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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실존 (롬7:13-25)

본문

로마서 주석과 강해에 관한 책을 볼 때에,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를 먼저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하였느냐는 그의 신학적인 배경이나, 그 의 사상을 잘 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의 논란은 여지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나라고 하는 것이 바울이냐 아니면 제3자를 가리키느 냐 하는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바울의 것이라고 하면, 바울의 예수를 영접하기 전의 모습이냐 아니 면, 예수를 믿은 다음의 상태를 이야기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변화받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혼란한 상태에 빠져있 을수 있느냐는 논리를 폅니다.그럴듯합니다. 저의 입장은 예수를 믿은 후의 바울의 고백으로 봅니다. 저의 예수를 믿고,목사 가 된 다음에도 때때로 겪게 되는 갈등과 고민을 보아도 그렇고,예수를 오래 믿었 다는 많은 성도들의 엉뚱한 행동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예수믿고 구원받은 성도의 내적인 모순과 갈등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거룩하고 선한가에 대해 서 눈이 열리고 나면, 9절의 말씀처럼 나는 죽고,죄가 살아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율법 때문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13절에 보면-죄로 심히 죄되게 만든다고 했 습니다. 전에는 나의 죄가 조그맣게 보였는데 율법을 알고 나면 엄청난 것으로 닥 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런 상태에 그래로 머물러 있게 됩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 만이 아닙니다.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19절에 보면-'원하는 바 선은', 21절에도 '선을 행하기 원하는 ',22절에도'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즐거워한다는 인정하는 것보다 더 좋 아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율법에 눈을 뜨면,내가 죽고 죄가 살기도 하지만, 선을 행하려고 하는 노력이 생기고,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율법이 자유함을 얻었다고해서 율법이 필요없다는 오해를 해서는 안됩니다.이 말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시간에 먼저 이러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선을 지키고자하는 은혜,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알면 알수록,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율법을 즐거워하면 할 수록,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1) 15절에 원하는 것은 행치 못하고,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게 됨-자신이 자신 을 알지 못함 18절
2)상반된 소원,욕망,법이 내속에 공존하는 것을 봅니다. 17절-'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절에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 본문에서 '내 속에'라는 것은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로 함께 사용 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18절에 육신,23절에 지체라는 말,24절의 사망의 몸은 동일한 의미로서, 이것은 우리의 육체,몸을 말합니다. 이것은 부패성이 있습니다.쉽게 죄를 짓게 됩니다. 어떤 분은 몸을,죄의 작업장이라고 말했습니다. 21절에서 내 속에라는 것은 '자아''영혼'이 아니라, 몸 안에 죄가 거하고 있 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죄는 허락을 받고 들어온 것도 아닙니다. 세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단침입,무단거주하면서도 쫓아 낼수도 없는 무법자가 내 몸 속 에 있다는 것입니다. 25절에는 이해할수 없는 말을 하고 있는데,'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말합니다. 두 개의 존재가 나옵니다. 마음과 육신입니다. 하나는 중생받은 나 자신이고,다른 하나는 옛사람의 흔적이라고 할수 있는 우리 의 몸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만 육신으로는 죄를 짓고 산다는 이 중적인 의미가 아니고, 내가 비록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고, 중생한 심령이지 만,내 마음 속에는 죄에게 쉽게 문을 열어 주는 복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반된 두 실존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괴롭습니다. 갈등을 느낍니다. 갈5:17절에는 이 갈등을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줍니다.'육체의 소욕은 성령님을 거 스리고,성령님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고 합니다.이처럼 두개의 소욕이 서로 거 스리고 대적하다가, 결국은 내가 원하는 선,내가 원하는 순종은 행하지 못하는 패 배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죄의 소원에 따라서 결국 죄를 범하고 만 모순을 바울이 보았습니다. 23절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내가 보도다'고 했습니다. 내 몸의 죄 짓고자 하는 다른 법이, 하나님을 따르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 이 싸우는데 번번히 죄를 짓고자하는 소욕이 이기고,나를 끌어다가 죄의 멍에 아 래에다 집어 던집니다. 이 얼마나 기가막힌 패배입니까 이 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기 안에서 세개의 모순을 봅니다. 이율배반,갈등,패배라는 모순입니다. 괴롭고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고 통스럽습니다. 중생받은 사람으로서 이럴수가 있느냐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롬 5:1절에'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그리스도와 함께 화평을 누리자'고 했습니다. 또 그런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모순이 있습니까 롬 6:6절에서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다시는 죄에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함이니.' 이제는 죄의 종노릇할수 없는 데 어찌 이런 일이 있느냐 7:6절에'율법에서 벗어나서.영의 새로운 것으로.' 성령님의 사람이 된 우리에 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느냐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바울은 너무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까지 돌아갔느냐하면, 나는 구원 받지 못하지 않았느냐 내 가 중생하지 못하지 않았느냐'옛날로 돌아가지 않았느냐'는 절망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14절과 같은 아주 기막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율법은 영적이요,거룩하고 신 령합니다. 거기에 비교해서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에게 팔려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팔렸도다'고 과거로 되었지만,원문에는 '팔려있는'이라는 현재,또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할수 있습니까 바울이 죄의 종이 될수 있습니까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고, 죄의 종노릇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바울이 아닙니까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바울은 이야기 했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된자 가 절대로 죄의 종이 될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자기를 놓고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죄아래 팔렸도 다'고 했습니다. 죄에게 팔린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죄의 종으 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인가 원상복귀되었다는 말인가 그럴수는 없지요. 그러면 무엇입니까 바울은 너무나 모순이 많은 자신을 보면서 절망감을 감정적 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나의 꼴을 보니 죄에게 다시 팔려간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도 감정적인 표현이 많이 들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죄를 많이 범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죄의 종이 된것입니까 아닙니다. 죄를 많이 짓고 보니까, 죄의 종 이 되어 질질 끌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눅 15:19절에 보면 탕자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면서 "나는 이제 아버지에게 돌아 가면 아들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해야지,품군이 되어야지"하고 말합니다. 그 아들이 입으로 무슨 말을 해도 품군은 아닙니다. 그는 엄연한 아들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의 표현이지,사실은 아무리 잘못했어도 아들입니다. 죄를 범했어도 죄의 종이 된 것이 아니라,그렇게 느껴지는 감정의 표현입니다. 이런 자신을 보고 바울은 절규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바울은 위대한 사도입니다. 더구나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바울입니다. 소문으로 듣고,바울을 존경하고 한번 보기를 고대하는 로마의 교인들 에게 이처럼 자신의 적나라한 연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자신의 약함을 나타낼수 있는 것은 위대한 사람 만이 할수 있는 일입니다. 또 그런 약한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를 사도로 믿고 따르며, 순 종하는 성도들도 복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울이 가지고 있는 모순은 없습니까 우리가 정말 예수를 믿고,중생한 사람들이라고 하면,그리고 양심이 있다면,이 바울의 이야기를 보고, 이것은 바로 내이야기야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오호라의 고백은 황목사의 고백이고, 이 오호라의 고백은 여러분의 고백 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았어도, 은사를 많이 받았어도, 예수를 10년을 믿고,20년을 교회에 다녔어도, 다 똑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들, 성경을 많이 배우고 깨달아도 똑 같습니다.육체의 소 욕과 성령님의 소욕의 갈등을 봅니다. 가끔씩 죄를 짓는 패배를 봅니다.이것은 육신 을 입고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누구나 똑 같은것입니다. 믿는 것을 보면 의인인데,하는 것 보면 죄인이요. 또 하는 꼴을 보면 죄인인데, 믿는 것을 보면 의인입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냐 물론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 오는 갈등과 회개의 탄식은 은혜의 한 단면입니다. 죄가 처음에는 방문객처럼 닥아 오지만, 믿음이 조금만 떨어지면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오호라.의 탄식은 믿는 사람에게 만 있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뒤에도 이런 탄식이 없으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오호라의 탄식은 죄를 범한 후에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나옵니다. 완전한 하나님에 비교하면 우리는 너 무 추합니다. 신앙의 훌륭한 위인들을 보면, 깨끗한 생활을 하는데도 자주자주 탄 식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기의 부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탄식은 '은혜 받은 자의'고백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또 있습니다. 24-25절 사이를 보십시요. 금방 울던 아이가,소리 내어 웃는 것고 같습니다.'오호라'하고 탄식하다가 접속 사도 없이 금방 하나님께 감사의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의 모순과 죄의 모습을 보고 갈등합니다. 그러나 이 갈등 의 자리에 오래 있어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천부여.''성령님이여 .애통하게'하면서 늘 울면서 끝나는 신앙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의 부족과 실패와 모순을 깨닫고 탄식하다가도 즉시 예수를 에게도 돌아와 야 합니다. 그리고 기뻐하며 찬송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호라'의 은혜가 있습니까. 즉시 '감사합니다'의 은혜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또 '오호라'의 은혜가 없는 사람은 '감사합니다.'의 은혜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보면서, 우리의 교회를 보면서 회개를 많이 합니다. 우리의 선배들을은 지금보다 죄를 덜 지었는데도 늘 '오호라'탄식이 많았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죄를 더 많이 짓고있는데도 '오호라'의 탄식이 없습니다. '할렐루야''아멘'은 많은데 '오호라'의 탄식은 없습니다. 이것이 정상인가 무엇인가 문제는 없습니까 신학교의 난립-교회의 부패상 교회의 지도자가 이렇게 부패했는데 교인들의 잘못을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호라의 탄식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아멘을 하기 전에 오호라의 탄식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리로다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 뉴키즈 온 더 록-발광하는 여학생들 =부인 "그들을 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면 나도 그들보다 더 발광하고 뛸테니까요 그들이나 뭔 다르겠습니 까" 찬송 8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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