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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눅24: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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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다수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법은 없습니다.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발표할 때 "미친수학자"라고 비웃었고,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한다고 종교지판은 그 를 이단자라고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로우랜드 힐이 세계최초로 우표사용을 제 안했을때 수많은 사람들이 무모한 망상적 계획이라고 했고 뉴욕 YWCA 에서 여성 들에게 타자교육을 시키려할때 여성이 어떻게 그런일을 할 수 있느냐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옳았는가 하는것은 이젠 명백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할때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혔습니까 조롱했고, 비웃었으며 결국에는 그들을 미워하여 톱에켜서 죽이고 돌로쳐서 죽이 고 십자가에 거꾸로 메달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듯이 그들의 입을 막기위해 그들을 죽였지만 진리는 오늘날까지 살아서 부활의 진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소망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향것이며 예수님이 다시오시는 그날에 세상모든 사람앞에 명확히 증명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활의 진리가 흐르고 있건만 아직도 살아계신 주님,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은 아직도 어딘가에 죽은채 묻혀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을 자신의 종교라는 이름하에 덮어버리고 교리라는 이름하에 가둬버리고 자신의 교만과 합리화속에 숨겨버리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의 삶에 기쁨이 없고 능력이 결핍되어 있는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 습니까 과학자들이 우리속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빼앗아가지 않았습니까 또한 세상의 초등학문들, 우리의 귀를 즐겁게하는 세상이야기들에 대한 많은 소리를 듣고있습니다. 그 소리들이 우리에게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빼앗아가지나 않았습니까 이 세상의 허황된 분위기가 살아계신 주님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지는 않았습니 까 예수님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고 찬송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도 회색적이고 죽어버린 그리스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생각속에서만 맴도는 실재적으로 우리와 관계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빼앗겼습니다. 기도를 하고 부활이야기를 하고 예수님의 이름 으로 토론을 하면서도 우리는 예수님에게 눈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엠마오 로 가는 두 제자처럼.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대화하며 동행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물론 몇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해가 저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죽은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출현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부활체이셨기 때문에 생전의 예수님과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중요한 이유는 그 들의 신령한 눈이 밝아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6절 "-저희의 눈이 가리워졌 더라 " 그들의 대화는 구세주에 대한것, 메시야에 대한것, 십자가 죽음이야기, 또한 부 활에대한 이야기등이었지만 다시말하면 예수님에 대한 것들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과 대화 하면서도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이러한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고, 남에 게 가르치고 있고, 설교하고 있고 바로 부활에 대해 설교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부활의 주님과 관계없이 살아계신 주님과 관계없이 우리의 인생길을 실의와 슬픔 속에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다 알고 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대충 다 안다. 성경도 좀 읽었다. 설교 도 많이 들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 엠마오로 향해가는 제자들과 똑같은 상태속 에 젖어있을 수 있습니다. 엠마오 도상으로 가는 제자들이 살아나신 예수님을 죽어버린 예수님으로 과거의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죽어버린 예수님에 대한 애정은 가지고 있었듯이 우리도 생각속에 애정은 가지고 있지만 내 속에 살 아계신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우리는 이 사람이 이 스라엘을 구속할자라고 바랐노라"라고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 사람을 이스라엘의 구속자, 메시아로 바랐으나 지금 예수는 죽었다. 지금은 바랄 수 없게 되었다 이 이야기 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상태에 따라 여러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해가 이미 기울어져 석양의 시간에 서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 침에 솟아오르는 해같은 상태에 있는 신앙을 가진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첫사랑의 시간속에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사람은 노쇠한 신앙의 시간속에 서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항상 현재 진행형입니다. 신앙은 시 작이 있을 뿐이지 끝이 없습니다. 바라면 계속 바라야지 "바랐었다"가 있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진단해보면 지금의 자신의 신앙은 방학인지 휴학중인지 졸업해버 렸는지 동면에 들어갔는지, 석양인지, 아침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신앙을 회상하면서 추억속에서만 사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항상 현재이어야 합니다.
예) 마틴루터 = 종교개혁 때 힘든 시련을 받고 거의 재기 불능할 정도로 완전히 절망상태에 빠 져버린 때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적이 많고 박해가 심하고 또 악마가 좌절감을 주었습니다. 그럴 때 마틴루터의 부인이 상복을 입고 나오는것이었습니다. 누 가 죽었나 하고 물으니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라고 말하자 루터가 화를 내면 서 하나님이 왜 돌아가시느냐 그 분인이 하나님이 죽지 않았는데 왜 당신은 죽 은 사람처럼 절망을 하고 있습니까 라는 말에 도전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죽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베드로의 하나님, 바울의 하나님, 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믿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철학자의 하나님도, 신학자의 하나님도, 과거의 하나님 도, 부자만의 하나님도, 가난한 사람만의 하나님도, 권력자만의 하나님도 약한 민중만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 내속에서 이 상황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예) 어떤 목사님의 예화 = "그대의 눈동자 속에서 나를 찾을 때까지 나는 삶의 의미를 몰랐다" 나도 빨리 그랬으면. 이 사람은 사랑하는 여자의 눈동자 속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 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눈동자 속에서 삶의 의미를 순간마다 찾아야겠 고 자칫잘못하면 우리의 신앙이 과거의 신앙, 지식적인 신앙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참으로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오늘 부활절을 계기로 다시 체험하시며 살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 영국의 에드빌론 시에 유명한 예술품거리가 있답니다. 부활절을 몇일앞둔 어느날, 노신사 한분이 이 가게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을 아주 의미심장하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분은 어린시 절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장 성하여 사업에 손을 대고 너무 그의 삶이 바빴던 나머지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다가 문득 이 가게 앞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 시는 그 장면, 그리고 여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가슴을 치며 울고 있는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숙연히 어렸을 때의 신앙에대한 향수가 다시 되살아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거리를 지나가던 구두닦이 한 소년이 이 노신사 옆에 와서 말을 걸기 시작 합니다. " 아저씨. 저 그림이 뭔지 아세오 저기 십자가를 지고 있는 분이 예수님이세요 왜 죽으셨는지 아세요"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아니 아저씨 죄 때문에 그리고 제 죄때문에 돌아가셨어요" 구두닦이 수년이 내던지는 이 한마디 가 화살처럼 노신사의 가슴에 밖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애써 귀를 막으면서 거리를 나왔습니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생각난듯이 소년이 다시 좇아왔습니다. "아저씨, 깜밖잊어 버렸어요. 그 예수님은요 다시 사셨어요, 지금도 살아계세요" 이 살아계신 주님앞에서 그는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의 아침 그는 가까운 교회에 출석해서 다시 그의 신앙의 교제를 회복했다는 간증이 남아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살아계신 ) 을 만날때 절망속에 엠마오 두제자는 산소망을 얻었습니다. 실패와 낙망속에 있던 베드로가 능력의 종이 되었습니다. 공포속의 제자들이 평강을 얻었습니다. 박해자 사울이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축복가운데 하나는 이 험난하고 폭풍속을 항해하는 것과 같은 세상이지만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 직도 주님을 죽은자들 가운데서 찾고 계십니까 아니면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앞에 서계신 자비로운 살아계신 그분을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까 부활의 주님, 지금도 살아계셔서 내 마음문을 두드리고 계신 그분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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