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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치 못한 죄 (롬1:19-25)

본문

로마서는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여호와 하나님의 대책과 그 은혜를 보여줍니다. 다시말해, 처음에는 우리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 우리를 적나라하게 벗기십니다. 두번째는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를 성령님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마지막에는 우리를 그의 제단 위에 올려진 거룩한 산제물이 되게 하십니다. 로마서 내용이 이같이 네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보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난주 18절에서 살펴본 것은, 인간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있다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저주요, 죽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을 잘못하였길래 하나님이 그토록 진노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한 해답이 오늘 본문 가운데 적나라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들이 얼마나 악하면 내가 진노하겠는가 똑똑히 보여주지!’라고 하면서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을 사정없이 하나하나 벗겨놓는 것과 같습니다. 병원에 엑스레이는 우리 몸 속에 있는 이상을 모두 숨김없이 찍어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은 우리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내가 예수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여기에 나오는 내용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하고 스스로 태연스럽게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안믿고를 떠나서 자연인의 자리로 돌아가 인간 본래의 모습을 직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입버릇처럼 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이 환하게 알고 있는 자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자신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앞으로 더욱더 바싹 다가가게 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18절 중반절에 보면, “모든 경건치 않은”죄입니다. 경건치 못한 죄에 대한 설명이 19-25절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경건치 않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불경건을 영어로 Godlessness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라는 God에, 없다는 의미인 less와 명사형 접미사인 ness를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글자 그대로 읽는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시53:1)“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같은 경우를 가리켜 불경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경건의 죄가 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말씀해 주는 구절이 21절입니다. (롬1: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불경건의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다음 21절이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롬1: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하고 등을 돌리는 것, 바로 이것이 불경건입니다. 그러니까, 불경건은 하나님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 죄가 아주 고약한 까닭이 있습니다. 21절 초두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면서도 모른척 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르고 지은 죄는 비교적 추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쁜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은 고약한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르고 짓는 죄보다도 알고 짖는 죄값이 더 무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인정하셨습니다. (눅12:47-48)“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래서 아예 성경을 배우지 않고 무식하는 편이 하나님 앞에서 때때로 훨씬 유리하다는 오판을 하여 말씀을 배우고 가까이 하는 것을 멀리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미 장성해야 될 때가 지났는데도 고의적으로 유치한 떼를 벗어버리지 않는 경우에 근심의 대상이 됩니다. 이때의 문제는 더 큰 축복과 은혜를 누려야 하는데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삶이 고달프고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자연 상태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정말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불꽃 튀기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특히, 칼바르트와 부루너의 논쟁이 유명합니다. 칼바르트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워낙 마음이 타락하고 썩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다’고 아예 부정해 버렸습니다. 반면에 부루너는; `인간이 아무리 부패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마음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학자들의 말에 귀를 귀울이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 속을 꿰뚫어 보시는 그분께서 우리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9절에 분명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롬1: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이 말씀을 간단히 설명하면,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그의 위엄을 깨달을 수 있는 이해력을 심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 미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미개인이라 할지라도 신을 찾는 종교의 씨앗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상의 역사가 시작되던 날부터 지금까지 종교가 없는 부족이나 도시, 국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계심을 아는 의식은 인간의 골수에까지 깊이 박혀 있어서 그것을 지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차라리 천성을 바꾸는 편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얼마가지 않아서 본능적으로 자기의 엄마 아빠를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롬1: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물 위에 자기의 영광을 보여줄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더는 말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둔한 사람이라도 못보았다거나 모른다는 구실을 내세울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04편을 기록한 저자는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라고 매우 문학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우주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빛이 가득하고 그 빛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주에 가득한 빛으로 화려한 복장을 만들어 입으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같은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온 우주 안에 하나님의 빛이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고개를 돌릴래야 돌릴 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 우주 만물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이 계시는 궁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궁전을 거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궁전 안에 사는 사람이 궁전에 계시는 왕을 모른다고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이와같이 우리가 삼라만상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 삼라만상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이 지닌 신비스러움도 창조자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는 큰 증거가 됩니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절묘한 하나님의 솜씨를 우리는 입과 눈으로부터 시작해서 말톱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찾을 수 있을 만큼 우리 몸에는 가득하다,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무수한 솜씨로 아릅답게 꾸며진 공장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측량할 수없는 부요함이 넘쳐 흐르는 창고를 가지고 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사지백체를 보아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연만물을 보나 우리 자신의 몸을 보나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그 원인으로 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을 창조하셨으므로 그것을 무한하신 권능으로 유지하시고 지혜로 다스리시며 선으로 보존하고 계십니다. 이름없고 하찮은 풀 한포기를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마음 속에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19-20절에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신론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능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고, 이 삼라만상은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교과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라서 그분을 영화롭게 못했다는 논리는 절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도 섬기지 않을 뿐입니다. 자기들의 생각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는 줄 알면서도 고의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는 불경죄를 범할까요 그 이유가 21절에 나옵니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우선, 그 첫째 이유로, 인간의 마음의 죄로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욕망의 잡초가 마음을 온통 뒤덮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는 알지만 그분을 영화롭게 할 만큼 능력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22절에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혜가 뭡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칭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거짓 지혜를 말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것보다 순종하지 않는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멀리 떠날까 어떻게 하면 그의 간섭을 덜 받을까 어떻게 하면 마음대로 살 수 있을까 이것을 궁리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자칭 지혜롭다고 하는 자가 찾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압니가 우상입니다. 23-25절까지의 내용이 바로 우상숭배에 대한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의 눈에는 우상 숭배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편해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23절에 보면, (롬1: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참된 지혜를 거부하고 자기의 지혜대로 살겠다고 택한 길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본질상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섬기기 편한 신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편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에게 있어서 창조자 하나님은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할 때 엄하게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요구는 부패한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에게 대단히 거추장스러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 이 부담스러운 하나님이 안보 이는 곳으로 도망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이래서 결국 자기도피처를 찾게 된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인데 비하여 우상은 비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과 같은 것을 전혀 요구하지 않습니다. 불상 앞에 서서 회개하고 통곡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없지요 사람들이 우상을 좋아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은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멀리하기를 원합니다. 부담스러운 하나님 대신 편리한 신을 찾아 다니다가 얻은 것이 우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상은 인간의 허망한 생각과 공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고대인들은 형상을 가진 우상을 선호했습니다. 그들은 짐승이나 일월성신이나 사람의 모양으로 형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반면에 오늘날 현대인의 우상은 형상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현대인들은 상당히 수준이 높아서 뭘 만들어 놓고 절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우상을 섬기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기가 섬기기 편리한 신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우상숭배 안에 감추어진 본질상의 특징은 마음의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24절에; (롬1: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정욕은 쾌락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정욕은 특히 금지된 쾌락을 좋아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악착같이 하기 싫어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은 기어이 하고 싶어하는 부패한 마음입니다. 속담에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할때 더욱 쾌감을 느끼는 못된 근성이 있습니다. 24절 중간에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성적 타락과 결부시켜 말씀하고 있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성적 타락은 우상숭배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고대 로마나 고린도는 우상의 도시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성적으로 매우 문란했던 도시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겉으로는 신을 섬긴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쾌락을 즐기기 위해 무서운 죄를 범하는 남녀가 득실거렸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숭배를 하면 할수록 현대인들은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는 함정에 빠집니다. 우상숭배 안에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문제에 대한 증거들은 오늘날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운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New Age Movement인데, 우리 말로 번역하면 새시대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접어들어 기독교 문명이 쇠퇴해가면서 동양에서 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된 운동이라고 합니다. 힌두교를 위시해서 불교, 유교, 도교 등의 모든 동양종교가 혼합된 것입니다. 이것의 가장 큰 특징은 범신론입니다. 다시말해, `사람은 신이요, 신은 곧 사람이다! 그리고 우주만물 역시 신이다!’라는 사상이 그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만물 안에 편재해 있는 신의 숫자가 무려
3,300만이 넘는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것은 역사상 나타난 우상숭배 중에서 가장 지독한 우상숭배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섬기는 우상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을 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관심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신이라고 생각할 때에 자연히 인간은 신처럼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망상을 하게 됩니다. 이 잠재력만 개발하면 누구나 굉장히 행복해질 수가 있을 것이라는 공상에 빠집니다. 그래서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자기를 신으로 착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고안해낸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예를 든다면, 최면술, 마인드콘트롤, 강령술, 예언, 점성술, 요가 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즈음 이 운동이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번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이 운동에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영화롭게 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상숭배를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안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는 교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를 끌여들일 수밖에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23절을 보십시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오하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여기에 “바꾸었다”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과 바꾸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피조물로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다음에 또 25절을 보십시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이 말씀에서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만큼 무서운 죄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상숭배 문제를 놓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생명을 걸고서 싸웠던 것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라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우상 앞에 절하라는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우리가 풀무불에 들어가서 타죽는 한이 있다고 할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하면서 결사 각오로 대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30년대 주기철 목사님은 일본에 강제로 일본 천황을 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하자 강단에서 피맺힌 절규를 했습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일본의 신사에 절하지 못합니다. 드리리이다. 드리리이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끝까지 저항하다가 감옥에 끌려가서 6년 동안 고생하면서 갖가지 잔인한 고문을 당하던 중에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이름만을 높이려고 하는 이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25절을 보십시다. 사도 바울이 소리 높에서 무엇이라고 찬송하고 있습니까 “주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그렇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바울처럼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는 행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찬양하는 참으로 복된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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