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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틈바구니 속에서 (행27:9-26)

본문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가이사랴에서 2년동안의 투옥생활을 했던 바울 사도는 드디어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따라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천부장 베스도는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에게 사도 바울과 몇몇의 죄수들을 로마로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나 행선하기가 위태하므로 바울사도는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예고하였지만 백부장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 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고 항해를 강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 황에서 본문 13절과 14절의 말슴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하고 행선하더니 얼마 못되어 섬 가운 데러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라는 말씀은 인생의 순풍이 가 자기 인생의 역풍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모든 인생들에게 두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가지는 모든 인간의 저마다의 목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에서 바울사도는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백부장은 죄수의 호송을 위 해, 선장과 선주는 돈벌이를 목표로 삼고 로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모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와 인생의 목적이 있 게 마련인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인생의 항로에는 뜻하지 않은 역경이 닥쳐올 때가 있 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순하디 순한 남풍이 갑자기 유라굴로 라는 광풍으로 변하여 바울이 타고 있던 배를 뒤흔들었던 것처럼 인생 의 주변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질병의 광풍, 실패와 가난과 불행의 광풍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은 낙관보다 비관이 더 지 배적일 수 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여라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 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절망상태가 연이어 계속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상호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절망의 상태가 우리에게 찾아 올 때에 우리는 좌절하고 삶을 포기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이 보여주는 진리는 일순간의 절망은 있으나 영원한 절망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오늘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당면한 현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 라 그 현실을 살아가는 태도에 있습니다. 신자의 생활태도와 불신자의 생활태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드라뭇데노' 배에 타고 있던 276명 모두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던 것처럼 사람은 신자나 불신자를 무론 하고 누구나 시련과 역경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절망을 순간순간 체험할지는 모르지만 삶 자체는 포 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은 절망의 현실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를 바울사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절망의 와중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까
1. 어떤 경우에서도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22절에서 25절에 보면 여러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큰 풍랑이 그대로 있었고 구원의 여망이 끊어져 버린 가운데 있었 습니다. 굶주림과 허기에 지쳐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무리를 향하여 바울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중 에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서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내게 주셨다 하셨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 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희망은 강한 용기요 새로운 의지"라고 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우리의 불행을 치료하는 한가지 약이 있는데 그것은 희망이라는 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토마스 카알라일 은 말하기를 '인간은 희망에 기초를 둔 존재'라고 말하면서 "내 소유 를 다 빼앗긴다 할지라도 나는 오직 한 가지 희망만 갖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한 시편 42편 5절의 말씀은 무엇을 의 미합니까 인간은 희망을 잃고서는 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희망을 잃지 아니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어도 희망을 잃어버리면 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편기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퀼른이라는 도시의 어느 건물 지하실 벽에 다음과 같은 낙서 가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햇빛을 볼 수 없을 때 에도 나는 태앙이 있음을 믿는다.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에 라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엄연히 계심을 믿는다." 이 말은 2차 세계 대전당시 그 지하실에 갇혀있던 어느 전쟁포로가 하나님께 고백한 기도를 새겨 놓은 것입니다. 희망의 사람은 어떤 경우에라도 절망을 극 복합니다. 여러분의 희망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생긴다고 오늘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 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은 여전히 엄습하며 구원의 여망이 끊어져버린 가운데서 바울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 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 을 믿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에 희망을 준 믿음은 하나님 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 라고 하는 말씀을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어디에서 생기는 믿음입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 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한 로마서 10장17절 의 말씀처럼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믿음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통 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에 생긴 믿음이 우리의 심령에 절망을 몰아내고 희망을 주시는 것 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사도는 풍랑이는 한 밤중에 파도소리 속에 섞여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울아 두려워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내게 주셨다." 개 인적이면서도 생생하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바울사도는 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마음 속에 믿음이 생기게 되었고 더 이상 절망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절망의 현실에 부딪쳐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을 붙잡으십시오. 시편 39편 7절은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소망은 주님께 있으므로 주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대로 인생을 살 아가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세상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2.어떠한 경우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갖는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최선을 다하라고 본문 말씀은 강조합니다. 본문 27절에서 마지막 절까지를 보면 14일이 라는 장구한 기간 동안 낮과 밤이 뒤바뀌는 가운데 생명이 죽음으로 향하여 가는 절박한 환경에 처하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모든 일에 전력 투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할 수 있는데까지 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모르지만 할 수 있는데까지 해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바울사도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공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먹고 기운을 내도록 떡을 만들어 최선을 다하여 공급했 습니다. 밀을 바다에 던져 배를 가볍게하고 닻을 끊는 일에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가는 것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절망의 여울목에서 최선을 다하여 헤엄치고 헤엄쳐서 육지로 달려나온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다가 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시인 쉴러는 말하기를 "자기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언제나 잘 살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머케이는 "최선을 다하는 생활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성공하기를 원하지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을 본 문은 강조합니다. 최선을 다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성 공합니다. 승리하게되고 흥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하면 여러분의 삶에 변확 올 것을 믿습니다. 유명한 조각가인 미켈란젤로가 어느날 시스틴 교회당의 벽화를 손수 그리고 있었습니다. 천장이 너무 높아서 까마득한데 그는 천장에 바짝 다가가서 벽에 선을 하나하나 자세히 그리고 있었습니다. 예배당 밑에 서 미켈란젤로의 행동을 쳐다보고 있던 친구가 말합니다." 여보게여기 에서 아무리 보려고 해도 그 천장의 그림은 잘 보이지 않네, 그저 적 당히 그리고 빨리 내려 오게나."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천장에서 그 친 구를 향하여 "여보게 이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이 그림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고 소리쳤습니다."아 그야 자네지." 미켈란젤로는 "맞네.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시는 한 나는 최선이하로 일할 수가 없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일에든 적당히 해치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태리 에 가보면 미켈란젤로의 찬란한 조각품, 천장과 벽에 그린 그림들을 볼때에 정말 감탄하게 됩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만들고 그릴 수 있을까 그것은 최선 이하로 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매달려보십시오. 최선을 다하여 병을 치료해보고 최선 을 다하여 사업을 해보십시오.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고 하나님과 더불 어 씨름해 보십시오. 분면 거기에는 좋은 결과가 생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두가지를 강조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안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절망적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 그리고 최선을 다해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44절에 보면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였고 구원을 얻으 리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라고 하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희망을 버리지 않 고 최선을 다하니 마침내 다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하지 마십시오. 눈물 거두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희망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여러분의 재능과 여러분의 모든 것 을 최선을 다해 사용하여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감당하면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편에서 희망을 주시며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절망을 극복하라 성경


본문:욘 2:1-10 희망은 인간을 소생시키고 깊은 주름을 펴게 하지만 절망은 산사람도 죽음 으로 재촉하게 만듭니다. 본문에는 절망적인 환경을 멋지게 극복하는 극적 인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쓰시려 했으나 요나는 쓰임 받기를 원치않아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도망(1:3)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의 낯을 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나 이 스라엘 땅만 떠나면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교회문을 나서고 성도와의 모임이 끝나면 하나님은 낯을 피할 수 있 다고 생각해서 아무렇게나 말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 끝에도 계시고 바다끝에도 계시고 음부에도 계십니다. (시139:8-9)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안도했지만 큰 풍랑을 만 났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곁길로 가는걸 바라보고만 계실 분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요나가 배에서 바다에 던져졌고 파도는 잔잔해졌으나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희망을 찾아 볼래 야 찾을 수 없는 절망이었습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이 스올(지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2) 인간이 왜 절망적인 상황을 맞습니까.그 이유는 인간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보다는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헤쳐나갈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원자탄을 발명한 아인쉬타인도 그 지식으로 죽음의 절망 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케네디의 권력도, 양귀비의 미모도, 맥아더의 용맹 도 , 역도산의 완력도 이 절망만은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 극한 상황의 절망을 극복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안되었기에 절망을 이길 힘을 찾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절망의 관계 하나님께 절망적인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므로 절망은 인간이 쓸 수 있는 단어일뿐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큰일인데도 어른에게는 아무일이 아 니듯이 우리에게는 태산같은 문제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아무거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다는 것은 생사가 달려있는 큰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요나로 하여금 불순 종을 깨닫게 하는 기회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나쁜일도 좋게 만드 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께 절망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은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세도 동족을 위 해 사람을 죽인자였고, 다윗은 남의 아내를 성범죄했고, 노아도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다가 자식들에게 봉변을 당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고,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데려다가 보배처럼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폐품을 잘 활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 도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 시며 지혜가 있으시니 아주 보배처럼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훌륭한 목수가 좋지 않은 목재를 가지고도 멋진 가구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구제불능의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낙심하지도 절 망하지도 포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배처럼 쓰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자를 택하여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천한 자, 멸시받는 자, 없는 자들을 택하여 있는 자를 폐하신다(고전 1:27-29)고 하셨습니다. 결국 인간 의 절망은 자신의 연약함에 낙심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지 않은데 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절망적인 환경은 없습니다. 요나는 태풍을 만나 집이 물에 잠겼다거나 바람에 쓰러졌다거나,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났다거나, 병이 났다거나 그런 정도가 아니라 물고기 뱃속에 갇혀 사방이 온통 캄캄하여 죽음만 기다리는 환경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를 잠수함으로 사용하셔서 요나가 일하기에 가장 편리한 위치의 바닷가에다 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인간의 불가능이 하나님의 가능이요 인간의 무지가 하나님의 지혜임을 깨닫게 합니다. 절망을 통한 교훈 하나님은 두번째로 요나를 찾아오셨습니다. (3:1) 그러니까 첫번째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재확인 시키셨습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울때 어디론가 도망가면 엄마는 어디고 따라가 서 잡아오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어디로 가던지 따라오셔서 간섭하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반드시 이루고 마십니다. 실수했어도 깨닫게 하시고 위 로와 용기를 주시며 반드시 일을 이루고 마십니다.
그러므로 일찍 순종하여 쓰임 받길 바랍니다. 절망을 극복한 자세 기도-여호와를 불러 아뢰었고, 부르짖었습니다.
(2) 기도했다는 의미로 기도는 구조 요청입니다. 삼풍백화점 사고시에도 철근 더미에 묻힌 사람이 구조요청의 신호를 부내고 밖에서 받은 사람은 살아나 놀 수 있었듯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할 수 있으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신자의 특권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응답하겠고 (렘33:3) 구하라 주실 것이요 (마7:7)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 리라(시50:10)고 했습니다. 기도하라 하셨으니 이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환자도, 일하는 사람도, 노인도, 어느 계층 누구도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돈이나 지식이나 권세, 명예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면 돈 없는 자,배우지 못한 자,권세가 없는자 보통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으며 만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기도로 응답받고 해결받도록 하신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요 특권입니다. 기도하면 풀리고 열리고 해결되는데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감사-요나는 뒤늦게 나마 하나님이 살게 해주셔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을 깨닫고 믿음으로 감사했습니다. 지옥과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향한 믿음의 표현이요 확신입니다. 그 감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서원-요나가 서원을 한 것은 적극적인 믿음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제까 지는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자기의 유 익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반드시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적극적이고 분명한 약속입니다. 결론 인간에게서의 절망은 실패자로 만들거나 무력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 요 극복을 위해 있는 것이요 그것을 통하여 미처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했 던 것을 깨닫게 하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요나는 원래 사명대로 니느웨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온 성 사람들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원해 냈습니다. 작은 요나를 크게 쓰신 하나님은 작은 여러분을 크게 쓰시고 보배롭게 쓰실 것입니다. 능력자이시고 지혜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붙잡혀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인물로 쓰임받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전진합시다 성경


본문:히 10:35-39 불교는 산속의 종교, 기독교는 거리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불교 의 경우 입산,수도,득도,성불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며, 기독교의 경우 에는 현실,역사,삶 구원에 중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명상과 사색을 중요시하는 정적인 종교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변화와 중생과 전진을 중요시하는 동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당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지녀야 할 신앙생활의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교훈한 말씀입니다. 특히 뒤로 물러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통이나 실패나 박해 같은 여건들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위협하더라도 그런 것들 때문에 뒤로 물러서면 안된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인 것입니다. 본문의 교 훈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 보겠습니다.
1. 담대해야 상을 받습니다. 35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34절을 보면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는 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옥에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용기를 잃어버리거나 믿음을 포기해 버리면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 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35절과 11:6을 연결시키면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힘쓰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나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담대한 믿음으로 이 기면 상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은 두가지 특징을 갖 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영예와 상은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상은 하나님 이 주시는 상입니다. 최고의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지성인들이 받기를 소마하는 상이 있습니다. 그 상이 바로 노벨상입니다.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은 스웨덴의 화학자이며 발명 가였습니다. 1863년 폭약을 발명하고 공장을 설립하여 폭약을 제조하기 시 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공장이 폭파되어 동생과 종업원 4명이 희 생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폭약 때문에 갑부가 되었 고, 그의 유언을 따라 1901년 노벧상 제도를 만들어 시상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통해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며 자신의 유산 3100만 크 로나를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에 기부했습니다. 상은 물리,화학,생리,과학,문학 ,의학 및 경제, 평화 부분에 걸쳐 시 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한 사람도 수상자가 없습니다. 시상식은 매년 12월 10일 스웨덴 국왕이 임석한 가운데 진행되 며 수상자에게는 금메달과 22만 달러 정도의 상금을 줍니다. 그러나 용기와 인내로 자신의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받는 상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노벧상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천군천사가 부 르는 승리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이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저는 몇년 전 스톡홀름을 방문했을 때 노벧상 시상식장에 들어가 보 았습니다. 텅빈 방에서 상을 받는 흉내를 내면서 장차 받을 상을 생각 해 보았습니다.
둘째 영원한 상입니다. 노벧상이나 올림픽상은 지상에서만 그 가치와 영예가 인정되는 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영원한 상입니다. 그영광과 가치 가 영원히 인정되고 평가받는 상입니다. 영원한 상이란 없어지지 않는 상, 녹슬지 않는 상, 그 가치가 영원히 존속되는 상인 것입니다.
2. 인내해야 약속을 이룹니다. 36절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가장 소중한 품성입니다. 나아가 인간 이 지녀야 할 품성이기도 합니다. 짐승도 단번에 성을 내거나 단번에 자기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람이라면 인내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인 바이얼리니스터 니꼴로 파가니니 (Niccolo Paganini)가 어느 날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주도중 바이 얼린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청중들은 깜짝 놀랐 습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남은 세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줄이 또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두 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때 세번째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졌습니다. 그는 잠시 연 주를 멈추더니 한 손으로 바이올린을 높이 치켜들며 "줄 하나와 파가 니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노련한 솜씨로 연주를 했습니다. 그의 연주가 끝나자 관중들은 우뢰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포기하면 안됩니다. 인내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세줄이 끊어지고 단 한 줄만 남았더라도 그 한줄 믿음으로 성공을 연주해 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암놈 펭귄이 알을 낳으면 숫놈 펭귄이 날개로 덮고 따뜻하게 하여 새 끼가 나오게 한다고 합니다. 최소한 두달동안 먹지도 않고 영하 40도의 한냉과 싸우며 시속 40km 의 강풍을 견뎌 낸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인내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합니다. 신앙인의 인내도 예외가 아닙니다. 참을성도 없고, 기다릴 줄도 모릅니다. 조그만 괴로워도 짜증내고, 약간만 고통스러워도 신경질을 내는 가 하면 쉽게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크리미어 전쟁 당시 부상으로 다리를 잘라야 하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이 그 병사에게 "최대한 용기를 갖고 아픔을 참아야 된 다"고 말하자 그 병사는 막대리를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그 병사는 막대기의 끝부분을 입으로 깨물면서 수술이 끝날때까지 단 한마디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막대기를 보니 끝 부분이 거의 짓뭉개져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의미깊은 교훈을 줍니다. 고통이나 좌절로 아픔을 겪을 때 실패나 절망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우리가 붙잡을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유는 십자가보다 더 억울한 사건도, 십자가보다 더 쓰라린 아픔도, 십자가보다 더 골깊은 상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들때 우리에게 평화와 위로와 소망과 승리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약속을 이루지 못합니다. 인내해야 소망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인내해야 영원한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3. 전진해야 기뻐하십니다. 38절을 보면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뒤로 물러간다는 말의 뜻은 "철회하다","뒤로 끌다"라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이나 계획을 쉽게 철회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을 뒤로 끌어 내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뒤로 물러 가는 사람은 자신도 주저않고 남도 끌어내리는 사람입니다. 굼벵이도, 지렁이도, 개미도 앞으로 갑니다. 하루살이도 앞으로 날아 갑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사람도 앞으로 갑니다. 부산 목포는 20 시간, 대전은 10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20시간이 걸려도 목적지인 고향을 향해 앞으로 갔기 때문에 가족을 만나고 명절을 지킬 수 있었 습니다.뒤로 가는 것은 30분도 지겹고 힘이 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를 보면 애굽을 떠나 40년만에 가나안 땅에 도 착했습니다. 참으로 지루하고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났던 애굽으로 되돌아 가자고 대들었고 소리쳤습니다. 출애굽기 14:12을 보면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소리치며 저항했던 사건이 기록 되어있고, 출애굽기 16:3을 보면 신광야에 이른 그들이 광야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실컷 먹다가 하나님의 손에 편히 죽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원망하는 장명이 기록되어 있스빈다. 그들은 전진에는 관심이 없고 되돌아가는 궁리에 바빴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늘 옛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 지난 날의 향수와 미련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엔 "과거에","소시적에","나 어렸을 때"라는 말이 일상어로 사용됩니다. 둘은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오늘 여기가 제일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과거가 필요없듯이 미래 도 필요없습니다. 이들은 수단과 한탕주의와 단발적인 삶에 만족하고 현싫을 엔조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는 언론사에서 압구정동을 서성대는 젊은이들을 붙잡고 '꿈이 뭣니 까'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꿈이요왜 꿈을 꿔요오늘 저녁 디스코텍에 가는 것예요그런거 몰라요여기 있잖아요 (엄지손가락을 보이며)"라는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의외로 현실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당장 오늘 나한테 무슨 복이 떨어지느냐, 나한테 득되는게 뭐냐,유익한게 뭐냐를 따집니다. 그들은 바로 현실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셋은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고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며 이스라 엘을 애굽에서 나아오게 하신 것은 그들로 가나안이라는 미래지향적 복지를 향해 전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걸핏하 면 뒤로 되돌아갈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고,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0:28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부산을 가기로 했으면 24시간이 걸려도 한발짝씩, 그리고 시속 10킬 로의 속도라도 부산을 향해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힘들고 느리고 괴롭더라도 뒤돌아 서거나 중단하면 안됩니다. 범죄심리학자들은 범죄자에겐 귀소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 기가 죄지은 현장을 남몰래 둘러보고픈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전진해야 합니다. 불행했던 과거, 불미했던 지난날 상처 였던 그 사건, 죄짓고 살았던 과거로 되돌아가면 안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영원한 가나안입니다. 되돌아가면 목적지에 못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노래불렀던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못갔고 가나안 땅에도 못들어 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산 교훈이 됩니다. 주님 바라보고 전진합시다. 곁을 보고 사람보다 사건보고 경치보면 전 진 못합니다. 주님이 최종 목표이며 영원한 세계가 최종 목적지입니다. 뒤로 물러가지 맙시다. 계속 전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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