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역사 (행3:1-10)
본문
1.자연과학에서는 변화를 말할때 물리적 변화니 화학적 변화니 하는 말을 쓴다.
1)우리가 아는 대로 물리적 변화란 성분의 변화 없이 상태나 외형만 바뀌는 것이다.
예)나무-책상. 문. 식탁
2)화학적 변화란 전혀 새로운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예)술-식초 우유-치즈 나무-종이 모래-유리
2.사람의 변화도 동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
3.본문을 통하여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 한 사람을 본다.
I .그는 날 때 부터 앉은 뱅이 였다(3:2)
A.본문을 보자.
1.행4:22-"40여세"
2.그는 태어날 때 부터 앉은 뱅이로 태어나 40여년간을 그렇게 살아왔다.
3.어릴 때에는 그래도 부모가 보호해주니 괜찮다.
1)부모는 자식이 건강하든 불구든 사랑해 준다.
2)불구 자식에 대해서는 더 사랑과 관심을 쏟는다.
예)한국특수요육연구소 김일권소장(뇌성마비딸을 치료함).
4.부모로 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지도 못하고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결혼해 집 떠나고 외톨박이가 되었다.
1)산입에 풀칠이라도 해야될 형편이다.
2)그래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은 구걸 이었다. 성전을 택한 이유는 예배하러 가는 곳이니 비교적 인심이 좋은 곳이다.
5.그가 앉은 뱅이로 구걸하는 신세라는 사실도 안타깝지만, 발짝만 옮기면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는데 그는 이것을 전혀 몰랐다. 오직 구걸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인생이다.
B.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1.교회를 다닌지 여러해 또는 수 십년이 되면서 구원받은지도 꽤 오래 되었는데도 한번도 제발로 걸어보지 못한 신앙이 아닌가
2.예수 그리스도를 등지고, 참된 구원의 소식에는 관계없이 성전 밖에 서 있듯이 세상을 향해서 동전같이 던져지는 지식이나 듣고 교양의 폭이나 넓히고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갔다 하지 않는가 이것이 참 신앙이라고 생각하는가
3.생명이 약동하고 감격과 희열이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에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익숙해져서 “이대로가 좋다” “그냥 대강 대강 살자”하는 동안에 발목과 무릎에 힘을 잃고,홀로 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예)앵벌이 어린 소년을 납치해서 양발을 무릎에 묶어놓는다. 앉은뱅이가 됨.
4.앉은뱅이 신앙은 어떻게 자라나나
1)혼자서 못뛴다. 고무줄 신앙.
2)교회를 “누구누구” 위해 나와 준다. 남편위해, 아내위해, 목사위해.
3)말씀을 들을 때 비판이나 한다. “귀만 높다” 4)듣기는 들어도 변화가 없다. 물리적 변화는 있는데, 화학적 변화가 없다.
5.나의 신앙은 어떤가
II .앉은뱅이 상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4-7).
A.본문
1.베드로와 요한→ 9시(오후 3시)기도하러 왔다.
2."은과 금은 내게 없다"
1)은과 금 때문에 교회는 썩어간다.
2)목사도 은과 금에 혈안이 되어있고, 교회도 은과 금을 위해서 예수의 제자되고 사업도 하고 ⇒하는 식의 기복적 신앙으로 교회를 다닌다.
3)이럴때 교회는 썩고 그 교인의 인격은 전혀 변화가 없다.
3.다행히 베드로와 요한은 이런게 없었다.
4.은과 금보다 더 귀한 것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1)이것이 복음이다.
2)사도들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5.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사도들의 손에 붙들린바 되었다.
B.오늘
1.교회를 다니면서도 몸은 교회당안에 들어와 있지만 마음은 교회 밖에 나간 사람이 많이 있다.
2.형식으로와 있다.
3.앉은뱅이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1)그것은 육신의 귀로 듣는게 아니다.
2)하나님의 음성은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한다.
4.복음에⇒주님께서 선포하신 후 흔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다.
1)우리에게 귀가 있다는 것을 모르실 만큼 바보인가
2)“마음의 귀”를 말씀하셨다.
5.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앉은뱅이 상태로 평생을 산다.
III.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혁명이 일어났다(7-10).
A.본문
1.하나님의 음성을 듣되 이 앉은뱅이는 마음의 귀로 들었다.
2.그 순간 그는 일어났다 걸었다. 뛰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3. 40년간의 허송세월, 고통의 세월, 눈물의 세월, 수모의 세월, 한탄의 세월이 지나갔다. 고후5:7 ⇒그는 새 사람이 되었다.
B.우리는 어떤가
1.일어나 걷고, 뛰는 ⇒ 체험을 했나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의 귀로 듣고 내 삶에 혁명이 일어난 순간이 있었나
예화)제자훈련을 통해 변화된 이야기.
2.우리는 일어나야 한다.
3.앉은뱅이 상태에서 일어나야 한다.
4.지금까지의 앉은뱅이 생활을 족하지 앉는가
5.그러나 이제는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
결론
1.나의 신앙은 앉은뱅이 아닌가
2.구원받지 못해서 앉은뱅이인가 구원을 받았는데 아직도 앉은뱅이인가
3.일어나야 한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음성을 마음의 귀로 듣고 일어나 걷는 성도가 되자. 행 2:1-13 신앙 잡지인 가이드 포스트(Guide Posts)에 실린 글 중에 '신앙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where does faith begin)라는 제목 속에 '변덕스러운 화살'이라는 글을 읽고 퍽 신비로운 생각을 하게 되어 소개합니다. 얘기의 내용인즉, '보 브릿지스'(Beou Bridges)라는 사람의 신앙 간증인데, 이 사람은 배우 출신의 가문에서 태어난, 미국의 TV.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입니다. 그가 신앙을 갖게 된 동기를 말하면서 12살 때 일을 기억하며 말합니다. 고향 캘리포니아 주 '마비스타'라는 곳에서 살면서 동네 아이들과 활쏘기 내기를 하였는데, 각기 화살에 자기 화살의 표시를 하고는 과녁을 향해 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힘껏 수직으로 당기어 누가 제일 많이 쏘아 올렸다가 가장 가까운 곳에 떨어지게 하느냐 하는 놀이였습니다. 얼마나 위험천만한 놀이입니까
그런데, 쏴-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을 당기는 순간 찡하는 소리와 함께 강한 반동을 느끼면서 화살은 햇빛 사이로 위잉하고 살아져 버렸습니다. 잠시후 휙, 휙, 휙, 소리를 내며 자기들이 서 있는 근처로 떨어지는 화살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브릿지스'가 쏜 화살은 아직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날 친구와 함께 잔디를 깎아 주도록 약속했기에 더 찾을 길이 없어 중단하고 친구 집으로 가 잔디를 깎아 주었습니다. 그 동안 내내 화살 생각뿐이었습니다. 다 끝내고 '잘가!' 라는 친구의 인사를 받고는 무작정 집을 향해 뛰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웬 힘이 생겼는지 힘이 솟구쳤습니다. 땀에 옷이 흠 뻑 젖으리만큼 뛰다가 숨을 헐떡이며 어느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 서게 되었습니다. 시원한 그늘에서 땀을 닦고 있는데 우연히 나무 가지를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울퉁불퉁 뻗은 가지들 사이로 햇빛이 간간이 비치는데 시선이 멎는 곳이 있었습니다. 유심히 바라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자기의 화살이 그 나무 가지에 꽂혀있는것이 아닌가!,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쏜 곳에서 무려 2 마일이나 떨어 진 곳에서 자기의 쏜 화살이 있을 줄이야!.그날 후로 '브릿지스'는 새로운 신비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고, 교회와 주일학교 출석하여 신앙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고, 점차 나이가 들면서, 자기가 경험한 여름날의 화살 사건은 종교적 진리를 포용할 수 있는 실례가 되었고,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그의 능력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후 그는 누가 뭐라도 자기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힘'을 믿는다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비단 이 한사람만의 체험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120명이 한꺼번에 이런 초자연적 능력을 체험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신앙은 이러한 체험적 사실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신앙은 단순한 관념적 지식이 아니요, 신앙은 합리적 논리적 체계도 아니고, 신앙은 어쩌면 엄청난 비 합리적인 불가사의한 신비의 체험적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은 사람들은, 많은 종교적인 지식의 사람들도 아니었고, 율법을 강해 할 수 있는 서기관들도 아니었고, 말씀을 사람의 유전에 따라 머리로 이해하며 지키려 든 바리새인들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누구 인줄은 내가 모르나, 분명한 사실은 내 눈을 뜨게 한것만은 사실이다"라고, 부인할 수 없는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곧 체험입니다. 체험적 사실 위에 얻어진 신앙! 그것이 오순절의 성령님의 역사이었고, 오늘 신약 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저들은 눈으로 보았고,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을 저 들은 손으로 확인하였고, 이제 약속했던 성령님의 충만함을 몸으로 체험했을 때, 저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오늘도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들은 모두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졌을 때, 세상을 향해 두려움이 없었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아무나 증인되고, 아무나 예수 위해 희생하고, 죽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 받기 전에 제자들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말로는 다 주님을 위해 죽으러 가자고 했지만, 정작 위기가 닥칠 때, 다 달아나 버렸던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주님의 증인들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1.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이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 위에 역사 하는 힘(力)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인간의 능력만 믿으려고 합니다. 인간이 쌓아올린 과학기술의 능력으로 사람을 달에 보냈다 왔기에,
그러므로 앞으로 무한한 인간의 기술을 믿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의심하려고 안합니다. 또한 인간이 발명한 약품과 치료 방법은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요, 인간 이상의 인간의 능력은 발휘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역사는 이 인간의 능력 위에 역사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혼잡했던 언어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두려워하던 마음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무식하던 입에서 지혜로운 말이 나타났습니다. 어부의 말에서 3000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이적과 권능이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코 인간의 힘은 아니었습니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인간의 능력만 믿으려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이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님을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2. 우리는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야 하겠습니다. 본래 그리스도를 주(主)로 시인하고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할 수 없고,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성령님을 다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의 힘이 온전히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직도 세상이 더 크게 보이고, 육신의 욕망과 허욕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이 탄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님 충만을 받아야 육신의 소욕을 이루지 않게 됩니다. 알콜 중독자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술을 끊게 되었다. 그가 술을 끊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가 어느날 술집 앞을 지나가면서 윈도우에 진열된 술병들을 보았을 때 마시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윈도우에 비치는 건너편 우유상점의 간판을 읽게 되었다. "25센트만 내고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우유가 있습니다." 그는 즉시 그 우유 상점에 뛰어 들어가 우유를 배부를 때까지 마셨다. 그가 우유상점을 나와 술집을 지나쳤을 때에는 진열된 술병들로 하여금 더 이상 유혹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우유를 실컷 마셨기 때문에 술이 따로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님과 하나님의 것으로 가득 채워진다면 세상의 것들이 갖가지의 모습으로 유혹해 온다고 해도 이미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들어갈 자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단이 목적대로 사용하려고 하기 전에 우리의 빈자리를 성령님과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야 한다. 성령님 충만한 생활! 그것이 오순절의 성도들의 생활이었습니다. 저들은 이 세상의 것에 집착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우선 순위를 두고 살게 되었습니다. 성령님 충만하게 될 때,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을 때, 자발적인 자율적인 행동이 나왔습니다. 봉사를 위한 봉사, 칭찬을 위한 칭찬, 직분을 위한 직분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에 요청을 가눌 길이 없어 자발적으로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도들 발 앞에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져왔습니다. 헌금을 하자고 했어 한 저들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은 부흥회마저도 헌금을 위해 부흥회를 여는 경우도 있는데,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뜨거워진 가슴에는 지금도 누가 먼저 하느냐 가 아닙니다. 저들은 이 뜨거워진 가슴에서 이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이렇게 가슴이 뜨거워지기를 원하십니까 성령님 충만한 생활을 원하십니까
3. 성령님 충만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길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어 놓아야 합니다. 아직도 무엇인가 가득 차 있는 것들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혀 있는 모든 것을 비어 놓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높은 바벨의 탑을 헐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누구에게나 하시라도 성령님은 임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어 놓는 것만큼 성령님은 충만하게 임합니다. 성령님은 항상 대기 상태에 있습니다. 아직도 마음을 닫아 놓고 마음의 열쇠를 내가 쥐고 있는 한 성령님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내 안방의 열쇠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내가 주인 행세하지 않겠다는 고백이고 행동입니다. 내것이라고 하던 모든 것, 재물, 재능, 지식, 건강, 시간, 등등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도록 위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비운다는 뜻입니다. 과연 위의 말들처럼, 내가 얼마나 나의 마음을 비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나의 의지대로 되는 것 같으면, 누구인들 못하겠습니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주관 못하는 것이 우리들 자신들입니다. 항상 육신에 저서, 육신대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혈기가 빠져나가지 못한, 혈육의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역사를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 주어야 가능합니다. 위에서부터 오는 강권적 역사로 나를 사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회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성령님의 강권적 역사가 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녀들이 어그러진 길로 갈 때, 불순종의 길로 달려갈 때, 그냥 내 버려두지 않고 반드시 성령님의 능력으로 막아 주십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거역할 때, 몇 번씩 깨닫게 해 주지만,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강권적으로 역사 하십니다. 그래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쓰십니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민감하게 느낄수록 이상한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대로 순종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신비로운 은총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주신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에서 공경할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의 체험으로 예배하며, 그의 긍휼하심의 축복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짐을 깨달아, 성령님 충만을 받도록 날마다 마음을 비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체험을 깨달았기에 그는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매일 매일, 자기를 비어 주님께 맡긴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 충만한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우리가 아는 대로 물리적 변화란 성분의 변화 없이 상태나 외형만 바뀌는 것이다.
예)나무-책상. 문. 식탁
2)화학적 변화란 전혀 새로운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예)술-식초 우유-치즈 나무-종이 모래-유리
2.사람의 변화도 동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
3.본문을 통하여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 한 사람을 본다.
I .그는 날 때 부터 앉은 뱅이 였다(3:2)
A.본문을 보자.
1.행4:22-"40여세"
2.그는 태어날 때 부터 앉은 뱅이로 태어나 40여년간을 그렇게 살아왔다.
3.어릴 때에는 그래도 부모가 보호해주니 괜찮다.
1)부모는 자식이 건강하든 불구든 사랑해 준다.
2)불구 자식에 대해서는 더 사랑과 관심을 쏟는다.
예)한국특수요육연구소 김일권소장(뇌성마비딸을 치료함).
4.부모로 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지도 못하고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결혼해 집 떠나고 외톨박이가 되었다.
1)산입에 풀칠이라도 해야될 형편이다.
2)그래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은 구걸 이었다. 성전을 택한 이유는 예배하러 가는 곳이니 비교적 인심이 좋은 곳이다.
5.그가 앉은 뱅이로 구걸하는 신세라는 사실도 안타깝지만, 발짝만 옮기면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는데 그는 이것을 전혀 몰랐다. 오직 구걸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인생이다.
B.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1.교회를 다닌지 여러해 또는 수 십년이 되면서 구원받은지도 꽤 오래 되었는데도 한번도 제발로 걸어보지 못한 신앙이 아닌가
2.예수 그리스도를 등지고, 참된 구원의 소식에는 관계없이 성전 밖에 서 있듯이 세상을 향해서 동전같이 던져지는 지식이나 듣고 교양의 폭이나 넓히고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갔다 하지 않는가 이것이 참 신앙이라고 생각하는가
3.생명이 약동하고 감격과 희열이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에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익숙해져서 “이대로가 좋다” “그냥 대강 대강 살자”하는 동안에 발목과 무릎에 힘을 잃고,홀로 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예)앵벌이 어린 소년을 납치해서 양발을 무릎에 묶어놓는다. 앉은뱅이가 됨.
4.앉은뱅이 신앙은 어떻게 자라나나
1)혼자서 못뛴다. 고무줄 신앙.
2)교회를 “누구누구” 위해 나와 준다. 남편위해, 아내위해, 목사위해.
3)말씀을 들을 때 비판이나 한다. “귀만 높다” 4)듣기는 들어도 변화가 없다. 물리적 변화는 있는데, 화학적 변화가 없다.
5.나의 신앙은 어떤가
II .앉은뱅이 상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4-7).
A.본문
1.베드로와 요한→ 9시(오후 3시)기도하러 왔다.
2."은과 금은 내게 없다"
1)은과 금 때문에 교회는 썩어간다.
2)목사도 은과 금에 혈안이 되어있고, 교회도 은과 금을 위해서 예수의 제자되고 사업도 하고 ⇒하는 식의 기복적 신앙으로 교회를 다닌다.
3)이럴때 교회는 썩고 그 교인의 인격은 전혀 변화가 없다.
3.다행히 베드로와 요한은 이런게 없었다.
4.은과 금보다 더 귀한 것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1)이것이 복음이다.
2)사도들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5.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사도들의 손에 붙들린바 되었다.
B.오늘
1.교회를 다니면서도 몸은 교회당안에 들어와 있지만 마음은 교회 밖에 나간 사람이 많이 있다.
2.형식으로와 있다.
3.앉은뱅이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1)그것은 육신의 귀로 듣는게 아니다.
2)하나님의 음성은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한다.
4.복음에⇒주님께서 선포하신 후 흔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다.
1)우리에게 귀가 있다는 것을 모르실 만큼 바보인가
2)“마음의 귀”를 말씀하셨다.
5.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앉은뱅이 상태로 평생을 산다.
III.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혁명이 일어났다(7-10).
A.본문
1.하나님의 음성을 듣되 이 앉은뱅이는 마음의 귀로 들었다.
2.그 순간 그는 일어났다 걸었다. 뛰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3. 40년간의 허송세월, 고통의 세월, 눈물의 세월, 수모의 세월, 한탄의 세월이 지나갔다. 고후5:7 ⇒그는 새 사람이 되었다.
B.우리는 어떤가
1.일어나 걷고, 뛰는 ⇒ 체험을 했나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의 귀로 듣고 내 삶에 혁명이 일어난 순간이 있었나
예화)제자훈련을 통해 변화된 이야기.
2.우리는 일어나야 한다.
3.앉은뱅이 상태에서 일어나야 한다.
4.지금까지의 앉은뱅이 생활을 족하지 앉는가
5.그러나 이제는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
결론
1.나의 신앙은 앉은뱅이 아닌가
2.구원받지 못해서 앉은뱅이인가 구원을 받았는데 아직도 앉은뱅이인가
3.일어나야 한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음성을 마음의 귀로 듣고 일어나 걷는 성도가 되자. 행 2:1-13 신앙 잡지인 가이드 포스트(Guide Posts)에 실린 글 중에 '신앙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where does faith begin)라는 제목 속에 '변덕스러운 화살'이라는 글을 읽고 퍽 신비로운 생각을 하게 되어 소개합니다. 얘기의 내용인즉, '보 브릿지스'(Beou Bridges)라는 사람의 신앙 간증인데, 이 사람은 배우 출신의 가문에서 태어난, 미국의 TV.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입니다. 그가 신앙을 갖게 된 동기를 말하면서 12살 때 일을 기억하며 말합니다. 고향 캘리포니아 주 '마비스타'라는 곳에서 살면서 동네 아이들과 활쏘기 내기를 하였는데, 각기 화살에 자기 화살의 표시를 하고는 과녁을 향해 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힘껏 수직으로 당기어 누가 제일 많이 쏘아 올렸다가 가장 가까운 곳에 떨어지게 하느냐 하는 놀이였습니다. 얼마나 위험천만한 놀이입니까
그런데, 쏴-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을 당기는 순간 찡하는 소리와 함께 강한 반동을 느끼면서 화살은 햇빛 사이로 위잉하고 살아져 버렸습니다. 잠시후 휙, 휙, 휙, 소리를 내며 자기들이 서 있는 근처로 떨어지는 화살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브릿지스'가 쏜 화살은 아직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날 친구와 함께 잔디를 깎아 주도록 약속했기에 더 찾을 길이 없어 중단하고 친구 집으로 가 잔디를 깎아 주었습니다. 그 동안 내내 화살 생각뿐이었습니다. 다 끝내고 '잘가!' 라는 친구의 인사를 받고는 무작정 집을 향해 뛰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웬 힘이 생겼는지 힘이 솟구쳤습니다. 땀에 옷이 흠 뻑 젖으리만큼 뛰다가 숨을 헐떡이며 어느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 서게 되었습니다. 시원한 그늘에서 땀을 닦고 있는데 우연히 나무 가지를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울퉁불퉁 뻗은 가지들 사이로 햇빛이 간간이 비치는데 시선이 멎는 곳이 있었습니다. 유심히 바라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자기의 화살이 그 나무 가지에 꽂혀있는것이 아닌가!,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쏜 곳에서 무려 2 마일이나 떨어 진 곳에서 자기의 쏜 화살이 있을 줄이야!.그날 후로 '브릿지스'는 새로운 신비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고, 교회와 주일학교 출석하여 신앙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고, 점차 나이가 들면서, 자기가 경험한 여름날의 화살 사건은 종교적 진리를 포용할 수 있는 실례가 되었고,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그의 능력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후 그는 누가 뭐라도 자기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힘'을 믿는다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비단 이 한사람만의 체험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120명이 한꺼번에 이런 초자연적 능력을 체험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신앙은 이러한 체험적 사실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신앙은 단순한 관념적 지식이 아니요, 신앙은 합리적 논리적 체계도 아니고, 신앙은 어쩌면 엄청난 비 합리적인 불가사의한 신비의 체험적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은 사람들은, 많은 종교적인 지식의 사람들도 아니었고, 율법을 강해 할 수 있는 서기관들도 아니었고, 말씀을 사람의 유전에 따라 머리로 이해하며 지키려 든 바리새인들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누구 인줄은 내가 모르나, 분명한 사실은 내 눈을 뜨게 한것만은 사실이다"라고, 부인할 수 없는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곧 체험입니다. 체험적 사실 위에 얻어진 신앙! 그것이 오순절의 성령님의 역사이었고, 오늘 신약 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저들은 눈으로 보았고,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을 저 들은 손으로 확인하였고, 이제 약속했던 성령님의 충만함을 몸으로 체험했을 때, 저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오늘도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들은 모두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졌을 때, 세상을 향해 두려움이 없었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아무나 증인되고, 아무나 예수 위해 희생하고, 죽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 받기 전에 제자들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말로는 다 주님을 위해 죽으러 가자고 했지만, 정작 위기가 닥칠 때, 다 달아나 버렸던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주님의 증인들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1.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이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 위에 역사 하는 힘(力)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인간의 능력만 믿으려고 합니다. 인간이 쌓아올린 과학기술의 능력으로 사람을 달에 보냈다 왔기에,
그러므로 앞으로 무한한 인간의 기술을 믿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의심하려고 안합니다. 또한 인간이 발명한 약품과 치료 방법은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요, 인간 이상의 인간의 능력은 발휘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역사는 이 인간의 능력 위에 역사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혼잡했던 언어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두려워하던 마음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무식하던 입에서 지혜로운 말이 나타났습니다. 어부의 말에서 3000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이적과 권능이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코 인간의 힘은 아니었습니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인간의 능력만 믿으려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이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님을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2. 우리는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야 하겠습니다. 본래 그리스도를 주(主)로 시인하고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할 수 없고,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성령님을 다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의 힘이 온전히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직도 세상이 더 크게 보이고, 육신의 욕망과 허욕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이 탄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님 충만을 받아야 육신의 소욕을 이루지 않게 됩니다. 알콜 중독자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술을 끊게 되었다. 그가 술을 끊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가 어느날 술집 앞을 지나가면서 윈도우에 진열된 술병들을 보았을 때 마시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윈도우에 비치는 건너편 우유상점의 간판을 읽게 되었다. "25센트만 내고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우유가 있습니다." 그는 즉시 그 우유 상점에 뛰어 들어가 우유를 배부를 때까지 마셨다. 그가 우유상점을 나와 술집을 지나쳤을 때에는 진열된 술병들로 하여금 더 이상 유혹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우유를 실컷 마셨기 때문에 술이 따로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님과 하나님의 것으로 가득 채워진다면 세상의 것들이 갖가지의 모습으로 유혹해 온다고 해도 이미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들어갈 자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단이 목적대로 사용하려고 하기 전에 우리의 빈자리를 성령님과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야 한다. 성령님 충만한 생활! 그것이 오순절의 성도들의 생활이었습니다. 저들은 이 세상의 것에 집착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우선 순위를 두고 살게 되었습니다. 성령님 충만하게 될 때,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을 때, 자발적인 자율적인 행동이 나왔습니다. 봉사를 위한 봉사, 칭찬을 위한 칭찬, 직분을 위한 직분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에 요청을 가눌 길이 없어 자발적으로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도들 발 앞에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져왔습니다. 헌금을 하자고 했어 한 저들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은 부흥회마저도 헌금을 위해 부흥회를 여는 경우도 있는데,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뜨거워진 가슴에는 지금도 누가 먼저 하느냐 가 아닙니다. 저들은 이 뜨거워진 가슴에서 이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이렇게 가슴이 뜨거워지기를 원하십니까 성령님 충만한 생활을 원하십니까
3. 성령님 충만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길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어 놓아야 합니다. 아직도 무엇인가 가득 차 있는 것들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혀 있는 모든 것을 비어 놓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높은 바벨의 탑을 헐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누구에게나 하시라도 성령님은 임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어 놓는 것만큼 성령님은 충만하게 임합니다. 성령님은 항상 대기 상태에 있습니다. 아직도 마음을 닫아 놓고 마음의 열쇠를 내가 쥐고 있는 한 성령님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내 안방의 열쇠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내가 주인 행세하지 않겠다는 고백이고 행동입니다. 내것이라고 하던 모든 것, 재물, 재능, 지식, 건강, 시간, 등등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도록 위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비운다는 뜻입니다. 과연 위의 말들처럼, 내가 얼마나 나의 마음을 비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나의 의지대로 되는 것 같으면, 누구인들 못하겠습니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주관 못하는 것이 우리들 자신들입니다. 항상 육신에 저서, 육신대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혈기가 빠져나가지 못한, 혈육의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역사를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 주어야 가능합니다. 위에서부터 오는 강권적 역사로 나를 사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회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성령님의 강권적 역사가 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녀들이 어그러진 길로 갈 때, 불순종의 길로 달려갈 때, 그냥 내 버려두지 않고 반드시 성령님의 능력으로 막아 주십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거역할 때, 몇 번씩 깨닫게 해 주지만,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강권적으로 역사 하십니다. 그래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쓰십니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민감하게 느낄수록 이상한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대로 순종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신비로운 은총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주신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에서 공경할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의 체험으로 예배하며, 그의 긍휼하심의 축복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짐을 깨달아, 성령님 충만을 받도록 날마다 마음을 비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체험을 깨달았기에 그는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매일 매일, 자기를 비어 주님께 맡긴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 충만한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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