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기도 (눅18:9-14)
본문
카르타고의 그 유명한 장군 한니발은 외눈박이였습니다. 어느날 화가 에게 자기의 초상화를 그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화가는 한니발장군의 모습 그대로 꾸밈없이 그려왔고 한니발은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추한 얼굴로 그려왔느냐며 대노하면서 죽었습니다. 한니발은 다른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려오도록 했더니 이 사람은 한 눈을 더 만들어 가지 고 왔습니다. 한니발 장권은 초상화를 보더니만 '내 눈이 하나밖에 없는데 어찌 더 만들어서 가져왔느냐'며 이 사람도 죽이고 다른 화가에 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오도록 했습니다. 이 화가는 깊이 생각하더니 만 장군의 얼굴을 옆에서 본 모습으로 그려가지고 왔습니다. 한니발은 자기 초상화를 보고 매우 기뻐했고 또 그 화가에게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화가의 친구들이 '자네는 어떻게 해서 살아오게 되었느냐' 물었 더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옆에서 한 눈이 안 보이게 그려다 드렸다 네'라고 했답니다. 사람의 행복과 불행의 문제는 어느 시각 어느 면에서 느끼고 보느냐 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생활이 여유있지 않지만 웃으며 행복하게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이 풍족한 환경속에 있으면서도 늘 불평하며 행복을 잃고 사는 이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 으며 또한 어떤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은혜와 감사가 나오기도 하고 원망과 불평이 산출되기도 합니다. 이는 곧 한 마디로 어떠한 자세와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많은 돈과 권세와 명예를 다 가지고 있다해도 내 속의 관심이 다른 곳에 있다면 그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관심은 오직 '의' 에 있습니다. 과거에 내가 못된 짓을 해 많은 재산을 모으고 명예와 권세를 누리고 살 수 있게 됐다한들 오늘 갑자기 내가 임종을 맞게 됐다면 그 좋은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남을 울게하면서 살아온 지난 날을 기억하면 한없는 후회로 두려워할 것입니다.
의롭지 못하게 살았다면 존재를 상실하는 아픔으로 울게 될 것이고 또한 괴로움과 번민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돼지가 되어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는 사람이 되어 고통을 느끼고 싶다'라고 말했는가 봅니다. 사람은 의.식.주가 풍부하다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의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의'는 세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 스스로 세운 의가 있습니다.자기가 생각하기에 이 일은 옳 은 일이요 잘하는 일이다면서 스스로 세우는 의가 있습니다. 비교하는 의가 있습니다. 저 사람보다는 내가 낫고 저 사람보다는 내 가 훌륭하다는 생각으로 다른 이와 비교하면서 의를 세우는 이가 있습니다. 일종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을 보면서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 이다라고 생각하는 부류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좋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길 원하며 내부보다는 외모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가 있습니다.나는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인 정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데 문제가 있고 또 하나는 내가 나를 인정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다 나를 인정해 주는데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왕상 22장에 보면 아합왕과 여호사밧왕이 전쟁하러 가기전에 선지달 을 불러서 싸움의 결과가 어떠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시드기야를 비 롯한 모든 사람들은 승리한다고 할 때 오직 한 사람 미가야는 아니라 고 했습니다. 이일로 그는 많은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말을 들 으셨고 또 그의 말대로 전쟁에서 패하고야 말았습니다. 엘리야도 예레미야도 외로운 길을 걸어갔지만 하나님이 인정해 주셨 기에 웃으며 순교의 길을 걸어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의 마음은 평안했고 또한 세상에 두려운게 없었습니다. 본문에 예배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경배, 만나는 것, 자신을 함께 보여드리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릴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 본연의 위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이 두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과 자기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차이점을 발견한다면 바 리새인은 자기이 거룩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기도하며 십일조를 하며 저 세리와는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오며 내 놓을 것 없는 불쌍한 자입니다'고 눈물로 부르짖고 있 었습니다. 결국 그는 의롭다함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성전문을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배의 궁극적 관심은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또 하나님께 의 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름없는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흡족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데는 다음 과 같은 세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나는 토색도 안했고 나는 불의나 간음도 안했으며 나는 이레 에 두번씩 금식하며 나는 십일조를 드립니다'며 '나는 나는' 하며 자 기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이라든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의 허물을 생각하며 자기도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좋은 사람임을 드러내고 있는 교만한 자세였습니다. 내가 남보다 더 의롭고 남보다 더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 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는데 이사야서 30장 25절에 보면 망대라고 하는 교만이 무너질 때에 고산에서는 샘이 터지고 준령과 개울에서는 시냇물이 흐르는 복을 주 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가 될 뿐입니다. 자 신을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구분할 때에 우상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모순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이 사람은 토색,불의, 간음자이지만 나는 저 사람처럼 살지 않 고 이렇게 깨끗하게 살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라며 교만한 기도를 드 리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금식을 일주일에 한번 하지만 나는 두번 씩 합니다며 외적인 자랑을 하고 있는데 외적인 자랑의 내부는 회칠한 무덤처럼 아름답지 못한게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명함을 주기에 받아보니 업적이 너무나 많았는데 내용에는 무슨 회장직이 3개에다가 수십가지 자기자랑이 나열돼 읽기도 불편 할 정도였습니다. 받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명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하라하 셨고 금식할 때에는 남이 모르도록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하라셨음이 생각납니다. 보편적으로 말이 많은 사람 속이 덜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옛말에 빈 달구지 소리 많다하고 빈 항아리일수록 깨지는 소리 많다하고 빈 항아 리일수록 깨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짐을 가득 실은 달구지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본문에 세리는 말이 없고 '그저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며 가슴치며 울고만 있을 뿐입니다.그는 옆에 누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만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폴란드가 낳은 수학자요 천문학자며 저술가인 코페르니쿠스는 온세상 사람이 다 천동설을 주장할 때 그만은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는교 황청으로부터 책벌과 함께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끝까지 하나님 앞에 양심을 따라 지동가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임종때 묘비에 무슨 글을 써주길 원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주님 저는 베드로에게 베푸신 친절이나 바울에게 내려주신 은혜를 원 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베푸신 그 자비만을 주 시옵소서'라고 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마다 뒤돌아 보니다 죄 뿐이니 나에게도 강도에게 베푸신 자비를 허락하시옵소서 해야할 것입니다. 본디 주님을 만난 자는 말이 적다고 합니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아무런 말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오기는 했는데 그 마음 은 예배드리지 못하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께 예배드리는 시간만큼은 거짓없이 적나라한 모습으로 솔직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 받고 의롭 다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받고 돌아가는 자의 발걸음에는 은헤와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게 넘칠 것입니다. '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라'
의롭지 못하게 살았다면 존재를 상실하는 아픔으로 울게 될 것이고 또한 괴로움과 번민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돼지가 되어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는 사람이 되어 고통을 느끼고 싶다'라고 말했는가 봅니다. 사람은 의.식.주가 풍부하다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의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의'는 세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 스스로 세운 의가 있습니다.자기가 생각하기에 이 일은 옳 은 일이요 잘하는 일이다면서 스스로 세우는 의가 있습니다. 비교하는 의가 있습니다. 저 사람보다는 내가 낫고 저 사람보다는 내 가 훌륭하다는 생각으로 다른 이와 비교하면서 의를 세우는 이가 있습니다. 일종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을 보면서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 이다라고 생각하는 부류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좋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길 원하며 내부보다는 외모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가 있습니다.나는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인 정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데 문제가 있고 또 하나는 내가 나를 인정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다 나를 인정해 주는데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왕상 22장에 보면 아합왕과 여호사밧왕이 전쟁하러 가기전에 선지달 을 불러서 싸움의 결과가 어떠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시드기야를 비 롯한 모든 사람들은 승리한다고 할 때 오직 한 사람 미가야는 아니라 고 했습니다. 이일로 그는 많은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말을 들 으셨고 또 그의 말대로 전쟁에서 패하고야 말았습니다. 엘리야도 예레미야도 외로운 길을 걸어갔지만 하나님이 인정해 주셨 기에 웃으며 순교의 길을 걸어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의 마음은 평안했고 또한 세상에 두려운게 없었습니다. 본문에 예배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경배, 만나는 것, 자신을 함께 보여드리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릴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 본연의 위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이 두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과 자기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차이점을 발견한다면 바 리새인은 자기이 거룩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기도하며 십일조를 하며 저 세리와는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오며 내 놓을 것 없는 불쌍한 자입니다'고 눈물로 부르짖고 있 었습니다. 결국 그는 의롭다함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성전문을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배의 궁극적 관심은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또 하나님께 의 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름없는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흡족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데는 다음 과 같은 세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나는 토색도 안했고 나는 불의나 간음도 안했으며 나는 이레 에 두번씩 금식하며 나는 십일조를 드립니다'며 '나는 나는' 하며 자 기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이라든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의 허물을 생각하며 자기도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좋은 사람임을 드러내고 있는 교만한 자세였습니다. 내가 남보다 더 의롭고 남보다 더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 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는데 이사야서 30장 25절에 보면 망대라고 하는 교만이 무너질 때에 고산에서는 샘이 터지고 준령과 개울에서는 시냇물이 흐르는 복을 주 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가 될 뿐입니다. 자 신을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구분할 때에 우상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모순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이 사람은 토색,불의, 간음자이지만 나는 저 사람처럼 살지 않 고 이렇게 깨끗하게 살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라며 교만한 기도를 드 리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금식을 일주일에 한번 하지만 나는 두번 씩 합니다며 외적인 자랑을 하고 있는데 외적인 자랑의 내부는 회칠한 무덤처럼 아름답지 못한게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명함을 주기에 받아보니 업적이 너무나 많았는데 내용에는 무슨 회장직이 3개에다가 수십가지 자기자랑이 나열돼 읽기도 불편 할 정도였습니다. 받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명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하라하 셨고 금식할 때에는 남이 모르도록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하라셨음이 생각납니다. 보편적으로 말이 많은 사람 속이 덜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옛말에 빈 달구지 소리 많다하고 빈 항아리일수록 깨지는 소리 많다하고 빈 항아 리일수록 깨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짐을 가득 실은 달구지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본문에 세리는 말이 없고 '그저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며 가슴치며 울고만 있을 뿐입니다.그는 옆에 누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만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폴란드가 낳은 수학자요 천문학자며 저술가인 코페르니쿠스는 온세상 사람이 다 천동설을 주장할 때 그만은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는교 황청으로부터 책벌과 함께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끝까지 하나님 앞에 양심을 따라 지동가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임종때 묘비에 무슨 글을 써주길 원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주님 저는 베드로에게 베푸신 친절이나 바울에게 내려주신 은혜를 원 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베푸신 그 자비만을 주 시옵소서'라고 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마다 뒤돌아 보니다 죄 뿐이니 나에게도 강도에게 베푸신 자비를 허락하시옵소서 해야할 것입니다. 본디 주님을 만난 자는 말이 적다고 합니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아무런 말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오기는 했는데 그 마음 은 예배드리지 못하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께 예배드리는 시간만큼은 거짓없이 적나라한 모습으로 솔직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 받고 의롭 다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받고 돌아가는 자의 발걸음에는 은헤와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게 넘칠 것입니다. '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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