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부활 신앙 (눅24,13-43)
본문
소식은 에나 지금이나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끝없는 <소망>과 <생명>을 불러 이르키는 <역사적 사실>이 되고 있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과학문명 속에서 인간의 개성마져 상실되고, 삶의 의미마져 잃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부활은 에나, 지금이나 <삶의 근거 와>, <신앙의 근거>와, <소망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에수께서 다시 부활 하셨다는 일에 대하여 반대하는 경향이 19세기 인간 이 성을 에찬했던 합리주의자들에게서 있었으나, 그러나, 그와같은 합리적 논리가 에수의 부활이 없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채 물거품 같이 살아지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핍박했던자들이 아무리 부활의 사건을 부인하려해도, 그것은 엄연한 현실의 사건이었기에 저들은 폭력과 무력으로 탄압했지만, 그러나, 이 부활의 사실을 증거하는 증거자들 앞에 두손들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여과도지 못한 이성을 가지고 신앙의 세게를 자기들의 제한된 이성의 범위에서 역사적 그리스도를 관념적 그리스도로, 그리고 육체적 그리스도의 부활 을 정신적 상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게속되고 있으나, 시대와 시간은 흐르나 십자가와 부활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사실 위에 선 진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시간 역사적 부활의 사실을 다시 논증할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초대교회의 제자들이 그랬드시 너무도 벅찬 감격이요, 너무도 당연한 귀결 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두뇌가 아무리 발달하고, 과학기술의 응용이 말 할 수 없이 거대한 힘으로 우리의 현실을 지배한다 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두뇌 에 따라 변하는 하나님이 아니요, 역사적 사실은 시간이 흐른다고 사실이 될 수 없다는 이유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6.25 전쟁을 자기들이 먼저 이르켜 놓고도, 지금껏 남한이 먼저 이르켰 다고 떠들어 대지만, 그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시간과함께 그 사실이 바꾸어질 수 없음 같이 에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도 그런것이기 때문입니다.
1. 오늘 우리의 걸음을 살펴보면, 2000년전 부활의 날에 에루살렘을 떠나 엠 마오로 향해가는 두 제자들 같이 <회의>와 <슬픔>과 <낙담>속에서 걸어가는 생인지도 모릅니다. 저녁 노을이 깃든 석양의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겉잡을 수 없는 허탈감 에서, 그리고 그들이 보고들은 간단없는 현실의 사건들 속에 대화를 나누며 내려 가는 두 제자의 모습에서 21세기의 문명의 몰락으로 기우려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것 같습니다. 오늘의 인간이 쌓아올린 물질문명은, 과거 로마의 창검같이 현대인의 마음속 에 크다란 위용으로 군림하는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빌라 도 법정에서 한마디 변명도 없이 골고다 언덕까지 무거운 형틀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은 오늘의 현대인들에게는 너무도 초라하게 보여질런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실망하고 돌아서는 젊은이들이 많은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걸음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걸음이 아닌가 얼핏보면, 신앙은 이렇게 현실 속에서 나약한 것 같이 보입니다. 골고다 언덕 으로 향하는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얼마나 그가 나약한 존재로 보였겠 습니까.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는 우리가운데 다시 살아 나시었습니다. 죽었던 자리에서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 나시었습니다. 실패와 조롱속에서 영광과 승리로 부활 하시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이 없었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 이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도께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그는 감격의 환호성을 발했습니다.
2. 여러분! 우리는 어짜피 죽음의 행렬에 서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석양을 보며 내려가는 길과 같이 언제가는 우리들 차례가 될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봅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 행렬에서 우리처럼 더 불쌍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문질문명은 제아무리 풍요한 사회, 번영한 사회를 이룩했다고 해도, 죽음의 행렬에 끼어있는 나를 건져낼 힘은 없습니다. 응당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야 할 과학이 도리어 생명을 노리는 전쟁 의 무기로 이용되고 있는 사실을 여러분 어떻게 보십니까 한반도에 아직도 전쟁의 공포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몇개의 폭탄이 한 꺼번에 쌓아올렸던 문명세계를 페허와 시킬 위협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부 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해서 만들어진 병기가, 인간을 살륙하려는데 쓰여지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이 인간생명을 보호, 연장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지만, 이처럼 한 편에서는 한꺼번에 인류를 멸절시킬 무기를 만들어 놓고 있으니이것이 어찌 슬픈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오늘의 기계문명은 우리의 마음마져 뺏어 갔습니다. 20세기의 기계문명은 공장만 기계화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것, 심 지어는 인간까지도 기계화 해 버렸습니다.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 계가, 결국은 그것이 사람을 부리게 되었고, 사람을 판단케 되었고, 그 기계 앞에 시간과 마음을 그리고 모든것을 빼았겼습니다. 그러기에 정신적 고아들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사랑과 봉사와 희생은 자취를 감추고 단지 이 불안을 잊기위한 찬라적인 쾌락추 구만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가누어 갈 삶의 기초를 잃은 현대인들은 이제 갈곳이 없어졌습니다. 갈곳은 낙심속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 처럼 엠마오 도상의 길 뿐입니다. 미래가 없고, 소망도없고, 감격도 없는, 오직 현실의 불안과 슬픔뿐, 그러기에 이순간도 향락추구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있는 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살려고 내려가는 길이었으나, 그 길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이런 슬픔 속에 있는 인간에게 그리스도는 오늘도 새 소망으로 찾아 오십니다.
3. 그러면 오늘 이 현실속에 있는 우리에게 부활신앙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것입니까 옛날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갖었던 부활신앙과 과연 달라야 할 것인가 2000년전 초대교회의 부활 신앙과 오늘의 있어서 부활신앙의 의미과 내용이 달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시대적 변천, 시간의 흐름은 비교할 수 없이 달라졌지만, 죽음, 그 자체 가 변하지 않고 엄연히 우리의 현실로 존재한다면, 부활 신앙도 엄연히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나, 오늘 우리에게서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꼭 같은 하나님이 요, 꼭 같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변한것은 시간의 흐름이요, 인간의 마음이 지, 그리스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의 인간과, 그 문명의 모습이 달라졌을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달라지지 아니 했습니다. 이제 슬픔에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의 슬픔 마음에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낙심속에 실망가운데 세상을 향해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그 주님이 지금 불안한 현실 속에서 부활의 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병고의 시달리는 육체속에 부활과 생명의 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저 북방의 먹구름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동포들에게 참 자유와 소망의 주님 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현실이 제아무리 어둡게 보이고, 제아무리 미래를 볼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라도,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부활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초자연적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각의 경험의 세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와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신앙의 능력입니다. 부활 신앙은 이 세상의 죽음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한낮 윤리적 도덕적 교훈은 될 지언정 영생의 종교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살아날 영생을 얻을 구원의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이야 말로 부활신아에서 꽃이 피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 버린다면, 기독교는 아무런 쓸모없는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부활은 만들어놓은 신화나 꾸민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입니다. 온갖 적 그리스도의 세력들이 이 부활의 사실을 음페하려고 제아무 리 노력했지만, 역사적 사실을 뒤집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고,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오늘 우리의 걸음을 살펴보면, 2000년전 부활의 날에 에루살렘을 떠나 엠 마오로 향해가는 두 제자들 같이 <회의>와 <슬픔>과 <낙담>속에서 걸어가는 생인지도 모릅니다. 저녁 노을이 깃든 석양의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겉잡을 수 없는 허탈감 에서, 그리고 그들이 보고들은 간단없는 현실의 사건들 속에 대화를 나누며 내려 가는 두 제자의 모습에서 21세기의 문명의 몰락으로 기우려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것 같습니다. 오늘의 인간이 쌓아올린 물질문명은, 과거 로마의 창검같이 현대인의 마음속 에 크다란 위용으로 군림하는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빌라 도 법정에서 한마디 변명도 없이 골고다 언덕까지 무거운 형틀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은 오늘의 현대인들에게는 너무도 초라하게 보여질런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실망하고 돌아서는 젊은이들이 많은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걸음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걸음이 아닌가 얼핏보면, 신앙은 이렇게 현실 속에서 나약한 것 같이 보입니다. 골고다 언덕 으로 향하는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얼마나 그가 나약한 존재로 보였겠 습니까.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는 우리가운데 다시 살아 나시었습니다. 죽었던 자리에서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 나시었습니다. 실패와 조롱속에서 영광과 승리로 부활 하시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이 없었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 이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도께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그는 감격의 환호성을 발했습니다.
2. 여러분! 우리는 어짜피 죽음의 행렬에 서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석양을 보며 내려가는 길과 같이 언제가는 우리들 차례가 될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봅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 행렬에서 우리처럼 더 불쌍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문질문명은 제아무리 풍요한 사회, 번영한 사회를 이룩했다고 해도, 죽음의 행렬에 끼어있는 나를 건져낼 힘은 없습니다. 응당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야 할 과학이 도리어 생명을 노리는 전쟁 의 무기로 이용되고 있는 사실을 여러분 어떻게 보십니까 한반도에 아직도 전쟁의 공포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몇개의 폭탄이 한 꺼번에 쌓아올렸던 문명세계를 페허와 시킬 위협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부 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해서 만들어진 병기가, 인간을 살륙하려는데 쓰여지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이 인간생명을 보호, 연장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지만, 이처럼 한 편에서는 한꺼번에 인류를 멸절시킬 무기를 만들어 놓고 있으니이것이 어찌 슬픈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오늘의 기계문명은 우리의 마음마져 뺏어 갔습니다. 20세기의 기계문명은 공장만 기계화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것, 심 지어는 인간까지도 기계화 해 버렸습니다.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 계가, 결국은 그것이 사람을 부리게 되었고, 사람을 판단케 되었고, 그 기계 앞에 시간과 마음을 그리고 모든것을 빼았겼습니다. 그러기에 정신적 고아들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사랑과 봉사와 희생은 자취를 감추고 단지 이 불안을 잊기위한 찬라적인 쾌락추 구만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가누어 갈 삶의 기초를 잃은 현대인들은 이제 갈곳이 없어졌습니다. 갈곳은 낙심속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 처럼 엠마오 도상의 길 뿐입니다. 미래가 없고, 소망도없고, 감격도 없는, 오직 현실의 불안과 슬픔뿐, 그러기에 이순간도 향락추구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있는 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살려고 내려가는 길이었으나, 그 길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이런 슬픔 속에 있는 인간에게 그리스도는 오늘도 새 소망으로 찾아 오십니다.
3. 그러면 오늘 이 현실속에 있는 우리에게 부활신앙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것입니까 옛날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갖었던 부활신앙과 과연 달라야 할 것인가 2000년전 초대교회의 부활 신앙과 오늘의 있어서 부활신앙의 의미과 내용이 달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시대적 변천, 시간의 흐름은 비교할 수 없이 달라졌지만, 죽음, 그 자체 가 변하지 않고 엄연히 우리의 현실로 존재한다면, 부활 신앙도 엄연히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나, 오늘 우리에게서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꼭 같은 하나님이 요, 꼭 같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변한것은 시간의 흐름이요, 인간의 마음이 지, 그리스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의 인간과, 그 문명의 모습이 달라졌을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달라지지 아니 했습니다. 이제 슬픔에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의 슬픔 마음에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낙심속에 실망가운데 세상을 향해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그 주님이 지금 불안한 현실 속에서 부활의 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병고의 시달리는 육체속에 부활과 생명의 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저 북방의 먹구름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동포들에게 참 자유와 소망의 주님 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현실이 제아무리 어둡게 보이고, 제아무리 미래를 볼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라도,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부활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초자연적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각의 경험의 세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와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신앙의 능력입니다. 부활 신앙은 이 세상의 죽음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한낮 윤리적 도덕적 교훈은 될 지언정 영생의 종교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살아날 영생을 얻을 구원의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이야 말로 부활신아에서 꽃이 피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 버린다면, 기독교는 아무런 쓸모없는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부활은 만들어놓은 신화나 꾸민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입니다. 온갖 적 그리스도의 세력들이 이 부활의 사실을 음페하려고 제아무 리 노력했지만, 역사적 사실을 뒤집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고,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