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패하는 자 같으나 승리하는 자 (행22:1-21)

본문

예루살렘 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으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 에 말들이 끊일 사이가 없더니,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이 퍼지면서 사실이니 아니니 하는 말로 다시 들끊고 있을 때였습니다. 방안에 숨어서 꼼짝도 하 지 못하던 제자들이 길거리로 나와 겁없이 '예수는 다시 사셨다'고 외치고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모여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관원들과 제사장들은 한편으로는 당황하고 한편으로는 분개하고 있었 죠. 이때에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소탕하러 앞장섰습니다. 사울 일당의 소탕작업에 걸려든 사람이 일곱 집사중 한 사람인 스데반 이었습니다. 지혜가 충만하고 성령님으로 충만하며 성경지식이 풍부한 대지도 자였지요. 그를 돌로 쳐 죽일 때에 스데반은 패하는 자 같았고, 사울은 승 리하는 자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고 아 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헌신하므로써 오히려 순교자에게 패하는 자가 되었 습니다. 여기에 스데반은 패 하는 자 같았으나 승리하는 자 였음을 전해주 고 있습니다. 왜 신앙생활은 패하는 자와 같습니까
첫째로, 주님의 교훈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에 보면 '악한 자를 대적지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이런 말씀을 기독교인이 따라 실행하고자 하면 모든 악한 자에게 패배자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른편 뺨을 칠 때에 왼편뺨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는 것은 약자의 자세요. 패배자의 자세로 보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승리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의 승리는 의의 편에 서는 것이요 진리를 놓치지 아니하는 것 이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해하는 승리는 죽지 않고 사는 것이요. 뺏기지 아니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해하는 승리는 죽지 않고 사는 것이요, 뺏 기지 아니하는 것이요, 그리고 지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모든 것을 버리는 자는 패 배자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위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가기지 위한 생활 이 아니요, 세상에서 어떤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한 생활이 아니요 세상에서 어떤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한 생활이 아니요 오래 장수하기 위한 생활이 아 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한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뺏기고 놓치고 핍박을 받으면서, 어떤 때는 스데 반처럼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와 영광을 위하여 것을 보 면 패하는 자와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죽었다고 패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뺏겼다고 패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쫓 겨났다고 패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시대가 흘러 갔을 때에 가서 승리자는 결정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오늘의 승리를 위한 생활이 아니라,역사 가 흘러간 후에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생활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뺏겼다, 쫓겨났다,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패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요 진리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패하는 자 같으나 승리하는 자입니다. 토기장이와 진흙 성경


본문:롬 9:19-24, 렘 18:1-2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나무로 깎아서 만들었거나 돌을 다듬어 만들지 않고 진흙을 빚어 만드셨다고 하는데에는 큰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진흙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아름다 운 그릇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과 그의 정성스런 손길을 통하여 참으로 많은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 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렘 18:2) 라고 느닷없이 말씀하셔 서 그는 토기장이에게로 가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그의 손에서 파상할 때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렘 18:4)라고 그가 본 것을 말하였 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에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 지 못하겠느냐.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 라.'(렘 18:6)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토기장이와 진흙과의 관 계와 같습니다. 또한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한나라도, 세계도, 전 인류도 모두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 손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 나 를 이같이 만들었습니까'라고 하나님께 힐문할 수가 없습니다.
1. 오늘의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토기장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 하나님 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기때문이며 그 분은 우리의 삶의 주관자이시기 때 문입니다. 사람의 운명은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나서 우연히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창조의 목 적이 있고 그 쓰이는 용도가 있는 것입니다. 진흙이란 것은 그 자체로는 아 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무엇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진흙 은 그것을 다룰 수 있는 분의 손에 의하여 빚어지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능력으로 우리를 빚으시고 만들어 나가십니다. 그것은 토기장이의 권한입니다. 진흙은 빚어지고 만들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마음대로 주무르시어 하나님의 용도와 계획에 맞는 여러가지 그릇들 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진흙덩어리가 토기장이에게 '지금 나 한테 뭘 하시는 겁니까' 하고 질문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어 떠한 그릇으로 만들어지든지 그의 손길에 따라 만들어질 뿐이요 일단 만들 어진 그릇은 큰 그릇이던 작은 그릇이던,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던 천하게 쓰 이는 그릇이던 그 쓰여지는 용도에 순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토기장 이이신 하나님은 이 진흙을 가지고 만드실 때에 당신이 구상하시고 목표하 신대로 당신이 원하는 그릇들을 만드십니다. 가치있는 작품이 되기까지는 시 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오랜 시간들을 즐겨 기다리십니다. 우리 의 인격이나 신앙도 사실 내가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그리고 그의 손길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진흙으 로 그릇을 만드시는 토기장이이시니까 그러합니다.
2.
그런데 여기서 인간은 '진흙'이라고 그랬습니다. '아담'이란 말은 '아 다마'(진흙)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진흙은 흙을 물에 섞은 것입니다. 마른 흙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고운 흙이 물에 개이고 그것이 부 드럽고 고분고분하게 됨으로서 토기장이의 손에 의하여 좋은 작품들이 나오 게 됩니다. 흙에 물을 부어 진흙이 되게 한다는 것은 보잘 것 없고 무가치한 것에 하나님의 능력이신 물이 부어짐으로 우리에게 생명이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이 물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진 생명을 말한 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흙은 그 자체로서는 그다지 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른 목적을 위해 올바른 손으로 빚어질 때에 위대한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흙에서 굉장히 아름답고 가치있는 도자가가 만들어져 나오는 것은 참으 로 신비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진흙은 부드럽고 질이 좋은 흙이라야 합니다. 토기장이가 흙을 쓸 때에 아무 흙이나 다 쓰지를 않습니다. 흙이 좋지 못하면 작품은 망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부드럽고 고분고분한 진흙이 되 어야 하고 또한 흙은 아무리 좋아봐야 흙이니까 반드시 토기장이의 손에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만들어진 그릇이란 없습니다. 만드신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흙'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 대로 나를 만드십시요'하고 완전히 그 뜻을 따르는 질 좋은 부드러운 진흙 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의 집에 가보니 빠르게 돌아가는 녹로(회전대)에 서 일하는 토기장이의 모습을 그는 보았다고 그랬습니다. 그릇을 만들 때에 빙빙 돌아가는 녹로 그것이 중요한데 그 돌아가는 녹로에 의하여 모양이 만 들어지고 매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듬어져서 좋은 그릇이 됩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 돌아가는 녹로의 속도를 조절하는 이는 역시 토기장이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우연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하여 조절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환경들을 설정하시 고 그 돌아가는 속도를 조절하십니다. 이것은 모두 다 우리를 유효적절하게 만드시는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는 진흙을 녹로에다 놓고 그 크기와 모양과 속도를 조절하시여 그가 원하는 그릇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만들어진 그릇의 크기가 아니라 돌 아가는 녹로의 중심입니다. 그 중심이 잘 잡혀야만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올 것입니다. 이 녹로의 중심이 잘못 잡히면 불가불 잘못된 물건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대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중심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중심이 그리스도에게 있 어야 할 것입니다.
4. 선지자 예레미야가 눈여겨 본 것은 진흙으로 만든 것이 토기장이의 손 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렘 18:4)한 것입니다. 이것은 녹로에서 돌아가다가 망쳐진 그릇을 의미합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에 손에 언제나 순복해야 하는데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망쳐진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방법대로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안에서 자신의 계획을 세워야 하는 데 하나님의 뜻밖에서 우리 인생의 계획을 세우면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완성된 그릇을 볼 수 있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릇이 망쳐집니다.
그런데 토기장 이는 그 망쳐진 진흙을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진흙을 다시 비져 새것 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데 은혜로우시고 우리를 다시 만드시는데 지극히 자 비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수 없이 다시 만들어지는데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가 이것을 용납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은혜입니다.
5. 여기서는 그릇을 굽는 용광로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 떠한 그릇이라도 용광로를 통하기 전에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용광로에서 수천도의 열이 가해짐으로 그릇에 강도를 주고 아름다움을 주고 가치와 유용성을 높여 줍니다. 도자기에서는 그래서 이 용광로의 과정이 가 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불한번 잘못 때면 전부를 망친다고 합니다. 신자의 신앙도 반드시 불시련의 용광로를 통과할 때 보잘 것 없는 흙덩 어리가 보석과 같이 아름다운 도자기로 변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 기에 인생은 반드시 용광로를 가지게 마련입니다. 욥은 고통의 용광로를 거 쳐서 위대한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고 자기는 거기서 정금과 같이 나왔다고 그랬습니다. 토기장이는 이 용광로를 얼마나 뜨겁게 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온도에 따라서 도자기들의 예술품으로서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용광로의 온도를 가장 정확하고 효과있게 조절하시는 유능한 토기장이십니다. 사람은 이 용광로를 통과하여야만 보잘 것없는 흙덩어리가 강하고 아름답고 유용한 값진 '자기'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흙이 아름 다운 고려청자 이조백자가 된다는 일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신앙도 하나님의 용광로를 통과할 때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6. 렘 19:1-13에 보면 하나님은 다시금 예레미야에게 또 하나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는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서 그것을 흰놈의 아들의 골짜 기에 가서 다 던져 깨트려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상과 죄악으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난 유다의 죄를 상징적으로 심판한 실물교훈이였습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오지병이라도 던져 깨트리면 깨여지고 맙니다. 선지 자 예레미야는 완성된 토기를 가지고 그 땅의 장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 앞 에 그것을 던져 박살을 내면서 심판을 예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버렸으며 여기서 우상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며 죄를 범하였다.내가 이 오지병을 깨트리는 이 골짜기가 학살의 골짜기라고 불리울 날이 올 것이다'(렘 19:10-11)하면서 오지병들을 던져 깨트렸습니다. 깨여진 도자 기는 다시 고쳐 쓸 수는 없습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릇 그것은 곧 우리들입니다. 세상에 이름있는 도예가들의 작품들은 굉장한 값에 팔리고 옛날 고려청자같 은 것은 값을 매기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이 만드신 그 릇들인 우리 인생들이겠습니까 그것은 최고의 걸작품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악과 반역으로 나가면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그릇들을 토기장이이신 그 분은 여지없이 모두 부숴 버리실 것입니다. 이것은 죄악되고 반역하는 인간과 사회와 나라들에 대하여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릇'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릇'이란 무엇을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일은 못합니다. 그릇은 다만 무엇을 담고 받아드리고 또 이것을 나누어 줍니다. 그릇은 비워있을 때 가득히 채워지고 채워졌을 때 남에게 나눠줍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쓰시기에 아름답고 적합한 그릇이 되 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495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