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얻는 자와 멸망하는 자 (고전10:1-13)
본문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배경으로 해서 상을 얻는 자와 멸망하는 자를 대조해서 말씀한 것이다. 바울 자신은 9장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 해서 말하고 10장에서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대조해서 말하고 있다. 상 얻는 자는 바울 자신이고 멸망하는 자는 거역했던 이 스라엘이다. 이러 이러한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는 것이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 지 말자는 그런 얘기이다. 9장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발명하면서 " 나는 자유자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일에 주를 위해서 매인 자다 " 그렇게 말했다. 또 나는 사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종이 되겠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주님을 본 자다, 그렇지만 여러 모양이 되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 같이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하고 그리고 거룩한 사업에 성취를 이룬 그런 사람이었지만 자기의 자랑을 버린다.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얘기 했다. 결국 자기의 소원은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고자 해서 달음질하는 것이다. 그러면 썩지 아니할 면류관은 무엇인 가 그것은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복음에 참여하는 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성육신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 한 복음에 자신이 참여하는 이런 영광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절제했다고 말하 고 있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했다는 것은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해서 그렇다." 그 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이스라엘은 10장에서 구름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으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로 침례를 받았고, 영적인 음 식을 먹었지만 절제하지 않고 악을 즐겨했기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들 은 우상 숭배를 했고, 간음했고, 시험했고, 원망하는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입었지만 결국 자기들의 소 욕을 따르다 보니까 이런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들 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없 이 그렇게 했다. 물이 없으니까 원망했고, 이러저러했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감당할 시험밖에는 준 것이 없다. 감당치 못할 시험을 하나님은 주시지 않는다. 만약 감당치 못할 것 같으면 피할 길을 주신다. 결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니고 너희가 악을 즐겨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달음질하는데, 달려가는데, 경주하는데, 누가 상을 얻을 것인가 그것은 자기를 절제하고, 주님께 신실한 사람이 상을 얻을 것이다 하는 그런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었으며, 그것은 왜 그렇게 좋 은 상황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고, 모세와 합하여 세례를 받 았고, 신령한 음식을 먹었고,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다시 악에 빠지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와 실재'라는 그런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표면적 으로는 역사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일도 역사 안에 있는 일이었다. 만일 이것이 역사로 끝나게 되면, 역사 이상이 되지 못할 때는 이스라엘처럼 도로 멸망한다는 것이다. 요즘의 예를 들어 보면 기도를 했 더니 병이 고쳐졌다던가, 하나님이 이러저러한 축복을 주셨다던가, 이런 것들이 역사적인 문제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적 실재로 취해지지 못하면 결국 이스라 엘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거울이 된다. '구름 아래 있었다' 이것은 유월절을 먹고난 후에 이스라엘이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유월절을 취한 다음 구름 기둥이 임했다. 그 때부터 구름 기둥이 인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모두가 구름 아래 있 게 되었다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였던가 갈 길을 모르고 캄캄하고 당황 할 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했으니까 그 길이 없는 광야에서 그것은 얼마나 큰 은혜였고 놀라운 기적이었는가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실패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이 역사가 되 고 말았기 때문에, 역사는 되지만 그들 안에 실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월절을 취한 뒤에 왜 구름 기둥이 임했는가 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 기 때문이다. 그냥 임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지금 실재 안에서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를 취할 때, 어린양과 무교병과 쓴나물이신 바로 그 유월절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의 운명으로 취할 때, 그것을 내 자신으로 받아들일 때, 내가 그렇다는 것을 내 스스로 인정하고 동화할 때, 그 때 바로 그 생명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이 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을 먹고도 그 사람 그대로였다. 보통 식 당에서 고기 먹은 것처럼, 유월절을 먹고도 나는 그대로였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다 해서 인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쇠고기를 먹던가, 돼지고기를 먹 던가, 내 몸에 영양분은 다르고, 성분은 달라질 것이고, 내 건강도 달라질 것이다. 보리밥을 먹었느냐, 쌀밥을 먹었느냐, 맹물을 마셨느냐, 우유를 마셨느냐에 따라서 내 몸세포에는 영향이 올 것이다. 그렇지만 인격에 영향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밥을 먹는 것은 역사에 속한 것이다. 내가 보리밥을 먹었느냐, 쌀밥을 먹었느냐는 역사에 속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이런 역사적인 유월 절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구름 기둥도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구름 기둥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인격이 아니었다. 실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고도 그들은 도로 자기의 세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우리 가 유월절을 취할 때 그렇게 취하면 우리도 마찬가지가 된다. 우리가 만일 십자가를 취할 때 그렇게 취하면 마찬가지가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복음이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서 흘린 보혈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것은 역사로 받아들인 것이다. 자기가 자 기것으로 실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역사로 받아들인 것이니까 분명히 자기는 알고 있기는 알고 있고 '아, 그것은 놀라운 사건이었다'고 알고 있긴 한데 자 기 자신의 인격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이다. 그와 똑같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실재로 취하지 못하면 오늘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 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유월절이신 그 사람을 취하고 나 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역사적인 함께가 아니고 우리 생명이 바꿔지 기 때문에 내가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를 내 양식으로, 내 운명으로 먹으면 나는 내 운명이 바꿔지게 된다. 내 운명이 바꿔지면 그 때부터 내 삶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면 결국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내 앞에 있어서 그 영이 함께한 것과 같이 우리를 인도한 것을 보게 된다. 어제까지는 나는 호랑이고기를 먹고 산 사람이었다. 그러면 호랑이 영이 자기 앞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린양 의 고기로 바꿨으면 어린양의 영이 나와 함께 할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쌀밥 을 먹었으면 쌀밥의 영이 나와 함께 할 것이고 보리밥을 먹었으면 보리밥의 영 이 함께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호랑이 고기를 먹었으면 호랑이 영이 나와 함께 할 것이고 어린양의 고기를 먹었으면 어린양의 영이 함께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어린양의 영과 함께 하는 삶을 실재적으로 체험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멸망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까 교리는 무용한 것이다. 우리가 교리를 배우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 역사를 배 우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 역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교리를 잘 배우고 확실하게 교리를 깨닫는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구름 아래 있었던 것만큼 명백할 수는 없다. 그 보다 더 확실한 체험을 있을 수 없다. 이스라엘은 그래도 안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체험으로는 인격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이렇게 말했다. 바다는 바로 홍해였다. 이 것은 사망의 물을 표현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거기에 빠지면 다 죽는 것이다.
그런데 유월절을 취한 후에 홍해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왜 유월절을 취한 후에 홍해 바다를 건너가게 되었는가 이 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사망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물에 빠져 죽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물이 왕노릇했다는 것이 아닌가 나를 지배해 버렸다, 물이 나를 삼켜 버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물은 사망이다. 바다는 사망이다. 그러니까 사망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홍해 바다를 건너왔다. 통과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여전히 사망이 왕노릇 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하면 바다를 건너는 것이 단지 역사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실재가 아니었 기 때문에, 자기들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육신만 건너온 것이지 그 인격이 아 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또 다시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유월절을 지날 때 사망이 지나갔다. 그래서 유월절이라 한다. 그리고난 다음 바다를 통과하게 되었다. 사망을 통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다 속으로 통과한 것이니까 이것이 신약에 와서 침례의 예표가 되었다. 침례를 받는 그것은 과거에 이스라엘이 바다를 통과했던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이 사망의 바다를 통과하는가 우리가 유월절을 취한 후에 우리는 사망의 바다 를 통과하게 되는 것을 우리가 실재 안에서 경험하게 된다. 내가 어린양의 고기 를 먹고, 쓴나물을 먹고, 무교병을 먹고 나면, 역사로 취하지 않고 실재로 취하 게 되면 우리에게 사망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사망이 나를 지배한다, 절망이 온다, 흑암이 온다는 것은 내가 10년을 대구 교회에 왔는데 아무 것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들은바가 없고, 아는 바가 없다, 이 것은 사망이 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자세히 탐구(탐구)해 보면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10년 동안 그러면 몸만 왔다 갔다 했는가 그게 아니다. 다 들었고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자기한테 사망이 덮은 것이다. 왜 사망이 덮었는가 그것은 유월절을 자신으로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한테 유월절이 없으니까, 나는 어린양이 아니니까,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니까, 나는 하나님이 호흡 을 줘서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 사망이 온 것이다. 왜 이런가 왜 나는 이런가 왜 하나님은 이런가 이렇게 되고 만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다를 통과하는 실재 적인 경험은 유월절 이후에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유월절이 없는 한 바다를 통과할 수 없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큰물이 땅을 덮고 있었던 상황을 보게 된다. 큰물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갈라낼 수 있었을까 위엣물과 아랫물을 가르고 또 천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해서 뭍이 드러나게 했던 것이다. 어 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면 다 되는가 이런 역사가 있어서, 이런 실재가 있어서 물은 갈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다. 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결국 어린 양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 침례로 나타나서 예수 와 함께 침례를 받는 것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국 어떻게 사망을 이기는 것인가 어떻게 사망의 물을 통과하는 것인가 우리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밖에는 사망의 물을 통과할 수 없다. 인생의 모든 불만과 의문과 거역과 만족스 럽지 못한 그 모든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내 주제를 모르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닌가 쉬운 말로 하면 내 주제를 모르니까, 내 주제만 알면 당연한 일인데 주제를 모르니까 온 것이다. 우리의 주제를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로 취한 다면 우리는 문제가 없어질 것이다. 문제의 바다가 없어질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적인 바다는 통과했지만 실재적인 바다를 통 과하지 안았던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인 유월절은 취했지만 실재로서 유월절인 그리스도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세 번째는 모세와 연합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는. " 이런 말과 같다. 이것은 모세와 연합해서 바다를 건넜다 이렇게 말한다. 연합한다는 말은 동일시(同一視)한다는 말이다. 모세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셨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세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도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기 위해서 그와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까지 그 아들을 이끌어 왔다. 왜 십자가까지 이끌어 왔는가 그것은 우리가 동 일시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분을 만난다든지 아니면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는 분을 만나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이나 저런 사람이나 다 동일시 하지만 우리는 동일시가 안된다. 우리 가 동일시가 안된다. 그래서 결국 동일시 될 때까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낮 추시는 것을 보게 된다. 십자가 앞으로 가게 된 이유는 우리가 그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동일시가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다 같지만 우리가 그 렇게 안되기 때문에 그래서 십자가 앞으로 가게 되었다. 결국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면서 우리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 아, 저 사람이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저 사람이구나. 내 운명이 바로 저 사람의 운명이고, 저 사람의 운명이 바 로 내 운명이구나. 이것이 바로 인생이구나, 이 인생이란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 구나 ' 하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와 연합하게 된다. 전에 내가 종교적으로 연합한다는 개념은 내가 어 떻게 열심을 내면 연합하는가 내가 어떻게 심오한 기도의 경지에 들어가면 신 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런 것이 종교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내가 연합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입신(入神)하려는 사람도 있고, 환상(幻像) 속에 들어가려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연합인줄 알지만 연합이 아니다. 우리는 그 운명이 동일시되어야 연 합이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만일 낮아지게 보이지 않았더라면, 낮게 오시 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분을 영원히 동일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일시하지 못했으면 숭배만 한다. 숭배만 하는 종교가 될 뿐이지 생명의 연합이 불가능한 입장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를 볼 때도 우리가 그와의 연합이다. 유월절 양을 보고, 쓴나물을 보고, 무교병을 보면서 거기서 우리가 만 일 동일시가 안되면 내가 그것을 취하지 못한다. 내가 취한다는 말은 내가 동일 시되어야 취하는 것이 된다. 동일시되는 것이 곧 취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동일 시되면 하나이다. 물과 물이 합해지는 것은 물과 물이 같기 때문이다. 똑같기 때문에 금방 합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물과 나무는 합해지지 않는다. 같지 않기 때문에 합해질 수 없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동일시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 줄을 믿나니,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줄을 믿는다'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모세와 연합하여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 그러니까 그들이 만일 모세를 따르지 않았다면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속에서 우리는 바다를 통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 안에 서 사망이 우리에게 왕노릇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 같은 신령(神靈)한 식물을 먹었다'고 되어 있다. 신령한 식물은 만나를 말하는데 그들은 40년간 역사적인 만나를 먹었다. 매일같이 이 만나를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에서 떠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만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하늘에서 내려오는 식량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인 식량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인 내 인격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유물론적(唯物論的)으로 생각하면 물질이 정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이 우리 정신을 이런 사람을 만들어 내거나, 저런 사람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쌀밥을 먹는 사람과 보리밥을 먹는 사람과 정신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사람의 인격이 다를 수는 없다. 힘이 다를 수는 있을 것이다. 쌀밥 먹는 사람의 힘과 보리밥 먹는 사람의 힘이 다르고, 육식하는 사람과 채식 하는 사람의 힘이 다를 것이다. 인격이 다른 것이 아니고 육신의 힘이 다를 뿐 이다. 물질은 그것이 비록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격을 변화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40년간 만나를 먹었어도 그들 은 여전히 악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이것도 역시 참 만나이신 그리스도, 만나 의 실재를 먹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 만나의 실재는 그리스도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였다. 하나님 말씀이 물질이 된 것이다. 만나가 내 려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물질로 이스라엘 사람에게 공급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육 신이 된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먹을 때 그 때 비로소 우리가 사망 의 왕노릇하는 데서 해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 공급이 되는 것은 역시 유월절을 취하는 것이다. 바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와 우리가 동일시되는 것이다. '영적인 음료를 마셨다, 갈라진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셨다'고 한다. 쪼 개진 반석으로부터 이스라엘이 생수를 먹었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었다.
그런데 이것을 먹으면 목마름은 해결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없어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갈라진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는 목마름만 없 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흘러나오는 생명을 예표하는 것이다. 우리가 실재적으로 원망이 없어지고 우리 안에 배의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것은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먹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흐르는 생명을 먹어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을, 아버지 앞에 서 있는 그 인격을 우리가 마셔야만 우리 속에서 영원한 불만이 없어지게 되고, 영원한 목마름이 없어지게 된다. 그 렇지 않고는 아무리 반석이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서 솟아나는 그 물을 먹는다 해도 우리 인생의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는다. 이치가 육신의 목마름은 해결되지 만 인생의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날도 여러 가지 기적들이 있지만 그 기적들을 통해서 우리 인격이 변화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분명히 내가 암이 결렸다가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졌다고 하면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아닌가 놀라운 감사이다.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하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감사는 시들어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인격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갈라 진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이다. 우리 가 십자가 위에 있는 그리스도를 볼 때 거기서 한 생명이 흐르는데 영원한 생 명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된다. 육신으로는 분명히 죽임을 당하고 있는데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마27;46) 여기서는 아무 것도 역사적인 것을 볼 수 없다. 역사적인 것은 비참한 것밖에 없다.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적으로 볼 때 비참한 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실재 안에서 보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게 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산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육신으로 멀쩡하게 숨쉬고 있다 해서 내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나 하면 그것이 아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역사적으로 분명히 죽고 있는데 왜 영원한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인가 아버지 앞에 서 있는 가장 진실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장 완전한 피조물이, 거기에서 영원한 것이 나오게 되고, 실재가 나오게 되고, 참이 거기서 나오게 된다. 그것 을 우리가 비로소 마실 때, 내가 그 진실을 마실 때, 그 때 내 인생에 목마름이 없어지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친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역사는 예표에 불과하지 역사 자체가 우리를 생명 안으로 인도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르는 반석으로부터 이 물을 마셨다'고 했다. 우리는 가다가 목이 마르니까 반석을 쳐서 물을 먹었다. 이것은 바울은 해석하기로 그 반석은 이스라엘에서 따르는 반석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는 곳마다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스라엘이 가는 곳마다 따르는 반석이 있었겠는가 역사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 이 아닌가 이것은 영원한 실재를 봤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따르는 반석이 되어서 우리한테 항상 따르는 반석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배에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물을 먹고 다른 자리로 옮기면 물이 없다.
그런데 물이 계속 따라 다닌다면 항상 물을 먹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항상 따라 다니면서 우리에게 공급이 되는 사람은 그리스도 가 아니겠는가 바위에서 깨진 나온 물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온천 물이라 하더라도 목욕하고 나오면 나는 온천 바깥에 있게 된다. 어디 부곡 하와 이에 가서 온천물에 씻고 왔다 하더라도 그 온천물이 우리 집까지 묻어 오는 것은 아니다. 그 온천은 나를 따르는 온천이 아니다. 광야에서 갈라진 반석은 따르는 반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따르는 반석이라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예표였다. 구약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 은 예표였던 것이다. 어떤 영원한 것을 위한 예표였다. 우리가 만일 역사만을 취하게 되고 역사 이면에 있는 실재를 취하지 못할 경우에는 우리는 아무리 좋 은 것을 가졌어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볼 때도 우리 인생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다. 내가 모태로부터 나와서 일생을 살고 있는 과 정은 역사이다. 물질적인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인생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고 역사를 통과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크나 작으나 아무 관계가 없다. 키가 크다고 해서 더 인격이 크냐 키가 작다고 해서 인격이 적으냐 그것이 아니고 키가 적은 사람이라 해서 생명이 없냐 그렇지도 않고, 키가 크다고 생명이 많 으냐 그렇지도 않다. 고래의 생명도 하나고, 피라미의 생명도 하나이다. 하나의 생명일 뿐이다. 만일 고래의 생명이 여러개이고 피래미의 생명이 하나라면 고래는 한 번 죽지 않고 여러 번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래는 한 번 죽으면 끝나는 것이다. 피래미도 한 번에 죽고 고래도 한 번에 죽는다. 생명이 하나뿐 이니까. 그러기 때문에 크나 작으나 생명은 하나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의 표현이고 예표일 뿐이지 그 자체가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에 연연해하지 말자는 것이다. 역사가 이러기 때문에 불행하다느니 역사가 저러기 때문에 행복하다느 니 이러지 말자는 것이다. 역사 때문에 행복하고 역사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처럼 좋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백성이 없지 않은가 구름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 지났으며 모세와 연합하고 영적인 식물을 먹었으며 따르는 반석으로부터 마셨다. 이렇게 놀라운 것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 지만 그것이 자기들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가 엄청나게 많더라도 또 그것이 아무리 좋더라도 그것이 더 구나 아무리 종교적인 것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거나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 하거나 하지를 못하고 그건 단지 예표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실재를 받게 될 때 그것들은 살아나서 의미가 있게 된다는 이 뜻이다. 우리가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를 취할 때 지금으로부터 수 천 년전에 일어났던 유월절 사건은 우리를 통해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 생생하게 현재적인 사건으로 살아나게 된다. 우리가 실재가 취해졌을 때 우리 역사, 우리 인생의 역사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 된다.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대가 다 죽은 것 이었다. 다 뼈다구밖에 없었다. 거기에 생기가 들어가고 힘줄이 들어가고 피가 돌고 살이 붙어니까 일어나서 큰 군대가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적 우리 인생, 역사적 인간은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대와 같다. 번지가 모두 없어서 다 굴러 다니는 해골대와 같다. 누구 뼈인지 누구 발인지 다 몰랐다. 곰탕집에 가보면 어느 소의 뼈인지 모르듯이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내 인생의 역사 를 생각해보면 그 역사가 왜 이렇게 왔는지 왜 이런 인생을 사는지 모른다 말 이다. ' 어떤 사람은 재수 좋아서 저렇게 되었는가, 어떤 사람은 재수 없어서 이 렇게 되었는가, 나는 하는 일마다 안되는가 ' 별별것이 다 있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운수 소관이고 팔자 소관이고 이렇게 보고, 어떤 사람은 ' 하나님의 축복이다 ' 이렇게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 하나님의 저주다 ' 이렇게 하기도 하고 그렇다. 어떤 사람이 잘되는 걸 보면 종교적으로 보면 ' 하나님이 축복해 줘서 그런 모양이다.' 어떤 사람이 잘 안되는 걸 보면 ' 하나님한테 벌 받아서 그런 모양이다 ' 한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것을 보면 ' 아, 저 사람은 재수가 좋다.' 또 어떤 것을 보면 ' 아, 저 사람은 재수가 없다.' 이렇게 말을 한다. 운 나쁘다. 팔자 소관이다. 이렇게만 본다. 그런 것은 다 소 용이 없다. 우리 안에 실재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다. 바다 가운데를 통과해 왔어도 소용이 없다. 우리 안에 실재이신 그리스도 가 있을 때 그것들은 살아나는 것이다. 왜 이랬던가 왜 나는 이랬었던가 객관 적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불행했던 것도 그래서 이렇게 되었었구나, 좋았던 것 도 이래서 그렇게 되었었구나.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살아서 산 것이 되는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여기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은 종이와 먹만 있으니까 이것은 죽은 것이다. 종이와 먹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가 있을 때, 그 실재가 있을 때 종이와 먹은 단지 종이와 먹이 아니고 살아있는 말씀으 로 변화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사람 이다. 우리가 만물에게 이름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이것은 마이크다 하고 이름을 주고 이것은 스피커다 하고 이름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신성한 임무가 있는데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능력을 줬다는 것이다. 살아나 게 할 수 있다. 종이 조각을 우리는 살아날 수 있게 할 수 있다. 휜 종이에 검 은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은 죽은 것이다. 돌비에 새겨진 것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내게 할 수 있다. 산 것이 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 있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것도 살릴 수 있는 것이 사람이고 또 어떤 것도 죽 일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굉장한 것도 우리가 잘못하면 죽일 수 있다. 다 죽 은 것이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대를 군대가 할 수도 있고 큰 군대를 해골대 되게도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는 참 놀라운 것이 었다. 우리가 이 신성한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 우리가 여긴다면 우리가 이 임무 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유월절 그리스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야만 모든 것을 살려낼 수가 있다. 우리가 그 유월절 그리스도 를 취해야 그것이 내 운명으로 취해져야 내가 모든 만유를 살려낼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죽이는 것이 된다. 우리가 실재적인 경험 안에서도 우리 자신 이 유월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살려낼 수 있다. 이 형제도 살려낼 수 있고 저 형제도 살려낼 수 있다. 그러나 유월절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면 우리는 다 죽이는 사람이 된다. 다 밟아서 해골대가 되게 한다. 죽어서 오래 되면 해골이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진시황제까지라도 죽어서 오래되면 뼈다귀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 사람 때문에 만유는 멸망이 될 수도 있고 구원이 될 수도 있다. 죽은 것은 살아날 수도 있고 산 것은 죽을 수도 있다.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 한사람이 올바르게 되는 것이 결국 우주가 올바르게 되는 그런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절제해서 승리한 표본으로 서 자기 자신을 예로 들었고 절제하지 못해서 멸망한 이스라엘을 들었다. 두 예 를 통해서 누가 상을 얻는 것이냐 썩은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달려가는 사람들 도 자기를 절제하거늘 하물며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어찌 해서 자기 자신을 절제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을 주를 위해서 하는 사람만이 그의 신실한 사람만이 결국 상을 얻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를 보면서 이것은 우리에게 경종이다. 경고다 거울 이다. 이 사람들이 이러이러 했어도 안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만 일 우리 역사가 좀 부족하거든 내 역사가 부족하거든 예를 들어 나는 키가 좀 적게 생겼다 이것은 역사이다. 나는 돈이 좀 적다 이것도 역사이다. 그러거든 이것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거울이 있으니까 이스라엘은 이렇게 좋 은 역사가 있었어도 다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탓만 하지말고 우리 생명이 역사를 살리는 것이지 역사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 이 역사를 살릴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살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적은 것을 가지고도 큰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큰 능력을 가지고도 적은 능력밖에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주신 말씀은 너희가 적은 능력을 가 지고도 크게 했다는 것이다. 왜냐햐면 영원한 생명은 모든 것을 살리는 것이니 까 풍요롭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고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게 될 것이다.
우상 숭배에 빠지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서 사는 사람들이다. 간음하는 사람들도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 사람들이다. 주를 시험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들이다. 원망하는 사람 들도 마찬가지로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이다. 결국은 아무리 그렇게 해 봤자 자 기를 위해 살아봤자 나오는 것은 이것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우상 숭배 하는 것이나 간음하는 것이나 주를 시험하는 것이나 원망하는 것이나 이런 것밖에는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양을 우리가 취하게 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취하게 된다면 하나님 아들을 우리가 취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와 연합되어서 그가 죽은 자를 살리듯이 우리도 죽은 자를 살리는 자가 될 것이고 그가 만유의 주가 되듯이 우리도 만유의 주가 될 것이다. 없어서는 안될 자가 되게 될 것이고 우리로 인해서 모든 것이 살아나는 그런 기적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부언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다. 천당이 있는가 없는가 이런 질문을 많이 받게 된다. 그것은 꼭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듣 다보면 없다고 하는 것으로 들리니까 있는가 없는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달 라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실재와 역사를 생각한다면 천당이란 것은 역사이다. 실재가 없는데 역사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홍해 바다를 지나온 것을 생각해 볼 때 예를 들어서 홍해 바닷가 꼭 있어서 홍 해 바다를 통과하겠는가 바다를 통과할 사람이 있다면 물을 통과할 사람이 있 다면 홍해 바다 뿐이겠는가 동해 바다도 안되겠는가 그러나 홍해 바다가 없 으면 안될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다를 건널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중요한데 그 사람은 제쳐 놓고 천당이 있냐 없냐만 묻는다. 있 으면 뭘하고 없으면 뭘하겠는가 홍해 바다가 있다고 다 건너가겠는가 홍해 바다가 분명히 있는데 이스라엘은 건너가고 애굽 사람은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천당이 있어 봤자 뭐 하겠는가 갈 사람이 있고 못 갈 사람이 따로 있는데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설명을 해도 알아듣기 어려운 모양이다. 이상한 것이다. 기와집이냐 초가집이냐 그것을 물을 필요가있겠는가 사람이 있 으면 기와집을 만들 수도 있고 초가집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만일 사람이 없으면 기와집이면 뭘하고 초가집이면 뭘하겠는가 기와집이 있어도 소용이 없고 초가집이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자 꾸 역사만 묻는다.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지금까지 있었던 인류가 만든 것이다. 역사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지 않는 가 사람들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지 역사란 것이 원래 있어서 역사라는 속으로 사람이 살아갔던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간 것이 역사가 된 것일 뿐이다. 그 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미래라는 것은 없다. 우리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내일 이란 것은 없다. 우리가 있으면 내일이 있고 우리가 없으면 내일이 없는 것이다. 오늘 밤에 내가 죽는다면 내일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인류가 있다는 것을 전제해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지 인류가 없으면 역사라는 것이 없다. 홍해 바다가 있느냐 없느냐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진짜로 홍해 바닷가 있었나 없었나 해서 학 자들간에 여러 가지 논란이 생긴다. 그래서 하다가 안되니까 바다를 어떻게 건 너가겠는가 해서 red sea가 reed sea가 된다나 해서 갈대 밭이 된다고 한다. red나 reed가 비슷하니까 갈대 밭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물을 건너갈 수 있겠느 냐 물이 갈라졌겠냐 좀 낮으막한 갈대밭을 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이래서 또 논쟁이 생기는 것이다. 아 그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하고 또한쪽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하고 이러는 것이다. 홍해 바다가 있으면 뭘하고 없으면 뭘하겠는가 바다를 건너는 사람 이 중요한 것이다. 일본이 있으니까 독도가 누구 것이냐 이러고 있지 일본이 없 으면 독도가 누구 것이냐 할 것도 없다. 200해리 선포할 것도 없다. 일본 때문에 하는 것이지 일본이 없다면 할 필요가 없다. 천당이 있는가 없는가 하면 있 다고도 못하겠고 없다고도 못하겠다. 있다고 하면 있는줄 알아 버리고 없다고 하면 없는줄 알아 버린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 없는 줄 알아도 안되 고 있는 줄 알아도 안된다. 참 어려운 문제이다. 있다고 생각해도 잘못된 생각 이고 없다고 생각해도 잘못된 생각인 것이다. 둘 중에 하나가 정답이라고 사람 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둘 다 정답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있냐 없냐이지 천당이 있냐 없냐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가 있냐 없냐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있으면 역사가 있고 사람이 없으면 역사가 없다. 역사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 히 공간 안에 진행되지만 어디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있다.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 역사가 있었다.
미국 사람이 있기 때문에 미국 역사 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우리를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하지 않고 우리가 역사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역 사를 창조해 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바다 가운데로 지나고 신령한 음식을 먹 고 이것이 역사적인 것이었으면 우리도 이스라엘과 똑같다. 이런 일이 우리의 거울이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경계)를 위한 예표가 되었다고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두 평행선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역 사고 교회는 실재인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만일 없다면 이 역사는 이조 역사 와 꼭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이씨 조선 역사나 이스라엘 역사나 똑 같은 것이 되고 만다. 교회가 있기 때문에 이 역사는 특별한 역사가 될 수 있다.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로 영광스러운 민족이 된다면 이조 역사도 영광스러운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민족이 엉망인 코리아가 되고 만다면 이조 역사도 엉망 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이스라엘을 살려내게 될 것이다. 참 이스라 엘이 역사적인 이스라엘을 살려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참 사람이 우리 인생을 살려내게 될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참 생명이 우리 인생 을 영화롭게 만들게 될 것이다. 아멘
그런데 반대로 이스라엘은 10장에서 구름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으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로 침례를 받았고, 영적인 음 식을 먹었지만 절제하지 않고 악을 즐겨했기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들 은 우상 숭배를 했고, 간음했고, 시험했고, 원망하는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입었지만 결국 자기들의 소 욕을 따르다 보니까 이런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들 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없 이 그렇게 했다. 물이 없으니까 원망했고, 이러저러했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감당할 시험밖에는 준 것이 없다. 감당치 못할 시험을 하나님은 주시지 않는다. 만약 감당치 못할 것 같으면 피할 길을 주신다. 결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니고 너희가 악을 즐겨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달음질하는데, 달려가는데, 경주하는데, 누가 상을 얻을 것인가 그것은 자기를 절제하고, 주님께 신실한 사람이 상을 얻을 것이다 하는 그런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었으며, 그것은 왜 그렇게 좋 은 상황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고, 모세와 합하여 세례를 받 았고, 신령한 음식을 먹었고,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다시 악에 빠지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와 실재'라는 그런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표면적 으로는 역사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일도 역사 안에 있는 일이었다. 만일 이것이 역사로 끝나게 되면, 역사 이상이 되지 못할 때는 이스라엘처럼 도로 멸망한다는 것이다. 요즘의 예를 들어 보면 기도를 했 더니 병이 고쳐졌다던가, 하나님이 이러저러한 축복을 주셨다던가, 이런 것들이 역사적인 문제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적 실재로 취해지지 못하면 결국 이스라 엘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거울이 된다. '구름 아래 있었다' 이것은 유월절을 먹고난 후에 이스라엘이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유월절을 취한 다음 구름 기둥이 임했다. 그 때부터 구름 기둥이 인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모두가 구름 아래 있 게 되었다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였던가 갈 길을 모르고 캄캄하고 당황 할 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했으니까 그 길이 없는 광야에서 그것은 얼마나 큰 은혜였고 놀라운 기적이었는가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실패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이 역사가 되 고 말았기 때문에, 역사는 되지만 그들 안에 실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월절을 취한 뒤에 왜 구름 기둥이 임했는가 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 기 때문이다. 그냥 임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지금 실재 안에서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를 취할 때, 어린양과 무교병과 쓴나물이신 바로 그 유월절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의 운명으로 취할 때, 그것을 내 자신으로 받아들일 때, 내가 그렇다는 것을 내 스스로 인정하고 동화할 때, 그 때 바로 그 생명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이 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을 먹고도 그 사람 그대로였다. 보통 식 당에서 고기 먹은 것처럼, 유월절을 먹고도 나는 그대로였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다 해서 인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쇠고기를 먹던가, 돼지고기를 먹 던가, 내 몸에 영양분은 다르고, 성분은 달라질 것이고, 내 건강도 달라질 것이다. 보리밥을 먹었느냐, 쌀밥을 먹었느냐, 맹물을 마셨느냐, 우유를 마셨느냐에 따라서 내 몸세포에는 영향이 올 것이다. 그렇지만 인격에 영향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밥을 먹는 것은 역사에 속한 것이다. 내가 보리밥을 먹었느냐, 쌀밥을 먹었느냐는 역사에 속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이런 역사적인 유월 절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구름 기둥도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구름 기둥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인격이 아니었다. 실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고도 그들은 도로 자기의 세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우리 가 유월절을 취할 때 그렇게 취하면 우리도 마찬가지가 된다. 우리가 만일 십자가를 취할 때 그렇게 취하면 마찬가지가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복음이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서 흘린 보혈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것은 역사로 받아들인 것이다. 자기가 자 기것으로 실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역사로 받아들인 것이니까 분명히 자기는 알고 있기는 알고 있고 '아, 그것은 놀라운 사건이었다'고 알고 있긴 한데 자 기 자신의 인격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이다. 그와 똑같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실재로 취하지 못하면 오늘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 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유월절이신 그 사람을 취하고 나 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역사적인 함께가 아니고 우리 생명이 바꿔지 기 때문에 내가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를 내 양식으로, 내 운명으로 먹으면 나는 내 운명이 바꿔지게 된다. 내 운명이 바꿔지면 그 때부터 내 삶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면 결국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내 앞에 있어서 그 영이 함께한 것과 같이 우리를 인도한 것을 보게 된다. 어제까지는 나는 호랑이고기를 먹고 산 사람이었다. 그러면 호랑이 영이 자기 앞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린양 의 고기로 바꿨으면 어린양의 영이 나와 함께 할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쌀밥 을 먹었으면 쌀밥의 영이 나와 함께 할 것이고 보리밥을 먹었으면 보리밥의 영 이 함께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호랑이 고기를 먹었으면 호랑이 영이 나와 함께 할 것이고 어린양의 고기를 먹었으면 어린양의 영이 함께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어린양의 영과 함께 하는 삶을 실재적으로 체험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멸망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까 교리는 무용한 것이다. 우리가 교리를 배우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 역사를 배 우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 역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교리를 잘 배우고 확실하게 교리를 깨닫는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구름 아래 있었던 것만큼 명백할 수는 없다. 그 보다 더 확실한 체험을 있을 수 없다. 이스라엘은 그래도 안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체험으로는 인격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이렇게 말했다. 바다는 바로 홍해였다. 이 것은 사망의 물을 표현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거기에 빠지면 다 죽는 것이다.
그런데 유월절을 취한 후에 홍해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왜 유월절을 취한 후에 홍해 바다를 건너가게 되었는가 이 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사망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물에 빠져 죽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물이 왕노릇했다는 것이 아닌가 나를 지배해 버렸다, 물이 나를 삼켜 버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물은 사망이다. 바다는 사망이다. 그러니까 사망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홍해 바다를 건너왔다. 통과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여전히 사망이 왕노릇 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하면 바다를 건너는 것이 단지 역사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실재가 아니었 기 때문에, 자기들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육신만 건너온 것이지 그 인격이 아 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또 다시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유월절을 지날 때 사망이 지나갔다. 그래서 유월절이라 한다. 그리고난 다음 바다를 통과하게 되었다. 사망을 통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다 속으로 통과한 것이니까 이것이 신약에 와서 침례의 예표가 되었다. 침례를 받는 그것은 과거에 이스라엘이 바다를 통과했던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이 사망의 바다를 통과하는가 우리가 유월절을 취한 후에 우리는 사망의 바다 를 통과하게 되는 것을 우리가 실재 안에서 경험하게 된다. 내가 어린양의 고기 를 먹고, 쓴나물을 먹고, 무교병을 먹고 나면, 역사로 취하지 않고 실재로 취하 게 되면 우리에게 사망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사망이 나를 지배한다, 절망이 온다, 흑암이 온다는 것은 내가 10년을 대구 교회에 왔는데 아무 것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들은바가 없고, 아는 바가 없다, 이 것은 사망이 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자세히 탐구(탐구)해 보면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10년 동안 그러면 몸만 왔다 갔다 했는가 그게 아니다. 다 들었고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자기한테 사망이 덮은 것이다. 왜 사망이 덮었는가 그것은 유월절을 자신으로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한테 유월절이 없으니까, 나는 어린양이 아니니까,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니까, 나는 하나님이 호흡 을 줘서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 사망이 온 것이다. 왜 이런가 왜 나는 이런가 왜 하나님은 이런가 이렇게 되고 만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다를 통과하는 실재 적인 경험은 유월절 이후에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유월절이 없는 한 바다를 통과할 수 없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큰물이 땅을 덮고 있었던 상황을 보게 된다. 큰물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갈라낼 수 있었을까 위엣물과 아랫물을 가르고 또 천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해서 뭍이 드러나게 했던 것이다. 어 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면 다 되는가 이런 역사가 있어서, 이런 실재가 있어서 물은 갈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다. 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결국 어린 양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 침례로 나타나서 예수 와 함께 침례를 받는 것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국 어떻게 사망을 이기는 것인가 어떻게 사망의 물을 통과하는 것인가 우리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밖에는 사망의 물을 통과할 수 없다. 인생의 모든 불만과 의문과 거역과 만족스 럽지 못한 그 모든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내 주제를 모르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닌가 쉬운 말로 하면 내 주제를 모르니까, 내 주제만 알면 당연한 일인데 주제를 모르니까 온 것이다. 우리의 주제를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로 취한 다면 우리는 문제가 없어질 것이다. 문제의 바다가 없어질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적인 바다는 통과했지만 실재적인 바다를 통 과하지 안았던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인 유월절은 취했지만 실재로서 유월절인 그리스도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세 번째는 모세와 연합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는. " 이런 말과 같다. 이것은 모세와 연합해서 바다를 건넜다 이렇게 말한다. 연합한다는 말은 동일시(同一視)한다는 말이다. 모세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셨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세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도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기 위해서 그와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까지 그 아들을 이끌어 왔다. 왜 십자가까지 이끌어 왔는가 그것은 우리가 동 일시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분을 만난다든지 아니면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는 분을 만나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이나 저런 사람이나 다 동일시 하지만 우리는 동일시가 안된다. 우리 가 동일시가 안된다. 그래서 결국 동일시 될 때까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낮 추시는 것을 보게 된다. 십자가 앞으로 가게 된 이유는 우리가 그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동일시가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다 같지만 우리가 그 렇게 안되기 때문에 그래서 십자가 앞으로 가게 되었다. 결국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면서 우리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 아, 저 사람이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저 사람이구나. 내 운명이 바로 저 사람의 운명이고, 저 사람의 운명이 바 로 내 운명이구나. 이것이 바로 인생이구나, 이 인생이란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 구나 ' 하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와 연합하게 된다. 전에 내가 종교적으로 연합한다는 개념은 내가 어 떻게 열심을 내면 연합하는가 내가 어떻게 심오한 기도의 경지에 들어가면 신 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런 것이 종교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내가 연합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입신(入神)하려는 사람도 있고, 환상(幻像) 속에 들어가려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연합인줄 알지만 연합이 아니다. 우리는 그 운명이 동일시되어야 연 합이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만일 낮아지게 보이지 않았더라면, 낮게 오시 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분을 영원히 동일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일시하지 못했으면 숭배만 한다. 숭배만 하는 종교가 될 뿐이지 생명의 연합이 불가능한 입장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를 볼 때도 우리가 그와의 연합이다. 유월절 양을 보고, 쓴나물을 보고, 무교병을 보면서 거기서 우리가 만 일 동일시가 안되면 내가 그것을 취하지 못한다. 내가 취한다는 말은 내가 동일 시되어야 취하는 것이 된다. 동일시되는 것이 곧 취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동일 시되면 하나이다. 물과 물이 합해지는 것은 물과 물이 같기 때문이다. 똑같기 때문에 금방 합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물과 나무는 합해지지 않는다. 같지 않기 때문에 합해질 수 없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동일시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 줄을 믿나니,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줄을 믿는다'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모세와 연합하여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 그러니까 그들이 만일 모세를 따르지 않았다면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속에서 우리는 바다를 통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 안에 서 사망이 우리에게 왕노릇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 같은 신령(神靈)한 식물을 먹었다'고 되어 있다. 신령한 식물은 만나를 말하는데 그들은 40년간 역사적인 만나를 먹었다. 매일같이 이 만나를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에서 떠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만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하늘에서 내려오는 식량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인 식량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인 내 인격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유물론적(唯物論的)으로 생각하면 물질이 정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이 우리 정신을 이런 사람을 만들어 내거나, 저런 사람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쌀밥을 먹는 사람과 보리밥을 먹는 사람과 정신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사람의 인격이 다를 수는 없다. 힘이 다를 수는 있을 것이다. 쌀밥 먹는 사람의 힘과 보리밥 먹는 사람의 힘이 다르고, 육식하는 사람과 채식 하는 사람의 힘이 다를 것이다. 인격이 다른 것이 아니고 육신의 힘이 다를 뿐 이다. 물질은 그것이 비록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격을 변화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40년간 만나를 먹었어도 그들 은 여전히 악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이것도 역시 참 만나이신 그리스도, 만나 의 실재를 먹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 만나의 실재는 그리스도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였다. 하나님 말씀이 물질이 된 것이다. 만나가 내 려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물질로 이스라엘 사람에게 공급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육 신이 된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먹을 때 그 때 비로소 우리가 사망 의 왕노릇하는 데서 해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 공급이 되는 것은 역시 유월절을 취하는 것이다. 바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와 우리가 동일시되는 것이다. '영적인 음료를 마셨다, 갈라진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셨다'고 한다. 쪼 개진 반석으로부터 이스라엘이 생수를 먹었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었다.
그런데 이것을 먹으면 목마름은 해결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없어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갈라진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는 목마름만 없 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흘러나오는 생명을 예표하는 것이다. 우리가 실재적으로 원망이 없어지고 우리 안에 배의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것은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먹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흐르는 생명을 먹어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을, 아버지 앞에 서 있는 그 인격을 우리가 마셔야만 우리 속에서 영원한 불만이 없어지게 되고, 영원한 목마름이 없어지게 된다. 그 렇지 않고는 아무리 반석이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서 솟아나는 그 물을 먹는다 해도 우리 인생의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는다. 이치가 육신의 목마름은 해결되지 만 인생의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날도 여러 가지 기적들이 있지만 그 기적들을 통해서 우리 인격이 변화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분명히 내가 암이 결렸다가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졌다고 하면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아닌가 놀라운 감사이다.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하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감사는 시들어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인격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갈라 진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이다. 우리 가 십자가 위에 있는 그리스도를 볼 때 거기서 한 생명이 흐르는데 영원한 생 명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된다. 육신으로는 분명히 죽임을 당하고 있는데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마27;46) 여기서는 아무 것도 역사적인 것을 볼 수 없다. 역사적인 것은 비참한 것밖에 없다.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적으로 볼 때 비참한 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실재 안에서 보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게 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산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육신으로 멀쩡하게 숨쉬고 있다 해서 내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나 하면 그것이 아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역사적으로 분명히 죽고 있는데 왜 영원한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인가 아버지 앞에 서 있는 가장 진실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장 완전한 피조물이, 거기에서 영원한 것이 나오게 되고, 실재가 나오게 되고, 참이 거기서 나오게 된다. 그것 을 우리가 비로소 마실 때, 내가 그 진실을 마실 때, 그 때 내 인생에 목마름이 없어지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친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역사는 예표에 불과하지 역사 자체가 우리를 생명 안으로 인도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르는 반석으로부터 이 물을 마셨다'고 했다. 우리는 가다가 목이 마르니까 반석을 쳐서 물을 먹었다. 이것은 바울은 해석하기로 그 반석은 이스라엘에서 따르는 반석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는 곳마다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스라엘이 가는 곳마다 따르는 반석이 있었겠는가 역사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 이 아닌가 이것은 영원한 실재를 봤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따르는 반석이 되어서 우리한테 항상 따르는 반석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배에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물을 먹고 다른 자리로 옮기면 물이 없다.
그런데 물이 계속 따라 다닌다면 항상 물을 먹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항상 따라 다니면서 우리에게 공급이 되는 사람은 그리스도 가 아니겠는가 바위에서 깨진 나온 물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온천 물이라 하더라도 목욕하고 나오면 나는 온천 바깥에 있게 된다. 어디 부곡 하와 이에 가서 온천물에 씻고 왔다 하더라도 그 온천물이 우리 집까지 묻어 오는 것은 아니다. 그 온천은 나를 따르는 온천이 아니다. 광야에서 갈라진 반석은 따르는 반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따르는 반석이라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예표였다. 구약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 은 예표였던 것이다. 어떤 영원한 것을 위한 예표였다. 우리가 만일 역사만을 취하게 되고 역사 이면에 있는 실재를 취하지 못할 경우에는 우리는 아무리 좋 은 것을 가졌어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볼 때도 우리 인생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다. 내가 모태로부터 나와서 일생을 살고 있는 과 정은 역사이다. 물질적인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인생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고 역사를 통과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크나 작으나 아무 관계가 없다. 키가 크다고 해서 더 인격이 크냐 키가 작다고 해서 인격이 적으냐 그것이 아니고 키가 적은 사람이라 해서 생명이 없냐 그렇지도 않고, 키가 크다고 생명이 많 으냐 그렇지도 않다. 고래의 생명도 하나고, 피라미의 생명도 하나이다. 하나의 생명일 뿐이다. 만일 고래의 생명이 여러개이고 피래미의 생명이 하나라면 고래는 한 번 죽지 않고 여러 번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래는 한 번 죽으면 끝나는 것이다. 피래미도 한 번에 죽고 고래도 한 번에 죽는다. 생명이 하나뿐 이니까. 그러기 때문에 크나 작으나 생명은 하나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의 표현이고 예표일 뿐이지 그 자체가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에 연연해하지 말자는 것이다. 역사가 이러기 때문에 불행하다느니 역사가 저러기 때문에 행복하다느 니 이러지 말자는 것이다. 역사 때문에 행복하고 역사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처럼 좋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백성이 없지 않은가 구름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 지났으며 모세와 연합하고 영적인 식물을 먹었으며 따르는 반석으로부터 마셨다. 이렇게 놀라운 것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 지만 그것이 자기들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가 엄청나게 많더라도 또 그것이 아무리 좋더라도 그것이 더 구나 아무리 종교적인 것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거나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 하거나 하지를 못하고 그건 단지 예표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실재를 받게 될 때 그것들은 살아나서 의미가 있게 된다는 이 뜻이다. 우리가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를 취할 때 지금으로부터 수 천 년전에 일어났던 유월절 사건은 우리를 통해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 생생하게 현재적인 사건으로 살아나게 된다. 우리가 실재가 취해졌을 때 우리 역사, 우리 인생의 역사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 된다.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대가 다 죽은 것 이었다. 다 뼈다구밖에 없었다. 거기에 생기가 들어가고 힘줄이 들어가고 피가 돌고 살이 붙어니까 일어나서 큰 군대가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적 우리 인생, 역사적 인간은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대와 같다. 번지가 모두 없어서 다 굴러 다니는 해골대와 같다. 누구 뼈인지 누구 발인지 다 몰랐다. 곰탕집에 가보면 어느 소의 뼈인지 모르듯이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내 인생의 역사 를 생각해보면 그 역사가 왜 이렇게 왔는지 왜 이런 인생을 사는지 모른다 말 이다. ' 어떤 사람은 재수 좋아서 저렇게 되었는가, 어떤 사람은 재수 없어서 이 렇게 되었는가, 나는 하는 일마다 안되는가 ' 별별것이 다 있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운수 소관이고 팔자 소관이고 이렇게 보고, 어떤 사람은 ' 하나님의 축복이다 ' 이렇게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 하나님의 저주다 ' 이렇게 하기도 하고 그렇다. 어떤 사람이 잘되는 걸 보면 종교적으로 보면 ' 하나님이 축복해 줘서 그런 모양이다.' 어떤 사람이 잘 안되는 걸 보면 ' 하나님한테 벌 받아서 그런 모양이다 ' 한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것을 보면 ' 아, 저 사람은 재수가 좋다.' 또 어떤 것을 보면 ' 아, 저 사람은 재수가 없다.' 이렇게 말을 한다. 운 나쁘다. 팔자 소관이다. 이렇게만 본다. 그런 것은 다 소 용이 없다. 우리 안에 실재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다. 바다 가운데를 통과해 왔어도 소용이 없다. 우리 안에 실재이신 그리스도 가 있을 때 그것들은 살아나는 것이다. 왜 이랬던가 왜 나는 이랬었던가 객관 적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불행했던 것도 그래서 이렇게 되었었구나, 좋았던 것 도 이래서 그렇게 되었었구나.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살아서 산 것이 되는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여기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은 종이와 먹만 있으니까 이것은 죽은 것이다. 종이와 먹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가 있을 때, 그 실재가 있을 때 종이와 먹은 단지 종이와 먹이 아니고 살아있는 말씀으 로 변화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사람 이다. 우리가 만물에게 이름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이것은 마이크다 하고 이름을 주고 이것은 스피커다 하고 이름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신성한 임무가 있는데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능력을 줬다는 것이다. 살아나 게 할 수 있다. 종이 조각을 우리는 살아날 수 있게 할 수 있다. 휜 종이에 검 은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은 죽은 것이다. 돌비에 새겨진 것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내게 할 수 있다. 산 것이 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 있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것도 살릴 수 있는 것이 사람이고 또 어떤 것도 죽 일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굉장한 것도 우리가 잘못하면 죽일 수 있다. 다 죽 은 것이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대를 군대가 할 수도 있고 큰 군대를 해골대 되게도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는 참 놀라운 것이 었다. 우리가 이 신성한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 우리가 여긴다면 우리가 이 임무 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유월절 그리스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야만 모든 것을 살려낼 수가 있다. 우리가 그 유월절 그리스도 를 취해야 그것이 내 운명으로 취해져야 내가 모든 만유를 살려낼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죽이는 것이 된다. 우리가 실재적인 경험 안에서도 우리 자신 이 유월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살려낼 수 있다. 이 형제도 살려낼 수 있고 저 형제도 살려낼 수 있다. 그러나 유월절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면 우리는 다 죽이는 사람이 된다. 다 밟아서 해골대가 되게 한다. 죽어서 오래 되면 해골이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진시황제까지라도 죽어서 오래되면 뼈다귀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 사람 때문에 만유는 멸망이 될 수도 있고 구원이 될 수도 있다. 죽은 것은 살아날 수도 있고 산 것은 죽을 수도 있다.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 한사람이 올바르게 되는 것이 결국 우주가 올바르게 되는 그런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절제해서 승리한 표본으로 서 자기 자신을 예로 들었고 절제하지 못해서 멸망한 이스라엘을 들었다. 두 예 를 통해서 누가 상을 얻는 것이냐 썩은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달려가는 사람들 도 자기를 절제하거늘 하물며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어찌 해서 자기 자신을 절제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을 주를 위해서 하는 사람만이 그의 신실한 사람만이 결국 상을 얻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를 보면서 이것은 우리에게 경종이다. 경고다 거울 이다. 이 사람들이 이러이러 했어도 안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만 일 우리 역사가 좀 부족하거든 내 역사가 부족하거든 예를 들어 나는 키가 좀 적게 생겼다 이것은 역사이다. 나는 돈이 좀 적다 이것도 역사이다. 그러거든 이것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거울이 있으니까 이스라엘은 이렇게 좋 은 역사가 있었어도 다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탓만 하지말고 우리 생명이 역사를 살리는 것이지 역사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 이 역사를 살릴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살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적은 것을 가지고도 큰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큰 능력을 가지고도 적은 능력밖에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주신 말씀은 너희가 적은 능력을 가 지고도 크게 했다는 것이다. 왜냐햐면 영원한 생명은 모든 것을 살리는 것이니 까 풍요롭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고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게 될 것이다.
우상 숭배에 빠지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서 사는 사람들이다. 간음하는 사람들도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 사람들이다. 주를 시험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들이다. 원망하는 사람 들도 마찬가지로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이다. 결국은 아무리 그렇게 해 봤자 자 기를 위해 살아봤자 나오는 것은 이것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우상 숭배 하는 것이나 간음하는 것이나 주를 시험하는 것이나 원망하는 것이나 이런 것밖에는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양을 우리가 취하게 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취하게 된다면 하나님 아들을 우리가 취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와 연합되어서 그가 죽은 자를 살리듯이 우리도 죽은 자를 살리는 자가 될 것이고 그가 만유의 주가 되듯이 우리도 만유의 주가 될 것이다. 없어서는 안될 자가 되게 될 것이고 우리로 인해서 모든 것이 살아나는 그런 기적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부언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다. 천당이 있는가 없는가 이런 질문을 많이 받게 된다. 그것은 꼭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듣 다보면 없다고 하는 것으로 들리니까 있는가 없는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달 라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실재와 역사를 생각한다면 천당이란 것은 역사이다. 실재가 없는데 역사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홍해 바다를 지나온 것을 생각해 볼 때 예를 들어서 홍해 바닷가 꼭 있어서 홍 해 바다를 통과하겠는가 바다를 통과할 사람이 있다면 물을 통과할 사람이 있 다면 홍해 바다 뿐이겠는가 동해 바다도 안되겠는가 그러나 홍해 바다가 없 으면 안될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다를 건널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중요한데 그 사람은 제쳐 놓고 천당이 있냐 없냐만 묻는다. 있 으면 뭘하고 없으면 뭘하겠는가 홍해 바다가 있다고 다 건너가겠는가 홍해 바다가 분명히 있는데 이스라엘은 건너가고 애굽 사람은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천당이 있어 봤자 뭐 하겠는가 갈 사람이 있고 못 갈 사람이 따로 있는데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설명을 해도 알아듣기 어려운 모양이다. 이상한 것이다. 기와집이냐 초가집이냐 그것을 물을 필요가있겠는가 사람이 있 으면 기와집을 만들 수도 있고 초가집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만일 사람이 없으면 기와집이면 뭘하고 초가집이면 뭘하겠는가 기와집이 있어도 소용이 없고 초가집이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자 꾸 역사만 묻는다.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지금까지 있었던 인류가 만든 것이다. 역사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지 않는 가 사람들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지 역사란 것이 원래 있어서 역사라는 속으로 사람이 살아갔던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간 것이 역사가 된 것일 뿐이다. 그 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미래라는 것은 없다. 우리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내일 이란 것은 없다. 우리가 있으면 내일이 있고 우리가 없으면 내일이 없는 것이다. 오늘 밤에 내가 죽는다면 내일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인류가 있다는 것을 전제해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지 인류가 없으면 역사라는 것이 없다. 홍해 바다가 있느냐 없느냐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진짜로 홍해 바닷가 있었나 없었나 해서 학 자들간에 여러 가지 논란이 생긴다. 그래서 하다가 안되니까 바다를 어떻게 건 너가겠는가 해서 red sea가 reed sea가 된다나 해서 갈대 밭이 된다고 한다. red나 reed가 비슷하니까 갈대 밭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물을 건너갈 수 있겠느 냐 물이 갈라졌겠냐 좀 낮으막한 갈대밭을 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이래서 또 논쟁이 생기는 것이다. 아 그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하고 또한쪽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하고 이러는 것이다. 홍해 바다가 있으면 뭘하고 없으면 뭘하겠는가 바다를 건너는 사람 이 중요한 것이다. 일본이 있으니까 독도가 누구 것이냐 이러고 있지 일본이 없 으면 독도가 누구 것이냐 할 것도 없다. 200해리 선포할 것도 없다. 일본 때문에 하는 것이지 일본이 없다면 할 필요가 없다. 천당이 있는가 없는가 하면 있 다고도 못하겠고 없다고도 못하겠다. 있다고 하면 있는줄 알아 버리고 없다고 하면 없는줄 알아 버린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 없는 줄 알아도 안되 고 있는 줄 알아도 안된다. 참 어려운 문제이다. 있다고 생각해도 잘못된 생각 이고 없다고 생각해도 잘못된 생각인 것이다. 둘 중에 하나가 정답이라고 사람 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둘 다 정답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있냐 없냐이지 천당이 있냐 없냐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가 있냐 없냐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있으면 역사가 있고 사람이 없으면 역사가 없다. 역사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 히 공간 안에 진행되지만 어디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있다.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 역사가 있었다.
미국 사람이 있기 때문에 미국 역사 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우리를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하지 않고 우리가 역사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역 사를 창조해 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바다 가운데로 지나고 신령한 음식을 먹 고 이것이 역사적인 것이었으면 우리도 이스라엘과 똑같다. 이런 일이 우리의 거울이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경계)를 위한 예표가 되었다고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두 평행선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역 사고 교회는 실재인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만일 없다면 이 역사는 이조 역사 와 꼭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이씨 조선 역사나 이스라엘 역사나 똑 같은 것이 되고 만다. 교회가 있기 때문에 이 역사는 특별한 역사가 될 수 있다.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로 영광스러운 민족이 된다면 이조 역사도 영광스러운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민족이 엉망인 코리아가 되고 만다면 이조 역사도 엉망 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이스라엘을 살려내게 될 것이다. 참 이스라 엘이 역사적인 이스라엘을 살려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참 사람이 우리 인생을 살려내게 될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참 생명이 우리 인생 을 영화롭게 만들게 될 것이다. 아멘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