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회복 (삼하12:15-25)
본문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이 회개하고난 다음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다윗의 범죄를 지적하고 돌아간 다음에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 난 아이가 앓기 시작합니다. 봉독한 본문 말씀에,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범죄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 범죄의 열매인 아이가 심한 고통 가운데 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는 다윗 자신이 죽어야 마땅한 죄였습니다. 자기의 충신을 죽였고 그 아내를 겁탈했습니다. 이러한 죄는 비록 왕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이 분명히 받아서 죽어야 마땅하지만,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말씀을 통해서 지적 받자 마자 그 자리에서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은 건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과 밧세바가 범한 죄의 결과로 맺혀진 이 아이는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취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그 아이가 심히 앓고 있는 상황에서 다윗은 자기 방으로 들어와서 금식을 하며 땅에 엎드려서 기도를 합니다. 울면서 기도를 합니다. 사실 자기가 죽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아들이 죽는 모습을 볼 때에 그 아비 된 마음이 얼마나 아플 것인가는 자식을 키워 본 여러분들은 다 이해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심한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기시사 이 아이의 생명을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합니다. 금식을 하면서 1주일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섬기고 있는 신하들이 옆에 가서 왕에게 권면합니다. “일어나 잡수시면서 기도하십시오. 식음을 전폐하지 마시고 왕의 건강을 생각하십시오. 왕의 직무를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고 여러 면으로 금식을 말도록 권면하지만 다윗이 듣지를 않습니다. 신하들도 포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1주일만에 이 아이는 다윗의 눈물어린 기도와 상관없이 죽고 맙니다. 신하들은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아이가 죽은 사실을 왕에게 보고할 수도 없다. 이거 보고했다가는, 지금 죽기 전에도 저렇게 울면서 금식하면서 난리인데 이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가는 왕이 자기 몸을 자해하지 않겠느냐 자기의 죄값으로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에 자기를 자책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훼상할 것 아니냐 그러니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신하들이 뒤에서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다윗이 신하들이 수근거리는 것을 보고 눈치를 채고 묻습니다. “아이가 죽었느냐” 왕의 물음에 어쩔 수 없이 신하들이 대답을 합니다. “예, 죽었습니다.” 이 죽었다는 소리가 떨어지자 마자 다윗은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가서 목욕을 합니다. 기름을 바릅니다. 그리고 하나님 전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내려와서 상을 차리라 하더니 음식을 먹습니다. 전혀 상상 밖의 행동을 취하는 다윗을 보고 신하들은 걱정과 놀람을 가지고 묻습니다. 왕이 아들의 죽음을 놓고 혹시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잖아 있겠죠 걱정과 놀람 가운데 묻습니다. “왕이여, 어찌하여 죽기 전에는 그렇게 눈물흘리고 금식하고 애타하더니,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그렇게 정반대 일을 하고 있습니까 죽기 전에는 조금 희망이 있으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죽고난 다음에는 슬픔이 더 가중되고 아픔이 더 가중되고 더 좌절해야 될 텐데, 어찌하여 거꾸로 그렇게 합니까” 그럴 때 다윗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이가 죽기 전에는 내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함으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사 혹시 살려 주실까 해서 내가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아이가 죽었는데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졌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겠느냐 그 아이가 이미 죽었는데 내가 살려 낼 수 있겠느냐 이제 내가 그에게로 가는 것 뿐이다. 모든 인생은 다 죽는 법이다. 그래서 먼저 죽은 사람, 먼저 죽은 것 뿐이지. 나도 그 아이를 죽음으로 보내지만 나도 얼마 있지 않아 곧 그 아이를 찾아가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음식을 다시 먹기 시작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리고 밧세바에게 다윗이 위로했다고 했습니다. 아이를 잃은 밧세바, 밧세바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아이가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그 맘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죄의 결과로 인한 고통을 다윗이 들어가서 위로하고 함께 지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난 아이가 솔로몬입니다. 그 이름은 “화평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화평의 사람”이라 지칭된 솔로몬이 태어났고, 도저히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또 벌어지는데, 그 불륜의 관계로 맺어진 그 사람 사이에서 난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명자라는 칭함을 받고 차기 이스라엘 왕권을 쥐게 되는 왕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이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자, 일반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불륜의 관계에서 태어난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이 택한 차기 이스라엘 왕이 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이 불륜의 관계 말고도 정실 부인들 사이에서 난 왕자들이, 형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들을 다 버리시고 하나님께서 이 불륜의 관계로 맺어진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은 정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가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마음에 깊이 기억해야 할 부분이 바로 범죄의 결과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범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죄는 다윗이 범한 죄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회개함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죄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이 사건에서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고, 그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오늘 본문에서 참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을 낳기 전에 이 아이를 낳은 다윗과 밧세바는 물론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회개가 그 범죄의 결과까지를 없애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가장 강렬하게 보여준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 죄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만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말씀으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그 죄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독생하신 주님,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면서 죄를 참 쉽게 짓습니다. 우리가 쉽게 짓는 이 죄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오늘 우리는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의 비참함을 크게 세 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죄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가 있는 곳에 고통이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안으로든 밖으로든 심한 고통이 따릅니다. 다윗이 시편 11편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 뼈가 녹아 나나이다.” 내 뼈가 녹아난다고. 무엇 때문에요 그 죄로 인한 고통 때문지요. 그러면 다윗이 밧세바를 취할 때에는 고통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고통이 있기 전 즐거움이 있었지요. 한 여인을 취하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쾌락으로 끝나 버리고 맙니다. 죄라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보면 미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죄라는 것은 선악과를 따 먹는 것처럼 아직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것처럼 탐스러운 거에요. 죄라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으로 취했다고 할 때는 그것은 무엇인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것이 내게는 기쁨이 될 것 같고, 내게는 풍요로움이 될 것 같고, 내게는 유익이 될 것 같아서 취하는 것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적으로 사탄의 유혹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찰나적인 쾌락이요, 찰나적인 기쁨이요, 찰나적인 만족입니다. 범죄를 하고 돌려보내고난 다음 다윗의 자세를 보십시오. 무엇이 따르기 시작합니까 근심이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노출되고 발각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임신했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더욱 더 고민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밤을 새면서 연구를 했을 것 같아요. 이 문제를 어떻게 감출 것이냐 그래서 궁리 끝에, 우리야를 불러다가 집에 보내고 그 아내와 동침케 해서 우리야의 아기를 낳은듯이 보이게 할 궤계를 꾸미는 것을 보면 그가 부단히 고민하면서 연구한 결론인 것 같습니다. 죄를 짓는 순간 달콤하고, 짓는 순간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뒤돌아보는 순간 고통이 따릅니다. 근심과 걱정이 따라옵니다. 고민이 따라옵니다. 죄의 결과는 고뇌입니다. 여러분, 죄짓고난 다음 고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고통이 있지요. 그러나 그것도 자꾸 짓다 보면 고통이 있어요, 없어요 그것도 없어질 단계에 들어가고 맙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무어라고 말합니까 “강퍅해졌다. 화인 맞았다. 불로 지졋다.” 그 말이에요. 마음이 그러니, 지져 놓으니까 감각이 없어요. 버린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은 분명히 그 단계에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죄의 결과는 비참입니다. 고통입니다. 다윗은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많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가 죄를 감추기 위해서 고통을 받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 이 아들이 아파서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서도 고통을 당합니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1주일 동안 아파요. 그냥 “하나님이 치시매 죽었더라.” 그러면 고통도 찰나적일 거에요. 그러나 1주일 동안을 아프다가 죽어요. 아마 제가 생각할 때는 땅을 치며 가슴을 치고 아마 다윗이 이런 기도를 했을 것 같아요. “하나님, 차라리 내 영혼을 거두어 주십시오. 하나님, 차라리 내 생명을 취해 주세요.” 그런 기도를 했을 것 같아요. 그것이 부모 마음 아니겠어요 자식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울며 가슴이 아프지요. 그러면 그 아이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까 그 아이의 죄의 결과입니까 아니지요. 아이는 죄가 없어요. 다윗의 죄의 결과로 아이가 죽는 겁니다. 우리가 이사건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죄의 결과는 고통 뿐만 아니라,
둘째는 상실이라는 겁니다. 죄의 결과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지만, 없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죄의 결과로 얻어진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물질을 요구합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우리가 나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우리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 범죄의 결과 불순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얻는 것 같지만, 성취되는 것 같지만, 어느 단계에 가서 보니까 없어지지 않습디까
사랑하는 여러분, 학개서 1장 2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하나님의 일보다는 너희 일에 빨랐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의 하는 일을 불어버린다.”고 말씀하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죄에 대한 미혹을 분명히 직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할 때마다 거기에는 어떤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하기를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내 일생을 사는 날 동안 의인의 자손들이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누구의 자손들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던 사람들의 자손들이 거지 되는 것을 못 보았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 앞에 바로 살기 위해서 자식들 제대로 교육 못 시키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살기 위해서 자식에게 유산 제대로 못 물려주어도 그 자식들이 굶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자식들 때문에 불순종하는 일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자식을 위해서.” 그러면서 불순종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아이들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잘 가르치기 위해서, 그 과외지도 안 시키면 어때요 그 과외지도 시키기 위해서 월급에서 모자라니까 불법을 해야지요, 은연중에 바라고 은근히 요구하고, 그래 가지고 부정한 물질 가지고 자식들 키워 봤자 무엇할 겁니까 누차 말하지만 썩은 물질을 가지고 그 자식들 먹여 봤자 그 자식들 배탈나지요. 깨끗한 걸로 자식을 키워야지, 부정한 물을 그 자식들 먹여 봐요, 썩은 물을 먹여 봐요, 배탈나나 안나나, 인생이 탈이 난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키워 버리면.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그처럼 부요했냐 말이에요. 자식들이 우상이에요. 하나님 앞에 분명히 알아야지요. 그렇게 살면 안 돼요. 우리 믿지 않는 선조들도 참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았어요.
어느 분이 일제시대 때 글을 쓴 것을 읽다 보니, 이런 글이 있었어요. 옛날 우리나라 조상들은 재산을 보물이나 금가락지 등 패물로 바꾸어 가지고 땅 속에 잘 묻어 두곤 했잖아요
그런데 어떤 집이 있었는데, 장마철에 비가 와서 처마 끝에 물이 떨어지면서 땅이 패이는데 그 패인 곳에서 무엇이 나왔느냐면, 보물이 잔뜩 든 항아리가 하나 나왔어요. 이걸 어머니가 먼저 발견했는데, 이 어머니가 그걸 발견하자 마자, 어떻게 했느냐 급히 다시 덮어 버렸어요. 그리고 그 집을 팔고 다른 데로 이사를 가 버렸어요. 보니까 이 재물로 인해서 그 자식들이 잘못될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우리 선조들도 지혜로웠어요. 자식들을 물질로 키우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았어요. 잘 먹이고 잘 입히며,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준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에요. 무엇으로 키워야 하느냐 하면, 신앙으로 키워야 하는 겁니다. 신앙으로는 키울 생각 안 하고,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할 생각은 안 하고, 자식들의 신앙생활은 점검하지 않고, 학교 선생님이나 잘 쫓아 다니고, 교회에서 아이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리나 신경쓰고 들여다 보지도 않고. 정신차려요.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죄의 결과는 상실이라는 점입니다.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다 불어 버린다고 했어요. 얻어지는 것 같지만 얻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나 물질을 아무리 쌓아 두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불어 버리시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내가 쌓아 놓은 재물, 내가 붙잡아 놓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분 있어요 자신 있어요 제가 한번 철야기도 시간에 잠깐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서울에 아는 집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이 크게 사업을 했어요. 46세 정도 됐는데, 대경산업이라고 섬유업계에서 돈을 굉장히 많이 벌었고, 도미니카에 직원 200명 정도의 공장도 세워놓았지요.
그런데 갑자기 아파서 점심 때 집에 들어와 그냥 쓰러져 버렸어요. 병원에서 사형선고 받아 버렸어요. 세워 놓은 사업, 몇 십억 원의 재산,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그 분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았어요. 그리고난 다음 그 분 내외는 한 달에 20만원 가지고 생활비를 한데요. 나머지 전부 다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서 이제 생활을 바꾸어 버렸어요. 제가 볼 때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쌓아 놓은들 무엇합니까 하나님이 치시려고 하시면, 하나님이 불어버리면 그것은 한 순간입니다. 그 생명, 우리가 모아 둔 재물, 우리가 쌓아 둔 학벌, 그 무슨 소용 있어요 다 필요없어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죄의 결과에는 우선 비참한 고통이 따르고,둘째로는 그 죄의 결과가 상실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죄의 결과는 단절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난 그 다음부터 지금 이 싯점에 이르기까지 1년 동안 기도하고 하나님께 물어봤다는 귀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죄의 결과 가운데, 제가 생각할 때 가장 큰 비참함은 내적, 외적 고통도 아닙니다. 죄 가운데 얻었던 것을 잃어버리는 것도 고통 중에 고통이겠지요, 그러나 진짜 고통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기도하던 사람이 기도 못하는 것처럼 큰 고통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누렸던 그 은혜와 기쁨을 빼앗긴 것처럼 그렇게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번에 살펴본 시편에서 다윗이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합니까 회개하면서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합니까 “하나님이여, 내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옵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던, 보내셨던 성령님을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왜지요 다윗이 당한 고통 가운데서 가장 큰 고통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끊어진 바로 이 고통이기 때문이지요. 다윗이 이 싯점에 올 때까지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실패하면서도 성공하면서도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까 그러던 그가 이 죄를 짓고난 다음부터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계속하지 못합니다. 그 교제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점검해야 합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혹시 이 영적인 교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과 기쁨과 감격들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그 단절들은 무엇을 보고 또 알 수 있습니까 계시록을 통해서 주님께서 권면하시기를, 너희가 첫사랑을 잃어버렸도다 너희가 어디서 그 첫사랑을 잃어버렸는지 확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회복하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이 중단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그 감격들을 상실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인해 그동안 누렸던 그 만족과 기쁨이 끊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부분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비극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예수 믿는 다면, 이 교제가 끊어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범죄한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고 고백해요. 오늘 제가 왜 이렇게 음성을 높이는 줄 아시겠죠 저도 답답해 죽겠어요. 기도하는 자리에 보여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간절해야 할 사람이 그 간절함을 잃어 버렸어요. 열심 있던 사람들이 열심을 상실해 버렸어요. 이것이 우리의 바른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디서 내가 이렇게 됐나 오늘날 우리가 그 하나님 말씀들을 불순종한 결과가 단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쩌다 보니까 내가 이렇게 됐습니다.”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불순종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때, “내가 특별히 불순종한 것이 없는데.”라고 생각할 겁니다. 아니에요. 깊이 한번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셔야 합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성령님이 요구하는 삶에 대한 불순종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윗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금식하며 울고 기도하는 모습. 저는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요 1년만에 다윗이 눈물을 회복했습니다. 1년만에 다윗이 꿈을 회복했습니다. 1년만에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는 기도를 회복했습니다. 1년만에 그가 심한 고통 가운데서 드디어 회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죄의 결과로 우리에게는 고통이 옵니다. 상실이 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회개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보셔서 우리와의 교제를 단절시키지 않으시고 회복 시켜 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아름다운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오늘 바로 본문에 기록된 다윗의 모습입니다. 눈물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모습.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입니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멋있는 삶입니다. 비록 다윗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죄를 지었지만, 가장 비열한 죄를 지었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그 긍휼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의 결과들을 봅니다. 죄는 아무리 아름답고 내게 유익될 것 같아도, 범죄한 다음 따라 오는 것은 고통이요, 시간이 지나면 그 아름답게 보이고 유익이 될 것 같던 것들은 모두 상실되어 버리며, 또한 가장 큰 비극은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영적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는 1년만에 회복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시면서 몇 개월 동안 하나님과의 사이에 영적인 교제가 희미해지고 단절되었다고 할지라도,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셔야 돼요. 고통 당하면서라도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라도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회복의 역사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시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눈물을 회복하게 되길, 무릎 꿇는 삶을 회복하길,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회복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나 1주일만에 이 아이는 다윗의 눈물어린 기도와 상관없이 죽고 맙니다. 신하들은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아이가 죽은 사실을 왕에게 보고할 수도 없다. 이거 보고했다가는, 지금 죽기 전에도 저렇게 울면서 금식하면서 난리인데 이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가는 왕이 자기 몸을 자해하지 않겠느냐 자기의 죄값으로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에 자기를 자책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훼상할 것 아니냐 그러니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신하들이 뒤에서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다윗이 신하들이 수근거리는 것을 보고 눈치를 채고 묻습니다. “아이가 죽었느냐” 왕의 물음에 어쩔 수 없이 신하들이 대답을 합니다. “예, 죽었습니다.” 이 죽었다는 소리가 떨어지자 마자 다윗은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가서 목욕을 합니다. 기름을 바릅니다. 그리고 하나님 전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내려와서 상을 차리라 하더니 음식을 먹습니다. 전혀 상상 밖의 행동을 취하는 다윗을 보고 신하들은 걱정과 놀람을 가지고 묻습니다. 왕이 아들의 죽음을 놓고 혹시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잖아 있겠죠 걱정과 놀람 가운데 묻습니다. “왕이여, 어찌하여 죽기 전에는 그렇게 눈물흘리고 금식하고 애타하더니,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그렇게 정반대 일을 하고 있습니까 죽기 전에는 조금 희망이 있으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죽고난 다음에는 슬픔이 더 가중되고 아픔이 더 가중되고 더 좌절해야 될 텐데, 어찌하여 거꾸로 그렇게 합니까” 그럴 때 다윗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이가 죽기 전에는 내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함으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사 혹시 살려 주실까 해서 내가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아이가 죽었는데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졌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겠느냐 그 아이가 이미 죽었는데 내가 살려 낼 수 있겠느냐 이제 내가 그에게로 가는 것 뿐이다. 모든 인생은 다 죽는 법이다. 그래서 먼저 죽은 사람, 먼저 죽은 것 뿐이지. 나도 그 아이를 죽음으로 보내지만 나도 얼마 있지 않아 곧 그 아이를 찾아가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음식을 다시 먹기 시작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리고 밧세바에게 다윗이 위로했다고 했습니다. 아이를 잃은 밧세바, 밧세바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아이가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그 맘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죄의 결과로 인한 고통을 다윗이 들어가서 위로하고 함께 지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난 아이가 솔로몬입니다. 그 이름은 “화평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화평의 사람”이라 지칭된 솔로몬이 태어났고, 도저히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또 벌어지는데, 그 불륜의 관계로 맺어진 그 사람 사이에서 난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명자라는 칭함을 받고 차기 이스라엘 왕권을 쥐게 되는 왕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이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자, 일반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불륜의 관계에서 태어난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이 택한 차기 이스라엘 왕이 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이 불륜의 관계 말고도 정실 부인들 사이에서 난 왕자들이, 형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들을 다 버리시고 하나님께서 이 불륜의 관계로 맺어진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은 정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가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마음에 깊이 기억해야 할 부분이 바로 범죄의 결과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범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죄는 다윗이 범한 죄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회개함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죄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이 사건에서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고, 그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오늘 본문에서 참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을 낳기 전에 이 아이를 낳은 다윗과 밧세바는 물론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회개가 그 범죄의 결과까지를 없애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가장 강렬하게 보여준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 죄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만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말씀으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그 죄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독생하신 주님,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면서 죄를 참 쉽게 짓습니다. 우리가 쉽게 짓는 이 죄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오늘 우리는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의 비참함을 크게 세 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죄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가 있는 곳에 고통이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안으로든 밖으로든 심한 고통이 따릅니다. 다윗이 시편 11편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 뼈가 녹아 나나이다.” 내 뼈가 녹아난다고. 무엇 때문에요 그 죄로 인한 고통 때문지요. 그러면 다윗이 밧세바를 취할 때에는 고통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고통이 있기 전 즐거움이 있었지요. 한 여인을 취하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쾌락으로 끝나 버리고 맙니다. 죄라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보면 미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죄라는 것은 선악과를 따 먹는 것처럼 아직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것처럼 탐스러운 거에요. 죄라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으로 취했다고 할 때는 그것은 무엇인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것이 내게는 기쁨이 될 것 같고, 내게는 풍요로움이 될 것 같고, 내게는 유익이 될 것 같아서 취하는 것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적으로 사탄의 유혹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찰나적인 쾌락이요, 찰나적인 기쁨이요, 찰나적인 만족입니다. 범죄를 하고 돌려보내고난 다음 다윗의 자세를 보십시오. 무엇이 따르기 시작합니까 근심이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노출되고 발각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임신했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더욱 더 고민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밤을 새면서 연구를 했을 것 같아요. 이 문제를 어떻게 감출 것이냐 그래서 궁리 끝에, 우리야를 불러다가 집에 보내고 그 아내와 동침케 해서 우리야의 아기를 낳은듯이 보이게 할 궤계를 꾸미는 것을 보면 그가 부단히 고민하면서 연구한 결론인 것 같습니다. 죄를 짓는 순간 달콤하고, 짓는 순간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뒤돌아보는 순간 고통이 따릅니다. 근심과 걱정이 따라옵니다. 고민이 따라옵니다. 죄의 결과는 고뇌입니다. 여러분, 죄짓고난 다음 고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고통이 있지요. 그러나 그것도 자꾸 짓다 보면 고통이 있어요, 없어요 그것도 없어질 단계에 들어가고 맙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무어라고 말합니까 “강퍅해졌다. 화인 맞았다. 불로 지졋다.” 그 말이에요. 마음이 그러니, 지져 놓으니까 감각이 없어요. 버린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은 분명히 그 단계에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죄의 결과는 비참입니다. 고통입니다. 다윗은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많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가 죄를 감추기 위해서 고통을 받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 이 아들이 아파서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서도 고통을 당합니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1주일 동안 아파요. 그냥 “하나님이 치시매 죽었더라.” 그러면 고통도 찰나적일 거에요. 그러나 1주일 동안을 아프다가 죽어요. 아마 제가 생각할 때는 땅을 치며 가슴을 치고 아마 다윗이 이런 기도를 했을 것 같아요. “하나님, 차라리 내 영혼을 거두어 주십시오. 하나님, 차라리 내 생명을 취해 주세요.” 그런 기도를 했을 것 같아요. 그것이 부모 마음 아니겠어요 자식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울며 가슴이 아프지요. 그러면 그 아이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까 그 아이의 죄의 결과입니까 아니지요. 아이는 죄가 없어요. 다윗의 죄의 결과로 아이가 죽는 겁니다. 우리가 이사건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죄의 결과는 고통 뿐만 아니라,
둘째는 상실이라는 겁니다. 죄의 결과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지만, 없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죄의 결과로 얻어진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물질을 요구합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우리가 나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우리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 범죄의 결과 불순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얻는 것 같지만, 성취되는 것 같지만, 어느 단계에 가서 보니까 없어지지 않습디까
사랑하는 여러분, 학개서 1장 2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하나님의 일보다는 너희 일에 빨랐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의 하는 일을 불어버린다.”고 말씀하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죄에 대한 미혹을 분명히 직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할 때마다 거기에는 어떤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하기를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내 일생을 사는 날 동안 의인의 자손들이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누구의 자손들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던 사람들의 자손들이 거지 되는 것을 못 보았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 앞에 바로 살기 위해서 자식들 제대로 교육 못 시키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살기 위해서 자식에게 유산 제대로 못 물려주어도 그 자식들이 굶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자식들 때문에 불순종하는 일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자식을 위해서.” 그러면서 불순종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아이들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잘 가르치기 위해서, 그 과외지도 안 시키면 어때요 그 과외지도 시키기 위해서 월급에서 모자라니까 불법을 해야지요, 은연중에 바라고 은근히 요구하고, 그래 가지고 부정한 물질 가지고 자식들 키워 봤자 무엇할 겁니까 누차 말하지만 썩은 물질을 가지고 그 자식들 먹여 봤자 그 자식들 배탈나지요. 깨끗한 걸로 자식을 키워야지, 부정한 물을 그 자식들 먹여 봐요, 썩은 물을 먹여 봐요, 배탈나나 안나나, 인생이 탈이 난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키워 버리면.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그처럼 부요했냐 말이에요. 자식들이 우상이에요. 하나님 앞에 분명히 알아야지요. 그렇게 살면 안 돼요. 우리 믿지 않는 선조들도 참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았어요.
어느 분이 일제시대 때 글을 쓴 것을 읽다 보니, 이런 글이 있었어요. 옛날 우리나라 조상들은 재산을 보물이나 금가락지 등 패물로 바꾸어 가지고 땅 속에 잘 묻어 두곤 했잖아요
그런데 어떤 집이 있었는데, 장마철에 비가 와서 처마 끝에 물이 떨어지면서 땅이 패이는데 그 패인 곳에서 무엇이 나왔느냐면, 보물이 잔뜩 든 항아리가 하나 나왔어요. 이걸 어머니가 먼저 발견했는데, 이 어머니가 그걸 발견하자 마자, 어떻게 했느냐 급히 다시 덮어 버렸어요. 그리고 그 집을 팔고 다른 데로 이사를 가 버렸어요. 보니까 이 재물로 인해서 그 자식들이 잘못될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우리 선조들도 지혜로웠어요. 자식들을 물질로 키우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았어요. 잘 먹이고 잘 입히며,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준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에요. 무엇으로 키워야 하느냐 하면, 신앙으로 키워야 하는 겁니다. 신앙으로는 키울 생각 안 하고,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할 생각은 안 하고, 자식들의 신앙생활은 점검하지 않고, 학교 선생님이나 잘 쫓아 다니고, 교회에서 아이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리나 신경쓰고 들여다 보지도 않고. 정신차려요.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죄의 결과는 상실이라는 점입니다.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다 불어 버린다고 했어요. 얻어지는 것 같지만 얻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나 물질을 아무리 쌓아 두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불어 버리시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내가 쌓아 놓은 재물, 내가 붙잡아 놓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분 있어요 자신 있어요 제가 한번 철야기도 시간에 잠깐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서울에 아는 집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이 크게 사업을 했어요. 46세 정도 됐는데, 대경산업이라고 섬유업계에서 돈을 굉장히 많이 벌었고, 도미니카에 직원 200명 정도의 공장도 세워놓았지요.
그런데 갑자기 아파서 점심 때 집에 들어와 그냥 쓰러져 버렸어요. 병원에서 사형선고 받아 버렸어요. 세워 놓은 사업, 몇 십억 원의 재산,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그 분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았어요. 그리고난 다음 그 분 내외는 한 달에 20만원 가지고 생활비를 한데요. 나머지 전부 다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서 이제 생활을 바꾸어 버렸어요. 제가 볼 때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쌓아 놓은들 무엇합니까 하나님이 치시려고 하시면, 하나님이 불어버리면 그것은 한 순간입니다. 그 생명, 우리가 모아 둔 재물, 우리가 쌓아 둔 학벌, 그 무슨 소용 있어요 다 필요없어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죄의 결과에는 우선 비참한 고통이 따르고,둘째로는 그 죄의 결과가 상실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죄의 결과는 단절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난 그 다음부터 지금 이 싯점에 이르기까지 1년 동안 기도하고 하나님께 물어봤다는 귀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죄의 결과 가운데, 제가 생각할 때 가장 큰 비참함은 내적, 외적 고통도 아닙니다. 죄 가운데 얻었던 것을 잃어버리는 것도 고통 중에 고통이겠지요, 그러나 진짜 고통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기도하던 사람이 기도 못하는 것처럼 큰 고통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누렸던 그 은혜와 기쁨을 빼앗긴 것처럼 그렇게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번에 살펴본 시편에서 다윗이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합니까 회개하면서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합니까 “하나님이여, 내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옵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던, 보내셨던 성령님을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왜지요 다윗이 당한 고통 가운데서 가장 큰 고통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끊어진 바로 이 고통이기 때문이지요. 다윗이 이 싯점에 올 때까지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실패하면서도 성공하면서도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까 그러던 그가 이 죄를 짓고난 다음부터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계속하지 못합니다. 그 교제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점검해야 합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혹시 이 영적인 교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과 기쁨과 감격들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그 단절들은 무엇을 보고 또 알 수 있습니까 계시록을 통해서 주님께서 권면하시기를, 너희가 첫사랑을 잃어버렸도다 너희가 어디서 그 첫사랑을 잃어버렸는지 확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회복하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이 중단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그 감격들을 상실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인해 그동안 누렸던 그 만족과 기쁨이 끊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부분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비극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예수 믿는 다면, 이 교제가 끊어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범죄한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고 고백해요. 오늘 제가 왜 이렇게 음성을 높이는 줄 아시겠죠 저도 답답해 죽겠어요. 기도하는 자리에 보여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간절해야 할 사람이 그 간절함을 잃어 버렸어요. 열심 있던 사람들이 열심을 상실해 버렸어요. 이것이 우리의 바른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디서 내가 이렇게 됐나 오늘날 우리가 그 하나님 말씀들을 불순종한 결과가 단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쩌다 보니까 내가 이렇게 됐습니다.”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불순종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때, “내가 특별히 불순종한 것이 없는데.”라고 생각할 겁니다. 아니에요. 깊이 한번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셔야 합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성령님이 요구하는 삶에 대한 불순종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윗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금식하며 울고 기도하는 모습. 저는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요 1년만에 다윗이 눈물을 회복했습니다. 1년만에 다윗이 꿈을 회복했습니다. 1년만에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는 기도를 회복했습니다. 1년만에 그가 심한 고통 가운데서 드디어 회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죄의 결과로 우리에게는 고통이 옵니다. 상실이 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회개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보셔서 우리와의 교제를 단절시키지 않으시고 회복 시켜 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아름다운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오늘 바로 본문에 기록된 다윗의 모습입니다. 눈물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모습.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입니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멋있는 삶입니다. 비록 다윗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죄를 지었지만, 가장 비열한 죄를 지었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그 긍휼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의 결과들을 봅니다. 죄는 아무리 아름답고 내게 유익될 것 같아도, 범죄한 다음 따라 오는 것은 고통이요, 시간이 지나면 그 아름답게 보이고 유익이 될 것 같던 것들은 모두 상실되어 버리며, 또한 가장 큰 비극은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영적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는 1년만에 회복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시면서 몇 개월 동안 하나님과의 사이에 영적인 교제가 희미해지고 단절되었다고 할지라도,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셔야 돼요. 고통 당하면서라도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라도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회복의 역사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시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눈물을 회복하게 되길, 무릎 꿇는 삶을 회복하길,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회복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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