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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너희는 하늘만 쳐다보고 (눅21:25-36,행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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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지난 주간만큼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서 큰 관심을 끌 었고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적은 제가 기억하기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휴거로 온 언론이 야단 법석이었지요. 다미선교회에 속해 있다는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몇년 전부터 휴거를 말하기 시작 하였는데 그것이 최근에 와서 전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침내 정치계에 까지 문제가 되어 몇일전 국 회에서는 이 휴거문제로 총리를 국회에 나오게 하여 질문과 추궁 을 했습니다. 국회는 총리로부터 앞으로 사이비종교는 엄중히 법 으로 다스리겠다는 대답을 받아냈습니다. 휴거를 예언했던 지도자들은 10월 28일날 밤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실망하 거나 놀라지는 않았겠지만 그 예언을 믿고 "천국에서 만납시다" 라고 마지막 인사까지 하고 그날 밤에 흰 옷을 입고 그들의 교회 에 가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면서 들리워 올라가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정말 실망감, 수치심, 그리고 배신감을 주체할 수 없었 을 것입니다. 휴거는 말하자면 처음부터 사기극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 을 꾸몄던 사람들의 의도는 분명히 따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것은 그 예언으로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그들의 이름을 날 리고 크게 치부하자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목적을 달 성하는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온 세상을 시끄럽게 했고 이름을 날렸고 큰 돈도 벌었습니다. 교회돈을 30억원이나 가로챈 혐의로 수갑을 차게 된 것은 본래 계획에 없었던 불행한 일이고 크게 빗 나간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본래 그들의 목적에서 보나 현대사회의 성공 기준으로 보나 그들은 크게 성공을 거두었 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 며칠동안에신문 방송들이 계속 휴거에 대한 해설와 함께 보도를 상세히 했기 때문에 새삼 이 문제를 제가 다시 말할 필요 를 느끼지 않습니눼 이 땅의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일반국민 들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번 이 휴거사건은 오늘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취약성과 '질병'을 여실히 폭로시킨 사건 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는 이번 휴거사건은 그나름대로 우리 사회에 적지않은 공헌까지도 하였다고 보여집니다. 만일 이 땅의 기독교가 건전하다면 휴거 예언 같은 것은 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건전하다면 휴거론 이 사회적으로 센세이션은 커녕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할 뿐더러 아예 그런 사기극이 일어날 수도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번에 휴거문제로 우리 사회가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게 된 것은 결국 우리 한국교회는 물론 우리 사회가 크게 병들어 있다는 사 실을 증명한 셈입니다. 휴거헤프닝이 알려준 우리 사회와 교회의 병리현상은 무엇입 니까 우선 우리 사회는 시한부종말론이 무성할 수 있는 사회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휴거의 피해자들은 모두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이들은 돈있고 권력있는 지배세력에 의해 정치적, 경제적으로 억압과 착취를 받고 있던 피해자들로 또 다른 종교적 사기의 피해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 땅의 민중들이 이중 삼중으 로 억압을 당하고 피해를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휴 건 사건은 이 땅에 사회정의가 실현 되어 있지 않으며, 그러기 때문에 가난한 민중들이 이런 혹세무민하는 황당한 사이비 종교 에 속아넘어가서 어려움을 당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휴거같은 사이비종교가 생산될 수 밖에 없는 온상이 라는 사실을 이번 사건이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이비 종교를 법으로 엄격히 단속하겠다고 총리가 약속을 했습니다만 그의 약속은 별의미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이비종교가 생 겨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을 바꾸기 전에는 어떤 법적 대응 노력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한국교회는 휴거를 생산해 내는 공장과 같다고 봅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보면 한국기독교인들은 거의가 잠재적, 잠정적 휴거신봉자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휴거예 언에 휩쓸린 사람들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신앙, 즉 나만 천당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그것은 일반 기독교인 들의 생각과 별로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이들이 한결같이 가정 을 버리고 학교와 직장을 포기하고 교회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휴 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반가정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반세상적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관심하고 아예 사회로부터 철수해버린 것인데 이것은 아주 무책임한 행동일 뿐 아니라 비기독교적이라 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수 교단의 지도자들이 이들 휴거 론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서 제가 새삼 생각하게 되는 것은 보수주의적 성향을 띈 한국의 기독교인들과 휴거론자들간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들 양자들 사 이에 신학적으로나 신앙의 태도에 있어서 별로 차이를 찾기가 어 려운 데도 그들은 휴거론자들을 사이비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휴거론 비판자들의 설교와 신학적 주장 을 살펴보면 그들이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이 양자는 모두 탈정치적, 반사회적인 극단적 개인구원의 멧세지를 선포하고 있는 점에서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보 입니다. 종말과 재림에 대한 잘못된 이해 역사 이 양자가 모두 같이 가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번 휴거사건은 기독교란 종교가 과연 하늘만 쳐다 보는 종 교인가를 다시 묻게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이 승 천하실 때 그의 제자들이 모여 서서 그가 들리워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구름 속에 들어가고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그들은 계속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 흰옷을 입은 천사 두 분이 나타나서 이들에게 한 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 보고 있느냐" 이 말은 우리 한국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와 세계에서 책임있는 사람으 로 살지 않는 것이 우리 한국기독교인의 큰 문제입니다. 이 세상 에 살면서 어떻게 빛과 소금으로 살 것이냐는 문제를 매우 등한 시 하는 것이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성서에 예수님의 재림도 있고 종말사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이해해야 하고 부분적으로, 또는 문자적으로 단순 하게 이해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러한 이해는 잘못된 이해이고 성서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종말론을 믿습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말론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역사관입니다. 역빴 부정하거나 등한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 입니다. 재림에 대한 잘못된 이해 역시 문제입니다. 재림은 파루시아 (Parousia)란 희랍어의 번역인데 이 말에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는 것" 또는 "도착하는 것"이란 뜻이고, 다른 하 나는 "임재,옆에 있는 것,함께 있는 것"(1) 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기독교는 이 파루시아란 말은 다시온다는 뜻만을 채택하는 재림이란 말로 번역하였고 이렇게만 이해해 온 것이 큰 문제입니다. 파루시아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 하여 칼 바르트란 신학자는 세가지 형태를 말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부활, 두째는 성령님의 강림, 세째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의미한다고 풀이하였습니다.
(2) 성서에는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두 가지 다른 전통이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종말 대망의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종말의 현재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재림의 중 요한 부분은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는가가 아니라 지금 임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끝날 까f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계속적으로 이 지상에 계신 다는 뜻이 아닙니까 누가도 예수님의 재림을 그의 현재적 재 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누가는 예수 의 봉사와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정신이 다시 나타남을 재림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누가17:21). 틸리히(Tillich) 같은 신학자는 이 재림은 두가지 기능을 가 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하나는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것, 즉 인간역사에는 예수님을 능가할 수 있는 존재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특별한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능가하는 어떤 다른 존재가 인간의 역사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것, 그러 니까 예수보다 더 뛰어난 사람, 더 초월f적인 어떤 존재를 기대하 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재림의 상징의 다른 기능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의 상황을 특별한 긴장의 상황으로 이해하고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영꼰령양 예수는 메시야 일 수 없으므로 메 시야가 올 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에 대한 기독교 적인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주장은 메시야는 바로 나사 렛사람 예수에게서 출현한 것이고
그러므로 악마적인 권세는 이 제 원칙적으로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새로운 존재의 담지자로 그리고 그 자신이 새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제 낡은 시대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미 정복 되고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이미 왔지만 그f의 재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메시야관과 역사관은 우리를 "이미"와 "아직"이란 시 간 사이에서 살게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종 말은 이미 시작이 되었다는 것, 그러나 종말은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긴장 가운데 살게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개인의 생에서나 세계에의 역사적 삶에 있어서 나 이러한 긴장 속에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3).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오늘이란 의미는 매우 독특합니다. 오늘은 나의 일생의 마지막날이라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나의 남은 여생의 첫날이라는 양면을 지닙니다. 이것은 하필 개인의 삶에서만 그런 것이 아 니라 역사에서도, 집단적 삶에서도 마찬 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예배후에 공동의회에서 장로를 선출하게 되는 데 어떤 사람을 장로로 선출할 것이냐는 문제로 여러분이 그동안 많이 생각하고 기도도 하신줄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오늘 어떤 영 을 장로로 선출할 것입니까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장로 로 적격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제가 말씀드린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3장에서 장로의 자격을 규정하고있습니다. 거기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감독은 탓할 데가 없는 사람이어야 하고. 자제력이 있고 신중하고 품위가 있어야 하고 남을 후하게 대접할 줄 알며 남을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술을 즐기지 않으며 난 폭하지않고 온순하며 남과 다투지 않고 돈에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또한 자f 가정을 잘 다스릴 줄 알고.교회 밖의 사람들 에게도 좋은 평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기 말을 요약한다면, 훌륭한 인격과 인품을 가진 사람, 지 도력이 있 사람, 책임있는 가정인,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휴거를 신봉하는 사람은 자격이 없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조건입니다. 우리는 이 조건 을 등한시 하기 쉽습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될려면 어떻게 살아야f 하겠습니까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으려면 사회를 긍정하고 사회에 적극적으로 살고 공헌해야 해 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에서 빛 소 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사회와 세상에 대하여 부정적이거나 사회적, 정치 적 참여를 하지 않는다면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휴거를 믿는 사람들은 가정을 버리고 직장을 버리고 오로지 휴거만을 기다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에만 전념하는 사람 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장로의 자격은 물론 그리스도인의 자격도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가정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긍 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장로는 더욱f 이러한 삶을 모범적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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