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 (롬1:18-32)
본문
우리의 기독교의 복음은 희망과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복음은 희망이며,그 리고 구원입니다.그러나 언제나 희망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오늘의 본문은 희망이 아니라 저주를,구원이 아니라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본문 18절의 말씀에 하나님의 진노가-(제일 끝의 동사)나타나나니/ 성서의 원문에서는 이 나타난다는 동사가 문장의 제일 앞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그 이유에 대한 강 조로써 나타난다는 동사를 맨 앞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또한 이 나타나서 라는 동 사는 17절의 하나님의 의와 그리고 18절의 하나님의 진노를 서로 대조하면서 표현하 고 있습니다.즉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반해서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경 건치 않은 자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낸다는 말씀입니다.나타내다라는 헬 라어 원어의 뜻은 폭로하다,드러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이제 바울이 본문 21절 이하에서 열거하는 그러한 이유들,죄악들 때문에,하나님의 진노가 확연하게 나타났다,어쩔수 없이 폭로되었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진노라는 말에는 두가지의 표현이 있습니다.하나는 '투모스'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오르가' 라는 말입니다.투모스의 진노는 아주 격렬하게 갑자기 폭발하는 분 노를 가르킵니다.그러나 오르가라는 분노는 순간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오래 오 래 기다리다가 마침내 드러나는 진노입니다.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바로 오르가의 진노입니다.즉 아주 오래오래 참으시다가 마침내 폭발하는 그러한 진노인 것입니다.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신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창세기 6,7 장에는 인간을 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하나님 은 노아를 통해서 수차례 경고하시고 그리고도 120년간이라는 오랜 기간을 참으셨습니다.그러나 인간은 먹고 마시고 노는 향락에만 빠져 있었습니다.그 결과 노아의 방 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멸망을 당했습니다.모두 죽었습니다.하나님의 진노는 무서운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사회는 Pax-Romana 라고 불리우는 풍요의 사회였습니다.물질적인 풍요와 부가 절정에 올랐던 그러한 사회였습니다.그들에게 있어서는 미래는 별로 중 요하지 않았습니다.천국도 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현재 가 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흥청망청 하루하루의 삶을 최대한 즐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본문 26절과 27절에 보면은 그들이 동성연애를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이들의 사회를 한마디로 진단하라면 '하나님의 진노'를 잃어버린 사회라고 말 할수 있을 것입니다.오늘 우리의 사회를 가르쳐서 '지옥을 상실한 시대'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현대가 지옥을 잃어 버렸다는 말씀입니다.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지옥은 막연한 곳이 아니라 너무나도 선명하게 고통받는 곳입니다.우리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가 당하는 지옥의 현장에 대해서 잘알고 있습니다.영원히 꺼지지않는 지옥불에서 영원히 죽지도 않고 탄다고 생각해 보십시요,얼마나 소름 1 끼치는 일입니까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어느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글쎄 지옥 이 있을까요,죽어보면 알겠죠,지옥은 죽어보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그렇게 신앙생활 하면은 큰일 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지옥에 대한 확신이 불분명한 사람이 있습니다.그 까닭은 이 시대가 지옥을 상실하여 가기 때문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사랑 하는 성도 여러분,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누 구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우리는 지옥불을 바라보면서 깨어 서 기도하고 지옥불을 바라보면서 전도도 하고 지옥불을 바라보면서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임하여서는 정말 않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정말 않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 문의 로마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었습니다.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21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했기 때 문입니다.로마인들은 발달된 그리이스 철학과 함께 세계의 모든 학문을 흡수하여 학 문과 지식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습니다.로마의 업적중의 하나가 바로 학문의 발달인 것입니다.그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하나님을 논리적으로 평가금고 이성 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단지 알고만 있었습니다.그들에게는 감사와 경배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대상이 아닙니다.하나님 은 지식적으로 아는 대상이 아니라 감사와 경배의 대상입니다.하나님은 이성적인 대 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며,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대상이 아니라 체험적이며 고백 적인 대상인 것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을 아는데에서만 그쳐서는 않됩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실천의 대상인 것입니다.그것은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이며, 하나님께 감사함입니다.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우리는 모 두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둘째는,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기 때문입니다.허망하여 졌다는 말은 허탈해 졌다,아무 쓸데 없어져 버렸다는 의미인데 왜 이들 의 생각이 허망하여 졌을까를 생각해 봅니다.왜 허망하여 졌을까 그들은 자기 우월 감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인간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망각할 때 가장 먼저 나 타나는 모습이 바로 교만입니다.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본문의 로마인들의 경우입니다.그들은 로마인이라는 신분 하나만으로도 우월의식과 신분적 특권을 누렸습니다.그들은 우쭐하였습니다.그 결과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허망에 빠지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로마의 찬란한 문화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득권이 모두 물거품이 되 고 만 것입니다.만약에 우리가 한 평생의 삶을 살았는데 그것도 열심히 살았는데 모 두 물거품이 되었다면,아주 허망하게 끝난다면 어몽S구驪 우리의 삶을 허망으로 이끄는 것은 다름아닌 교만입니다.교만은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며,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입니다.따라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겸손하되 끝 까지 겸손해야 합니다.이 땅에서 가장 겸손히 산 사람은 가장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임입니다. 세째는,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 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함은 변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절대적으로 경배되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 의 우상으로 바꾸었는데 어찌 2 하나님이 진노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시편 106편 20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다고 개탄하고 있습니다.광야길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에 금송아지의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금송아지의 신은 바알의 신입니다.바 알의 신은 농사의 신이며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입니다.거기에 반해 야훼의 하나님 은 농사가 아니라 목축의 하나님이고 정착의 신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고 이동하는 하나님이십니다.이들이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의 바알을 섬겼다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한 방랑은 그만하고 우리도 정착해서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약속의 땅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저 여기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바알을 섬기면서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뱀을 내려서 심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게 하시는 순례자의 하나님을 땅의 풍요 를 기원하는 금송아지의 신과 바꾸어 버렸습니다.본문의 로마인들 역시 하나님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이들에게 있어서의 신은 버러지 형상의 부도덕한 향락이었습니다.폼페이 최후의날에서의 폼페이시는 바로 버러지 형 상의 향락을 대표하고 있는 시였습니다.그곳은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휴양지였는데 로마 최대의 향락산업이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그들은 모두 멸망당 했습니다.그것도 화산의 폭발로 도시전체가 불바다가 되고 만것입니다.하나님의 진 노가 임한 것입니다.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성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그 이유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형상의 우 상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서는 않됩니다.하나님 을 대신할 만한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습니다.특히 우리는 물질이 지배하는 자 본주의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자본주의 사회의 신은 자본,즉 물질입니다.세상사람 들은 말합니다.돈만있으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돈만 있으면 안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사실입니다.물질에는 위력이 있습니다.그러나 그 위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때에 더욱 가치가 있는 위력입니다.만약에 물질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 꾸어 놓았다면 그 물질은 이미 축복이 아닙니다.오히려 저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의 진노하심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째는,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지금,참과 거짓을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속에서 살고 있습니다.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지 도무지 알수 없는 시대속에서 살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한가지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참을 거짓으로 바꾸는 사람들은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입니다.하나님의 진리는 참입니다.이 참을 거짓것으로 바꾸어서 하나님의 질서를 혼란케하는 일련의 무리들이 있습니다.시한부 종말론자들을 비롯한 모 든 이단들이 그렇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꾼 결과,조물주 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있습니다.그들은 자기들의 교주를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목사님을 존경합니다.그러나 경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경배의 대상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한분 뿐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조물주이십니다.즉 창조자라는 말씀입니다.창조자이신 하나님이외에는 모두 피조물입니다.우리는 피조물 을 경배하지 않고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만 할것입니다. 다섯번째로,저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하는 사람입니다.마음 에 하나님을 두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결코 범죄하지 않습니다.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좋아해야 합니다.이시간에 나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나는 나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즐겨 하는가 아니면 싫어 하는가 아니면 그 저 그냥 사는가 늘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즐겨하는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이들은 여호와 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입니다.이들은 여호와는 나 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노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이들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이들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 나이다라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이들은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 에 하나님을 두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우리는 모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즐겨해야 합니다.마음의 중심에 피조물이나 세상의 어떤 가치 관이나 나의 철학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을 두기 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29절 이하에서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잘 납득이 않되는 부분이 있습니다.그것은 28절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입니다.또한 24절에서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 대로 마음의 더러움에 네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이들을 말 그대로 내어버리셨습니다.여기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여기에 대하여 여러분 나름대로의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저는 핸 드릭슨의 해석을 따르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저주하시고 진노하셔서 이들을 내어버리셨습니다.그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피조물을 버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마음인 가 하는 점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뼈를 깍는 아픔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여 봅니다.어떤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이 못된 짓만 하고 다니고,망나니짓만 하고 다녀서 그 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너는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라고,나라고 말하였을 때에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떠할까를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정말 자식을 저주하는 부모는 하나도 없습니다.부모의 진노는 부모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며,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수단이라고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이 편지를 쓰는 바울의 심정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바울의 심정도 이들이 하루속히 회개하고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오르가의 진노하심이라고 서두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하나님은 오래참으시는 하나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 의 심판이 임박해 있음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합니다.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자기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애타는 사랑의 다른표현인 것입니다.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회개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그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했던 심령이 있었다면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 를 하나님의 의로 바꾸는 역사가 우리안에 일어나야만 할 것입니다
창세기 6,7 장에는 인간을 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하나님 은 노아를 통해서 수차례 경고하시고 그리고도 120년간이라는 오랜 기간을 참으셨습니다.그러나 인간은 먹고 마시고 노는 향락에만 빠져 있었습니다.그 결과 노아의 방 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멸망을 당했습니다.모두 죽었습니다.하나님의 진노는 무서운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사회는 Pax-Romana 라고 불리우는 풍요의 사회였습니다.물질적인 풍요와 부가 절정에 올랐던 그러한 사회였습니다.그들에게 있어서는 미래는 별로 중 요하지 않았습니다.천국도 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현재 가 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흥청망청 하루하루의 삶을 최대한 즐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본문 26절과 27절에 보면은 그들이 동성연애를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이들의 사회를 한마디로 진단하라면 '하나님의 진노'를 잃어버린 사회라고 말 할수 있을 것입니다.오늘 우리의 사회를 가르쳐서 '지옥을 상실한 시대'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현대가 지옥을 잃어 버렸다는 말씀입니다.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지옥은 막연한 곳이 아니라 너무나도 선명하게 고통받는 곳입니다.우리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가 당하는 지옥의 현장에 대해서 잘알고 있습니다.영원히 꺼지지않는 지옥불에서 영원히 죽지도 않고 탄다고 생각해 보십시요,얼마나 소름 1 끼치는 일입니까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어느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글쎄 지옥 이 있을까요,죽어보면 알겠죠,지옥은 죽어보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그렇게 신앙생활 하면은 큰일 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지옥에 대한 확신이 불분명한 사람이 있습니다.그 까닭은 이 시대가 지옥을 상실하여 가기 때문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사랑 하는 성도 여러분,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누 구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우리는 지옥불을 바라보면서 깨어 서 기도하고 지옥불을 바라보면서 전도도 하고 지옥불을 바라보면서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임하여서는 정말 않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정말 않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 문의 로마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었습니다.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21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했기 때 문입니다.로마인들은 발달된 그리이스 철학과 함께 세계의 모든 학문을 흡수하여 학 문과 지식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습니다.로마의 업적중의 하나가 바로 학문의 발달인 것입니다.그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하나님을 논리적으로 평가금고 이성 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단지 알고만 있었습니다.그들에게는 감사와 경배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대상이 아닙니다.하나님 은 지식적으로 아는 대상이 아니라 감사와 경배의 대상입니다.하나님은 이성적인 대 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며,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대상이 아니라 체험적이며 고백 적인 대상인 것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을 아는데에서만 그쳐서는 않됩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실천의 대상인 것입니다.그것은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이며, 하나님께 감사함입니다.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우리는 모 두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둘째는,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기 때문입니다.허망하여 졌다는 말은 허탈해 졌다,아무 쓸데 없어져 버렸다는 의미인데 왜 이들 의 생각이 허망하여 졌을까를 생각해 봅니다.왜 허망하여 졌을까 그들은 자기 우월 감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인간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망각할 때 가장 먼저 나 타나는 모습이 바로 교만입니다.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본문의 로마인들의 경우입니다.그들은 로마인이라는 신분 하나만으로도 우월의식과 신분적 특권을 누렸습니다.그들은 우쭐하였습니다.그 결과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허망에 빠지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로마의 찬란한 문화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득권이 모두 물거품이 되 고 만 것입니다.만약에 우리가 한 평생의 삶을 살았는데 그것도 열심히 살았는데 모 두 물거품이 되었다면,아주 허망하게 끝난다면 어몽S구驪 우리의 삶을 허망으로 이끄는 것은 다름아닌 교만입니다.교만은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며,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입니다.따라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겸손하되 끝 까지 겸손해야 합니다.이 땅에서 가장 겸손히 산 사람은 가장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임입니다. 세째는,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 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함은 변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절대적으로 경배되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 의 우상으로 바꾸었는데 어찌 2 하나님이 진노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시편 106편 20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다고 개탄하고 있습니다.광야길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에 금송아지의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금송아지의 신은 바알의 신입니다.바 알의 신은 농사의 신이며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입니다.거기에 반해 야훼의 하나님 은 농사가 아니라 목축의 하나님이고 정착의 신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고 이동하는 하나님이십니다.이들이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의 바알을 섬겼다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한 방랑은 그만하고 우리도 정착해서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약속의 땅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저 여기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바알을 섬기면서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뱀을 내려서 심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게 하시는 순례자의 하나님을 땅의 풍요 를 기원하는 금송아지의 신과 바꾸어 버렸습니다.본문의 로마인들 역시 하나님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이들에게 있어서의 신은 버러지 형상의 부도덕한 향락이었습니다.폼페이 최후의날에서의 폼페이시는 바로 버러지 형 상의 향락을 대표하고 있는 시였습니다.그곳은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휴양지였는데 로마 최대의 향락산업이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그들은 모두 멸망당 했습니다.그것도 화산의 폭발로 도시전체가 불바다가 되고 만것입니다.하나님의 진 노가 임한 것입니다.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성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그 이유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형상의 우 상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서는 않됩니다.하나님 을 대신할 만한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습니다.특히 우리는 물질이 지배하는 자 본주의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자본주의 사회의 신은 자본,즉 물질입니다.세상사람 들은 말합니다.돈만있으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돈만 있으면 안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사실입니다.물질에는 위력이 있습니다.그러나 그 위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때에 더욱 가치가 있는 위력입니다.만약에 물질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 꾸어 놓았다면 그 물질은 이미 축복이 아닙니다.오히려 저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의 진노하심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째는,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지금,참과 거짓을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속에서 살고 있습니다.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지 도무지 알수 없는 시대속에서 살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한가지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참을 거짓으로 바꾸는 사람들은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입니다.하나님의 진리는 참입니다.이 참을 거짓것으로 바꾸어서 하나님의 질서를 혼란케하는 일련의 무리들이 있습니다.시한부 종말론자들을 비롯한 모 든 이단들이 그렇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꾼 결과,조물주 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있습니다.그들은 자기들의 교주를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목사님을 존경합니다.그러나 경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경배의 대상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한분 뿐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조물주이십니다.즉 창조자라는 말씀입니다.창조자이신 하나님이외에는 모두 피조물입니다.우리는 피조물 을 경배하지 않고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만 할것입니다. 다섯번째로,저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하는 사람입니다.마음 에 하나님을 두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결코 범죄하지 않습니다.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좋아해야 합니다.이시간에 나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나는 나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즐겨 하는가 아니면 싫어 하는가 아니면 그 저 그냥 사는가 늘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즐겨하는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이들은 여호와 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입니다.이들은 여호와는 나 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노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이들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이들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 나이다라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이들은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 에 하나님을 두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우리는 모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즐겨해야 합니다.마음의 중심에 피조물이나 세상의 어떤 가치 관이나 나의 철학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을 두기 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29절 이하에서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잘 납득이 않되는 부분이 있습니다.그것은 28절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입니다.또한 24절에서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 대로 마음의 더러움에 네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이들을 말 그대로 내어버리셨습니다.여기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여기에 대하여 여러분 나름대로의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저는 핸 드릭슨의 해석을 따르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저주하시고 진노하셔서 이들을 내어버리셨습니다.그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피조물을 버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마음인 가 하는 점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뼈를 깍는 아픔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여 봅니다.어떤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이 못된 짓만 하고 다니고,망나니짓만 하고 다녀서 그 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너는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라고,나라고 말하였을 때에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떠할까를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정말 자식을 저주하는 부모는 하나도 없습니다.부모의 진노는 부모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며,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수단이라고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이 편지를 쓰는 바울의 심정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바울의 심정도 이들이 하루속히 회개하고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오르가의 진노하심이라고 서두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하나님은 오래참으시는 하나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 의 심판이 임박해 있음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합니다.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자기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애타는 사랑의 다른표현인 것입니다.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회개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그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했던 심령이 있었다면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 를 하나님의 의로 바꾸는 역사가 우리안에 일어나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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