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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는 여인 (행9:36-42)

본문

사람들에게 있어서 남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즉 남이 알아준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27일 치러질 선거가 그런 것일 것입니다. 선거에 나선 사람들은 제각기 모두 다 “나는 이러이러하니 진짜 인정받을 사람입니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나를 좀 인정해 주십시오, 나를 뽑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타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평상시의 모습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고 그 사람의 인품을 성격을 닮고자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살아있을때야 살아있어서 인정받는다지만 죽은 자가 인정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승 집에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잇지만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살아있을 때 인정받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사실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비다라는 여인은 어떻습니까 이 여인은 살아있을때도 많은 교우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칭송을 받았는데 그가 죽어서까지도 사람들은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모든 무리들이 그를 사랑하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도 칭송을 받고, 인정을 받고, 죽었어도 인정은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가 살았을 땐 잘하다가 죽으니 “아이고, 그 사람 잘 죽었어.”라는 말을 듣는다면 살았을 때도 인정 못 받은 것이 됩니다. 다비다, 도르가라하는 이 여인이 모든 자들에게 칭송을 받고 인정을 받았던 것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39절 말씀 하반절을 보면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세상에서 천대받는 과부들을 위하여 손수 옷을 지어주면서까지 선행과 구제에 힘쓴 것입니다.
그런데 선행과 구제는 서로 다른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행은 하나님께 한 일이 선행입니다.주님 위해 하는 모든 일이 선행이고, 세상을 향해 한 일이 구제인 것입니다. 즉 선행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이 신자들의 선행이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올바로 사용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선행의 열매가 맺히게 되고 신자들의 이러한 선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주님께서는 그러한 선행을 보시고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위해 열심히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헌신하고, 봉사하고 주의 종들을 잘 받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얼마나 잘했으면 그가 죽었다고 하니 타향에 있던 베드로가 쏜살같이 달려와서 그를 위해 기도하였겠습니까 세상을 향해 옷을 지으며 구제하는 일을 하였기에 세상사람들에게도 많은 칭송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전 세금비리 공무원, 대구 지하철 붕괴.등 좋지 않은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낄 때가 많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대충 대충 믿어라. 예수 믿는 것 왜 그리 티내냐”고 합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일에 관련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대충 대충 예수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인정받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사람들에게도 인정받지만 무엇보다도 주님께 인정받으시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인정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1.먼저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이 여인이 먼저 선행을 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 위해 선한 행동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니 너희도 선하라 하셨습니다. 무엇이 투자되어야만 이 선행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 다 선행입니다. 예배하는 마음은 선행입니다. 경건생활이 무엇입니까 우리 학생들은 다 아시겠죠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제일주의가 경건 생활입니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세상 속에서 지내다 주일 하루만큼도 주님을 위해 예배드리고 찬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아주 큰 문제가 아닐까요 “아이고, 오늘은 피곤해서 못 가겠다.” “오늘은 누구 결혼식에 가봐야하기 때문에 못 가겠다.”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인데 왜 내 마음대로 합니까 믿는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주일예배를 잘 지키지 않는데 그 아들, 딸들은 반대로 잘 지키는 것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 아빠는 절대 안 닮아야지.”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님을 그대로 따라 하게 됩니다. 요즘은 공부 때문에 자녀가 주일을 범해도 그냥 둔다. 그러나 그것은 자녀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마귀의 자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생각하는 마음이 선행입니다. 우린 교회생활보다도 사회생활이 우선될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사회생활의 일부분이 교회생활인것처럼 착각할 때오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회에서 우리가 일하는 곳은 주님을 전하도고 나타내는 작업장입니다. 그 작업장을 집인 교회보다 우선으로 여긴다면 뭔가 판단착오가 아니겠습니까 무슨 일을 해도 교회중심 생활이어야 합니다. 직장을 정할 때도 먼저 교회를 생각하고 이사를 해도 먼저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교회를 초월해서 역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우리는 주님의 지체입니다. 지체가 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내 평생 교회를 사랑하며 주님 중심으로 살리라!”
2.이것은 특히 여성도님들이 주의해서 들어야 겠습니다. 여인으로서 지조를 지켜야 합니다.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는 지조가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남의 남편을 사랑하는 여성들이 많기에 특별히 자신의 남편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즉 나의 남편을 최고로 사랑하는 마을을 가져야 합니다. 남편들이 집에서 큰소리 치지 어디에서 큰소리 치겠습니다. 부인마저 바가지를 박박 긁는다면 아마도 남편 되신 분들은 서실 곳이 없을 것입니다. 세계의 유명한 인물들 가운데 유난히 남자가 많은 이유를 아십니까 바로 내조하는 부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조하는 부인이 없었다면 그들 중 절반을 세상 가운데서 인정을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전에 TV에 이런 광고가 있었죠. 예쁜 여자 탤런트가 나와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정말 남편의 성공의 절반은 아내 몫이 아닐까요 그 다음으로 범위를 넓혀서 내 민족, 내 조국,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즉, 나라를 위해 걱정하고 기도하는 여인이어야 합니다. 에스더는 유대인으로서 바사왕에게 시집을 갔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바사나라에 포로되어 수산성에 살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바사왕은 아하수에로였습니다. 그때 수산도성에 사는 유대민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들의 생명, 재산이 탈취를 당하도록 결정적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동기를 살펴보면 유다민족중에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대궐 문지기로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총리대신인 하만이 대궐문으로 출입할때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악감정 때문에 민정에 어두운 아하수에로 왕에게 무고하여 왕의 재가를 받으므로 되어진 사건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드개로부터 듣게 된 왕비 에스더는 비장한 결의로 3일간 자신을 위하여 거족적으로 금식기도를 한 후에 “죽으면 죽으리라”의 필사각오를 하고 동족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선두에서 활약합니다. 그 결과로 유대민족을 학살하려던 하망의 일가족은 멸절당하고 오히려 유대민족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고 위기에서 건져냄을 받는 큰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에스더처럼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앙의 지조를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면 우리는 변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지키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부는 신랑이 사우디엘 가도, 배를 타러가도, 징병에 끌려갔어도, 집 잘 보고 아이를 보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내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옛날 여인들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지 못하였을 경우엔 자결하기 위하여 은장도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만큼 여인으로서의 지조를 중요시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옛날 여인과 너무나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우린 남편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구별 되이 정결하게 지냅니다. 그리고 은장도대신 우리에겐 성경이 있습니다. 은장도는 자신을 완전히 지킬 수는 없고 그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직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우린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3.주님을 위해서 정말로 헌신하는 여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인정하는 여인, 주의 종이 인정하는 여인, 교회부흥도 헌신하는 자들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헌신하는 자 없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헌신하는 자는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무엇보다 주님께 인정받고 주님께 상을 받는 것입니다. 빼앗는 자는 강제로 협박해 상대편의 의지를 무시하고 권리를, 소유를 빼앗아 가지만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강제로 하지 않습니다. 받고자 하는 자에게는 주시고, 하고자 하는 자에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축복 받고 살기 원하십니까 주님께 인정받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상급 받고 면류관 쓰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헌신하십시오. 다비다처럼 정말로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헌신은 정말 자기 자신을 헌신처럼 버릴지라도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새신이 많이 신고 다녀야 헌신이 되듯이 우리 몸이 헌신이 될 정도로 헌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헌신할 때 교회는 부흥합니다. 우리가 헌신할 때 주님께 인정받습니다. 주님께 인정만 받는다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어떤 꼬마가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자전거가 갖고 싶습니다. 자전거를 갖게 해주세요.” 조금 있다가 더욱 크게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자전거가 갖고 싶습니다. 자전거를 갖게 해주세요.” 그러자 어머니가 그 소리를 듣고 이야기했습니다. “애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크게 기도하지 않아도 다 듣고 계시단다.” 그러자 꼬마가 말했습니다. “내 기도는 하나님보다 아빠가 들어야 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혹, 우리의 헌신은 이런 꼬마와 같은 헌신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헌신이 아니었습니까 “집사니까, 장로니까, 권사니까 이 정도는 해야겠지.” 물론 직분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헌신의 방향이 주님을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여집사님들이 특히 헌신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토요일 청소엔 여집사님들만 나오시는 것 같구요. 그리고 여러 가지 교회의 일들. 여러 성도님들! 내가 먼저 해야 됩니다. 교회 청소도, 봉사도, 힘든 일도, 복받기는 내가 먼저를 원하지만 헌신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모두가 “내가 먼저”라는 마음으로 헌신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다 함께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 함께의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초월하시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도 동의하고 헌신하여 잉태하였고, 아브라함도 동의하고 헌신함으로 그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뜻에 동의하고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지 않고 헌신한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나를 주님의 도구로서-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화목의 도구로, 부흥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동의 안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마지막
4.우리는 사랑하여야 합니다. 다비다는 사랑하였기에 선행을 하고 구제를 베풀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올바른 선행을 할 수 없고 세상의 가난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구제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들 성도끼리 덮어주고, 인정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힘을 합쳐 구제하길 원합니다. 다비다외에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헌신한 세 여인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마르다의 헌신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녀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붙고 여인의 소중한 그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씼었습니다. 마르다는 가장 최선의 헌신을 주님께 드린것입니다. 그리고 마르다의 헌신.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생각하고 예수님만 위해 일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의 각오를 가지고 한 헌신. 이 여인들에게 헌신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었겠습니까 이들에게는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력이 있었습니다. 헌신함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선행함으로 구제함으로 헌신함으로 주님께 인정받음과 함께 또한 세상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그리고 죽더라도 인정받을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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