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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를 각오한 바울 (행21,7-14)

본문

1,왜 Jerusalem에 올라 가는가
2,왜 순교를 각오했는가
3,순교를 각오한 결과는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 만난 후로는 줄곧 그의 생을 주님을 증거하는 일로 일관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역에 중점을 두고 증거를 했습니다. 해외의 전도를 세차레나 감행했었습니다. 마지막인 삼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지금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와 올 수록 바울에게 들려지는 소식은 반가운 것이 아니라 무섭고 험악한 것들이었습니다.
첫째는 사람들편에 들려 오는 소식으로써 예루살렘에는 바울이 올 것을 알고 체포하기 위하여 군병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령님의 계시인데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째는 함께 예수를 믿는 형제들로부터의 소식입니다. 형제들은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강력히 가로 막고 있습니다. 심지어 울면서까지 예루살렘 행을 말리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사정이 이쯤 되었으면 바울도 예루살렘으로의 길을 재고해봄직도 합니다. 아니 아예 에루살렘의 길을 포기할만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의 마음에 한 번 작정한 길에 후퇴가 없습니다. 언젠가 사도 바울은 믿음의 성도들을 가르켜 믿음의 좋은 군사라고 했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좋은 군사는 전진만 있을 뿐 결코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도 않되고 뒤로 물러섬은 더 더욱 않되는 말입니다. 주님의 좋은 군대는 비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좋은 군사는 용감할 뿐입니다. 주님의 좋은 군사는 푯대를 향하여 전진만 합니다. 주위에서 그렇게 말리는데도 한사코 예루사렘을 가고 있는 사도 바울을 보면서 우리들의 가는 길을 다시금 점검 하실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왜 Jerusalem으로 올라 가는가 " 주위의 형세가 그렇고 또 믿음의 형제들이 그렇게 만류를 함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행을 한사코 감행하는 이유눈 도데체 무었이란 말인가 예루살렘에 당도하기만 하면 체포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은 한 가지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행은 계산적으로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길을 그렇게 고집하고 있는 이유가 무었입니까 1 ),아는 것과 성령님의 뜻은 별개의 것입니다. - 10-11절에 "여러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님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성령님께서 오래 전에 벌써 바울에게 알려 주셨던 일을 이제 마지막으로 아가보란 선지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왜 이렇게 여러번 여러번 알려 주시는 것입니까 성령님이 이렇게 반복적으로 알려 주심은 이 사건을 미리 알고 피하라 함이 아닙니다. 앞으로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니 미리 기도함으로 효과적인 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요. 무어라고 했습니까 "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이 띠 임자를 이방인의 손에 넘겨 준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이 사실을 알고도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으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지 않는 결과가 됩니다. 일이 그렇게 되면 이는 성령님의 뜻이 아닙니다. 잘되면 내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란 말이 있습니다. 잘되면 그만이고 잘 못되면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나뿐 버릇들이 사람 들에게 있습니다. 사람들이 꿈으로 환상으로나 음성등으로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문제는 그렇게 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분간하지를 못해서 덮어 놓고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고 자기 좋은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성령님이 저들에게는 바울의 앞날을 알려 준 것이고 바울에겐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집요가헤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사람이 알고 있는 것과 하나님의 뜻은 별개의 것입니다. 통일된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님의 뜻이 아릴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은 믿음의 형제들이 눈물로 바울의 가는 길을 말리고 있습니다. 울며 불며 못가게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한 마음이 되어서 말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정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마태복음서에도 있습니다. 마16;21절에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간절하게 말릴때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바울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의 정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 바울은 자기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었던 주님의 뒤를 사도 바울은 용감하게 따르고 있을뿐입니다.
2,왜 순교를 각오했는가 " 12절에서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성령님에 매였기 때문입니다. ` 행20;22절에서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성령님에 매인바 된 사람임으로 오직 한 길 성령님의 인도만을 따를 뿐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가오한 것입니다.
2 ),복음을 증거키 위해서입니다. -` 행20;23절에 "오직 성령님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한난이 나를 기란다 하시나" 행20;24절에서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직 복음 증거하는 일 때문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인하여 복음이 증거될 수만 있다면 이로 만족하는 바울입니다.
3),은혜를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자기를 살리신 은혜를 아는 바울입니다. 나 같이 못난 인간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을 잘 아는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늘 나는 주님께 무었을 드릴까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었일까 가장 소중한 하나박에 없는 귀중한 목숨을 받히기로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위하여 죽으셨듯이 내가 주님의 은혜 때문에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영광일까 하면서 살아 온 바울입니다.
3,순교를 각오한 결과는 순교를 각오한 바울의 아름다운 삶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1),비겁하지 않고 소신껏 살았습니다. - 사람이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치 못해서가 아닙니다.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하다가 해를 입을까바 두려워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순교를 각오한 사람이니 두려울께 없었습니다. 두려울께 없으니 하나님의 명하신 뜻을 따라서 담대하게 살수 있었고 예루살렘을 향하여서도 용감하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2),불안을 극복하고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한번만 죽지마는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여러번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연 옳은 말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아무 것도 무서워 하지 않기 때문에 죽는 날 죽더라도 사는 날 동안은 평안을 누립니다. 그러나 죽을까바 겁을 내고 사는 사람은 항상 초조하고 불안한 가운데 사느라고 지례 죽기를 여러 벚 여러 번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옥 중에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하면서 사신 분입니다.
3),깨끝한 사람을 살 수 있었습니다. ` 행20;33절입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누구에게든지 청렴 결백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차하게 살고자 하니까 부정도 하고 타협도 하게 되는 것이지 죽을 것을 각오한 삶이라면 무었때문에 부정을 저지르겠습니까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 생명을 바친 사람이기에 깨끝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행을 고집하는 바울 순교하기를 즐겨하는 사도 바울 주님을 위하여 천한 목숨이나마 드릴 수 있음을 영광으로 알고 달려 온 바울입니다. 그 기다리던 기회가 지금 사도 바울 앞에 온 것입니다. 이 귀한 기회를 결코 노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나타 낼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있는게 아닙니다. 기회는 나를 기다려 주지 아니합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거든 사양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그런 일이거든 힘써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예루살렘의 길일찌라도 그게 순교의 험한 길일찌라도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영광으로 감당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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