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만이 필요합니다 (롬3:19-31)
본문
지난시간 우리는 죄악에 깊이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생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흔히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의로운 사람인것으로 여기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예수님당시의 유대교나 혹은 초대교회에서 조차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때문에 소위 율법을 잘 지키기만 하면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편재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하여서는 결단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없음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심은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을 얻고 의를 얻게 하시려는 의도가 아니라 우리의 능력으로는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서 3장 19절로 20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으로는 도저히 우리가 하나님의 의 앞에 똑바로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렇게 연약하고 악한 모습을 스스로 깨닫게하시기 위하여 율법을 유효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19절의 입을 막고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이 뜻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닫는다라고 번역된 프라게라는 헬라어단어는 막는다는 의미의 프라쏘의 단순과거 가정법의 용법을 가진단어입니다. 이는 다시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문을 닫아버리신다는 의미이며, 더욱 자세히 말하면 우리로하여금 핑계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자인하고 더이상 변명을 하지 못하도록 묶어놓는 검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의 역할을 성경은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합니다. 몽학선생이란유대의 관습중 주인의 상속자를 상속이 가능한 나이까지 개인교수를 해주는 후견인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함 이니라(갈3,24)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능력으로 부터 능히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고쳐주고 하나님의 올바른 의의 길을 제시하는 후견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차지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자신의 의를 쌓아간 율법주의자들의 모든 노력은 헛된것이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려 했던 거의 모든 율법주의자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장신구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했습니다. 한결같이 자신이 율법의 조문 조문들을 잘 지키고 있음을 자랑했고, 어쩔수 없이 율법을 못지킬 수 밖에 없는 자들을 마구 멸시했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외시켰고 자신들만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자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자그마치 여섯번이나 책망하고 있으며 특히 마태복음 23장27절에 회칠한 무덤과 같은자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이 유일한 나니님을 향한 길이라고 목숨처럼 귀중하게 여기던 그 율법을 통해 도저히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데 유효한 것이지 절대로 우리를 하나님의 의앞에 올바로 설 수 있게 할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선포합니다. 인간은 결단코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없습니다. 특히 율법을 통하여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향하여 당신은 내 기준에 비추어 유죄요! 그리고 그 죄질은 사형에 해당하오!하고 우리의 위선과 죄악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이들은 의를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실 세상같으면야 돈으로 얼마든지 의를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신분체계와 권력이 등장하면서 함께 등장하여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뇌물입니다. 인간의 역사이래 수많은 뇌물들이 역사를 수없이 바꾸어 놓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뇌물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죽음의 길로 한없이 떨어지다가 노새의 꾸중을 듣고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발람의 기록이 있습니다. 발락의 뇌물에 넘아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노새를 타고 가던 그 발람의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죽음의 사자 그 죽음의 사자을 보고서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 노새를 향하여 채찍질을 해대던 그 발람은 결국 노새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서야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선지자로 하여금 적국의 왕을 향해 자신의 조국을 저주하게끔 만들 수 있었던 이 뇌물이 야말로 최고의 매혹적인 것이었습니다. 진정 이 재물만 가진다면 무슨일이든지 다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제 동학농민란을 그린 개벽이라는 영화를 T.V를 통해 잠깐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계속하여 동학교도들이 옥에 갖히면 뇌물을 주고 석방시키는 장면들이 수십번이나 그려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때문에 탈옥하여 많은 생명을 죽이고 인질극을 벌였던 어떤 죄수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유명한 신조어를 남겼는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돈을 위하여 자신의 평생을 바쳐버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이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일도 서슴없이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주머니에 있는 2만원을 훔치기 위해 사람을 죽여버린 어떤 청소년의 강도기사가 우리의 마음을 이토록 암울하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이 재력이 통할지는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코 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을 더 많이 내면 더 거창한 능력을 행해준다는 어떤 신방(제주도의 무당들의 굿을 이렇게 부릅니다)들의 잡신과 같이 돈을 좋아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들의 천냥의 헌금보다도 가난한 과부의 두렙돈 헌금을 더욱 귀중하게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잔신들이 옳게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그 찜찜함을 돈으로 메꾸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재물은 거들떠도 보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이런 행위는 마치 부모노릇 제대로 못하는 부모들이 엏게 해서든 좋은 선물로 자녀들의 마음을 사려는 잘못된 노력과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교회에서보면 제대로 믿지못해도 있는사람들이 대접받고 힘도 쎄던데요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사에게 인정받고 교우들에게 인정받을 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코 인정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 날에 이렇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아무리 많은 헌금이 드려진다 해도 하나님 의 의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한 심령은 결단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서 견딜 수 없습니다. 또한 어떤이들은 노력과 봉사로 하나님의 의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의앞에 올바로 서지 못한 채로 드려지는 봉사와 헌신은 결국 자신의 바벨탑을 쌓는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시간 하나님의 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난 의 바로 이것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의는 세상 모든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거기에는 있는자와 없는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힘센자와 약한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율법이 있는자와 없는자의 구별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나타난 구원의 복음을 오직 아멘으로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것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석학 칼 바르트는 이것을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진실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이 하나님의 진실을 우리가 진실되게 소유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두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셨던 신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와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이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고통 당하셨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40일간 많은이들에게 증거를 남기시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우편에서 중보해 주시고 또한 마지막날에 재림하셔서 우리를 심판하신 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끝까지 참으셨고, 무한한 사랑을 베푸셨으며, 끝까지 용서하셨고 또한 지금도 용서하고 계시며, 우리에게도 끝없는 용서로 화목케하는 직책을 또한 주셨음을 믿어야만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모든 역사와 가르침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단 한가지의 길은 단지 그분의 이 모든 사역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율법이 개입될 수도 없습니다. 그 속에는 물질이 개입될 수도 없습니다. 그 속에는 어떤 친절도, 봉사도, 헌신도 게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그 진실을 우리 마음 중심에 받아들이는 그것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은 우리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우리의 그 어떤 노력과 공로로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습니다. 오짓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서만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율법이나, 헌금이나, 봉사와 헌신이 필요없는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요. 오늘 본문 마지막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 앞에 올바로 서게된 우리들은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기에 하나님의 그 긍휼에 감사하는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는데는 철저히 무익했던 율법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게된 이 순간에는 오히려 굳게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할 우리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데는 철저히 무익했던 재물과 헌신과 봉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게된 이 순간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야 할 우리의 정성이 되었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 피스티스는 안다는 단어 그노시스와 병행되어 사용되어졌습니다. 다시말해서 그를 믿는다는 사실은 그에 대해서 철저히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를 안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에 대해 몇가지 사실들을 목격했거나 경험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안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의 그 앎에 대한 결과도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그를 믿는다거나 그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에따라 모든 행동역시 따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가 신용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안다 혹은 믿는다라고 할 수 있으려면 그를 위해 보증도 서줄 수 있고, 빌려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사실도 마찬가지 입니다. 단지 그분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다는 것을 알거나 믿는다고 표현하느데 그치지 않고 마음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으로 끝까지 그 신앙을 움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목하라고 하셨음을 아는데 그치지 않고 실로 자신의 삶의 일부를 버려가면서라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분이 땅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진실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와 헌신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는 그 하나님의 진실을 나의 것으로 확실히 믿는 믿음속에 가능한 것입니다. 단지 믿습니다 하는 고백이 아니요 참 의로운 열매를 맺는 믿음의 확신 속에 꽃피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열매를 우리의 삶속에 소유했습니까 만일 그 증거를 보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 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5-17)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으로는 도저히 우리가 하나님의 의 앞에 똑바로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렇게 연약하고 악한 모습을 스스로 깨닫게하시기 위하여 율법을 유효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19절의 입을 막고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이 뜻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닫는다라고 번역된 프라게라는 헬라어단어는 막는다는 의미의 프라쏘의 단순과거 가정법의 용법을 가진단어입니다. 이는 다시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문을 닫아버리신다는 의미이며, 더욱 자세히 말하면 우리로하여금 핑계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자인하고 더이상 변명을 하지 못하도록 묶어놓는 검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의 역할을 성경은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합니다. 몽학선생이란유대의 관습중 주인의 상속자를 상속이 가능한 나이까지 개인교수를 해주는 후견인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함 이니라(갈3,24)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능력으로 부터 능히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고쳐주고 하나님의 올바른 의의 길을 제시하는 후견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차지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자신의 의를 쌓아간 율법주의자들의 모든 노력은 헛된것이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려 했던 거의 모든 율법주의자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장신구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했습니다. 한결같이 자신이 율법의 조문 조문들을 잘 지키고 있음을 자랑했고, 어쩔수 없이 율법을 못지킬 수 밖에 없는 자들을 마구 멸시했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외시켰고 자신들만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자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자그마치 여섯번이나 책망하고 있으며 특히 마태복음 23장27절에 회칠한 무덤과 같은자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이 유일한 나니님을 향한 길이라고 목숨처럼 귀중하게 여기던 그 율법을 통해 도저히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데 유효한 것이지 절대로 우리를 하나님의 의앞에 올바로 설 수 있게 할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선포합니다. 인간은 결단코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없습니다. 특히 율법을 통하여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향하여 당신은 내 기준에 비추어 유죄요! 그리고 그 죄질은 사형에 해당하오!하고 우리의 위선과 죄악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이들은 의를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실 세상같으면야 돈으로 얼마든지 의를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신분체계와 권력이 등장하면서 함께 등장하여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뇌물입니다. 인간의 역사이래 수많은 뇌물들이 역사를 수없이 바꾸어 놓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뇌물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죽음의 길로 한없이 떨어지다가 노새의 꾸중을 듣고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발람의 기록이 있습니다. 발락의 뇌물에 넘아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노새를 타고 가던 그 발람의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죽음의 사자 그 죽음의 사자을 보고서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 노새를 향하여 채찍질을 해대던 그 발람은 결국 노새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서야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선지자로 하여금 적국의 왕을 향해 자신의 조국을 저주하게끔 만들 수 있었던 이 뇌물이 야말로 최고의 매혹적인 것이었습니다. 진정 이 재물만 가진다면 무슨일이든지 다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제 동학농민란을 그린 개벽이라는 영화를 T.V를 통해 잠깐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계속하여 동학교도들이 옥에 갖히면 뇌물을 주고 석방시키는 장면들이 수십번이나 그려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때문에 탈옥하여 많은 생명을 죽이고 인질극을 벌였던 어떤 죄수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유명한 신조어를 남겼는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돈을 위하여 자신의 평생을 바쳐버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이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일도 서슴없이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주머니에 있는 2만원을 훔치기 위해 사람을 죽여버린 어떤 청소년의 강도기사가 우리의 마음을 이토록 암울하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이 재력이 통할지는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코 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을 더 많이 내면 더 거창한 능력을 행해준다는 어떤 신방(제주도의 무당들의 굿을 이렇게 부릅니다)들의 잡신과 같이 돈을 좋아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들의 천냥의 헌금보다도 가난한 과부의 두렙돈 헌금을 더욱 귀중하게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잔신들이 옳게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그 찜찜함을 돈으로 메꾸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재물은 거들떠도 보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이런 행위는 마치 부모노릇 제대로 못하는 부모들이 엏게 해서든 좋은 선물로 자녀들의 마음을 사려는 잘못된 노력과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교회에서보면 제대로 믿지못해도 있는사람들이 대접받고 힘도 쎄던데요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사에게 인정받고 교우들에게 인정받을 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코 인정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 날에 이렇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아무리 많은 헌금이 드려진다 해도 하나님 의 의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한 심령은 결단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서 견딜 수 없습니다. 또한 어떤이들은 노력과 봉사로 하나님의 의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의앞에 올바로 서지 못한 채로 드려지는 봉사와 헌신은 결국 자신의 바벨탑을 쌓는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시간 하나님의 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난 의 바로 이것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의는 세상 모든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거기에는 있는자와 없는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힘센자와 약한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율법이 있는자와 없는자의 구별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나타난 구원의 복음을 오직 아멘으로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것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석학 칼 바르트는 이것을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진실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이 하나님의 진실을 우리가 진실되게 소유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두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셨던 신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와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이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고통 당하셨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40일간 많은이들에게 증거를 남기시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우편에서 중보해 주시고 또한 마지막날에 재림하셔서 우리를 심판하신 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끝까지 참으셨고, 무한한 사랑을 베푸셨으며, 끝까지 용서하셨고 또한 지금도 용서하고 계시며, 우리에게도 끝없는 용서로 화목케하는 직책을 또한 주셨음을 믿어야만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모든 역사와 가르침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단 한가지의 길은 단지 그분의 이 모든 사역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율법이 개입될 수도 없습니다. 그 속에는 물질이 개입될 수도 없습니다. 그 속에는 어떤 친절도, 봉사도, 헌신도 게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그 진실을 우리 마음 중심에 받아들이는 그것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은 우리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우리의 그 어떤 노력과 공로로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습니다. 오짓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서만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율법이나, 헌금이나, 봉사와 헌신이 필요없는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요. 오늘 본문 마지막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 앞에 올바로 서게된 우리들은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기에 하나님의 그 긍휼에 감사하는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는데는 철저히 무익했던 율법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게된 이 순간에는 오히려 굳게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할 우리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데는 철저히 무익했던 재물과 헌신과 봉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게된 이 순간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야 할 우리의 정성이 되었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 피스티스는 안다는 단어 그노시스와 병행되어 사용되어졌습니다. 다시말해서 그를 믿는다는 사실은 그에 대해서 철저히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를 안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에 대해 몇가지 사실들을 목격했거나 경험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안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의 그 앎에 대한 결과도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그를 믿는다거나 그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에따라 모든 행동역시 따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가 신용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안다 혹은 믿는다라고 할 수 있으려면 그를 위해 보증도 서줄 수 있고, 빌려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사실도 마찬가지 입니다. 단지 그분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다는 것을 알거나 믿는다고 표현하느데 그치지 않고 마음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으로 끝까지 그 신앙을 움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목하라고 하셨음을 아는데 그치지 않고 실로 자신의 삶의 일부를 버려가면서라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분이 땅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진실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와 헌신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는 그 하나님의 진실을 나의 것으로 확실히 믿는 믿음속에 가능한 것입니다. 단지 믿습니다 하는 고백이 아니요 참 의로운 열매를 맺는 믿음의 확신 속에 꽃피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열매를 우리의 삶속에 소유했습니까 만일 그 증거를 보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 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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