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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특권 (요9:31-34)

본문

오늘 본문을 통하여 신자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후에 어떤 환경에 직면하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도할 때, 예수만 믿으면 무슨 문제든지 다 해결된다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만큼 사실이면서도 어려운 명제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문제의 열쇠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병통치약과는 다릅니다. 다시말 해 성경에서 해결한다고 말하는 문제들의 일람표와 우리 자신들이 해결되기 원해서 제시하는 만병의 일람표는 서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문제의 만병은 잘 먹는 것, 잘 사는 것, 건강해 지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제시하는 치료되어야 할 만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도망가서,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삶 등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는 삶으로 바뀌어 지며, 훈련받게 되는 것이 만병에서 치료되는 것입니다.
'본론' 여러분이 처음 예수 믿었을 때, 누가 가장 기뻐해 주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 가 예수님을 믿기를 잘했다고 격려해 주고 확인시켜 주는 사람은 뜻밖에도 우리의 동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그 눈을 뜨게 된 사실 만큼 축복된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못 보던 자가 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구걸할 수 밖 에 없는 신세가 이제 구걸할 필요가 없게 되어졌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데 이 소경이 눈을 뜨게 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34절에;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말해 눈을 떳는데도 내 쫓김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눈을 뜨이고서 내쫓김을 받는 것과, 눈이 그대로 감긴 채 그냥 어우러져 사는 것 중에 어느 편이 더 좋다고 생각되십니까 오늘 본문의 눈을 떠서 쫓겨났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믿었더니 오히려 거절당하고 쫓김을 받게되는 일을 겪고서는 '예수를 믿어서 도대체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는 갈등이 내게 생긴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말해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난 다음에, 예수를 믿었더니 모든 일이 다 잘되 더라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크게 오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고 불치의 병이 기적적으로 낫고, 사업의 축복이 열리고, 형통해 지더라는 간증들은 무었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이런 식의 형 통함이 있다는 공식을 보여주기 위한 축복의 셈플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들 이 우리가 이 세상의 축복들에 더 애착을 가지게 하려고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기적적인 축복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기적도 능히 행하시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축복에 대한 약속이 참되다는 것을 깨닫 게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그 영원한 축복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것들을 외면하는 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기적인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암에 걸려 오늘 죽으려는 사람을 고쳐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암을 고침받은 사람이 죽지 않고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사람도 마침내 죽고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이 세상의 만사형통의 표시로 암에서 꺼내서 죽음을 면케 하셨다면 어찌 늙어 죽는 것은 가만히 놔 두시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그런 특별한 축복을 보여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 여금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게끔 하시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간섭하시는 것이 아 닙니다. 다시말해 기적 그 자체로서 축복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 즉 물질계에서 경험하거나 이해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을 확인시키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예수를 믿으면 믿기 전보다 훨씬 고달파 집니다. 그리고 불편합니다. 이러한 고백들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럴 줄 알았 으면 나중에 믿을 것을'하는 고백들 말입니다. 그게 솔직한 고백입니다. 여러분 은 어떠하십니까 만일 그런 고백이 없다면 훨씬 곤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꺼꾸로 배워 왔 습니다. 예수를 믿게될 때, 고민이 없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이고 고민하는 사람이 가짜라고 알아 왔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고민하는 사람, 갈등하는 사람이 진짜이고 고민이 없는 사람은 어딘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만사형통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마 10:34-36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이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 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은 혈육입니다. 그리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굳게 뭉 쳐진 동지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자 우리는 갑자기 지금껏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공통의 이해관계 보다도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이 더 우선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부딪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남과 남 사이였다면, 갈라 서는 데 아픔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하나였기 때문에 갈라서는 것이 아픕니다. 남남이었더라면 예수를 믿고 안 믿고의 차이가 그다지 아플 것이 없을것 인데, 원래는 혈육이었고 원래는 동지였고 원래는 친구였던 사이였기에 한 쪽은 믿 고 한 쪽은 안 믿는다는 것으로 갈라선다는 것이 그토록 아프고 배신감이 있고 원 통함이 있고 더 처절한 증오심 마저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바 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사이 만큼 메꿀 수 없는 큰 간격도 없습니다. 그 어떠한 것으로도 이 사이를 메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아픔이 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아픔을 허용하시는가 하는 점이 문제입니다. 원래는 모든 인간이 한 통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배반 하고 이탈하여 죄를 좋아하고 죄 속에 있는 것이 편안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사탄이 주인인 나라에서 안락함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기에서 뽑아 내셨습니다. 하나님과는 평화하게 되었으나, 옛날에 의리 를 지켰던 사람들과는 적이 되게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탈출하여 온 이곳이야말 로 절대적으로 좋은 곳이요 축복받은 곳이요 여기가 진짜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었이냐 하면, 우리가 배신하여 나온 그곳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의 실제적인 영역은 우리가 배신하여 나온 바로 그곳 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배신하고 도망감으로 나를 향하여 배신자라고 욕하고 괄시하고 밟으려는 저 세상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살 아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살아야 합니까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전도를 위해서입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 에는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롬5:1-4절을 찾아보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 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는 3장과 4장에 걸쳐서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구원 을 얻었는가를 요한복음 5장을 근거로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그 누구도 먼저 구원 을 요청하거나 필요성을 인식했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제시 했을 때 반응 하 여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
그렇다면 무었 때문에 이렇게 열심을 내고 있는가'하며 의아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롬 5:1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과거형'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현재형' 또한 그로 말미 암아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 워 하느니라'미래형'" 구원은 일차적으로 죄로 더러운 몸이 씻겨진 사건이 이미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그리고 파티에 갈 준비를 지금부터 해야 합니다'현재'. 그리고 영광스러운 자리, 즉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미래'. 우리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영광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 자리에 까 지 가야 합니다. 거기를 어떻게 가야 하느냐 하면, 롬5:3절 이하에 있는 것같이 환난 중에도 즐거 워 하면서 갑니다. 그리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는 이유는 그 환난이 인내를 만들 어 내기 때문이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풍성한 영광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서 이 과정들을 통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을 왜 불신자들 속에 놔두어 우리를 향하여 으르렁대는 사람들 속 에서 고난과 핍박을 받게 하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환난을 통과해야 인내를 하고, 인내를 통과해야 연단이 되고, 연단을 통과해야 소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을 조금씩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환난의 필요성에 대하여 알아 보 십시다. 사람은 어려워지지 않으면 절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여유있 을 때는 장식류가 그 가치의 최고성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여유가 없게 되었을 때 에는 비로소 돈이 중요하구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정과 사랑과 행복이 물질과는 관계없는 곳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결단코 입으로 건성으로 선 언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이야 기하는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이 많습니다. 그것이 단지 여유있는 몸짓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유산을 사회로 기증하여 사회에 환원하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치장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즉, 여유 있는 데서 잘라 내어 주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생색이 나고 보람되는 일 중에, 남을 동정하는 것보다 더 자존심이 채워지며 보람되고 냄새를 안 피우고 품위서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다시말해 신앙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라야 진짜 신앙의 자리에 돌아오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환난을 당해보 아야 알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자존심을 거는 자리에까지 들어가 봐야 그 사람 의 본심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왜 거기서 당장 소망으로 가지 않고 인내로 가겠 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경험해 보면 알게 되지만, 우리가 쉽게 입으로 고백했던 만큼 마음 으로도 항복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은혜를 많이 받고서 우리는 쉽게 이 런 생각과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여! 오라, 적 그리스도들이여 오라! 어디 나를 찌르고 찢어보라, 그래서 내 입술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소리가 나오는지 보라!'고. 그러나, 우리가 환난을 직접 당해보면 이같은 생각들이 얼마나 힘이 없는 구호에만 그친 것이었는가를 알게됩니다. 굳이 괴뢰군이나 사탄이 우리에게 찾아올 필요가 없습니다. 당장 내 자녀의 시험 성적이 한 번 나빠지기만 해 보십시오. 그 날로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하나님 이 럴 수가 있습니까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제가 성가대원으로, 교사로 봉사하지 않 았습니까 아니 정한 시간에서 조금 지각을 하였다고 저 아이의 성적을 20점씩이나 깍아 내릴 수가 있습니까'하면서 우리는 금방 불평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 히 하나님의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고 맙니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몸과 내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이기주의자들인가를 환난을 당할 때에 알게 됩니다. 우리는 펄펄 뜁니다. 절 대 양보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환난이 빨리 그치기를 원하여 재빨리 회개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못해!' 하면서 덤벼듭니다. 어 느 쪽이 금방 응답을 받습니까 얼른 회개한 쪽이 조금은 빠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둘 다 환난이 일찍 그치지 않는 것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를 진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께서 금방 매를 그칠 것이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에누리 없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우치시고 훈련시키시는 것을 원하시지, 금방 우리를 굴복 시키려 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깨달음과 훈련은 생략한채 너무도 쉽 게 굴복하여 문제를 매듭지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적 부흥회는 언제 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었을 잘못했느냐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일단 회개할 감정을 만들어 주고, 울면 우리도 시원하고 부흥 사도 만족하고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여지껏 엄벙덤벙하며 살아와서 한 걸음도 제대로 신앙이 진전해 보여진 적이 별 로 없다는 것이 문제점입니다. 그래서 살짝 건드려도 언제나 넘어지는 신앙들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환난이 인내를 만든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환난으로 인내를 만드는가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십시다. 놀라운 것이 하나 있는데 신자가 아무리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를 갈면서도 그 환난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가는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매를 맞고 집을 나가는 자녀가 없는 법과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가기는 어디 갑 니까 결국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도망가면 그냥 놓아 둡니까 모든 경찰서에 사진 을 보내어서 잡아오게 하지 않습니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인내라는 것은 환난을 통해서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펄펄 뛰지만 내가 그 분의 손 에서 도망갈 수 없다는 것과, 펄펄 뒤고 있지만 내가 주님을 향한 시선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펄펄 뛰다가 지쳐서 자기가 아우성치던 것들을 모두 파묻고서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귀를 귀울이고 시선을 고정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에게 있는 놀라운 점입니다. 이것은 환난과 인내를 통해서만 가능해 지는 역사 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신앙에 조금의 여유만 생기면 기껏 한다는 것이 무었입니 까 십일조를 꺼내 놓고, '오늘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십일조를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도망을 가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 정도의 상태 로 방치해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연단의 과정을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연단이란 '경험되었다'는 뜻입니다. 단련되어서 그 정도에는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연단이 왜 중요한 지를 보십시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깊이가 조금 생긴 다음에 보면, 우리가 쉽사리 어느 시점에서 박수를 치거나 어느 시점에서 그를 매도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아도 신앙이 괜챦았을 때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충실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 편을 들고 가장 정열적이고 가장 열심을 가지고 떠들었던 것이 자신만만했던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 경험 속에서 배워야 됩니다. 어느 한 사람이 좌절 속에 빠진 것이 꼭 모자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만만해 했던 그 시기가 지나간 다음 단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서도 쉽게 뭐라고 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좌절하는 것이 끝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만족이 꼭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연단되었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로소 인생이라는 것이 아무리 막다른 골목에 있어도 놀랄 일이 못되고, 아무리 승승장구했어도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인생이 우리를 위협한다고 해도 그렇게 절망스런운 것이 아니며, 사람들 앞에서 한 두번 부추김 받는 것이 그렇게 남들에게 우월감으로 큰소리칠 것들이 아니라는 것 을 배우게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내면 세 계, 즉 영적인 세계의 힘을 저축하기 때문에 보이며 밖으로 드러나는 일들에 대해 어떤 초탈한 감정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드디어 사람들의 위협과 공 갈이 겁나지 않고, 사람들의 칭찬에 별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단계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다려 줄 줄을 알게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용서해 주 게 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을 연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할 것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 다음 단 계인 소망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신앙의 과정들은 우리에게 무었을 가르켜 줍니까 신자의 생활이 구원을 얻고 나서 감격으로 기뻐 뛰었지만 그 이후의 생활들이 계속 승리의 생활을 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므로 오늘 당장 죽 어도 천국에 갈 수있다는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이 확신 에 찬 생활이 그 신자로 하여금 승리의 생활을 보장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고 실 패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승리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균으로 보아서 나의 신앙 생활이 성공적이 냐 아니면 실패와 좌절의 연속들이냐 물을 때, 대개 '실패했습니다. 좌절스럽습니다'고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경이 그것을 예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러한 실패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실패를 통해서만이 참 소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신앙의 수준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가 무었이냐 하면, 그 자신이 소망을 갖 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이란 이런 식은 아닙니다. 예를 들 어 내가 지금 환난과 핍박을 당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잡고 있으면 언젠가는 천국에 갈 날이 있고 하나님께서 오셔서 '오냐, 네가 잘했다! 너를 지금껏 골탕 먹이던 자 들이 나쁜 자들이다'라는 판정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소망은 이런 것입니다. 결국 그가 살면서 자신이 얼마나 뿌리 깊이 죄에 인박여 있으며,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은 도무지 죄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 식으로 표현하자면, '오호라, 내가 죄인의 괴수로다! 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습니다!'라는 고백이 삶을 살면 살수록 확인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드디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고가셨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절망으로 끌고 갔습니까 그것은 나의 인생이 내 손과 내 힘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에 새기기위함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좌절과 절망과 자포자기에서 우리를 가리키십니다. 무었을 가리키십니까 그것은 내가 나를 포기하는 것이 내가 포기되는 것이 아 니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특권입니다. 다시말해, 내가 교만할 수 없듯이 또한 절망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배웁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 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나도 나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 의 말처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시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 데려가시고 이 고 통과 수난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과 자기의 힘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놓게 만드시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 제게 힘을 주십시오!' '제게 지혜를 주십시오!'라 고 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힘과 성공을 위한 방편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지혜가 되어 주시며, 제 힘이 되어 주시며 나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나의 상급과 방패 그 자체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실패가 와도 성공이 와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가될 수 있는 것 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 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 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인생을 걷게 하신 이가 그 목적지를 설정해 두셨으며 그 지나는 과정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린 그 과정을 통과 할 때마다 무었이가 하나가 깎여 나가고 딱여지고 새로운 것이 생긴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라고 고백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23:10절에 보면 이 진리를 아름답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리 라" 또 13-14절에 보면;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 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가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욥은 자기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부자로 살았고, 경 건하게 살았던 욥에게 하루 아침에 재난이 불어 닥쳐 왔습니다. 자식들이 일시에 다 죽고, 재산도 하루 아침에 다 빼았기어 다 잃어 버렸습니다. 부인은 그에게서 떠나가고 그는 설상가상으로 온 몸에 악창이 나고 병들어 구걸하며 기왓장을 들어 자기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그는 외쳤습니다. '하나님이여, 왜 이렇 게 하셨습니까'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문득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내 가 알지 못하나 내 인생을 쥐고 계시는 분이 어떤 필요성과 이유가 있어서 이 일을 시행하신다는 것을 내가 확실히 안다. 그리고 이 길을 통과하면 그가 나를 정금같 이 만들 것이라는, 그것 하나만은 내가 안다. 그러나 어떻게 가는 길인 지는 나는 모른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신자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그 인생을 계획하시고 간섭하시어 목적을 위하여 이끌어 가시는 분이심을 아는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신앙이란 우리가 근 거로 해서 살던 것이 무었인가를 확인하고 확인하여 주권을 하나님에게로 인양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우리의 절망이 무었입니까 드디어 내가 힘을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 힘을 잃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신앙은 바로 거기서부터 꽃피우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것이 아니요, 내 힘이 나의 힘이 아닌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항복해 나 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입으로는 참 쉽습니다. 그러기에 살아가면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을 삶 속에서 신앙적으로 그 얼마나 제대로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일찍이 모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시90:1-10절을 보시겠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고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아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서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 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 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 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 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 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 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모세가 왜 년수, 즉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짧은 이 인생 동안에 그 나라에 걸맞는 자들로 만들기 위하여 지금 훈련 시킥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지 않고 마치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나는 아직도 마음은 이팔 청춘이다.' 16살 청춘이라는 이 말의 뜻은 물론 '내 마음은 아직도 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말은 괜시리 호기를 부리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마음이 그렇다는 말로 사용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사실을 나타내는 대 표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나이가 50인데, 16년 밖에 살지 않은 것같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죽을 날이 아직도 50년은 더 남았다는 말이 아닙니까 백발이 허옇게 되셨는데도 꼭 그렇게들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음은 청춘이야!'란 이 말 속에는 '난 아직 안 죽을꺼야. 영원한 나라는 아직 준비하지 않아도 되지'라는 말도 안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현재가 영원하고, 지금이라는 시간이 무한할 것같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죽을 것 같은데도 말입니다. '빠삐용'이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거기에 독방에 갇힌 죄수가 고개를 내밀고는 묻습니다. '내 얼굴이 어떤가' 옆 감방의 죄수가 보니까 곧 죽게 된 몰 골입니다. 그래도 뭐라고 얘기해 줍니까 '응, 멀쩡해! 아직 30년은 더 살것 같군' 그러나 그 묻던 죄수는 그 다음 날에 죽어버렸습니다. 어느 날에는 빠삐용이 머리를 내밀고 묻습니다. '내 얼굴은 어떤가' '건간해, 좋 군!' 내일이면 죽을 텐데 무었 때문에 '너 죽을 것 같은 얼굴색이구나!'라고 말하 겠습니까 치료할 방법이 없는데 말입니다. 바로 이 세상의 인생들이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그러한 세상에서 탈출한 자들입니다. 이제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요한복음 본문으로 돌아가 보시겠습니다. 요9:34-35절을 보십시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 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이 말씀은 세상이 눈 뜬자를 쫓아내자 예수님께서 마중 나오셔서 만나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쫓김받고, 세상에서 나올 때만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푹 빠져 있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없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보십시오. 얼마나 짧았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헛된 것에서 속히 돌이킬 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와 훈련을 충실 하게 받아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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