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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질서에 관한 지혜 (고전11:1)

본문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점에 대해 몇 가지 말할 것이 있었으므로 우선 그들의 좋은 점을 들어 칭찬을 함으로써 본 장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특별히 두 가지 면에서 칭찬합니다.
첫째, 그들은 바울을 기억하고 인정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바울이 전한 가르침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유전(ordinance:2절)이란 말은 “전승”(tradition), 곧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지는 가르침을 의미합니다(딤후2:2 참조), (딤후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인간들이 만든 유전은 피해야 하지만(마15:2-3/ 골2:8).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주어진 유전은 반드시 준수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던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공공 집회시의 무질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여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자유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고린도 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찬은 무질서하고 파당적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도 혼란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영적 은사가 차고 넘쳤지만, 유감스럽게도 영적 은혜는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한을 사용하여 그러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 해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내심을 갖고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가르쳐 준 영적 원리들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에 입각해서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영적 원리들을 규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공예배시에 저지르는 잘못들을 세 가지 측면에서 언급합니다.
1. 여자들의 기도와 예언(11:3-16) 기독교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과, 노예들에게 자유와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족과 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다 평등하다고, 또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가르쳤습니다(갈3:28).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종족, 사회적 신분, 성(性) 및 경제적 지위 등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서 교제를 나누던 곳은 아마 교회뿐있을 것입니다. 반면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이 세롭게 발견한 자유를 지나치게 행사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새롭게 발흥하는 운동은 그 흐름에 반대하는 자들보다 늘 자체 정비에더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예외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여자들은 공예배시 머리에 쓰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자유를 지나치게 행사하려 했습니다. 바울은 공중 집회시 여자들이 기도하는 것과 예언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예언(prophesying)은 목사들의 설교(preaching)나 강해(expounding the Word)와는 전혀 다릅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성령님께서 그에게 직접 주시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서 메세지를 준비합니다) 신약 시대에는 여자들이 예언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딤전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초대 교회 당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여자들은 예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여자들은 공예배시에 기도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이 남자들의 권위까지 빼앗거나(딤전2:11-15 (딤전2: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딤전2: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딤전2: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딤전2: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딤전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다른 예언자들의 멧세지를 판단할 수는 없었습니다(고전14:27-35) (고전14: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고전14: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고전14: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고전14: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고전14: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고전14: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의문이 생기는 것이 있으면 여자들은 예배가 끝난 후 남편이나 다른 남자들에게 물어볼 수는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여자의 사회적 권위를 매우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신전의 매춘부들을 제외한 모든 여자들은 머리를 길게 길러야 했고 공중 모임에서는 머리에 덮는 것을 써야 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머리에 쓰는 것”이란 얼굴을 가리는 면사포(veil) 종류는 아니다. 다잇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했고, 이는 여자들의 순종과 순결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예배에 참석했기에 그런 그들로 하여금 기도를 하고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놔두는 것은 무모하고도 참람한 일이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해서 지으셨으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각각ㄹ 고유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고린도 교회에 질서를 되찾아 주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남녀간의 차이점이 결코 불평등이나 우열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으며, 그러한 것은 암시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가 화평하려면(15:33). 반드시 어떠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꼭 필요한 질서에는 서열(序列) 개념도 내포됩니다. 그러나 서열이 있다고 해서 교인들 간에 불평등이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지휘관은 사병보다 서열이 높습니다. 그러나 사병이 지휘관보다 인격적으로 훌륭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제시한 하나님의 질서를 세 가지 근본 원리에 입각해서 설명합니다. . 구속(11:3-7) 교회의 “머리됨”의 지위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시고,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며, 남자는 여자의 머리입니다. 어떤 학자는 “머리”(head)를 “기원”(origin)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만드셨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받을 수 없지만 성자는 성부와 동등된 분이지만, 구속 사역에 있어 성자는 성부에게 복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복속되어 있습니다(고전 3:21-23 /갈 3:28/ 엡5:21-33) (고전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엡5: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엡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엡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제시하는 남녀의 성경적 관계가 지역 교회 내에 해당하는 것이지 일반 세상의 모든 일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님을 유의해야 합니다. 남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 지역 교회 안에서나 가정 안에서 머리된 자로서 권위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남자나 여자 모두 머리(hair)나 머리에 쓰는 것 등, 머리됨‘(headship)을 상징하는 것들을 존중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하려면 받드시 긴 머리를 지녀야 하며, 그 위에 무엇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긴 머리를 하거나 머리에 무엇을 써서는 안 되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 남자들은 기도할 때 항상 모자를 쓰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권고는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혁신이었을 것입니다) 남자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음으로써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존중함을 나타냅니다. 반면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씀으로써 머리된 남편에 대한 존중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자는 하나님과 남편 모두에게 대한 복종을 표합니다. 고리도 교회의 여성도 중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공예배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사실상 자신의 품격을 이방 신전에 있는 매춘부들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신전의 매춘부들은 머리를 짧게 했으며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공공연히 나다녔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머리 스타일과 태도는 곧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공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죄를 범한 여자는 머리를 깍였습니다(민5:11-31). 바울은 5-6절에서 상이한 두 용어를 사용하는데, “밀다”(shave)는 말은 머리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깍는 것을 말하고, “깍다”는 말은 짧게 자르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머리를 하든 여자들에게는 모두 스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왔기 때문에(창2:18-25)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고, 공예배시 머리에 무엇을 씀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남편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이처럼 바울은 지역적인 관례와 성경의 원리를 결합해 양자 사이에 모순이 없도록 조정합니다. . 창조(11:8-12) 남녀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질서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으며(딤전2:13참조) 여자는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창조되고, 나중에 창조된 것이 남자와 여자의 우열(優劣)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 속에는 남자와 여자 중 남자가 머리가 될 뿐만 아니라 둘 사이의 동등한 협력 관계적 특성도 있음을 바울은 11-12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주(主)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입니다(갈3:28). 남자 없이 여자만 있을 수 없으며 여자없이 남자만 있을 수도 없습니다. 창조 당시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지만, 그 이후 오늘날까지 모든 남자는 다 여자에게서 납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10절에서 천사를 언급했을까 바울은 창조의 진리에서 자신의 주장을 이끌어 내고 있고 천사들은 피조물 중의 하나입니다. 천사들은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 경배드릴 때는 자신들의 얼굴을 가리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경의를 나타냅니다(사6:2). 또한 천사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의 공예배에 참석하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웁니다(엡3:10/ 벧전 1:12). 공예배는 매우 중요한 예식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함께 참석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인 우리들은 마치 하늘에서 예배하는 것처럼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 본성(11:13-15) 일반적인 견해를 따르면, 본성상 여자는 긴 머리를 하고 남자는 짧은 머리를 합니다. 로마인, 헬라인, 그리고 유대인(나실인을 제외하고)들은 모두 이러한 관례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머리 길이가 얼마나 되어야 하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는 차이가 있어 혼동이 없게 해야 한다고만 가르칩니다(성경의 가르침은 유니섹스(uni-sex) 스타일을 거부한다) 남자가 여자처럼 보이고 여자가 남자처럼 보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긴 머리는 여자의 영광입니다.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다시말해, 어떤 지역의 풍습상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이 관례가 아니라면, 긴 머리가 그 쓰는 것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여자들이 다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는 의미로 말했다기 보다는 단지 쓰는 것 대신에 긴 머리를 하도록, 그리고 그 긴 머리를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순종의 상징으로 삼길 권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자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의 여러 다른 지역마다 문화권이 다르더라도 다 적용되는 것이고 다만 그 원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지역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 마음으로 복종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한다는 것을 공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애찬(愛饌) 때의 이기심(11:17-22) 교회가 세워진 이래로, 성도들이 함께 먹는 것은 하나의 관례였습니다(행2:42, 4
6). 그것은 성도가 교제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자에게 자기 것을 나눠 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렇게 함께 음식을 나누는 관습은 주의 만찬의식을 지키는 것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이 식사를 “애찬”(the love fest)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임의 주된 강조점은 서로 교제하고 음식을 나눔으로써 성도의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애찬 모임은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예배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이 모임에 심각한 오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애찬은 교회에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쳤습니다. 애찬의 취지가 변질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번째. 분쟁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는 여러 파당이 있었고, 그 분쟁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전 교회가 함께 교제하기보다는 자기 파 사람끼리만 음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이기적 행위는 나무랐지만, 이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긍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현상을 통해 참된 신자를 가려내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기심 때문입니다. 부유한 성도는 많은 음식을 가지고 올 수 있었지만 가난한 성도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부유한 자들이 제네들끼리만 모여 음식을 먹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애찬의 원목적은 사랑으로 함께 나누는 것이었지만, 그 목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몇몇 교인들은 취하기까지 했습니다. 원래의 취지에 합당한 애찬은 비교적 가난한 사람들이 매주마다 규칙적으로 갖던 식사 시간뿐이었을 것이고, 비교적 부유한 자들은 그러한 모임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았을 것이며, 가난한 사람들의 거친 음식은 그들의 위(胃)뿐만 아니라 자존심까지도 상하게 했을 것입니다. 물론 식사시의 이러한 분열상은 고린도 교회의 보다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 주는 한 단면에 불과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꽤 성숙한 성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그들은 여전히 젖먹이 아이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처럼 변질된 애찬을 중지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애찬의 원래 목적을 되살리라고 권고합니다. “부자들은 시장하거든 집에서 음식을 먹으라, 만약 자기보다 더 가난한 성도들을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곧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하는 것입니다. 애찬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기회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것을 장애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떤 주일학교의 야유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야외예배에서 예배후 게임 담당자가 나와서 한 가지 게임을 하는데, 그 게임은 여러 사람이 점점 뒤로 물러가 거리를 녋혀가면서 계란을 던지고 상대방에서는 깨지지 않게 그 계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양편의 거리가 넓어질수록 계란은 더 힘껏 던져야 했으며 그 결과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일학교 어린이 두 명이 그 던져지는 계란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의 집은 매우 가난했고 따라서 계란을 좀처럼 먹어보지 못한것 같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 두 아이 중의 어린 여자애가 게임을 이끌던 교사에게 다가가서 “남은 계란이 있으면 오빠와 내가 집에 가져가도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교사는 아직 다 끝나기 전, 지혜롭게 그 게임을 중단시키고 상품을 주고 남은 계란을 그 아이들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즐겁고 유익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된다는 사실을 그 교사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술을 마시는 잔치는 성찬을 준비하는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을 경멸하는 것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기념하는 방법이 아닌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성찬상을 두름1 그러나 처음 제정하신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참여한 성찬(주의 만찬)에는 차별이 있습니다. 이 예식을 제정하신 우리 주님께서 그러한 구별을 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도하실 때는 사람들 간에 아무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명절 끝날 곤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개로 와서 마시라”(요7:37).“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 그러나 성찬을 제정하실 때는 제자들과만 함께 앉으셨습니다. 이 사실 자체가 성찬의 구별적인 성격을 보여 줍니다. 즉,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앉은 열 두 명은 제자라는 점에서 이후에 올 다른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제자들이라 함은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에 자신을 의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땅 위에서 사람이든 재산이든 사상이든, 어느 대상에 대해서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님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철저히 복종하는 사람들이 제자들입니다. 이들을 주님께 대한 순종에 매여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입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 피를ㄹ 흘리심으로써 중보자로서의 주권을 얻으셨습니다. 그분은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빌2:9). 이렇게 예수께서는 피를 흘리심으로 구주(救主)로서의 자격을 얻으신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자격도 그분의 피가 보증해 준 구속(救贖)을 경험하고 그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집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그분이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일에 참여할 자격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되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분의 영예를 드높이는 일에 열심을 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모략을 당할 때, 주님의 진리가 공박될 때, 주님의 호의가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힐 때, 여러분은 의분으로 타오르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속주(救贖主)의 친구들입니다. 주님은 원수들의 목전에 상(床)을 베풀어 놓으시고(시23:5) 여러분을 따뜻하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찬상에 나아오는 것은 순종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자격을 갖추어서도 아니고, 여러분이 스스로의 충성심을 자랑할 수 있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여러분의 소망과 운명을 주관하시는 주님으로서 여러분의 모든 관심과 충성을 다 바쳐야만 할 그분을 감히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성찬의 남용(11:23-34) 복음주의 교회들은 세례와 성찬을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식으로 세우신 것이라 알고 또 준수합니다(“성찬”은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서처럼 교제(Communion)라고도 칭해지며, “감사를 돌린다”는 뜻의 유카리스트(Eucgarist)라고도 칭해지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잔과 떡(그 당시의 식사에 보통 쓰이던 것)을 취하시어 그것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성도들의 의미깊은 영적 체험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이 의식에 참여하는 체험이 영적으로 가치를 가지는가의 여부는 참여한 자들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마음의 자세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이었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심각한 질문입니다. 또한 경솔한 태도로 떡과 찬을 받는 것도 잘못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합당치 않은 자세로 성찬에 참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고전11: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바른 자세로 성찬에 참예할 때, 성찬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또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찬이 징계가 아니라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첫째, 성찬의 영적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11:23-26상반절) 떡은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케 하고, 잔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생각케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던 사람들의 죽음을 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길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로서 우리가 소유하게 된 것은 모두 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심은 바로 복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는가를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 물이 되셔서(사53:6/ 벧전 2:24). 우리가 갚을 수 없는 빚을 갚으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죽으셨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기꺼이, 그리고 온유하게 죽음을 당하셨습니다(롬5:8). 그리스도는 사악한 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맡기시고, 그 몸으로 세상 죄를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을 상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회상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영적인 현실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단순히 어떤 기념물 주위를 돌아보면서 그것을 기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진실된 믿음으로 살아 계신 구주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도의 의무를 생각해야 합니다(11:26하반절)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성찬식을 거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교회나 성도 개개인의 복된 소망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돌아오셔서 우리를 하늘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은 마땅히 되어야 할 바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주님과 같아질 것입니다(요일3:2참조)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셋째,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11:27-28, 31-32) 바울은 우리가 성찬에 참예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바울은 합당한 자세로 성찬에 참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성찬 때 여성들이 장로로부터 떡과 잔을 받지 않습니다. 성찬식에 참예한 여성도 들은 떡과 잔을 받는 대신 울면서 앉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가 다가가서 “자매여, 떡과 잔을 받으시오, 이것은 죄인들을 위한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들은 합당치 않은 태도로 성찬을 대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태도로 성찬에 참예하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돌아본 다음, 주님께 그 죄들을 고백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저지른 죄들을 고백하지 않고 성찬상에 나아 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면 우리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버릴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고 징계하실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의 살피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른 성도들을 판단하는 데는 전문가였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자신의 죄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다른 성도들을 감시하는 ‘종교적 감시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합당치 못한 태도로 먹고 마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임할 징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이 일은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성숙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히12:1-11). 징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징계는 범죄자를 정죄 하는 심판이 아니라 불순종하는(그리고 고집센) 자녀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징계를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넷째, 주위를 살펴야 합니다(11:33-34) 우리가 주위를 살펴보는 이유는 다른 신자들의 죄를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몸을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29절). 여기에는 이중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떡에서만 주님의 몸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주변에 있는 교회(성도들) 안에서도 주님의 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전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교회는 성찬을 통해서 그 일치됨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는 그런 일치됨이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찬은 오히려 그들의 불일치를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찬은 가족들끼리의 식사와 같은 것으로서, 그 가족의 주인 되신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보살필 것을 원하십니다. 주님께 좀더 가까이 나가고자 하는 성도가 그 형제된 성도들과 사이가 멀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면서 어떻게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신자가 아닌 사람은 성찬상에 나아 와서는 안 됩니다. 또한 참 신자라 할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과 동료 성도들 앞에 합당치 못하면 역시 성찬에 참예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찬 예식을 지키기 전에 영적 준비 기간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즉, 성찬에 참예하는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어느 성도의 죄용서 해 대한 상담과 성찬식때 자기의 잘못을 교회 앞에 고백함
그런데 죄를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성찬식은 영적 잘못을 조사하고 슬퍼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찬은 주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뵈올 날을 기쁜 마음으로 기대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기 직전까지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감사를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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