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도 지나고 보면 기쁨인 것을 (롬8:11-18)
본문
페스탈로치는 "고난과 눈물은 나를 높은 예지로 이끌었으나, 만족과 즐거 움은 나에게 큰 감도을 만들어 줄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고진 감래"라는 고사 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고통도 지나고 보면 기쁨이 된다."라는 뜻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미래의 영광이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에게 쓰여지는 승리의 월계관이나 그가 누리는 행복은 노력과 수고와 고난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진주 조개의 고통이 아름다운 보석을 만 드는 것고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내는 쓰지만 인내가 주는 열매는 달다 고 합니다. 고난은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고난이 힘들고 고통스럽지 만 이를 참고 견딜 때 멋진 결실을 부둥켜 안고 감격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는 영광에 이르는 고난에 대한 몇가 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이 교훈이 지금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분에게 그 고통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주시는 크신 은혜의 결실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기쁨의 원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절).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신체 가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합니다. 육신이 없는 영만 있을 수 없고 영이 없는 육신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버려져야 할 시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영과 육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한 순간이라도 따로 떨어져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함께 있는 것 중에서 하나 의 부분을 도려낸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고통이 바로 이런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따분할 때가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헌금을 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음은 간절히 원하고 있지만 육신이 말을 들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 래 육신은 힘든 것을 싫어 합니다. 항상 편한 생활을 그리워 합니다. 그런 육신을 이끌고 힘든 땀을 흘리게 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은 몸이 하기 싫은 것을 마지 못해 하는 것보다 몸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육신이 술을 마시고 싶어할 때 그것을 억제하는 것 역시 육신을 동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담배를 끊는 것도 담배를 계속 피워온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통입니다. 성적인 충동도 억제하기 힘든 욕구 중의 하나 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화풀이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통이 터질 일 입니다. 성령님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을 거부하는 일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참고 나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회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일을 죽이려고 하면 참고 견디는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몸은 일하 기 싫어하고 힘들어 하지만 부지런히 일하고 땀흘려 수고할 때 건강은 물론 많은 수입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먹고 마시고 향락을 즐기고자 합니다. 그 결과는 죄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힘들지만 육체의 정욕을 거부하고 영적인 삶을 위하여 힘쓸 때 참 된 행복이 찾아옵니다.
2. 하나님의 후사는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7절).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상속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그가 다시 사시므로 그 안에서 우리도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 분을 위한 헌신을 다짐하는 예 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았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서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옳게 살아 보겠다고 결심할 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 보자고 새로운 결 단의 옷을 입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핍박과 함께 고난이 뒤따라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고 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늘의 기업을 이어갈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솔선하여 헌신하고 내 자신이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모든 고난을 견디며 헌신하는 성도들이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나 홀로 편한 생활을 보내면서 은 혜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감사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감사가 어떻게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있고 그 입에서 나오는 찬송이 어찌 하늘 과 천사들의 박수를 얻어낼 수 있겠습니까 흘러간 명화 중에 "쿼바디스"를 기억하고 계실 줄 압니다.본래 이 말은 " 쿼바디스 도미네"로 베드로가 박해를 피하여 달아나는 것을 본 주님께서 베 드로가 도망 나온 도시를 향해 가시는 주님을 향하여 베드로가 "주여 어디 로 가시나이까"라고 질문한 것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네가 고난을 피해 달아나기 때문에 내가 더 대신 고난을 받 으려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고난을 피하면 주님은 나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가 주님과 함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이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계시고 있을 때 나는 마냥 희희 낙락하고 지낸다면 주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도 동 참하여 주님과 함께 영광의 잔치를 맛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오늘의 고난은 내일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18절). 이 믿음의 바울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내일의 보다 좋은 일을 위하여 오늘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감수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오늘 비가 와도 씨를 뿌리는 것은 내일의 풍성한 수확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훗날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 2:11에 보면 죽도록 충성한 사람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 다고 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총 속에 면류관을 쓰고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분들은 바로 이 땅에서 주를 위해 고난받고 핍박을 받으며 땀흘려 수고 하는 성도들입니다.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성도가 아니면 하늘의 상을 받을 자가 없습니다. 오늘 내가 수고하면 내일 우리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삽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허리띠를 조이면서 부지런히 일할 때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이 그 혜택을 입게됩니다. 오늘 우리가 피땀 흘려 내 안에,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면 나 와 우리의 후손이 함께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복되고 유용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오늘 땀흘려 노력하리라는 새로운 각오가 있는사람만이 성공의 기쁨을 노 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오늘의 수고를 외면하면 내일의 영광은 없습니다. 운동 선수가 오늘도 끈 임없이 피땀을 흘려 가면서 연습에 열중해야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고난을 받는 사람은 그 인격이 단려을 받고 성결함을 입어 칭찬과 존 경을 받습니다. 시편 119:1에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되게 행하였으나 고난을 당한 후에는 주의 율례를 깨닫고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연단을 받은 사람이 참된 인간의 심성을 지니게 되고 위대한 일 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어떤 환난이 와도 넘어지지 않는 위대한 승리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에는 네가지가 있습니다.
1) 고난을 통하여 인간을 회복 시키시고.
2) 고난을 통하여 인간됨을 확인 시켜주고.
3) 고난을 통하여 약한 사람을 강하게 하시고.
4) 고난을 통하여 승리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고난을 내일의 영광으로 승화시켜 역사를 밝히는 우리 성도들이 되 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뜻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고난을 겪습니다. 뜻도 없고 목적도 없으면 고난도 없습니다. "나는 고통하는 고로 존재한다 "는 철학자 키에로케고르의 말은 의미 있는 말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고통을 모릅니다. 돼지는 고민이 없습니다. 내일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광에 이르는 고난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1).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영광은 고난을 받으신 후에 온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 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오늘의 수고와 헌신은 내일의 성공과 영광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역사는 땀과 피눈물을 흘리면서 수고하는 분들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민족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교회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가문의 역사도 그 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재음미하면서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위해서 나의 눈물과 피를 섞으리라는 새로운 각오를 주님께 다짐해야 겠습니다. 여러분의 그 헌신과 희생이 고난이 내일의 기쁨과 영광과 영원한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고난이 힘들고 고통스럽지 만 이를 참고 견딜 때 멋진 결실을 부둥켜 안고 감격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는 영광에 이르는 고난에 대한 몇가 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이 교훈이 지금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분에게 그 고통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주시는 크신 은혜의 결실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기쁨의 원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절).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신체 가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합니다. 육신이 없는 영만 있을 수 없고 영이 없는 육신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버려져야 할 시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영과 육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한 순간이라도 따로 떨어져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함께 있는 것 중에서 하나 의 부분을 도려낸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고통이 바로 이런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따분할 때가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헌금을 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음은 간절히 원하고 있지만 육신이 말을 들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 래 육신은 힘든 것을 싫어 합니다. 항상 편한 생활을 그리워 합니다. 그런 육신을 이끌고 힘든 땀을 흘리게 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은 몸이 하기 싫은 것을 마지 못해 하는 것보다 몸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육신이 술을 마시고 싶어할 때 그것을 억제하는 것 역시 육신을 동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담배를 끊는 것도 담배를 계속 피워온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통입니다. 성적인 충동도 억제하기 힘든 욕구 중의 하나 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화풀이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통이 터질 일 입니다. 성령님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을 거부하는 일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참고 나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회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일을 죽이려고 하면 참고 견디는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몸은 일하 기 싫어하고 힘들어 하지만 부지런히 일하고 땀흘려 수고할 때 건강은 물론 많은 수입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먹고 마시고 향락을 즐기고자 합니다. 그 결과는 죄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힘들지만 육체의 정욕을 거부하고 영적인 삶을 위하여 힘쓸 때 참 된 행복이 찾아옵니다.
2. 하나님의 후사는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7절).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상속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그가 다시 사시므로 그 안에서 우리도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 분을 위한 헌신을 다짐하는 예 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았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서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옳게 살아 보겠다고 결심할 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 보자고 새로운 결 단의 옷을 입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핍박과 함께 고난이 뒤따라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고 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늘의 기업을 이어갈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솔선하여 헌신하고 내 자신이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모든 고난을 견디며 헌신하는 성도들이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나 홀로 편한 생활을 보내면서 은 혜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감사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감사가 어떻게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있고 그 입에서 나오는 찬송이 어찌 하늘 과 천사들의 박수를 얻어낼 수 있겠습니까 흘러간 명화 중에 "쿼바디스"를 기억하고 계실 줄 압니다.본래 이 말은 " 쿼바디스 도미네"로 베드로가 박해를 피하여 달아나는 것을 본 주님께서 베 드로가 도망 나온 도시를 향해 가시는 주님을 향하여 베드로가 "주여 어디 로 가시나이까"라고 질문한 것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네가 고난을 피해 달아나기 때문에 내가 더 대신 고난을 받 으려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고난을 피하면 주님은 나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가 주님과 함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이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계시고 있을 때 나는 마냥 희희 낙락하고 지낸다면 주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도 동 참하여 주님과 함께 영광의 잔치를 맛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오늘의 고난은 내일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18절). 이 믿음의 바울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내일의 보다 좋은 일을 위하여 오늘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감수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오늘 비가 와도 씨를 뿌리는 것은 내일의 풍성한 수확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훗날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 2:11에 보면 죽도록 충성한 사람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 다고 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총 속에 면류관을 쓰고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분들은 바로 이 땅에서 주를 위해 고난받고 핍박을 받으며 땀흘려 수고 하는 성도들입니다.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성도가 아니면 하늘의 상을 받을 자가 없습니다. 오늘 내가 수고하면 내일 우리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삽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허리띠를 조이면서 부지런히 일할 때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이 그 혜택을 입게됩니다. 오늘 우리가 피땀 흘려 내 안에,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면 나 와 우리의 후손이 함께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복되고 유용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오늘 땀흘려 노력하리라는 새로운 각오가 있는사람만이 성공의 기쁨을 노 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오늘의 수고를 외면하면 내일의 영광은 없습니다. 운동 선수가 오늘도 끈 임없이 피땀을 흘려 가면서 연습에 열중해야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고난을 받는 사람은 그 인격이 단려을 받고 성결함을 입어 칭찬과 존 경을 받습니다. 시편 119:1에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되게 행하였으나 고난을 당한 후에는 주의 율례를 깨닫고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연단을 받은 사람이 참된 인간의 심성을 지니게 되고 위대한 일 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어떤 환난이 와도 넘어지지 않는 위대한 승리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에는 네가지가 있습니다.
1) 고난을 통하여 인간을 회복 시키시고.
2) 고난을 통하여 인간됨을 확인 시켜주고.
3) 고난을 통하여 약한 사람을 강하게 하시고.
4) 고난을 통하여 승리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고난을 내일의 영광으로 승화시켜 역사를 밝히는 우리 성도들이 되 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뜻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고난을 겪습니다. 뜻도 없고 목적도 없으면 고난도 없습니다. "나는 고통하는 고로 존재한다 "는 철학자 키에로케고르의 말은 의미 있는 말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고통을 모릅니다. 돼지는 고민이 없습니다. 내일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광에 이르는 고난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1).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영광은 고난을 받으신 후에 온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 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오늘의 수고와 헌신은 내일의 성공과 영광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역사는 땀과 피눈물을 흘리면서 수고하는 분들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민족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교회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가문의 역사도 그 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재음미하면서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위해서 나의 눈물과 피를 섞으리라는 새로운 각오를 주님께 다짐해야 겠습니다. 여러분의 그 헌신과 희생이 고난이 내일의 기쁨과 영광과 영원한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