음을 깨닫고서 이것을 알고 힘을 내라고 유대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 복잡한 것 같습니다만 자세히 요약하면 이방인들에게는 자긍하지 말고 낮추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으라고 하는 것이요, 유대인들에게는 위축되지 말고, 나중에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깨닫고, 유대인들에게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전도의 문이 열린 이 사실, 이 비밀을 깨닫고, 마음으로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 로마서 11장의 요지입니다. 사실, 1996년 현재까지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구약 전통 유대교만을 고집 하는 그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예수를 안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예수를 잘 믿습니다. 우리 나라도 보십시오. 100년 기독교 역사상 벌써 1/4이 예수를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1/100도 안됩니다. 그것이 참 이상합니다만 그러나 성경대로 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의 문을 안 열어 주셨습니다. 처음에 열었으나 구원의 문을 이방인에게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방인의 수가 들어오고 있는 때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전도가 잘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지상 말세가 되면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차면 이제 이방인들의 전도의 문도 닫히고 마지막 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 성경이 보여 주는 세상 말세의 모습. 성경대로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처음부터 유대인들이 복음을 잘 받아 들였더라면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의 문이 안 열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처음에 이상하게도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스데반을 죽이고 핍박을 하자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가서 다 이방 세계로 가 버렸습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참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때인만큼 이방인들은 자긍하지 말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감사하고 스스로 높이지 말고, 겸손하고 도리어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곰곰히 생각하면 시원하고도 적절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상반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모든 것이 잘 되고 형통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고, 현재 가정의 어려움, 사업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런 가정도 동시에 같이 있습니다. 로마 교회와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부유층과 물질적으로 어려움 당하는 자들이 같이 있는 곳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공부 많이 해서 지식 수준이 높은 사람들과 그리고 공부할 기회가 적어서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보통 세상의 다른 공동체는 주로 같은 성질의 사람들이 어떤 이익을 위하여서 같이 집단을 이루고 있지만 교회는 특이하게도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와 같이 정 방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우리는 때로 로마 교회와 같이 똑같은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현재 잘 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된다고 절대로 이방인들처럼 자긍하지 말 것이며 이 모든 것이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고 자긍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긍이라는 말은 자기 스스로 자기 공로인양 으시대고 뽐내는 것을 말합니다. 뿌리가 가지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라. 항상 더욱 조심하며 겸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뿌리에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실 내가 잘되고 있는 중이라면, 내 사업이 잘 된다면 다른 경쟁자의 사업이 안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유대인에게 허용될 것이 이방인들에게 와서 지금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저쪽으로 갈 것이 지금 내게로 와서 잘 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사실을 깨닫고 자긍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내게 주셨음을 알고서 더욱 겸손하고 두려워하고 겸비해야 합니다. 한편 지금 현재 잘 안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때가 올 것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힘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잘될 때는 내 공로인양 우쭐대면서 살아갑니다. 또 안될 때는 짜증 부리며 괴로워하며 내 식구들까지 괴롭히고 남까지 괴롭힙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모습입니까 얼마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살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의 일체의 비결을 알았노라.” 어떤 사람은 풍부에 처할 줄은 알지만, 궁핍이 오면 도무지 못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도 잘되고 모든 일이 잘되고 가정도 잘되고 물질이 넉넉해지면 우리 남편 최고라고 하면서 날마다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명랑해지고 교회도 잘 나옵니다.
그런데, 사업이 기우뚱하고 가정의 어려운 때가 오면 매일 남편에게 바가지 긁으면서도무지 못살겠다고 합니다. 난리를 피웁니다. 교회도 안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풍부에 처할 줄은 아나 비천에 처할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디 생에 낮만 있습니까 밤도 있는 법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들 때는 잘 견디어 냅니다. 밤이 오면 잘 견디어 냅니다. 가난할 때는 가정을 잘 돌보고, 아내 사랑할 줄 알고 열심히 노력할 줄 아는 편입니다. 그러나 풍부해지고 부유해지자 가정을 돌보지 않습니다. 조강지처를 버립니다. 돈 쓰는 재미에 교회도 오지 못하고, 예배에도 오지 못하고, 교만해지고, 거드름 피우고, 어려울 땐 기도 생활 하다가 잘되면 기도 안합니다. 이런 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은 알지만, 풍부에 처할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바울이 말한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인생의 낮이 와도 잘 대처하고 밤이 와도 잘 대처하는 사람, 모든 일이 잘 되고 풍부하면 더욱 겸손해지며 이럴 때일수록 두려워하는 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이, 잘될 때 기고 만장하는 것을 누가 못합니까 안될 때 다 죽어 가는 것 누가 못합니까 요즘은 안되니까 자살들을 합니다. 가정을 포기하고 인생을 끝장냅니다. 그것을 누가 못합니까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잘될 때에는 오히려 겸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자중하면서 더욱 두려워하면서 사는 것이 진찌짜 사는 것입니다. 또한 잘 안될 때 낙심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뭔가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견디어 내는 것. 이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될 때에는 한정 없이 저쪽으로 가고 못 될 때에는 한정 없이 이쪽으로 가지만 그리스도인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살아 있다고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는 낮과 밤이 교차됩니다. 저 하늘나라 가면 밤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세상에서는 고통이 있고, 즐거울 때가 있으며, 어두울 때가 있고 밝을 때가 있으며, 낮이 있고 밤이 있습니다. 잘 될 때는 오히려 겸비하며 은혜를 깨닫고 안 될 때에는 낙심하지 말고 잘 견디어 내는 사람, 이런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승리하는 삶이요, 가장 소망스러운 인생입니다. 여러분 짧은 인생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큰 깨우침이 되어 우리 인생이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서로 다른 인종으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스데반의 박해로 인하여서 흩어진 유대인들이 로마까지 와서 처음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이방인인 로마 사람들도 점점 복음을 듣고 교회로 들어와서 이제 교회 구성원이 유대인 반 로마 이방인 반정도가 되었습니다. 서로 대비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같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 교회 내에서 충돌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서로가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기에 정 반대의 이질성이 교회 내에서 같이 조화를 이루는 문제가 아주 심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만 칭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방인만을 편들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서로 다른 이 두 집단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해야 가장 적당한 말이 되겠습니까 로마서라는 바울의 편지를 보면서 우리는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오묘한 말씀의 지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주시는 것도 아니요,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이 버리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믿으면 누구든지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이 더 예수를 잘 믿을 것 같은데 거꾸로 됐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상하게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 당시에 더욱더 복음을 잘 받아들여서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러한 묘한 현상이 벌어지자 정말 로마 교회는 심각한 갈등을 내부적으로 겪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예수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흉을 보고 괄시를 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자기 동족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은 사실에서 소외감과 낙심과 절망을 하면서 나름대로 괴로워하면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구약 율법에 명시된 할례 같은 것도 지켜야 참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억지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주 시원하게 두 집단에 대하여 말씀을 합니다. 구원은 반드시 믿음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할례와 같은 행위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 혼자 힘만으로는 건너편 언덕에 절대로 오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사닥다리,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강한 일침을 놓았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예수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약적 전통이 오히려 걸림돌이 많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런 걸림돌이 전혀 없는 이방인들에게 더욱더 전도가 잘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방인들의 숫자가 교회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방인들은 점점 교회 안에서 의기양양하게 되었습니다.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커져 갔습니다. 그런 반면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낙심되고, 자기 동족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심히 고민하면서 괴로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예견한 바울이 이제 로마서 10:11절에서 놀라운 지혜로운 말씀으로 두 집단에 대해서 경고를 합니다.
첫째로, 이방인들에게 너무 자긍하지 말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유대인들에게는 너무 낙심해서는 안되며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히 이방인을 구원시키는 사도로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8절에 보면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고자 함이라”하면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인 것을 증거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에 대한 전도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복음을 특히 이방인에게 전도하게 하십니까 유대인인 바울 자신을 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십니까 아니, 자기 동족들도 안 믿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벌리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오히려 믿지 않고 핍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이 흩어져서 이제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바울은 그렇게 가고 싶었던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후 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 백성들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다. 그런즉 하나님이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로 알라 저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구원의 문을 이방인에게로 돌려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집중하게 되었고 지금은 이방인이 본격적으로 구원을 받는 전도의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으나 오기를 싫어하거늘” 첫 번째 유대인들을 구원의 자리에 초청했으나 유대인들이 싫어했습니다. “그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이제 저 사거리 길가로 가서 아무나 구원의 잔치에 만나는 대로 초청해 오라”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이 거부하자 이방의 전체 민족에게 복음의 문이 열어 지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어쩌면 어부지리를 얻고 있는 셈입니다. 국회 위원 당선자가 있는데 그가 무슨 사정으로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차점자가 다시 당선이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이방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방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절대로 자긍하지 말고 이것이 자기 공로인줄로 생각하고 으시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순전히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지 무슨 행동이 유대인들보다 나아서 구원받는 것이 절대로 아니요 지금은 유대인들이 마음 문을 닫고 있어서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전도의 초점이 맞춰진 상태라 이렇게 이방인들에게 전도가 잘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자기의 공로인줄 생각하지 말고 자긍하지 말라고 바울은 이 사실을 본문에서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참 감람나무가 있는데 그 가지가 고약해서 몇 가지를 꺾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저쪽에 있는 돌감람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대신 이 꺾여진 참 감람나무 그 꺾이운 자리에 접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접붙임 받은 이 가지는 하나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제 가지가 뿌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가지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8절에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 또 20절에 “…높은 마음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18절에 “…네가 뿌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존하는 것이라.” 21절에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절에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결국 찍히움을 받으리라”고 엄청난 경고를 주면서 겸비할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 내에서 의기양양해 있는 이방인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입니까 그럼 한편 유대인들에게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위축되어 있는 유대인들에게 11:1에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이방인들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좋은 감람나무의 것으로 접붙임을 얻었으므로 원가지인 유대인들은 더더욱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니요,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바울은 자기가 이 비밀을 25절에서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이방인의 어떤 일정한 구원받은 숫자가 들어오면 그 때에는 이방인의 대한 전도의 문이 닫혀 버리고 유대인에게 전도하는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대다수가 지금 예수를 부인하고 전도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런 어려움에는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비밀이 있음을 깨닫고서 이것을 알고 힘을 내라고 유대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 복잡한 것 같습니다만 자세히 요약하면 이방인들에게는 자긍하지 말고 낮추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으라고 하는 것이요, 유대인들에게는 위축되지 말고, 나중에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깨닫고, 유대인들에게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전도의 문이 열린 이 사실, 이 비밀을 깨닫고, 마음으로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 로마서 11장의 요지입니다. 사실, 1996년 현재까지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구약 전통 유대교만을 고집 하는 그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예수를 안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예수를 잘 믿습니다. 우리 나라도 보십시오. 100년 기독교 역사상 벌써 1/4이 예수를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1/100도 안됩니다. 그것이 참 이상합니다만 그러나 성경대로 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의 문을 안 열어 주셨습니다. 처음에 열었으나 구원의 문을 이방인에게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방인의 수가 들어오고 있는 때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전도가 잘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지상 말세가 되면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차면 이제 이방인들의 전도의 문도 닫히고 마지막 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 성경이 보여 주는 세상 말세의 모습. 성경대로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처음부터 유대인들이 복음을 잘 받아 들였더라면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의 문이 안 열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처음에 이상하게도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스데반을 죽이고 핍박을 하자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가서 다 이방 세계로 가 버렸습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참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때인만큼 이방인들은 자긍하지 말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감사하고 스스로 높이지 말고, 겸손하고 도리어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곰곰히 생각하면 시원하고도 적절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상반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모든 것이 잘 되고 형통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고, 현재 가정의 어려움, 사업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런 가정도 동시에 같이 있습니다. 로마 교회와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부유층과 물질적으로 어려움 당하는 자들이 같이 있는 곳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공부 많이 해서 지식 수준이 높은 사람들과 그리고 공부할 기회가 적어서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보통 세상의 다른 공동체는 주로 같은 성질의 사람들이 어떤 이익을 위하여서 같이 집단을 이루고 있지만 교회는 특이하게도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와 같이 정 방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우리는 때로 로마 교회와 같이 똑같은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현재 잘 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된다고 절대로 이방인들처럼 자긍하지 말 것이며 이 모든 것이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고 자긍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긍이라는 말은 자기 스스로 자기 공로인양 으시대고 뽐내는 것을 말합니다. 뿌리가 가지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라. 항상 더욱 조심하며 겸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뿌리에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실 내가 잘되고 있는 중이라면, 내 사업이 잘 된다면 다른 경쟁자의 사업이 안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유대인에게 허용될 것이 이방인들에게 와서 지금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저쪽으로 갈 것이 지금 내게로 와서 잘 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사실을 깨닫고 자긍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내게 주셨음을 알고서 더욱 겸손하고 두려워하고 겸비해야 합니다. 한편 지금 현재 잘 안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때가 올 것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힘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잘될 때는 내 공로인양 우쭐대면서 살아갑니다. 또 안될 때는 짜증 부리며 괴로워하며 내 식구들까지 괴롭히고 남까지 괴롭힙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모습입니까 얼마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살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의 일체의 비결을 알았노라.” 어떤 사람은 풍부에 처할 줄은 알지만, 궁핍이 오면 도무지 못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도 잘되고 모든 일이 잘되고 가정도 잘되고 물질이 넉넉해지면 우리 남편 최고라고 하면서 날마다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명랑해지고 교회도 잘 나옵니다.
그런데, 사업이 기우뚱하고 가정의 어려운 때가 오면 매일 남편에게 바가지 긁으면서도무지 못살겠다고 합니다. 난리를 피웁니다. 교회도 안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풍부에 처할 줄은 아나 비천에 처할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디 생에 낮만 있습니까 밤도 있는 법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들 때는 잘 견디어 냅니다. 밤이 오면 잘 견디어 냅니다. 가난할 때는 가정을 잘 돌보고, 아내 사랑할 줄 알고 열심히 노력할 줄 아는 편입니다. 그러나 풍부해지고 부유해지자 가정을 돌보지 않습니다. 조강지처를 버립니다. 돈 쓰는 재미에 교회도 오지 못하고, 예배에도 오지 못하고, 교만해지고, 거드름 피우고, 어려울 땐 기도 생활 하다가 잘되면 기도 안합니다. 이런 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은 알지만, 풍부에 처할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바울이 말한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인생의 낮이 와도 잘 대처하고 밤이 와도 잘 대처하는 사람, 모든 일이 잘 되고 풍부하면 더욱 겸손해지며 이럴 때일수록 두려워하는 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이, 잘될 때 기고 만장하는 것을 누가 못합니까 안될 때 다 죽어 가는 것 누가 못합니까 요즘은 안되니까 자살들을 합니다. 가정을 포기하고 인생을 끝장냅니다. 그것을 누가 못합니까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잘될 때에는 오히려 겸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자중하면서 더욱 두려워하면서 사는 것이 진찌짜 사는 것입니다. 또한 잘 안될 때 낙심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뭔가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견디어 내는 것. 이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될 때에는 한정 없이 저쪽으로 가고 못 될 때에는 한정 없이 이쪽으로 가지만 그리스도인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살아 있다고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는 낮과 밤이 교차됩니다. 저 하늘나라 가면 밤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세상에서는 고통이 있고, 즐거울 때가 있으며, 어두울 때가 있고 밝을 때가 있으며, 낮이 있고 밤이 있습니다. 잘 될 때는 오히려 겸비하며 은혜를 깨닫고 안 될 때에는 낙심하지 말고 잘 견디어 내는 사람, 이런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승리하는 삶이요, 가장 소망스러운 인생입니다. 여러분 짧은 인생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큰 깨우침이 되어 우리 인생이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