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때와 해질 때 (롬5:5)
본문
오늘 제목은 길게 잡아야 되지만 할 때와 해질 때 라고 줄여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이 제목의 뜻은 이렇습니다. 하고자 할 때와 해질 때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믿고자 할 때와 믿어질 때의 차이점이며, 사랑할 때와 사랑해질 때의 차이점 입니다. 또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할 때와 죄 짓는 것이 어려울 때의 차이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믿고자 노력하고, 사랑하고자 애쓰는 차원이라면 신앙생활은 한없이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어지고 사랑해지면 신앙생활 뿐아니라 우리의 삶은 평안한 것이며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이 벗겨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종종 신앙생활의 괴로움을 사람들은 하소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발을 잘못 들여놨지, 신앙생활이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시작하지 않았았을텐데, 발을 빼자니 지옥 갈 것 같아 빼지 못하겠고 계속하자니 괴롭구나!” 하며 탄식하는 이들의 소리들 말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이 어렵습니까 힘이 들고 고달프신가요 내가 하고자 하는 차원, 즉 믿으려고 애를 쓰고 사랑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여러분의 고통은 가중될 것입니다. 믿어지고 사랑해질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할 수 있어서 힘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고자 애쓰는 것과 믿어지는 것의 차이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임을 알아야 겠습니다. 구약의 믿음은 인간이 애를 써야되고 힘써야 되는 차원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성경의 강권하는 힘에 이끌려 행해지는 차원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을 살펴 보십시요. 그들은 율법을 미간에 붙이고 손목에 걸고 문설주에 붙이며 율법을 지키고자 애를 썼고 하루에 세번씩 정해놓고 기도를 올렸으며 음식도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려가면서 철저하게 사람의 힘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최선을 다했던 그들에게 주님은 무엇이라 평가를 내렸습니까 구약에서 최고의 열심을 가지고 율법과 계명을 좆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이나 율법사들에게 주님은 무엇이라 말씀했습니까 회칠한 무덤과 같다 했고 열매없이 잎만 무성하다고 책망했습니다. 형식적이며 습관적인 그들의 신앙생활을 주님도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힘으로 노력으로 애써서 믿으려고 했고 노력했던 그들의 열매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으며 주님의 마음을 괴롭게만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구약의 사람들은 인간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결코 나타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애써서 자신의 몸을 불살라 준다 할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신약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지금은 구약의 형식적이고 율법적이며 사람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애를 쓰고 노력하는 때가 아닙니다. 성령님의 강권하는 감동속에서 자발적이며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를 갖게 되는 시대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힘으로 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시대라는 사실 입니다.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는 스가랴서의 말씀대로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 신앙생활 하는 때 입니다. 주님께서 말씀 하였습니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내가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것이 복되다고 말입니다. 즉 주께서 하늘나라에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이 보혜사 성령님을 받으면 믿어질 수 있고 사랑해질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진정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권세를 얻게 되면 너무도 신앙생활이 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힘이라면 명절때 마다 하는 씨름판의 씨름선수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선수들은 힘이 대단하지만 그 선수들을 말 한마디로 통제하는 사람은 권세를 갖은 심판인 것입니다. 150Kg, 200Kg이 넘는 힘 센 선수들도 심판의 말 한마디에 앉고 일어서고 경고를 받기도하고 퇴장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힘과 권세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진정 구약과 신약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하고자 할 때와 해질 때의 차이점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쨰는 믿을 때와 믿어질 때 입니다. 믿을 때란 내가 믿기위해 힘쓰고 애쓸 때를 말합니다. 반면 믿어질 때란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확신되어지는 믿음을 말합니다. 주님의 우편에 달려있던 강도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실로 믿어지는 믿음을 가졌던 사람 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처참하고도 초라하게 죽어가는 한 청년을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그의 구세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지는 믿음의 축복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어찌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자신의 주로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에베소서 2장8절의 말씀과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의심 많았던 도마가 예수님의 손에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은 다음 비로소 믿어지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믿어지는 감격 속에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힘차게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믿어질 때만이 확신이 있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어지는 믿음의 차원에 들어가면 결코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삶의 고통이나 풍파 가운데서 주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 믿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차원에서 우리는 질병이나 환란이나 핍박이라 할지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처럼 유라굴라 라는 폭풍 속에서 건져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처럼 사자굴 속에서 지켜주실 것이 믿어지기 때문 입니다. 아브라함 처럼 아삭이 죽는다 할지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 믿어지기 때문 입니다. 이제 믿어지는 신앙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합시다. 또한 인생의 길을 걸으십시요. 복음 안에 있는 참된 소망과 평강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어지는 차원에서만이 신앙의 길에서 이탈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좁은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할 때와 사랑해 지는 차원입니다. 사랑하고자 할때는 우리를 한 없이 슬프게 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내가 사랑하려고 하면 할 수록 미움이 더욱 생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 입니다. 또한 우리는 나의 힘쓰고 애쓰는 것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차원에 들어 갈 수 없음을 알야야 됩니다. 힘쓰고 애써서 나타나는 사랑은 그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게 되고 사랑해지는 체험 속에서만이 진정한 용서와 긍휼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은사로 우리의 심령 속에 부어진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자유로울 것이고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에서가 20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때 그는 미움과 울분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에서가 사랑해지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해지는 능력 앞에 그의 얼어 붙었던 마음도 봄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으며 그와 함께 야곱에 대한 형제애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사랑해지는 체험과 함께 에서는 용서와 사랑이 주는 평강과 풍성함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사랑하기가 힘이 듭니까 너무도 어렵게 생각 되시나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부어지도록 하십시요. 사랑해질 때만이 참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강팍하고 냉정한자 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 사랑해지는 차원이 되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라고 불려지는 요한은 어떤 사람이 였습니까 사마리아 동네를 통과하려고 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이 유태인 이므로 통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에 화가난 요한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저들을 살라 버릴까요” 하며 사랑과는 거리가 먼 말을 했던 사람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사랑이 부어지고 사랑해지는 심령이 되어서는 아무든지 사랑해지는 마음이 없다면 그 속에 하나님의 영생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법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뜻과 성품과 힘과 목슴을 다해 사랑하라 하셨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차원은 이렇게 깊건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지 염려가 아니될 수 없습니다. 롯의 사위들이 롯의 권고를 농담으로 들었듯이 오늘 우리도 주님의 이 새 계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겠습니다. 주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가 한 말은 일점일획 이라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 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나십시요! 근신 하십시요! 여러분의 사랑이 하나님 보시기에 족한 것인가요 사랑해지는 차원에서 중심으로 사랑하고 중심으로 용서하고 있나요! 주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의 비유를 통하여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 이었습니까 “너희도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천부께서 이와같이 하시리라”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려고 애쓰는 형식적인 차원이라면 천부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심령을 소유해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할 때와 죄를 이길 때 입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났음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 난 자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다는 뜻인 것이지요. 또한 3장 6절에서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이렇게 계속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사실로 볼 때 우리는 진정 죄로부터 승리해야 될텐데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겠습니까 율법의 명령으로 되겠습니까 국법으로도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세가 부어질 때 만이 능히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써서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하면 할 수록 죄의 유혹은 더욱 달콤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경험했지 않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죄가 다스려지고 죄를 이기는 권세를 받아 가지도록 합시다. 우리가 진정 죄로 부터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죄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 속에서 쫓겨나는 위대한 차원을 경험해야만이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려서 믿어지고 사랑해지고 죄를 이기는 힘을 받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만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에베소 기자의 말씀과 같이 오직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 때만 진정한 신앙의 의미를 맛 보게 되는 것입니다.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된다는 말씀은 우리가 꼭 명심해야 될 결론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자다가 깰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신앙의 잠을 깨우고 일어나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성령님충만 할 수 있습니까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 이러한 자에게 좋은 것 즉 성령님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으니, 오직 성령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이 되어 그 나라와 그 의를 날마다 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힘으로 노력으로 애써서 믿으려고 했고 노력했던 그들의 열매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으며 주님의 마음을 괴롭게만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구약의 사람들은 인간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결코 나타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애써서 자신의 몸을 불살라 준다 할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신약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지금은 구약의 형식적이고 율법적이며 사람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애를 쓰고 노력하는 때가 아닙니다. 성령님의 강권하는 감동속에서 자발적이며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를 갖게 되는 시대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힘으로 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시대라는 사실 입니다.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는 스가랴서의 말씀대로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 신앙생활 하는 때 입니다. 주님께서 말씀 하였습니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내가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것이 복되다고 말입니다. 즉 주께서 하늘나라에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이 보혜사 성령님을 받으면 믿어질 수 있고 사랑해질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진정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권세를 얻게 되면 너무도 신앙생활이 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힘이라면 명절때 마다 하는 씨름판의 씨름선수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선수들은 힘이 대단하지만 그 선수들을 말 한마디로 통제하는 사람은 권세를 갖은 심판인 것입니다. 150Kg, 200Kg이 넘는 힘 센 선수들도 심판의 말 한마디에 앉고 일어서고 경고를 받기도하고 퇴장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힘과 권세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진정 구약과 신약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하고자 할 때와 해질 때의 차이점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쨰는 믿을 때와 믿어질 때 입니다. 믿을 때란 내가 믿기위해 힘쓰고 애쓸 때를 말합니다. 반면 믿어질 때란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확신되어지는 믿음을 말합니다. 주님의 우편에 달려있던 강도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실로 믿어지는 믿음을 가졌던 사람 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처참하고도 초라하게 죽어가는 한 청년을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그의 구세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지는 믿음의 축복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어찌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자신의 주로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에베소서 2장8절의 말씀과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의심 많았던 도마가 예수님의 손에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은 다음 비로소 믿어지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믿어지는 감격 속에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힘차게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믿어질 때만이 확신이 있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어지는 믿음의 차원에 들어가면 결코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삶의 고통이나 풍파 가운데서 주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 믿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차원에서 우리는 질병이나 환란이나 핍박이라 할지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처럼 유라굴라 라는 폭풍 속에서 건져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처럼 사자굴 속에서 지켜주실 것이 믿어지기 때문 입니다. 아브라함 처럼 아삭이 죽는다 할지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 믿어지기 때문 입니다. 이제 믿어지는 신앙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합시다. 또한 인생의 길을 걸으십시요. 복음 안에 있는 참된 소망과 평강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어지는 차원에서만이 신앙의 길에서 이탈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좁은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할 때와 사랑해 지는 차원입니다. 사랑하고자 할때는 우리를 한 없이 슬프게 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내가 사랑하려고 하면 할 수록 미움이 더욱 생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 입니다. 또한 우리는 나의 힘쓰고 애쓰는 것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차원에 들어 갈 수 없음을 알야야 됩니다. 힘쓰고 애써서 나타나는 사랑은 그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게 되고 사랑해지는 체험 속에서만이 진정한 용서와 긍휼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은사로 우리의 심령 속에 부어진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자유로울 것이고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에서가 20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때 그는 미움과 울분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에서가 사랑해지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해지는 능력 앞에 그의 얼어 붙었던 마음도 봄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으며 그와 함께 야곱에 대한 형제애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사랑해지는 체험과 함께 에서는 용서와 사랑이 주는 평강과 풍성함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사랑하기가 힘이 듭니까 너무도 어렵게 생각 되시나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부어지도록 하십시요. 사랑해질 때만이 참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강팍하고 냉정한자 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 사랑해지는 차원이 되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라고 불려지는 요한은 어떤 사람이 였습니까 사마리아 동네를 통과하려고 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이 유태인 이므로 통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에 화가난 요한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저들을 살라 버릴까요” 하며 사랑과는 거리가 먼 말을 했던 사람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사랑이 부어지고 사랑해지는 심령이 되어서는 아무든지 사랑해지는 마음이 없다면 그 속에 하나님의 영생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법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뜻과 성품과 힘과 목슴을 다해 사랑하라 하셨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차원은 이렇게 깊건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지 염려가 아니될 수 없습니다. 롯의 사위들이 롯의 권고를 농담으로 들었듯이 오늘 우리도 주님의 이 새 계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겠습니다. 주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가 한 말은 일점일획 이라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 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나십시요! 근신 하십시요! 여러분의 사랑이 하나님 보시기에 족한 것인가요 사랑해지는 차원에서 중심으로 사랑하고 중심으로 용서하고 있나요! 주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의 비유를 통하여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 이었습니까 “너희도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천부께서 이와같이 하시리라”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려고 애쓰는 형식적인 차원이라면 천부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심령을 소유해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할 때와 죄를 이길 때 입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났음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 난 자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다는 뜻인 것이지요. 또한 3장 6절에서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이렇게 계속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사실로 볼 때 우리는 진정 죄로부터 승리해야 될텐데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겠습니까 율법의 명령으로 되겠습니까 국법으로도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세가 부어질 때 만이 능히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써서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하면 할 수록 죄의 유혹은 더욱 달콤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경험했지 않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죄가 다스려지고 죄를 이기는 권세를 받아 가지도록 합시다. 우리가 진정 죄로 부터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죄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 속에서 쫓겨나는 위대한 차원을 경험해야만이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려서 믿어지고 사랑해지고 죄를 이기는 힘을 받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만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에베소 기자의 말씀과 같이 오직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 때만 진정한 신앙의 의미를 맛 보게 되는 것입니다.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된다는 말씀은 우리가 꼭 명심해야 될 결론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자다가 깰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신앙의 잠을 깨우고 일어나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성령님충만 할 수 있습니까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 이러한 자에게 좋은 것 즉 성령님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으니, 오직 성령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이 되어 그 나라와 그 의를 날마다 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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