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그 자체 (롬1:26-32)
본문
방금 읽은 본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내용들 뿐입니다. 입에 담기조차 곤란한 죄의 이름들이 줄줄이 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복잡 다단한 세상을 살면서 정신적으로 몹시 시달리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피하고 싶어하는 내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에릭슨이라는 신학자는 현대인들의 죄를 논하기 어려운 이유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죄는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유쾌하거나 즐거운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들으면 마음에 거부감을 일으킨다. 또 많은 사람들이 “죄”의 개념조차 잘 이해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죄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죄의식을 잘 느끼지 않는다.’ 이같은 사람들을 앞에 놓고 죄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소귀에 경읽기나 다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 신학자의 말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거의 매일 날이 갈수록 범죄의 양상이 극악해지고 있습니다. 거의 매일 새로운 유형의 범죄가 꼬리를 물고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또한편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빼놓을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 변명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죄이야기가 먹혀 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에 대한 교리를 진지하게 다루지 아니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싫어도 먼저 우리가 안고 잇는 죄가 어떤 것인지를 바로 파악해야만이 그 다음에 우리의 참모습이 어떠한가를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우리의 참 실존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우리의 잘못된 행동이나 생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선천적인 본성, 즉 내적인 성질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근본 자아를 적나라하게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문제를 파헤쳐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론'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것이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이토록 악합니까 어쩌면 선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는 말입니까 정말 우리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토록 악하다면 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26절 초두에 나오는 ‘이를 인하여’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내용을 전부 받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꼭집어서 말하면 25절 내용을 되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인간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절은 인간이 왜 조물주를 섬기려 하지 않았는지를 한마디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 말씀의 뜻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을 기피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눈을 피해 제멋대로 살수 있을까 하는 인간의 못된 심리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을 싫어하고 기피했기 때문에 자연히 더 악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죄의 뿌리를 진단하는 말씀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사노라면 여러 종류의 모임에 참석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 어떤 모임에 가보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시끌벅적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한 말을 꺼내면 참석한 손님들의 인상이 금방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필이면 왜 이 자리에서 그 따위 말을 하느냐는 식으로 은근히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일찍이 그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추방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신 자기 자신이 올라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악한 행동을 하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에 내어버려 두사.” 2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우리에게는 비참한 결과가 찾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실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부패했다는 뜻입니다. 부패했다는 말의 원뜻은 동전이 규격에 맞지 않아서 쓸모가 없게 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마음은 규격에 맞지 않아 아무 가치가 없는 동전 한 닢이나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마음만 부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동도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부패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무엇이나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합당치 못한 일을 많이 행하였는가를 사례를 들어가면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 범죄 내용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2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마치 죄라는 상품을 진열해 놓은 쇼윈도우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죄목들이 세상에 있는 죄를 전부 망라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당시 로마 사회를 풍미했던 죄악상 가운데 큰 줄기만 뽑아놓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본문의 내용은 당시 로마 제국에 만연했던 죄악의 양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가 버질은 당시의 죄악상을 놓고 말하기를 ‘옳고 그른 것이 혼돈되어버린 사회였다. 유래없는 사치시대로서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놓고 그것이 무엇인가 묻는 것이 아니라. 얼마냐고 묻는 시대였다’고 했습니다.무엇이나 돈으로 가치가 결정되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사람까지도 돈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따라서 값이 비싸면 내용에 상관없이 무엇이나 좋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건전한 가치관이 몰락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과소비가 성행하는 우리 사회를 보면, 당시 로마시대와 비슷한 데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정신이 삐뚤어진 사회 속에서 살던 로마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곧 권태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쾌락을 추구하지 않으면 못견뎠습니다. 즐길 수 있는 일이라면 선악을 가릴 것이 없이 서슴치 않고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로마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0세기 말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 역시 별차이가 없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죄악상은 곧 우리 모두의 죄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 본문의 말씀을 주셨겠습니까 이제 본문 내용을 자세히 살피며 구체적으로 인간이 저지른 죄악들을 살펴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먼저 26-27절을 보십시다. (롬1:26-27)“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이 말씀은 동성연애를 지칭한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빠진 가장 심각한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적타락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동성연애였습니다. 이 죄는 이미 24절에 잠깐 언급되었습니다.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였으니” 성범죄는 어느 시대나 그 사회의 타락상이 어느 정도인가를 읽을 수 있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만일 동성연애가 유행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용납하는 사회가 되면 그것은 치유가 불가능한 말기적 현상으로 보아도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 중에서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가장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허락한 성은 고귀한 목적과 엄격한 질서를 가진 축복었습니다.
처음부터 남녀가 성관계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된 길은 결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혼이라는 틀속에서 만족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결혼이라는 자연질서를 벗어버리고 금지된 쾌락을 즐기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들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문란한 성행위를 즐기는 동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책임한 동거생활, 간통, 강간, 혼음, 변태성욕, 동성연애 등입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정도를 벗어낫기 때문에 인간이 이처럼 추악한 죄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로마 사회에서는 동성연애가 귀족을 물론 노예들의 세계까지 구석구석에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 초기의 황제 15명을 조사하여 보았더니 14명이 동성연애자였다는 충격적인 연구자료가 나와 있습니다. ‘황제’하면 마음에 드는 처첩들을 수두룩하게 거느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즐겼다는 것은 당시 로마사회가 동성연애 같은 자연스럽지 못한 성관계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짐승과 교합하는 일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기막힌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성연애는 로마사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선진국 사회를 둘러보세요! 동성연애가 얼마나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는지 다음에 나오는 몇가지 사례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1989년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 가정법원에서는 동성연애자들이 호적신고를 하면 결혼증명서와 유사한 증명서를 발급해 주어 정상적인 부부들과 똑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은 동성연애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1988년 개나다의 연합교회는 동성연애자들도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도록 총회에서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더우기 기가막힌 사실은 동성연애자들의 생활방식을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고려할 수 있다는 보고서가 제출된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교회마저도 동성연애자들을 정상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추세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 동성연애가 무서운 죄가 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짝지워서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결코 동성을 짝지워 결혼생활 하도록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동성연애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결혼 질서를 깨뜨리고 제멋대로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썼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을 향해 ‘당신은 남자 여자가 짝지워서 결혼생활을 하게 했지만 나는 당신보다 나아, 난 남자를 여자로 만들수 있고 여자를 남자로 만들 수도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방자한 행동입니다. 얼마가 가증스럽고 추악한 죄입니까 사람들이 이런 추악한 죄에 빠지게 되자 응분의 결과가 왔습니다. 27절을 보면; (롬1:27)“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죄값을 생전에 단단히 치루었다는 의미입니다. 건전한 사회에서는 오랜 기간동안 동성연애자들이 올바른 인격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일부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받고 있는 ‘상당한 보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금세기에 들어 에이즈라는 무서운 성병이 생겼습니다. 이 병은 동성 연애자들에게 내린 천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상당한 보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이즈에 대한 최근 미국 사회의 자료를 보면, 미국에서 십대가 성병을 옮기는 속도는 13초에 1명꼴이라고 합니다.
워싱턴 D.C의 한 고등학교에서 무작위로 조사한 결과 100명중 1명 꼴로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대학생인 경우 500명당 1명 꼴로, 그것도 도심지에 있는 대학에서는 300명당 1명 꼴로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상황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무의식 중에 동성연애자들을 너그럽게 보아준 셈이 되었고, 그 결과 값비싼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직접 연루된 자들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신음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오는 죄가 무엇입니까 ‘가득한 자요’라는 말에 말에 붙어 나오는 죄가 처음 4가지가 나옵니다. 또 이어서 5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득하다’는 말은 죄짓는데 마음을 온통 빼앗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할 마음을 죄에게 전부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 무서운 줄을 모르고 온갖 더럽고 악한 짓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모든 불의’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모든 불의란 광범위한 악을 포괄하고 있는 성경적인 용어입니다. 롬1:18절에 보면 불의라는 단어가 두 군데 걸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모든 불의란 본문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죄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 ‘추악’과 ‘악의’가 나옵니다. 추악은 악을 범하는 행동을, 악의는 그 밑에 갈려 있는 성품을 말합니다. 다음, ‘탐욕’은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터무니 없는 욕망을 말합니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위주의 소유욕을 말합니다. 아무리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입니다. 두번째 구룹에 해당하는 ‘가득한 자’의 다섯가지 죄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기’, ‘살인’, ‘분쟁’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한 통속에 든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을 시기하면 분쟁하게 되고, 서로 싸우다 보면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다 보면 살인까지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오는 ‘사기’는 우리가 잘 아는 고약한 죄입니다. ‘사기’의 어원은 고기를 낚기 위해 낚시에 다는 미끼를 가리키는데 아주 간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을 사기치는 사람은 머리가 보통 좋아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는 청화대 비서관을 사칭하면서 몇십억원을 끌어 모은 사람은 지능지수가 보통이 아닐 것입니다. 미끼를 달아서 눈을 멀거니 뜨고도 속아 넘아가도록 하는 사람이니까 얼마나 머리가 좋겠습니까 그리고 ‘악독’은 의도적으로 행하는 나쁜 짓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기’와 ‘악독’은 같은 고리에 달려 있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수군수군 하는 자’, ‘비방하는 자’가 나옵니다. 이것 역시 둘다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수군수군하는 것은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하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너하고 알자는 식으로 소근대는 것은 수근수근이고, 아예 그 사람 면전에서 욕하는 것은 비방이라고 풀이합니다. 아뭍튼 둘 다 상대방을 괴롭히는 말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가 나옵니다. 이것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로 해석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더 타당하냐고 할 때 후자로 해석하는 편이 더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죄목 전부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저지르는 나쁜 행동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는 큰 죄인입니다.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는 서로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과시하고 뻐기는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능욕이라는 말은 뻐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랑하는 말은 방랑자, 혹은 방랑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 돌팔이 의사나 약장사들이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거짓 선전을 일삼은 예가 허다했습니다. 돌팔이 의사는 자기만이 불치병을 고친다고 큰 소리쳤고 돌팔이 약장수는 자기 약이라야 병이 낫는다고 허풍을 쳤습니다. 이와같이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착각 속에서 사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입니다. ‘악을 도모하는 자’는 한 가지 악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또 다른 악을 궁리해서 저지르는 아주 질이 나쁜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배은망덕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매한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미련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쁜 짓을 함부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우매하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배약자’는 약속을 해놓고는 쉽게 깨뜨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정한 자’와 ‘무자비한 자’는 둘다 비슷한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본능적인 인간의 정마저도 외면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로마시대에는 갓난 아기를 남편이 누워있는 발치에 갖다 놓습니다. 아버지가 그 아기를 보고 마음에 들면 일어나 아기를 안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아기는 어머니가 키웁니다.
그런데 만약 아기가 마음에 안들어 아버지가 돌아 누우면 그 아기는 버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시에는 하루 30-40명이나 되는 많은 신생아들이 광장 같은 곳에 내버려졌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비정한 짓입니까 해외도피 유학을 다녀온 아들이 유산을 빨리 손에 넣기 위하여 아버지,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이고 집에 불을 질러 죽음을 위장하려다가 발각된 패륜아로 지금 세상이 떠들석하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인간성 상실입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의 사회상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무자비한 자요, 무정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2절을 보면,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라는 것을 인간이 본능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형‘은 로마서에서만 22번이나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8번은 모두 죄와 관계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사형에 해당되는 죄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모를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롬2:15)절에 보면,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예수 안믿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양심으로 자기의 죄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고 해서 죄의 값이 사망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몰라도 양심적으로 그 정도는 알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죄인 줄 알면서도 태연하게 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32절을 계속 봅십시다. (롬1:32)“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혼자 죄를 범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죄의 소굴로 끌여 들여서 함게 악을 행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죄를 짓는 모습을 보고 즐기며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옳다고 강변을 합니다. 사회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인간은 원래 나약한 존재인데 뭘 그러느냐 세상이 다
그런데 별 수 있느냐는 식으로 스스로 달랩니다. 큰 목적을 위해서라면 작은 잘못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자기를 합리화시키려고 합니다. 정말 추악한 사람들의 일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근본 성향, 생각, 행동이 얼마나 악한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로마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벌거벗겨 놓으면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잘난 척, 아무리 의로운 척 가장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추악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죄 중에는 우리와 무관한 것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21가지 죄목 중에서 우리에게 저촉되는 죄목을 찾으라고 한다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략 대여섯가지 안밖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나오는 죄목이 전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매도한다면 몹시 못마땅한 생각이 들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동기, 기회, 명분만 주어진다면 본문에 나오는 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혹 한 가지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형에 해당되는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법과는 다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수군수군한 것이 마음에 걸려 세상 법관을 찾아가 벌을 받겠다고 자청한다면 그를 정신병원에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어떻습니까 수군수군해도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군수군하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수군수군하는 말 뒤에 감추어져 있는 마음의 악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왜 수군수군하느냐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 보면 분명히 그곳에 흉악한 죄가 웅크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귀가 우리를 손가락질 하면서 26절 이하의 죄들을 하나 하나 하나님께 고소하는 듯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은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입니다. 그 대속의 은혜는 첫째, 하나님을 싫어하는 부패한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마음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 믿자마자 무조건 용서해 주신 은혜입니다.
셋째, 예수 믿은 후에도 여전히 악함이 남아있지만 성령님의 감화로 악을 범하지 못하게 막아주시는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이 은혜를 의지하며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론'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것이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이토록 악합니까 어쩌면 선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는 말입니까 정말 우리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토록 악하다면 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26절 초두에 나오는 ‘이를 인하여’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내용을 전부 받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꼭집어서 말하면 25절 내용을 되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인간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절은 인간이 왜 조물주를 섬기려 하지 않았는지를 한마디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 말씀의 뜻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을 기피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눈을 피해 제멋대로 살수 있을까 하는 인간의 못된 심리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을 싫어하고 기피했기 때문에 자연히 더 악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죄의 뿌리를 진단하는 말씀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사노라면 여러 종류의 모임에 참석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 어떤 모임에 가보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시끌벅적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한 말을 꺼내면 참석한 손님들의 인상이 금방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필이면 왜 이 자리에서 그 따위 말을 하느냐는 식으로 은근히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일찍이 그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추방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신 자기 자신이 올라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악한 행동을 하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에 내어버려 두사.” 2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우리에게는 비참한 결과가 찾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실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부패했다는 뜻입니다. 부패했다는 말의 원뜻은 동전이 규격에 맞지 않아서 쓸모가 없게 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마음은 규격에 맞지 않아 아무 가치가 없는 동전 한 닢이나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마음만 부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동도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부패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무엇이나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합당치 못한 일을 많이 행하였는가를 사례를 들어가면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 범죄 내용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2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마치 죄라는 상품을 진열해 놓은 쇼윈도우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죄목들이 세상에 있는 죄를 전부 망라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당시 로마 사회를 풍미했던 죄악상 가운데 큰 줄기만 뽑아놓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본문의 내용은 당시 로마 제국에 만연했던 죄악의 양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가 버질은 당시의 죄악상을 놓고 말하기를 ‘옳고 그른 것이 혼돈되어버린 사회였다. 유래없는 사치시대로서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놓고 그것이 무엇인가 묻는 것이 아니라. 얼마냐고 묻는 시대였다’고 했습니다.무엇이나 돈으로 가치가 결정되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사람까지도 돈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따라서 값이 비싸면 내용에 상관없이 무엇이나 좋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건전한 가치관이 몰락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과소비가 성행하는 우리 사회를 보면, 당시 로마시대와 비슷한 데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정신이 삐뚤어진 사회 속에서 살던 로마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곧 권태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쾌락을 추구하지 않으면 못견뎠습니다. 즐길 수 있는 일이라면 선악을 가릴 것이 없이 서슴치 않고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로마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0세기 말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 역시 별차이가 없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죄악상은 곧 우리 모두의 죄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 본문의 말씀을 주셨겠습니까 이제 본문 내용을 자세히 살피며 구체적으로 인간이 저지른 죄악들을 살펴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먼저 26-27절을 보십시다. (롬1:26-27)“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이 말씀은 동성연애를 지칭한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빠진 가장 심각한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적타락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동성연애였습니다. 이 죄는 이미 24절에 잠깐 언급되었습니다.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였으니” 성범죄는 어느 시대나 그 사회의 타락상이 어느 정도인가를 읽을 수 있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만일 동성연애가 유행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용납하는 사회가 되면 그것은 치유가 불가능한 말기적 현상으로 보아도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 중에서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가장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허락한 성은 고귀한 목적과 엄격한 질서를 가진 축복었습니다.
처음부터 남녀가 성관계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된 길은 결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혼이라는 틀속에서 만족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결혼이라는 자연질서를 벗어버리고 금지된 쾌락을 즐기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들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문란한 성행위를 즐기는 동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책임한 동거생활, 간통, 강간, 혼음, 변태성욕, 동성연애 등입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정도를 벗어낫기 때문에 인간이 이처럼 추악한 죄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로마 사회에서는 동성연애가 귀족을 물론 노예들의 세계까지 구석구석에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 초기의 황제 15명을 조사하여 보았더니 14명이 동성연애자였다는 충격적인 연구자료가 나와 있습니다. ‘황제’하면 마음에 드는 처첩들을 수두룩하게 거느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즐겼다는 것은 당시 로마사회가 동성연애 같은 자연스럽지 못한 성관계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짐승과 교합하는 일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기막힌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성연애는 로마사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선진국 사회를 둘러보세요! 동성연애가 얼마나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는지 다음에 나오는 몇가지 사례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1989년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 가정법원에서는 동성연애자들이 호적신고를 하면 결혼증명서와 유사한 증명서를 발급해 주어 정상적인 부부들과 똑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은 동성연애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1988년 개나다의 연합교회는 동성연애자들도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도록 총회에서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더우기 기가막힌 사실은 동성연애자들의 생활방식을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고려할 수 있다는 보고서가 제출된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교회마저도 동성연애자들을 정상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추세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 동성연애가 무서운 죄가 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짝지워서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결코 동성을 짝지워 결혼생활 하도록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동성연애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결혼 질서를 깨뜨리고 제멋대로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썼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을 향해 ‘당신은 남자 여자가 짝지워서 결혼생활을 하게 했지만 나는 당신보다 나아, 난 남자를 여자로 만들수 있고 여자를 남자로 만들 수도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방자한 행동입니다. 얼마가 가증스럽고 추악한 죄입니까 사람들이 이런 추악한 죄에 빠지게 되자 응분의 결과가 왔습니다. 27절을 보면; (롬1:27)“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죄값을 생전에 단단히 치루었다는 의미입니다. 건전한 사회에서는 오랜 기간동안 동성연애자들이 올바른 인격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일부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받고 있는 ‘상당한 보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금세기에 들어 에이즈라는 무서운 성병이 생겼습니다. 이 병은 동성 연애자들에게 내린 천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상당한 보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이즈에 대한 최근 미국 사회의 자료를 보면, 미국에서 십대가 성병을 옮기는 속도는 13초에 1명꼴이라고 합니다.
워싱턴 D.C의 한 고등학교에서 무작위로 조사한 결과 100명중 1명 꼴로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대학생인 경우 500명당 1명 꼴로, 그것도 도심지에 있는 대학에서는 300명당 1명 꼴로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상황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무의식 중에 동성연애자들을 너그럽게 보아준 셈이 되었고, 그 결과 값비싼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직접 연루된 자들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신음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오는 죄가 무엇입니까 ‘가득한 자요’라는 말에 말에 붙어 나오는 죄가 처음 4가지가 나옵니다. 또 이어서 5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득하다’는 말은 죄짓는데 마음을 온통 빼앗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할 마음을 죄에게 전부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 무서운 줄을 모르고 온갖 더럽고 악한 짓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모든 불의’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모든 불의란 광범위한 악을 포괄하고 있는 성경적인 용어입니다. 롬1:18절에 보면 불의라는 단어가 두 군데 걸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모든 불의란 본문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죄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 ‘추악’과 ‘악의’가 나옵니다. 추악은 악을 범하는 행동을, 악의는 그 밑에 갈려 있는 성품을 말합니다. 다음, ‘탐욕’은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터무니 없는 욕망을 말합니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위주의 소유욕을 말합니다. 아무리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입니다. 두번째 구룹에 해당하는 ‘가득한 자’의 다섯가지 죄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기’, ‘살인’, ‘분쟁’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한 통속에 든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을 시기하면 분쟁하게 되고, 서로 싸우다 보면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다 보면 살인까지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오는 ‘사기’는 우리가 잘 아는 고약한 죄입니다. ‘사기’의 어원은 고기를 낚기 위해 낚시에 다는 미끼를 가리키는데 아주 간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을 사기치는 사람은 머리가 보통 좋아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는 청화대 비서관을 사칭하면서 몇십억원을 끌어 모은 사람은 지능지수가 보통이 아닐 것입니다. 미끼를 달아서 눈을 멀거니 뜨고도 속아 넘아가도록 하는 사람이니까 얼마나 머리가 좋겠습니까 그리고 ‘악독’은 의도적으로 행하는 나쁜 짓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기’와 ‘악독’은 같은 고리에 달려 있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수군수군 하는 자’, ‘비방하는 자’가 나옵니다. 이것 역시 둘다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수군수군하는 것은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하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너하고 알자는 식으로 소근대는 것은 수근수근이고, 아예 그 사람 면전에서 욕하는 것은 비방이라고 풀이합니다. 아뭍튼 둘 다 상대방을 괴롭히는 말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가 나옵니다. 이것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로 해석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더 타당하냐고 할 때 후자로 해석하는 편이 더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죄목 전부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저지르는 나쁜 행동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는 큰 죄인입니다.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는 서로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과시하고 뻐기는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능욕이라는 말은 뻐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랑하는 말은 방랑자, 혹은 방랑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 돌팔이 의사나 약장사들이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거짓 선전을 일삼은 예가 허다했습니다. 돌팔이 의사는 자기만이 불치병을 고친다고 큰 소리쳤고 돌팔이 약장수는 자기 약이라야 병이 낫는다고 허풍을 쳤습니다. 이와같이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착각 속에서 사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입니다. ‘악을 도모하는 자’는 한 가지 악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또 다른 악을 궁리해서 저지르는 아주 질이 나쁜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배은망덕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매한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미련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쁜 짓을 함부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우매하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배약자’는 약속을 해놓고는 쉽게 깨뜨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정한 자’와 ‘무자비한 자’는 둘다 비슷한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본능적인 인간의 정마저도 외면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로마시대에는 갓난 아기를 남편이 누워있는 발치에 갖다 놓습니다. 아버지가 그 아기를 보고 마음에 들면 일어나 아기를 안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아기는 어머니가 키웁니다.
그런데 만약 아기가 마음에 안들어 아버지가 돌아 누우면 그 아기는 버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시에는 하루 30-40명이나 되는 많은 신생아들이 광장 같은 곳에 내버려졌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비정한 짓입니까 해외도피 유학을 다녀온 아들이 유산을 빨리 손에 넣기 위하여 아버지,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이고 집에 불을 질러 죽음을 위장하려다가 발각된 패륜아로 지금 세상이 떠들석하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인간성 상실입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의 사회상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무자비한 자요, 무정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2절을 보면,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라는 것을 인간이 본능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형‘은 로마서에서만 22번이나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8번은 모두 죄와 관계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사형에 해당되는 죄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모를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롬2:15)절에 보면,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예수 안믿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양심으로 자기의 죄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고 해서 죄의 값이 사망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몰라도 양심적으로 그 정도는 알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죄인 줄 알면서도 태연하게 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32절을 계속 봅십시다. (롬1:32)“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혼자 죄를 범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죄의 소굴로 끌여 들여서 함게 악을 행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죄를 짓는 모습을 보고 즐기며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옳다고 강변을 합니다. 사회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인간은 원래 나약한 존재인데 뭘 그러느냐 세상이 다
그런데 별 수 있느냐는 식으로 스스로 달랩니다. 큰 목적을 위해서라면 작은 잘못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자기를 합리화시키려고 합니다. 정말 추악한 사람들의 일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근본 성향, 생각, 행동이 얼마나 악한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로마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벌거벗겨 놓으면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잘난 척, 아무리 의로운 척 가장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추악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죄 중에는 우리와 무관한 것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21가지 죄목 중에서 우리에게 저촉되는 죄목을 찾으라고 한다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략 대여섯가지 안밖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나오는 죄목이 전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매도한다면 몹시 못마땅한 생각이 들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동기, 기회, 명분만 주어진다면 본문에 나오는 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혹 한 가지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형에 해당되는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법과는 다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수군수군한 것이 마음에 걸려 세상 법관을 찾아가 벌을 받겠다고 자청한다면 그를 정신병원에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어떻습니까 수군수군해도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군수군하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수군수군하는 말 뒤에 감추어져 있는 마음의 악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왜 수군수군하느냐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 보면 분명히 그곳에 흉악한 죄가 웅크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귀가 우리를 손가락질 하면서 26절 이하의 죄들을 하나 하나 하나님께 고소하는 듯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은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입니다. 그 대속의 은혜는 첫째, 하나님을 싫어하는 부패한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마음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 믿자마자 무조건 용서해 주신 은혜입니다.
셋째, 예수 믿은 후에도 여전히 악함이 남아있지만 성령님의 감화로 악을 범하지 못하게 막아주시는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이 은혜를 의지하며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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