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헬라인, X인 (행22,22-30)
본문
오늘 본문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첫째는 전통적인 유대인이 있고
둘째는 로마의 시민권을 돈으로 산 헬라인이 있고 셋짼는 그리스도인인 사도 바울이 있다. 오늘 우리는 이들 세 부류의 사람을 살펴보면서 그 중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결달 하실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다.
1,유대인 " 먼저 유대인을 생각해 본다. 오늘 바울의 변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유대인들이다. 유대인이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다. 유대민족이란 이름으로 쓰여질땐 거의가 종교적인 면을 함께 내포하는 말이다. 유대민족의 특징은 저들을 구원할 구원자이신 메시야가 올것을 굳게 믿는 믿음에 근거한 종교이다. 이는 아브라함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 명칭이 4복음서에 68회 사도행전에 79회나 쓰이면서 발견되는 것은 오신 메시야인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자들의 총칭이 되어 있다. 참으로 야릇한 일이다. 메시야를 그토록 기다리던 민족인데 어찌하여 메시야를 대적하는 자리로 전락을 한 것인가 더 엄격히 말하면 4복음서에 유대인이라고 호칭될 때는 불신자를 총칭하는데 쓰여졌다. 어쩌다가 이지경에 이르렀는가 무었을 하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나 시간상 유대인들의 생활과 믿음의 실상을 다 상세히 소개를 할 수는 없고 간단히 요약을 한다면 저들의 메시야 개념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세월 따라 흐려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에게 약속하신 메시야가 하나님의 의도되로 백성들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점차 사람의 방법과 사람의 생각에 의한 메시야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유대민족은 메시야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다리지 않고 자기들의 방법으로 기다렸기 때문에 막상 메시야가 오셨을 때 배척할 수 박엔 없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라고 전하는 자들을 잡아다가 죽이게 되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지금 전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도 유대인으로 유대인의 방식으로 메시야를 고대하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참 메시야를 만난 사란이 되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특징이랄까 결정적인 잘못된 점이랄까 . 유대인들은 하나의 종교적인 고집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자기들의 만의 하나님이란 것이다. 그 사상이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주님을 만나게된 과정을 말할 때까지는 종용히 듣고 있다가 갑자기 소란을 피우면서 바울을 향하여 22절에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소동을 벌렸다. 22절의 이말 하는 것까지가 어디인가 21절의 중반절에 이방인이란 말이 있다. "나더로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이방인에게 라는 말이 떨어지자 말자 발끈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오랬동안 소망속에 기다려 왔던 메시야의 대망의 소식이 이방인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이런 것을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모독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잘못된 인간적인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을 박게 하였고 이를 전하는 주님의 종을 잡아 죽였던 것이다. 그럼 오늘날 우리들은 유대인들 보다 낳은 점이 무었인가 우리 중에도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그것이 성경적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어떤 경험과 관습에 너무 의종하는 것을 보게된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일에 유대인들처럼 소란을 피운다. 물론 유대인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직겁적으로 말은 아니했어도 그 이상의 감정을 폭발할 때가 더러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명심을 해야할 것은 우리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보다 뭔가 낳다고 착각하지 말라. 한가지도 저들과 다를게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니 어쩌면 인간적인 면에서는 저들보다 못할런지도 모른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사람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들에게 우리들처럼 하나님을 알게하기 위하여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음이다. 우리가 이 일을 바로 하지 못하면 유대인보다 나음이 없다.
2,헬라인 24절에 천부장이 등장한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 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천부장이 백부장더러 바울을 채찍질 하라 했다. 심문하라고 했다. 당시에 로마에는 많은 천부장이 있었다.
그런데 유대땅 예루살렘의 치안을 맡은 천부장은 그 중에서도 꾀나 신임을 얻는 장교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가장 치안유지가 어려웠던 곳이 유대요 또 예루살렘이었던 까닭이다. 지금 예루살렘의 천부장은 28절의 말 그대로 원래부터 로마인이 아니라 헬라인이었으나 돈을 많이 주고 로마의 시민권을 산 사람이었다. 그러니 돈도 있고 실력도 있고 또 천부장이니 권력도 있는 상당한 사람이다. 오늘 우리네 주위에도 이런 권력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가 바울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그의 방법은 한마디로 공정하지가 못하다. 대체로 신문하는 방법에는 다음의 세가지 방법이 있다.
1),바울과 주모자를 따로따로 신문하는 방법
2), 바울과 유대인을 대면케하는 방법
3),바울을 죄인이라고 간주하고 고문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등이있다.
그런데 천부장은 이 셋 중에 가장 공정치 못한 방법을 가지고 바울을 대하고 있다. 바울은 죄도 정하기 전에 죄수로 취급되었다. 이것은 당시 로마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들을 신문할 때 통용하던 방법이었다. 이는 천부장만이 아니라 역사 이래로 관료주의자들과 지식인들과 가진 자 들 중에서 많이 행해질 수 있는 횡포라 하겠다. 천부장이 이럴 수 박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현실적인 것과 가시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정치인들에게 믿음이 없다. 오늘의 지식인들에게 믿음이 없다.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믿음이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들마져 그렇게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이 바울을 채찍으로 때리라고 했던 천부장보다 나음이 어디에 있는가
3,그리스도인 유대인과 헬라인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어던 사람인가를 사도 버울을 통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22;1절에서부터 지금까지 저 살기가 등등한 유대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오늘 바울에게서 배워야할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범은
첫째. 합당한 기회가 올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댐으로 인하여 로마의 군인들의 귀가 멍멍함은 물론 귀창이 터져나가는 듯 했을 것이다. 그뿐인가 로마의 군인들은 바울을 죄도 정치않고 죄인취급을 하여 결박하고 채찍으로 때릴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런 저항이 없다. 소란한 유대인들의 함성이 주져앉기를 기다린다. 로마의 군인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 올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진정이 되었을 때 바울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인내와 침착성 가운데 참 그리스도인의 상을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숙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신의 대의 명분인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망각할 때가 많다.
둘째; 기회를 바로 선용할 줄 아는 바울이다. 25절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 하니" 바울이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때는 유대인들이 어찌되나 보려고 막 종용해진 때 였고 로마의 군인들이 이성을 찾고 막 채찍을 들려고 하는 찰나였다. 얼마나 적절한 때인가 우리들에게도 이런 능력이 있어야한다. 쓸대 없는 일에 열을 올리지 말고 마땅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잘 선용할 줄 아는 분별력을 길러야한다. 세쩨; 바울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 할 줄 알았던 것을 배워야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체적으로 복종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정당한 권리는 누릴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임을 언제나 명심을 하고 살아야 하겟다. 아멘 !!
첫째는 전통적인 유대인이 있고
둘째는 로마의 시민권을 돈으로 산 헬라인이 있고 셋짼는 그리스도인인 사도 바울이 있다. 오늘 우리는 이들 세 부류의 사람을 살펴보면서 그 중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결달 하실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다.
1,유대인 " 먼저 유대인을 생각해 본다. 오늘 바울의 변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유대인들이다. 유대인이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다. 유대민족이란 이름으로 쓰여질땐 거의가 종교적인 면을 함께 내포하는 말이다. 유대민족의 특징은 저들을 구원할 구원자이신 메시야가 올것을 굳게 믿는 믿음에 근거한 종교이다. 이는 아브라함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 명칭이 4복음서에 68회 사도행전에 79회나 쓰이면서 발견되는 것은 오신 메시야인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자들의 총칭이 되어 있다. 참으로 야릇한 일이다. 메시야를 그토록 기다리던 민족인데 어찌하여 메시야를 대적하는 자리로 전락을 한 것인가 더 엄격히 말하면 4복음서에 유대인이라고 호칭될 때는 불신자를 총칭하는데 쓰여졌다. 어쩌다가 이지경에 이르렀는가 무었을 하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나 시간상 유대인들의 생활과 믿음의 실상을 다 상세히 소개를 할 수는 없고 간단히 요약을 한다면 저들의 메시야 개념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세월 따라 흐려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에게 약속하신 메시야가 하나님의 의도되로 백성들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점차 사람의 방법과 사람의 생각에 의한 메시야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유대민족은 메시야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다리지 않고 자기들의 방법으로 기다렸기 때문에 막상 메시야가 오셨을 때 배척할 수 박엔 없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라고 전하는 자들을 잡아다가 죽이게 되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지금 전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도 유대인으로 유대인의 방식으로 메시야를 고대하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참 메시야를 만난 사란이 되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특징이랄까 결정적인 잘못된 점이랄까 . 유대인들은 하나의 종교적인 고집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자기들의 만의 하나님이란 것이다. 그 사상이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주님을 만나게된 과정을 말할 때까지는 종용히 듣고 있다가 갑자기 소란을 피우면서 바울을 향하여 22절에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소동을 벌렸다. 22절의 이말 하는 것까지가 어디인가 21절의 중반절에 이방인이란 말이 있다. "나더로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이방인에게 라는 말이 떨어지자 말자 발끈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오랬동안 소망속에 기다려 왔던 메시야의 대망의 소식이 이방인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이런 것을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모독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잘못된 인간적인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을 박게 하였고 이를 전하는 주님의 종을 잡아 죽였던 것이다. 그럼 오늘날 우리들은 유대인들 보다 낳은 점이 무었인가 우리 중에도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그것이 성경적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어떤 경험과 관습에 너무 의종하는 것을 보게된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일에 유대인들처럼 소란을 피운다. 물론 유대인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직겁적으로 말은 아니했어도 그 이상의 감정을 폭발할 때가 더러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명심을 해야할 것은 우리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보다 뭔가 낳다고 착각하지 말라. 한가지도 저들과 다를게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니 어쩌면 인간적인 면에서는 저들보다 못할런지도 모른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사람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들에게 우리들처럼 하나님을 알게하기 위하여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음이다. 우리가 이 일을 바로 하지 못하면 유대인보다 나음이 없다.
2,헬라인 24절에 천부장이 등장한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 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천부장이 백부장더러 바울을 채찍질 하라 했다. 심문하라고 했다. 당시에 로마에는 많은 천부장이 있었다.
그런데 유대땅 예루살렘의 치안을 맡은 천부장은 그 중에서도 꾀나 신임을 얻는 장교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가장 치안유지가 어려웠던 곳이 유대요 또 예루살렘이었던 까닭이다. 지금 예루살렘의 천부장은 28절의 말 그대로 원래부터 로마인이 아니라 헬라인이었으나 돈을 많이 주고 로마의 시민권을 산 사람이었다. 그러니 돈도 있고 실력도 있고 또 천부장이니 권력도 있는 상당한 사람이다. 오늘 우리네 주위에도 이런 권력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가 바울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그의 방법은 한마디로 공정하지가 못하다. 대체로 신문하는 방법에는 다음의 세가지 방법이 있다.
1),바울과 주모자를 따로따로 신문하는 방법
2), 바울과 유대인을 대면케하는 방법
3),바울을 죄인이라고 간주하고 고문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등이있다.
그런데 천부장은 이 셋 중에 가장 공정치 못한 방법을 가지고 바울을 대하고 있다. 바울은 죄도 정하기 전에 죄수로 취급되었다. 이것은 당시 로마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들을 신문할 때 통용하던 방법이었다. 이는 천부장만이 아니라 역사 이래로 관료주의자들과 지식인들과 가진 자 들 중에서 많이 행해질 수 있는 횡포라 하겠다. 천부장이 이럴 수 박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현실적인 것과 가시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정치인들에게 믿음이 없다. 오늘의 지식인들에게 믿음이 없다.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믿음이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들마져 그렇게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이 바울을 채찍으로 때리라고 했던 천부장보다 나음이 어디에 있는가
3,그리스도인 유대인과 헬라인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어던 사람인가를 사도 버울을 통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22;1절에서부터 지금까지 저 살기가 등등한 유대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오늘 바울에게서 배워야할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범은
첫째. 합당한 기회가 올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댐으로 인하여 로마의 군인들의 귀가 멍멍함은 물론 귀창이 터져나가는 듯 했을 것이다. 그뿐인가 로마의 군인들은 바울을 죄도 정치않고 죄인취급을 하여 결박하고 채찍으로 때릴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런 저항이 없다. 소란한 유대인들의 함성이 주져앉기를 기다린다. 로마의 군인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 올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진정이 되었을 때 바울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인내와 침착성 가운데 참 그리스도인의 상을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숙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신의 대의 명분인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망각할 때가 많다.
둘째; 기회를 바로 선용할 줄 아는 바울이다. 25절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 하니" 바울이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때는 유대인들이 어찌되나 보려고 막 종용해진 때 였고 로마의 군인들이 이성을 찾고 막 채찍을 들려고 하는 찰나였다. 얼마나 적절한 때인가 우리들에게도 이런 능력이 있어야한다. 쓸대 없는 일에 열을 올리지 말고 마땅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잘 선용할 줄 아는 분별력을 길러야한다. 세쩨; 바울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 할 줄 알았던 것을 배워야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체적으로 복종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정당한 권리는 누릴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임을 언제나 명심을 하고 살아야 하겟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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