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살 동안만 (롬7:1)
본문
지난 주에 우리는 우리의 삶이 은혜의 삶이라는 사실과,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범죄해도 좋다는 말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은혜로서 새생명을 얻은 자는 죄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본질상 용납할 수 없는 존재로 새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죄를 계속해서 지어도 아무런 부담이 없이 그럴수록 은혜가 더하지 하나님은 다 용서하시는데 뭐 한다면 이는 믿지 않는 자요, 은혜와는 상관이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속 받은 성도는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불의의 병기로 드려선 않되고 오히려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결론을 맺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가장 우리를 낙심케 하고 괴롭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이다. 오늘의 본문은 이 율법의 한계와 필요성 그리고 성도의 삶에 있어서 율법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1. 율법은 사람의 살동안만 그를 주관한다. (1-6 ) / 본문은 율법과의 관계를 죽은 옛 남편으로 비유한다.
예) 남편 있는 여인 /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만 남편의 법(율법)에 구속된다. 그러나 남편이 죽을면 그 법은 더 이상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고 자유케 된다. 다른 남자와 결혼할 지라도 아무도 그를 욕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당시의 여인은 스스로 먹고 살수있는 대책이 전혀 없다. 오직 남편의 그늘 아래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남편이 죽었을 때 그녀가 재가 했다고 해서 아무도 그녀를 음녀라고 욕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모세는 이러한 여인에게 정식 이혼장을 주어서 누구에게든지 결혼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에게 율법이라는 남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율법이라는 남편에게서 벗어나 그리스도께로 시집을 간것이다. 이제 옛 남편 율법은 죽었으므로 더 이상 성도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도의 남편이 되고 오직 새 남편 그리스도의 법에만 매인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봉사하여 섬기며,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성도를 얽매일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오직 성도는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 얽매인 자들인 것이다.
예) 어떤 엘리트 신랑 / 아주 피곤하고 힘이들어 죽겠다. 때로는 자존심 상하여 에라 잘못 왔나보다 하고 이혼할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이 신랑은 이혼은 절대 않된다고 하며 그 잔소리는 여전했다. 그러나 얼마 못되어 남편이 죽었고, 다른 남편을 만나 시집을 갔는데 이 사람은 이전 신랑보다 더 엘리트일 뿐만 아니라 더우기 마음 씀씀이가 좋아서 부족한 신부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며 쓸어주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더란다. 가끔 이전 신랑 생각이 나는데 잘 죽었다 생각이 되더란다. 만일 안 죽었으면 그 끔찍한 생활을 어찌할까! 생각하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지옥이 따로 없더란다. 이 이야기는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한 것이다.
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되 의문(문자대로 그 조항을 의지하는 것 ) 의 묵은 것으로 아니하고 ,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다.
1) . 우리의 섬김은 의문에 있지 않다 / 의문이란 문자 그대로 그 조항을 의지하여 섬기는 것인데 이를 의지하여 따라가면 결국 자신은 결코 그 것대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의 절망과 의문에 기록된 죄의 정욕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이 똑같이 의문으로 다가오게 되고 이로 인해서 마음은 절망에 빠져 결국은 사망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조항은 우리에게 결국 죄의 정욕에 빠져 있음을 알게 해주고 그로 인한 의문대로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한다.
그러므로 의문의 율법은 우리에게 절망을 주기 위한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의의 기준은 되나 그 것은 우리가 미칠 수 없는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이다. 따라 가려하면 할수록 더 깊은 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2) 우리의 섬김은 영에 있다. / 영이라 함은 완전한 전인격을 의미한다. 육신의 반대말이 아니다. 정신과 영혼 그리고 온 육신을 포함한 하나님과 관계된 전인격을 의미한다. 마치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이 조약이 아니고 인격적인 관계이듯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성도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결코 외적인 조약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내는 파출부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아내의 섬김도 파출부와 비교해선 않된다. 파출부가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해서 아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신부된 성도가 남편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도 전인격적 서약에 있는 것이지 결코 파출부와 같이 몇시간 일하면 얼마의 보상을 준다는 계약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리석은 비인격적인 신앙에 종종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랑되신 예수님은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무슨 걱정을 하느냐고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것이다. 바로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얻는 것이다. 마치 지쳐있는 아내에게 한마디 남편의 사랑의 고백은 모든 것을 이기게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 종이 상전을 섬기는 것은 외적인 조약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나 자녀가 부모를 섬기는 것은 외적인 조약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가 부모를 섬기는 것이 종만 못할 수는 없다. 물론 외적 일의 양으로 따진다면 더 작을 수는 있겠으나 그 섬김의 질에 있어서는 한 가지를 하더라도 이는 진정한 자유의 사랑에 의해서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섬김이 그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의 신앙의 삶인 것이다.
3. 그러면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 (7-13 ) / 이쯤되면 이제 한가지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율법은 별 쓸모 없는 것이 아닌가 !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만드셨는가 이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있다.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7-11 ) / 율법을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약속 가운데 있는 성도의 삶의 표준을 제시하신 것이다.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분명한 멧세지를 기록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거룩한 율법이라 할 찌라도 이미 부패한 죄인에게는 의의 요구를 달성하기 보다는 죄를 깨달아 최소한의 방어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율법의 요구를 만일 다 행하고자 할 찐대 자신은 그것에 도달할 수 없는 부패한 죄인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다 그러나 나는 죄아래 팔려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도다. 고 기록하고 있다.
4. 이제 바울은 죄아래 팔린 자신의 모습을 적라나하게 고백하고 있다. (12-24 ) / 바울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는 자신의 거듭난 영혼이 간절히 원하는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오히려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깨달은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과 그러한 자신에게 악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때로는 자신을 당황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되어 낙심케 했던 것이다. 바울은 24절에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 하는 자포자기와도 같은 탄식의 고백을 외친다. 본문에서 한가지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 있어서 언급하고자 한다.
1) 먼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내가 아노니.(18 ) / 잘못 생각하면 영은 선하고 육신은 악하다는 영지주의의 주장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부패한 인간 존재의 한계를 고백하는 것으로서 전적인 타락을 말하는 것인데 단지 거듭난 마음의 선을 향한 욕구와 그렇게 따르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구별하여 표현한 것 뿐이다. 오히려 바울은 너희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전이라고 하여 거룩하게 보존하고 해롭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여러 곳에서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강조 되는 것은 거듭난 우리에게 타락한 본성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이 이세상에 살동안 계속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고 한 것이다. 사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너희 마음을 지키라고 했던 것이다. 결론 / 이제 바울은 25절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는 고백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되어진 것이다. 이것은 감사의 제목이다. 곤고한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것이다. 여기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하여서 자칫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해선 않된다. 오히려 바울은 이와같은 육신의 정욕을 쫏는 것을 준엄하게 책망했고 이러한 자는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이는 육신은 죄에 매여 할 수 없이 죄의 법을 섬기는 꼴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전인격적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한다는 감격의 고백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른 신앙이요 참신앙이다. 어떤 이들은 마치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니 차라리 믿지 않겠다고 의로운척 한다. 그러나 이는 복음을 깨닫지 못한 연고요, 아직도 자신이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고백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구속 받은 성도는 죄의 공격이 있어 넘어지고 깨어질 찌라도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로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 께서 피를 흘리셨고 나를 불러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
그러므로 죄를 계속해서 지어도 아무런 부담이 없이 그럴수록 은혜가 더하지 하나님은 다 용서하시는데 뭐 한다면 이는 믿지 않는 자요, 은혜와는 상관이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속 받은 성도는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불의의 병기로 드려선 않되고 오히려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결론을 맺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가장 우리를 낙심케 하고 괴롭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이다. 오늘의 본문은 이 율법의 한계와 필요성 그리고 성도의 삶에 있어서 율법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1. 율법은 사람의 살동안만 그를 주관한다. (1-6 ) / 본문은 율법과의 관계를 죽은 옛 남편으로 비유한다.
예) 남편 있는 여인 /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만 남편의 법(율법)에 구속된다. 그러나 남편이 죽을면 그 법은 더 이상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고 자유케 된다. 다른 남자와 결혼할 지라도 아무도 그를 욕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당시의 여인은 스스로 먹고 살수있는 대책이 전혀 없다. 오직 남편의 그늘 아래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남편이 죽었을 때 그녀가 재가 했다고 해서 아무도 그녀를 음녀라고 욕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모세는 이러한 여인에게 정식 이혼장을 주어서 누구에게든지 결혼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에게 율법이라는 남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율법이라는 남편에게서 벗어나 그리스도께로 시집을 간것이다. 이제 옛 남편 율법은 죽었으므로 더 이상 성도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도의 남편이 되고 오직 새 남편 그리스도의 법에만 매인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봉사하여 섬기며,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성도를 얽매일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오직 성도는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 얽매인 자들인 것이다.
예) 어떤 엘리트 신랑 / 아주 피곤하고 힘이들어 죽겠다. 때로는 자존심 상하여 에라 잘못 왔나보다 하고 이혼할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이 신랑은 이혼은 절대 않된다고 하며 그 잔소리는 여전했다. 그러나 얼마 못되어 남편이 죽었고, 다른 남편을 만나 시집을 갔는데 이 사람은 이전 신랑보다 더 엘리트일 뿐만 아니라 더우기 마음 씀씀이가 좋아서 부족한 신부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며 쓸어주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더란다. 가끔 이전 신랑 생각이 나는데 잘 죽었다 생각이 되더란다. 만일 안 죽었으면 그 끔찍한 생활을 어찌할까! 생각하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지옥이 따로 없더란다. 이 이야기는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한 것이다.
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되 의문(문자대로 그 조항을 의지하는 것 ) 의 묵은 것으로 아니하고 ,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다.
1) . 우리의 섬김은 의문에 있지 않다 / 의문이란 문자 그대로 그 조항을 의지하여 섬기는 것인데 이를 의지하여 따라가면 결국 자신은 결코 그 것대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의 절망과 의문에 기록된 죄의 정욕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이 똑같이 의문으로 다가오게 되고 이로 인해서 마음은 절망에 빠져 결국은 사망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조항은 우리에게 결국 죄의 정욕에 빠져 있음을 알게 해주고 그로 인한 의문대로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한다.
그러므로 의문의 율법은 우리에게 절망을 주기 위한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의의 기준은 되나 그 것은 우리가 미칠 수 없는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이다. 따라 가려하면 할수록 더 깊은 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2) 우리의 섬김은 영에 있다. / 영이라 함은 완전한 전인격을 의미한다. 육신의 반대말이 아니다. 정신과 영혼 그리고 온 육신을 포함한 하나님과 관계된 전인격을 의미한다. 마치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이 조약이 아니고 인격적인 관계이듯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성도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결코 외적인 조약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내는 파출부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아내의 섬김도 파출부와 비교해선 않된다. 파출부가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해서 아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신부된 성도가 남편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도 전인격적 서약에 있는 것이지 결코 파출부와 같이 몇시간 일하면 얼마의 보상을 준다는 계약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리석은 비인격적인 신앙에 종종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랑되신 예수님은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무슨 걱정을 하느냐고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것이다. 바로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얻는 것이다. 마치 지쳐있는 아내에게 한마디 남편의 사랑의 고백은 모든 것을 이기게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 종이 상전을 섬기는 것은 외적인 조약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나 자녀가 부모를 섬기는 것은 외적인 조약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가 부모를 섬기는 것이 종만 못할 수는 없다. 물론 외적 일의 양으로 따진다면 더 작을 수는 있겠으나 그 섬김의 질에 있어서는 한 가지를 하더라도 이는 진정한 자유의 사랑에 의해서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섬김이 그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의 신앙의 삶인 것이다.
3. 그러면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 (7-13 ) / 이쯤되면 이제 한가지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율법은 별 쓸모 없는 것이 아닌가 !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만드셨는가 이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있다.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7-11 ) / 율법을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약속 가운데 있는 성도의 삶의 표준을 제시하신 것이다.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분명한 멧세지를 기록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거룩한 율법이라 할 찌라도 이미 부패한 죄인에게는 의의 요구를 달성하기 보다는 죄를 깨달아 최소한의 방어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율법의 요구를 만일 다 행하고자 할 찐대 자신은 그것에 도달할 수 없는 부패한 죄인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다 그러나 나는 죄아래 팔려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도다. 고 기록하고 있다.
4. 이제 바울은 죄아래 팔린 자신의 모습을 적라나하게 고백하고 있다. (12-24 ) / 바울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는 자신의 거듭난 영혼이 간절히 원하는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오히려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깨달은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과 그러한 자신에게 악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때로는 자신을 당황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되어 낙심케 했던 것이다. 바울은 24절에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 하는 자포자기와도 같은 탄식의 고백을 외친다. 본문에서 한가지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 있어서 언급하고자 한다.
1) 먼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내가 아노니.(18 ) / 잘못 생각하면 영은 선하고 육신은 악하다는 영지주의의 주장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부패한 인간 존재의 한계를 고백하는 것으로서 전적인 타락을 말하는 것인데 단지 거듭난 마음의 선을 향한 욕구와 그렇게 따르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구별하여 표현한 것 뿐이다. 오히려 바울은 너희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전이라고 하여 거룩하게 보존하고 해롭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여러 곳에서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강조 되는 것은 거듭난 우리에게 타락한 본성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이 이세상에 살동안 계속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고 한 것이다. 사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너희 마음을 지키라고 했던 것이다. 결론 / 이제 바울은 25절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는 고백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되어진 것이다. 이것은 감사의 제목이다. 곤고한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것이다. 여기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하여서 자칫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해선 않된다. 오히려 바울은 이와같은 육신의 정욕을 쫏는 것을 준엄하게 책망했고 이러한 자는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이는 육신은 죄에 매여 할 수 없이 죄의 법을 섬기는 꼴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전인격적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한다는 감격의 고백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른 신앙이요 참신앙이다. 어떤 이들은 마치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니 차라리 믿지 않겠다고 의로운척 한다. 그러나 이는 복음을 깨닫지 못한 연고요, 아직도 자신이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고백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구속 받은 성도는 죄의 공격이 있어 넘어지고 깨어질 찌라도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로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 께서 피를 흘리셨고 나를 불러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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