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보라 (요1:30-51)
본문
겸손한 사명의 인물 요한의 소개로 첫 제자인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 르신 예수님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셨습니다. 본문은 바로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던 때의 상황 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진실로 빌립과 예수의 만남,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의 만남,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하여 다시 나다나엘과 예수의 만남에서, 한 겸손한 인물과 또한 사람 진실한 인간, 그리고 위대한 예수님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을 통하여 참된 전도자의 자세와 전도하는 방법, 그리고 만족할 만한 주님의 영접을 볼 수 있습니다.
1.안드레에게서 전도자의 심성을 배워 봅시다. 예수의 제일 제자였던 안드레는 장차 수제자가 될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안드레, 그는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전도자라고 할 수 있으니,
(1) 첫자리를 양보하는 겸손의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안드레는 늘 "베드로의 형제"로 기록되는데, 사실 그가 동생인지 형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적은 늘 베드로의 그늘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예수님을 만났고 베드로 를 인도했으면서도,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톱 클라스에 끼지 못하였 기 때문에 불평과 원한을 품을 수도 있었으나 전혀 그런 내색이 없었 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에게 지도적 지위를 양보하고 뒤에서 근실히 일하였던 것입니다. 지위.명예.서열에 관심이 없고 예수를 섬김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는 불평없이
둘째 자리로 만족한, 모든 겸손하고 충성된 성도 들의 본보기라고 할 것입니다.
(2) 그에게는 인도하는 성품이 있었습니다. 안드레에 대한 자료가 성서에 많지 못하지만 몇 곳에서 보이는 자료 를 통하여 알 수 있는 특별한 성품의 한 가지 있으니,다른 사람을 에 수께로 인도하는 성벽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특유한 기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비를 잘 하는 사람(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처럼)이 있는가 하면,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어시스트를 잘 하는 사람이 있고, 힘든 일은 맡아 놓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으로만 때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드레는 정말 좋은 기질이 있었으니 이미 말씀드린데로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하였고, 요한복음 6장8-9절에 보면 예수께서 5천 명을 먹인 이적을 베풀 때 오병이어를 가진 소년을 예수께 인도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할 때 도 그들은 주님께 안내하였습니다. "남들로 하여금 위대하여지도록 하는 자는 역시 위대하다."그런 일을 하는 자는 사람들에게서는 칭찬을 듣지 못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왜냐하면 은밀히 선 을 행하는 복된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께로 가는 영광을 나누려 한 선교열, 전도하는 마음을 가졌 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알고 그와 친교를 가진 그는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일에서 기쁨을 얻었고,예수를 자기 개인의 소유로 삼지 않았 습니다. 안드레는 참으로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고,전도에 천부적 기질을 가졌던 분입니다.
2. 와 보라. 예수께서 처음 안드레를 만나서 제자를 삼으실 때에도 "와 보라 (1:39)"라고 하셨고, 가서 본 안드레가 전도할 때 그의 대상자 나다나 엘에게 말한것도 "와 보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전도하는 사람이 하어야 할 '말' 이 있습니다. 메시야를 발견했다는 빌립의 말 에 대하여, 꼬장꼬장한 나다나엘은 조소하듯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와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변론으로 기독교인을 마들 기는 어렵고 이보다 해가 많습니다. 오히려 빌립은 간단히 "와 보라" 라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어떤 코메디안이 "뭔가 보여주겠다"고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 시키지만, 빌립은 "오라, 그리하면 볼 것이다!"라고 권위있는 초청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예수가 구주라는 신념을 주는 유일한 길은 그와 직접 부 닥치게 하는 것이고, 이론보다 체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구도자는 항 상 '오는' 행동과'보는 관출 두 가지가 필요 求. 보지도 않고 삼자적인 위치에 두고,논리와 추측으로 산물과 진리를 올바로 알고 믿기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신앙의 조직적인 이론보다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와 자기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 전도의 첩격인 것입니다. 19세기의 유명했던 무신론자 헉슬레가 어떤 회의에 참석했다가 주일 을 위하여 다들 교회에 나가는데 자기는 어떤 독신자를 붙잡고 "오늘 당신은 나와 같이 있으면서 당신의 신앙과 어찌하여 신자가 되었는가 에 대하여 이유를 말해줄 수 없는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헉슬레 와 변론할 능력이 없다고 대답하자 "어떤 변론이 아니라 이 예수가 당신에게 신앙과 어찌하여 신자가 되었는가에 대하여 이유를 말해줄 수 없는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헉슬레와 변론할 능력이 없다고 대답 하자 "어떤 변론이 아니라 이 예수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는 단순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신앙의 경험을 얘기하자 헉슬레는 자기도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면 참 행복하겠다고 눈물 흘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변론이 아니라 예수께 대한 단순한 경험담이었 습니다. 제일 좋은 변론은 "와 보라" 입니다.
3. 주님의 통찰 주님은 나다나엘이 자기를 찾아 왔을 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전도자 가 그렇게도 자신있게 '와 보라'라고 말하는 이유는, 예리한 통찰력으 로 위대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화과나무는 평화의 상징이기에 자기 집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밑에서 평안히 지나는 것이 평화의 이상이 었습니다 (왕상 4:25,미4:4). 나다나엘은 자기 집 무화과나무 아래서 묵상하며 하나님의 택하신 자 가 오기를 기도했던 것인데,예수님은 그 사실까지도 아시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전력과,아니 그보다 그의 중심을 아시는데 나다나엘은 놀라 그의 판정에 압도당한 것입니다. 그는 이미 이렇게 독백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내 꿈을 아신다. 그는 나의 기도도 아신다. 그는 내 중심의 소원도 아신다. 그는 내 영 혼의 탄식을 아신다.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기름 부음을 받 은 자"라고 말합니다. 나다나엘은 그 중심을 아시고 마음을 만족시켜 주신 이에게 영원히 항복했습니다. 주님은 이보다 앞서 안드레가 데리고 온 베드로를 보시고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겉만이 아니라 속까지 자세히 응시하셨습니다. 베드로를 "게바"라 한 것은 베드로에게 갈릴리의 우직한 어부만 보신 것이 아니라 장차 그가 교회의 기초가 될 반석을 보신 것입니다. 주님 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생명을 내게 맡기면 네가 가진 가능성을 다 성취시켜 주리라"고 말입니다. 큰 대리석 덩어리를 막고 있는 미켈란젤로에게 어떤이가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대리석 속에 갇힌 천사를 놓아주려 하노라"라고 대 답하였습니다. 예술가로서의 통찰력과 더 높은 이상을 실현하려는 의 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예수는 우리 각 사람 속에 숨은 영을 보시고 해방해 주실 수 있습니다. 참으로 나의 앞길 나보다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고 계시며 나의 능 력을 분명히 보여 측정하시고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약 1:5).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여러분의 모든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킬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께 나아가는 자는 "주여,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서이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안드레에게서 전도자의 심성을 배워 봅시다. 예수의 제일 제자였던 안드레는 장차 수제자가 될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안드레, 그는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전도자라고 할 수 있으니,
(1) 첫자리를 양보하는 겸손의 사람입니다. 성경을 보면 안드레는 늘 "베드로의 형제"로 기록되는데, 사실 그가 동생인지 형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적은 늘 베드로의 그늘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예수님을 만났고 베드로 를 인도했으면서도,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톱 클라스에 끼지 못하였 기 때문에 불평과 원한을 품을 수도 있었으나 전혀 그런 내색이 없었 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에게 지도적 지위를 양보하고 뒤에서 근실히 일하였던 것입니다. 지위.명예.서열에 관심이 없고 예수를 섬김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는 불평없이
둘째 자리로 만족한, 모든 겸손하고 충성된 성도 들의 본보기라고 할 것입니다.
(2) 그에게는 인도하는 성품이 있었습니다. 안드레에 대한 자료가 성서에 많지 못하지만 몇 곳에서 보이는 자료 를 통하여 알 수 있는 특별한 성품의 한 가지 있으니,다른 사람을 에 수께로 인도하는 성벽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특유한 기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비를 잘 하는 사람(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처럼)이 있는가 하면,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어시스트를 잘 하는 사람이 있고, 힘든 일은 맡아 놓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으로만 때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드레는 정말 좋은 기질이 있었으니 이미 말씀드린데로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하였고, 요한복음 6장8-9절에 보면 예수께서 5천 명을 먹인 이적을 베풀 때 오병이어를 가진 소년을 예수께 인도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할 때 도 그들은 주님께 안내하였습니다. "남들로 하여금 위대하여지도록 하는 자는 역시 위대하다."그런 일을 하는 자는 사람들에게서는 칭찬을 듣지 못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왜냐하면 은밀히 선 을 행하는 복된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께로 가는 영광을 나누려 한 선교열, 전도하는 마음을 가졌 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알고 그와 친교를 가진 그는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일에서 기쁨을 얻었고,예수를 자기 개인의 소유로 삼지 않았 습니다. 안드레는 참으로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고,전도에 천부적 기질을 가졌던 분입니다.
2. 와 보라. 예수께서 처음 안드레를 만나서 제자를 삼으실 때에도 "와 보라 (1:39)"라고 하셨고, 가서 본 안드레가 전도할 때 그의 대상자 나다나 엘에게 말한것도 "와 보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전도하는 사람이 하어야 할 '말' 이 있습니다. 메시야를 발견했다는 빌립의 말 에 대하여, 꼬장꼬장한 나다나엘은 조소하듯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와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변론으로 기독교인을 마들 기는 어렵고 이보다 해가 많습니다. 오히려 빌립은 간단히 "와 보라" 라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어떤 코메디안이 "뭔가 보여주겠다"고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 시키지만, 빌립은 "오라, 그리하면 볼 것이다!"라고 권위있는 초청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예수가 구주라는 신념을 주는 유일한 길은 그와 직접 부 닥치게 하는 것이고, 이론보다 체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구도자는 항 상 '오는' 행동과'보는 관출 두 가지가 필요 求. 보지도 않고 삼자적인 위치에 두고,논리와 추측으로 산물과 진리를 올바로 알고 믿기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신앙의 조직적인 이론보다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와 자기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 전도의 첩격인 것입니다. 19세기의 유명했던 무신론자 헉슬레가 어떤 회의에 참석했다가 주일 을 위하여 다들 교회에 나가는데 자기는 어떤 독신자를 붙잡고 "오늘 당신은 나와 같이 있으면서 당신의 신앙과 어찌하여 신자가 되었는가 에 대하여 이유를 말해줄 수 없는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헉슬레 와 변론할 능력이 없다고 대답하자 "어떤 변론이 아니라 이 예수가 당신에게 신앙과 어찌하여 신자가 되었는가에 대하여 이유를 말해줄 수 없는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헉슬레와 변론할 능력이 없다고 대답 하자 "어떤 변론이 아니라 이 예수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는 단순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신앙의 경험을 얘기하자 헉슬레는 자기도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면 참 행복하겠다고 눈물 흘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변론이 아니라 예수께 대한 단순한 경험담이었 습니다. 제일 좋은 변론은 "와 보라" 입니다.
3. 주님의 통찰 주님은 나다나엘이 자기를 찾아 왔을 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전도자 가 그렇게도 자신있게 '와 보라'라고 말하는 이유는, 예리한 통찰력으 로 위대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화과나무는 평화의 상징이기에 자기 집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밑에서 평안히 지나는 것이 평화의 이상이 었습니다 (왕상 4:25,미4:4). 나다나엘은 자기 집 무화과나무 아래서 묵상하며 하나님의 택하신 자 가 오기를 기도했던 것인데,예수님은 그 사실까지도 아시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전력과,아니 그보다 그의 중심을 아시는데 나다나엘은 놀라 그의 판정에 압도당한 것입니다. 그는 이미 이렇게 독백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내 꿈을 아신다. 그는 나의 기도도 아신다. 그는 내 중심의 소원도 아신다. 그는 내 영 혼의 탄식을 아신다.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기름 부음을 받 은 자"라고 말합니다. 나다나엘은 그 중심을 아시고 마음을 만족시켜 주신 이에게 영원히 항복했습니다. 주님은 이보다 앞서 안드레가 데리고 온 베드로를 보시고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겉만이 아니라 속까지 자세히 응시하셨습니다. 베드로를 "게바"라 한 것은 베드로에게 갈릴리의 우직한 어부만 보신 것이 아니라 장차 그가 교회의 기초가 될 반석을 보신 것입니다. 주님 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생명을 내게 맡기면 네가 가진 가능성을 다 성취시켜 주리라"고 말입니다. 큰 대리석 덩어리를 막고 있는 미켈란젤로에게 어떤이가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대리석 속에 갇힌 천사를 놓아주려 하노라"라고 대 답하였습니다. 예술가로서의 통찰력과 더 높은 이상을 실현하려는 의 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예수는 우리 각 사람 속에 숨은 영을 보시고 해방해 주실 수 있습니다. 참으로 나의 앞길 나보다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고 계시며 나의 능 력을 분명히 보여 측정하시고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약 1:5).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여러분의 모든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킬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께 나아가는 자는 "주여,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서이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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