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한 분만 영화롭게 기쁘시게 하자 (눅16:19-31)
본문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 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 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 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 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 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 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 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 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 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홍포 입은 부자뿐만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를 화려하게 꾸미는 일, 명예로 나 지위로나 부요함으로나 권세를 가지고 써든지 또 무슨 아름다운 도덕적인 행위를 통해서든지 또는 무슨 학위를 얻는다든지 또 무슨 좋은 재능을 계발해서든지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요한계시록 18장 7절에 말씀하시기를 "그가 어 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게 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주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는 "죄악이 하늘 에까지 가득차리라" 말씀하셨는데 그게 무슨 죄악인고 하니까 자기 를 아름답게 장식하며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이 두가지 죄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도 받았고 또 하늘나라를 소망하기 때문에 날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영화롭게 할까 이것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이런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비유로 말한다고 하면 자기가 좋은 자색옷을 만들고 또 고 운 베옷을 만들어 입을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에게 자색 옷을 만들 어 입히시고 또 아름다운 이 베옷을 지어서 주님을 입혀 영화롭게 해야 되겠습니다. 자기의 시간이나 소유나 재능이나 자기의 모든 힘 을 다 바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을 아름답게 또 영화롭게 주 님께 자색 옷을 지어 입혀 드리도록 이렇게 우리가 힘을 써야 되겠 습니다. 우리 장로교회에서 대소요리문답이라고 하는 교리 문답이 있는데 그중에 소요리 문답 제일 일문이 무엇인고 하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 워 하는 것이니라.' 성경에 여기 누가복음 16에도 말씀하시고 또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 인생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을 아주 간결하게 잘 표현한 교리입니다. 사람 의 제일되는 목적은 자, 누구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또 그리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 하나님을 자기 기쁨으로 삼고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받아서 자기 양식으로 자기의 힘으로 삼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주님으로 더불어 잔치하는 이런 생활하는 것이 믿는 성도들의 삶의 목적이고 또 사는 방식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예를 들면 우리 주님의 사랑을 하나 나타내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 일생을 다 바쳐야 되 겠고 또 주님의 진실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일생을 노력하 고 애써야 되겠고 또 주님의 그 약속하신 약속의 신실하심을 나타내 고 증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을 믿고 신실한 그런 생활을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우리를 보고 우리를 칭찬하는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하 심을 알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주님의 그 속성 하나하나, 주님의 성품 하나하나,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 주님의 하시는 그 모든 은혜 역사 하나 하나 를 우리가 잘 드러내어서 그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나타내어서 주님 에게 영광을 돌리는 이런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 못한다고 할지라도 일생동안 주님의 한 면이라도 주님 의 아름다운 한 성품이라도 우리가 드러내어서 '예수님은 이런 분이 시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깨닫게 되어서 놀라고 감격해서 이 렇게 냉정하고 쓸쓸하고 사막같은 세상에서 독사와 이리가 들끓는 이런 곳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나타내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 향기를 맡고 흐뭇해 하도록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고 삶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주님에게 아름다운 옷을 지어 입혀 드려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우입니다. 우리가 사실 무슨 좋은 옷을 지어서 주님 앞에 두리고 또 주님을 입혀 두리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이 본래 가지고 계신 그 영광이 우리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눈이 어두 워지고 또 죄악 세상이 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영광이 가리어져 있는 것인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아니하고 드러내 도록 하기만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본래 우리 주님은 영광이 없으신 분이신데 우리가 들어가지고 주 님을 사랑의 주님으로 만들고 진실하신 주님으로 만들고 거룩하고 의로우신 주님으로 만들고 또 주님이 우리에게 각양의 은사와 복을 주시는 그런 복되신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미안하지만 아닙니다. 만약 그리 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사람들이 이렇게 저 렇게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분을 상종해 가지고 이런 분은 이럴 것이 다 저럴 것이다 이렇게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다 가상이고 실제가 아 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본래적으로 참 피조물과는 구별 되는 거룩하심과 피조물을 창조하고 보관 유지시키시는 그런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본래의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짓고난 다음에 우리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를 못하는 것이고 또 이 죄악 세상이 더러워지고 악해져 가지고 여기에서는 죄짓는 사람이 왕입니다. 무슨 시비를 하 고 주장을 해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주먹 센 사람이 존경을 받 고 악을 더 행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이렇게 '아, 참 특별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는 것이 더 악하다 이겁니다. 이렇게 죄악 세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빛이 비치기는 비 치지만 이 세상이 어두워서 그 빛을 영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아름답게 하고 주님에게 아름다운 옷을 지어 드려서 주님의 아름다운 그 빛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사실은 주님이 본래 가지신 그 영광을 내가 가리우지 아니하고 드러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면으로 말하면 '내가 힘써서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래 말을 하지만 사실은 주님이 가지신 그 영광 가리워진 것을 내 가 하나씩 하나씩 꺼풀을 벗겨서 그 본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래서 세상에서도 예수 믿는 한 사람이 있어가지고 참 주님을 증 거하고 또 주님의 말씀대로 믿어서 순종해 살아가지고 그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때에 사람들은 그 영광을 보고 놀래고 두려워하고 또 그 주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서 흐뭇해하고 이 죄악 세상가운데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하늘나라도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주님의 영광이 하나 하나 드러날 때에는 모든 사람들과 만물들이 다 놀라고 기뻐하고 즐거워 하되 영원한 만족과 기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가리던 것을 드러내려고 하면 어떤 때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내가 희생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고 또 손해도 볼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생명까지 다 내놓아야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 드 려서 그 영광을 드러내도록 이렇게 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고운 베옷을 입었다 하는 말씀은 고운 베옷이라고 하는 것은, 자색 옷은 겉옷을 말하고 고운 베옷은 속옷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되 한 번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일매일 또 매사매사에 아주 작은 일 하나라도 '내가 이렇게 말하면 주님께 영광이 되어지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님을 이렇게 영화롭게 할 수가 있겠나, 내가 이 말 한마디 행동하나 잘못 하면 내가 욕 먹는 것은 괜찮지만 나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 나, 하나님이 그래 가르치더나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가' 이렇게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고 하면 이것이 우리의 허물이고 죄고 또 그것이 하늘나라에 가면 그야 말로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고 또 그 일 자체는 지옥 불에 가서 타 야될 그런 일이 될 것입니다. 이래서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하는 말씀으로 상징되는 것은 우리 가 드러나게 주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하는 그런 일도 할 뿐만 아 니라 남이 보지 못하는 그런 일도 그저 자기가 마음 속에 생각하는 것이나 남이 알지 못하는 작은 일이나 매사에 하나도 남김이 없이 어떻게든지 주님 한 분만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특별히 예수님이 요한복음 17장 1절 이하에 마지막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 그 기도가 있는데 그 기도를 보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 가지고 어떻게 살으 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아주 똑똑하게 찾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어떤 목적으로 살았는가 요한복음 17장 1절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 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사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러고 그 뒤에 쭉 계속 되어 있는 말씀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나타내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 하나 아버지가 어떻게 높고 위대하시며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시며 또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어떻게 은혜로우신 분이시고 아브라함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분이시고 그 약속을 어떻게 신실하게 이루신 분이시고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참되신가 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되 그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 그 하나님 아버 지의 아름다우심을 나타내는 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하신 일이 셨고 그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편으로는 빌립보 2장에 말씀하신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자기를 낮추시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높이 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까해서 예수님이 자기를 낮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되기까지 낮아지고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시고 영원히 인성을 벗지 아니하고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그런 낮아지심으로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나님 아버지 를 세상에 나타내고 세상에 증거하는 그 일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또 내가 이미 영광을 받았다 내가 이미 영광을 받고 또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를 높였습니다. 하나님의 그 아름다우심 하나님의 그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어서 사람들이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알고 발견해서 놀래고 감사하고 감격하고 참 하나님 아 버지를 믿고 바라보고 소망하는 가운데에서 구원을 얻게 하고 그래 가지고 또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이런 예수님의 삶이었답니다. 그 러니까 예수님은 조금도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자기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를 아니했습니다. 물론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 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는 말씀이 있지만 그거는 하나님 아버지 의 영광을 위해서 한 그런 기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여러분들 이 깊이 묵상하시고 또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이나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세상에 서 멸시 천대를 받으시고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이 없으시고 세상 에서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한 마디도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제물로 드려서 이 렇게 바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 기 위해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구주이시며 우리 삶의 모본이 되십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도 이제는 성경 말씀과 영감이 있고 우리 주님이 사신 이미 주님의 생애를 배웠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이 홍포 입은 부자처럼 자기를 아름답게 꾸미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그런 일을 우리가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한다고 하면 그렇게 살고난 결 과는 죽고난 뒤에 나타납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어떻게 사치하고 자기를 아름답게 했든지 그것 이 영원한 수치로 또 불가운데서 고통당하는 것으로, 거기에 가보니 까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을 자기의 종으로 부리고 자기 를 위해서 이렇게 부리고 살았지만 거기는 나사로를 거기에 가서도 부려 먹을 줄 알고 아버지여, 나사로를 보내가지고 내 혀 끝에 물 한 방울 이렇게 찍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했지만 아브라함이 거절했습니다. '아, 너 착각하고 있다. 너 오산하고 있다. 여기가 어딘데 여기가 세상인 줄 아나, 죄악 세상에서는 네가 네 마음대로 너를 높이고 이 래 살았지만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고 하늘나라다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자, 그러면 주님만 영화롭 게 하면 우리 자신은 어떻게 하고 그거는 염려하지 마십시고 성경 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에 동참한다 그랬고 우리 주님의 영광에 동참한다 그랬고 또 아버지의 영광에 동참을 한다"고 그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한 분 높이고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고 나타내는 그 일을 통해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자, 누구도 영광을 받겠습니 까 우리도 덩달아서 우리도 거기에 동참을 해 가지고 같이 영광을 받는 것이 우리가 받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아 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영화롭게 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주 되시고 주권 자 되심을 나타내는 것이 뭐 말로만, 물론 말로도 나타내야 되겠지만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다니엘이나 이런 성도들을 보면 그들의 행위 를 통해서 나타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 때에 하나님이 주권자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게 되고 '다니엘의 하나님을 찬송해라 아브라 함의 하나님을 찬송해라 요셉의 하나님을 찬송해라' 요셉이 하나님의 인도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영광을 세상에 드러냈었습니다. 우리가 보면 손양원 목사님이나 주기철 목사님 같은 그런 분들도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이렇게 새옷을 지어 입혀서 영 화스럽게 했는고 하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자 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해서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걸 세상 사람 들이 알고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신지 모릅니다. 참 이상하 지요 하기는 손양원 목사님이 했는데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럴 때에 그러면 손양원 목사님은 영광을 받지 못하겠느냐 하나님 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손양원 목사님도 거기에 동참을 해가지고 영광을 같이 받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영광은 그겁니다. 뭐 하나님이야 어찌 됐든지 간에 예수 믿는 사람이 원수를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모질박스럽게 원수를 갚습니다. 죽이고 또 죽이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아니해서 무덤까지 파 헤 치는, 만약 그런 일을 할지는 몰라도 자기는 기분이 좋을 지는 몰라 도 '네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가 그런 복수의 하나님이고 그 렇게 분을 풀지 못하는 그런 하나님이가' 하기는 내가 했는데 욕은 하나님이 먹는다 이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그것이 수치스러운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고 영원히 그런 행위는 지옥가서 불탈 행위가 될 수밖 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꾸미려고 하지 말고 주님을 영화롭게 주님을 이렇게 꾸며 드 릴려고 하면 자기는 거기에 동참해가지고 우리 주님이 영광을 받을 때 우리도 같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여기에 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또 두 번째는 홍포 입은 부자가 날마다 연락한다고 했습니다. 연락 한다는 말은 매일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즐겁게 잔치한다는 말인데 이 세상에서는 생일 잔치, 환갑 잔치, 무슨 취임 잔치 이런 잔치들이 있지만 이 홍포 입은 부자는 매일입니다. 매일. 매일 먹고 마시고 자 기 욕심을 채우고 자기 하나를 기쁘게 하는 그 일에 참 전심 전력하 고 일생을 다 이렇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음부는 지옥의 전 단계로 지 옥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이 지옥에 가게 되니까 거기에는 물 한방 울도 자기가 마음대로 취할 수가 없고 자기의 혀끝 하나를 잠깐 시 원하게 하는 그런 일도 거기에는 허락이 안됐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먼저 자기 것 먹어 치우고 또 없으면 남의 것이라도 빌려가지고, 요새 참 우리 한국 사람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 만큼 살지만 고 치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 세상 생활도 복받지 못하고 잘되지 못할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거 니꺼 내것 없는 것 같아서 먹는 사람이 최고인 것 같아요. 먼저 먹는 사람이 먼저 그만 남의 것을 취해 가지 고 먹어 치우고 기분 좋으면 그만 그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래 하면 그게 장사가 되겠습니까 경제가 되겠습 니까 이 하나님이 내신 이 세상도 하나님께서 유지가 되려고 하면 다른 사람도 생각하고 이렇게 염치도 차리고 또 세상의 질서도 지켜 야 되는데 사람들이 남은 생각 안하고 자기만 위해서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어떤 사람은 6먹는 이 탐식하는 것. 아, 뭐 생각만. '아침에 일어나 면 어느 집에서 뭘 잘하나, 어디 가면 뭐가 맛있나' 늘 먹는 것만 생각합니다. 뭐 자기 입가지고 먹는 것을 누가 뭐라 하겠습니다만 빌 려서. 남의 것을 탈취해가지고 먹는 그런 일. 또 그것만 하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몸을 망치는 마약. 이거 우리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 부산은 마약 도시라고 우리 한국에서 유명한 이렇게 이름이 난 그런 도시가 되었는데 이것도 결국 감각적인 그 만족 자기 가정이 어찌되든지 자기 일생이 어찌되든지 자기 명예가 어떻게 되 든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육체의 정 욕. 이거는 뭐 남의 여자고 남의 남자고 또 심지어는 남의 딸이고 남 의 아들들이고 또는 심지어는 어린아이고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아니 하고 자기 육체의 정욕 하나 만족시킬려고 사는 이런 세상이 되었지 만, 미안하지만 죽고난 뒤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는 성경에 말씀 하기를 혀 끝에 물한방울 딱 떨어지는 그 시원함,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을 안한다고 했습니다. 불 가운데에서 고통 가운데에서 고민한다 고 했습니다. 얼마동안 영원히 그게 하나님의 보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를 알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 며 사랑의 잔치를 하는 곳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애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애연이라는 말은 사랑의 잔치라는 말인데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한 사람, 두 사람 만나서 뭐가 지고 잔치하는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나눕니다. 예수님의 살의 은 혜를 나눕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 진리의 깨달음의 은혜, 또 성령님의 충만하신 그 은혜를 가지고 사랑의 잔치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 이렇게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사죄의 은혜를 입어서' 매일입니다. 매일. '내 속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뙨 행위가 있으면 주님 앞에 낱낱이 고백하 면 하나님께서 모든 그 더러운 그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하여 주 시고 깨끗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자. 이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살자. 그리하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령님께서,' 여러분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뭐 내가 아무 리 경건 생활하고 불경건을 버리려고 해도 마귀가 얼마나 집요하게 참 못 살게 구는지, 또 작정했다고 또 죄짓고 더 큰 죄를 짓고 이래 가지고 양심에 가책 받고 고민하고 고통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 죄를 예수님께 다 고백하면 용서해 주시고 성령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이래 해서 우리가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따라서 이래 살면 죄를 이 길 수가 있습니다. 어떤 참 몇십 년된 더러운 습관이라도 악습이라도 끊을 수가 있습니다. 누구의 도움으로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령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이 더러운 습성을 끊으려고 하면 끊어집니다. 또 어떤 허물과 죄로 인해서 당한 여러 가지 헝클어지고 잘못된 모든 일도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 해 살면 살살 봄눈 녹듯이 녹아서 다 해결이 되어지고 먼저 마음의 평안과 모든 일이 잘 풀어지는 형통하게 되는 그런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는 성도들의 잔치는 무슨 잔치인고 하 니까 이게 사랑의 잔치입니다. 그 잔치의 음식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의 살, 예수님의 피, 진리, 성령님 이렇게 피와 진리와 성령님이라 말씀하는 것은 주님의 피를 믿고 진리를 믿고 성령님을 믿으면 거기에 따라서 하나님의 온갖 충만 의 좋은 지혜와 능려과 은헤와 축복을 다 받을 수 있는 것을 말씀을 하십니다. 이래 가지고 이 잔치의 주인은 누구신고 하니깐 주님이십니다. 주 님이 피 흘려서 내 죄를 속해 주시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또 형제들을 모아 가지고 '죄 짓고 고민하지 마라. 회개해라 우리 주 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해 달라고 하면 용서해 주시고 너를 모든 더 러운 데서 불의한 데서 건져서 깨끗하게 해준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래 믿어. 믿어봐. 또 하나님께 기도해. 순종해.' '그러면 해 보겠습니다.' 이 주님의 살과 피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고 또 다른 사람 들이 그걸 듣고 믿습니다. 믿으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넘치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음식 먹고난 뒤에 힘이 나듯이 힘과 능 력을 얻어 가지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 욕심하나 만족시키고 자기 하나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 것이 아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참 주님의 사활 대속 공로를 날마다 믿고 진리와 영감에 순종하는 이 생활 하는 것이 이것이 주님의 잔치에 내가 참여하는 것이고 주님으로 더불 어 먹고 마시는 이런 일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있는 고기나 세상에 있는 술이나 좋은 것을 가 지고 자기 육신을 만족 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살았지만 나사로는 거 지 생활하면서, 이거 사람들이 알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뭘 보고 아는고 하니까 천사가 와가지고 죽을 때에 그를 받들어 가지고 아브 라함의 품속에 낙원에 데리고 가서 거기에서 영생복을 누리도록 한 것 그것 보니까 이 나사로는 겉으로는 거지 생활하고 남이 먹고 버 린 것을 먹는 그런 불쌍한 생활을 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주님의 사랑의 잔치에 참여해서 우리 주님 기쁘시 게 하고 주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서 먹고 마시고 남에게 나누어 주는 그런 생활 한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들, 우리 주님 예수님도 세상에 어떻게 사셨는가 여러분들 집에 가서 그거 한 번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말씀을 하시면서 거기에 나타난 여러 가 지 말씀을 종합해 보면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갔다가 돌 아 와서 "예수님, 음식 잡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배 부르다. 나는 이제 안 먹어도 되겠다." 제자 들의 생각이 주님에게 누가 음식을 대접을 했는가 그래 생각을 했지 만, 23절에 보니까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자의 뜻을 행하고 그 뜻을 영원토록 행해서 그 뜻을 완성시키는 그것이 내 양식이라" 그러니까 뭐 있는대로 없는대로 먹고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가지고 마약을 하 고 이래 가지고 그저 자기 하나, 자기 감각적인 것, 욕심 하나 만족 시키려고 하는 이런 삶을 사는 것이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그거는 미안한 말이지만 돼지같은 삶입니다. 멸망의 날, 도살의 날에 자기 몸을 살찌우는 돼지 같은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가지고 살고 뭘 양식으로 먹고 살아야 되는가 하니까 우리 주님도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양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아버지의 뜻을 행하면 양식됩니다. 힘이 되고 그것이 육체의 힘까지도 되고 이래 가지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살았다. 그럼 오늘 우리 믿는 성도들이 뭐 먹고 살아야 되는고 하니까 아 버지가 원하고 원하는 주님의 대속 구원을 내가 받아서 믿고 그 대 속 구원을 남에게 전하고 그래서 나 자신이 경건을 이루어서 믿음의 사람이 되고 경건한 행위를 하나 하면 '아이고 수지 맞았다.' 이게 우리 양심이고 우리 수입이랍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대속 공로를 믿고 회개하고 말씀대로 영감대로 바로 살아 가지고 경건 생활 하면 '아이고 수지 맞았다. 아이고 양식 먹었다. 아이고 참 배부르다.' 이것 이 우리 양식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도 우리 반사 선생님들이 심방하러 갈 때에 피곤하고 힘이 들 지만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또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주님의 은혜와 진리를 받아서 누림으로써 참된 양식을 먹고 참으로 기뻐하고 또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서로 나눌 때, 주님의 말씀의 은헤를 서로 나눌 때, 주님의 성령님의 은사를 서로 나눌 때에 이때가 참 주님 모시 고 사랑의 잔치를 베푸는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 참여해서 참 주님으 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주님의 모든 좋은 것을 내가 받아서 누리는 그런 우리 삶이 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그래야 하늘나라에 가서도 기쁠거라 말입니다. 하늘나라 가보니까 하늘나라는 주님 한분이 왕이십니다. 주님의 말씀 듣고 주님의 은혜 받고 또 주님의 피공로의 은혜 입은 사람으 로서 주님 모시고 사니까 아무런 부족한 것이 없고 힘이 나고 기쁘 고 줄거운 것이 하늘나라인데, 세상에서 말입니다 예배당에 나오는 것이 마치 참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모양으로 억지로 억지로 나왔다가 나와 가지고는 그만 자고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잠이 안오니까 이런 저런 공상이나 생각하고 손톱이나 다듬고 이래 가지고 가는 사람이 천국 가 놓으면 재미있겠 습니까 천하에 재미없고 지루한 곳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옥가는 것이 오히려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나사로는 세상에서는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는 참으로 불쌍 한 생활을 했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을 먹고 사는 것이 틀 림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주시는 그 양식을 먹고 살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때에 마치 다 떨어진 누더기로 우리 주님을 입히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운 그런 일들이 있으면 우리가 그 것을 다 회개를 해야 되겠습니다. 나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욕을 먹 고 나 때문에 주님께 영광이 돌아가지 않는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이거는 그야 말고 홍포입은 부자와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이걸 지금 우리가 회개를 하고 어떻게든지 내가 내 인격이나 내 행위나 내 말이나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눈에 안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참 주님을 믿고 주의 말씀을 따라서, 예를 들면 이웃 구원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 한 번을 했다고 하면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그 사랑s, 하나님의 그 구원이 세상에 나타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겁니다. 이래서 우리가 죽기 전에 내가 훼손했던 내가 가리웠던 주님의 영광을 다 드러내고 나타내고 가도록 이렇게 우리가 작정을 해야 되겠 습니다. 우리는 또 주님을 위한 사랑의 잔치를 베풀어서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됩니다. 우리 주님이 기뻐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이거 뭐 먹는 것은 부족하고 서로 이렇게 선물 주고 받고하는 그 런 것은 없다 하더라도 이 주님의 이 대속의 사랑, 이 주님의 말씀, 성령님의 은사 이것을 우리가 형제들에게 나눕니다. 말로 위로를 하고 격려하고 말씀으로 가르치고 또 내게 적은 물질이라도 있으면 나누 어서 이렇게 주님의 이 대속의 은혜를 서로 먹고 마시고 나누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주님을 배불리게 해 드리는 것. 주님이 참 포식이 되도록 '아, 내가 배부르다. 내가 만족스럽다.' 우리 주님이 만족할 수 있도록 이렇게 주님에게 양식 먹이고 주님 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 우리가 주님에게든지 그만 주님은 제쳐 놓고 참 이 세상으로 자기의 만족을 삼아 가지고 이래 사는 것은 부자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사로가 죽을 때에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순교하신 우리 백목사님이 순교하신 말씀을 들어보면 자기는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게 되면 제일 먼저 나사로 만나 보고 싶답니다. 나사로를 만나가지고 그 앞에 그만 절을 하고 무릎을 끓고 그를 존경하고 그 다음에는 요셉을 만나 보고 싶다. 그 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천하 모든 현실 중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현실 이 제일 귀하고 복된 현실입니다. 아, 병들어도 그게 좋은 현실이고 가난해도 그게 좋은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실생활에 있어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지를 못하는 것이 이게 한탄스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럽니다. '다른 사람은 같이 예수 믿어도 다른 사람 은 부자가 되는데 다른 사람은 모든 일이 잘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참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시는데 왜 나는 복이 없는가, 나는 왜 이렇게 늘 잘못되는가' 원망 불평이 생긴답니다. 또 시기심이 생깁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나 보다 잘될까 시기하는 그런 마음도 생깁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사람들 중에 제일 불쌍한 사람이 나사로 였습니다. 제일 가난한 사람이 나사로였고 제일 멸시 천대를 받는 사람이 나사로였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자기 현실에 대해서 하나도 원망하지 아니하고 불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 께 감사하는 그런 삶을 산 것이 분명합니다. 아, 성경에는 기록 안 되었으니까 불평한 것이 없는 것은 확신하고 감사는 했는가 그거는 기록이 없으니까 모르지만 얼마든지 추론할 수 있답니다. 마치 비유컨대 들판에 핀 꽃 한송이가 사람들의 발 길 에 채이지만 아무리 인간이 그 가치를 몰라주고 참 무시하지만 조물 주 한분만을, 자기를 만드신 주님 한 문만을 생각하면서 때를 따라 또 이렇게 잎이 날때는 잎이 나고 꽃이 필 때는 꽃이 피고 또 질때는 지고 이렇게 자기 의무를 감당하는 것과 같이 나사로는 주님이 어떤 현실을 주시던지 간에 하나도 원망 불평하지 아니하고 자기에 게 제일 좋은 현실로 주는 줄 알고 그는 불평없이 원망없이 주님 섬 기는 이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부자가 자기를 꾸미고 또 자기를 위해서 먹고 마시는 일을 하다가 음부에 가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또 자기 만족을 취할 수 없는
그런데 간 것을 우리가 이렇게 추론해 생각하면 이 나사로는 틀림없이 세상에 사는데 두 가지. 이거 우리가 배운 말씀이고 묵상할 제목입니다. 주님을 아름답게 옷 입혀 드리는 일과 또 주님을 배불리고 주님의 그 잔치에서 주님 을 기쁘시게 하는 일. 그 일을 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품 속에 가서 자, 주님이 가지는 영광에 동참하고 또 주님이 가지신 그 모든 것을 상속 받아 가지고 살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었으니 오늘 우리도 나사로를 본받아서 어떤 어 려운 처지에 있을지라도 주님이 나에게 유익해 주시기 위해서 주신 이 현실인 줄을 확실히 믿고 불평 불만하지 말고 감사하고, 자, 우리 할 일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자기를 꾸미는 일을 하지 말고 자기를 영화롭게 하지 말고 주님 영화롭게 하고 두 번째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을 만족하는 일.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문답 제 일조에 말한대로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 록 즐거워한다. 주님으로 자기 만족을 삼는 것이고 우리 주님이 기뻐하는 그게 내 기쁨이 되는 것이고 우리 주님이 만족하면 그게 내 만족이 되는 것 이지 그걸 내놓고 뭐 술로 밥으로 약으로 또 이 세상의 것으로 자기 를 기쁘게는 것은 지옥갈 일이고 불탈 일이고 다 망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한 분 영화롭게 하는 일과 우리 주님 기쁘시게 하는 이 일만 우리의 천직으로 우리의 삶의 목적으로 이렇게 살고 알 고 살면 이 세상 흔적은 잠깐이라고 했습니다. 부자로 살아도 잠깐, 가난하게 살아도 잠깐. 이것은 그 현실을 통해서 이 경건 이루고 이 두 가지 삶을 이루는 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거 하면 하나님이 필요한 대로 어떤 때는 또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고 아무런 걱정할 것이 없도록 다 해 줄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 래서 최악의 경우에 나사로와 같은 그런 경우에 우리가 빠진다고 하 더라도 우리 원망할 것 없습니다. 불평할 것 없습니다. 우리 할 일은 주님 기쁘시게 하는 일, 주님 높이는 일 이것만 하면 우리에게는 아 브라함의 품, 낙원이 기다리고 있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 복을 우리가 다 받게 되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를 화려하게 꾸미는 일, 명예로 나 지위로나 부요함으로나 권세를 가지고 써든지 또 무슨 아름다운 도덕적인 행위를 통해서든지 또는 무슨 학위를 얻는다든지 또 무슨 좋은 재능을 계발해서든지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요한계시록 18장 7절에 말씀하시기를 "그가 어 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게 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주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는 "죄악이 하늘 에까지 가득차리라" 말씀하셨는데 그게 무슨 죄악인고 하니까 자기 를 아름답게 장식하며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이 두가지 죄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도 받았고 또 하늘나라를 소망하기 때문에 날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영화롭게 할까 이것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이런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비유로 말한다고 하면 자기가 좋은 자색옷을 만들고 또 고 운 베옷을 만들어 입을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에게 자색 옷을 만들 어 입히시고 또 아름다운 이 베옷을 지어서 주님을 입혀 영화롭게 해야 되겠습니다. 자기의 시간이나 소유나 재능이나 자기의 모든 힘 을 다 바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을 아름답게 또 영화롭게 주 님께 자색 옷을 지어 입혀 드리도록 이렇게 우리가 힘을 써야 되겠 습니다. 우리 장로교회에서 대소요리문답이라고 하는 교리 문답이 있는데 그중에 소요리 문답 제일 일문이 무엇인고 하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 워 하는 것이니라.' 성경에 여기 누가복음 16에도 말씀하시고 또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 인생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을 아주 간결하게 잘 표현한 교리입니다. 사람 의 제일되는 목적은 자, 누구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또 그리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 하나님을 자기 기쁨으로 삼고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받아서 자기 양식으로 자기의 힘으로 삼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주님으로 더불어 잔치하는 이런 생활하는 것이 믿는 성도들의 삶의 목적이고 또 사는 방식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예를 들면 우리 주님의 사랑을 하나 나타내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 일생을 다 바쳐야 되 겠고 또 주님의 진실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일생을 노력하 고 애써야 되겠고 또 주님의 그 약속하신 약속의 신실하심을 나타내 고 증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을 믿고 신실한 그런 생활을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우리를 보고 우리를 칭찬하는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하 심을 알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주님의 그 속성 하나하나, 주님의 성품 하나하나,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 주님의 하시는 그 모든 은혜 역사 하나 하나 를 우리가 잘 드러내어서 그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나타내어서 주님 에게 영광을 돌리는 이런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 못한다고 할지라도 일생동안 주님의 한 면이라도 주님 의 아름다운 한 성품이라도 우리가 드러내어서 '예수님은 이런 분이 시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깨닫게 되어서 놀라고 감격해서 이 렇게 냉정하고 쓸쓸하고 사막같은 세상에서 독사와 이리가 들끓는 이런 곳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나타내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 향기를 맡고 흐뭇해 하도록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고 삶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주님에게 아름다운 옷을 지어 입혀 드려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우입니다. 우리가 사실 무슨 좋은 옷을 지어서 주님 앞에 두리고 또 주님을 입혀 두리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이 본래 가지고 계신 그 영광이 우리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눈이 어두 워지고 또 죄악 세상이 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영광이 가리어져 있는 것인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아니하고 드러내 도록 하기만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본래 우리 주님은 영광이 없으신 분이신데 우리가 들어가지고 주 님을 사랑의 주님으로 만들고 진실하신 주님으로 만들고 거룩하고 의로우신 주님으로 만들고 또 주님이 우리에게 각양의 은사와 복을 주시는 그런 복되신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미안하지만 아닙니다. 만약 그리 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사람들이 이렇게 저 렇게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분을 상종해 가지고 이런 분은 이럴 것이 다 저럴 것이다 이렇게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다 가상이고 실제가 아 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본래적으로 참 피조물과는 구별 되는 거룩하심과 피조물을 창조하고 보관 유지시키시는 그런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본래의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짓고난 다음에 우리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를 못하는 것이고 또 이 죄악 세상이 더러워지고 악해져 가지고 여기에서는 죄짓는 사람이 왕입니다. 무슨 시비를 하 고 주장을 해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주먹 센 사람이 존경을 받 고 악을 더 행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이렇게 '아, 참 특별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는 것이 더 악하다 이겁니다. 이렇게 죄악 세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빛이 비치기는 비 치지만 이 세상이 어두워서 그 빛을 영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아름답게 하고 주님에게 아름다운 옷을 지어 드려서 주님의 아름다운 그 빛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사실은 주님이 본래 가지신 그 영광을 내가 가리우지 아니하고 드러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면으로 말하면 '내가 힘써서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래 말을 하지만 사실은 주님이 가지신 그 영광 가리워진 것을 내 가 하나씩 하나씩 꺼풀을 벗겨서 그 본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래서 세상에서도 예수 믿는 한 사람이 있어가지고 참 주님을 증 거하고 또 주님의 말씀대로 믿어서 순종해 살아가지고 그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때에 사람들은 그 영광을 보고 놀래고 두려워하고 또 그 주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서 흐뭇해하고 이 죄악 세상가운데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하늘나라도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주님의 영광이 하나 하나 드러날 때에는 모든 사람들과 만물들이 다 놀라고 기뻐하고 즐거워 하되 영원한 만족과 기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가리던 것을 드러내려고 하면 어떤 때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내가 희생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고 또 손해도 볼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생명까지 다 내놓아야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 드 려서 그 영광을 드러내도록 이렇게 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고운 베옷을 입었다 하는 말씀은 고운 베옷이라고 하는 것은, 자색 옷은 겉옷을 말하고 고운 베옷은 속옷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되 한 번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일매일 또 매사매사에 아주 작은 일 하나라도 '내가 이렇게 말하면 주님께 영광이 되어지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님을 이렇게 영화롭게 할 수가 있겠나, 내가 이 말 한마디 행동하나 잘못 하면 내가 욕 먹는 것은 괜찮지만 나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 나, 하나님이 그래 가르치더나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가' 이렇게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고 하면 이것이 우리의 허물이고 죄고 또 그것이 하늘나라에 가면 그야 말로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고 또 그 일 자체는 지옥 불에 가서 타 야될 그런 일이 될 것입니다. 이래서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하는 말씀으로 상징되는 것은 우리 가 드러나게 주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하는 그런 일도 할 뿐만 아 니라 남이 보지 못하는 그런 일도 그저 자기가 마음 속에 생각하는 것이나 남이 알지 못하는 작은 일이나 매사에 하나도 남김이 없이 어떻게든지 주님 한 분만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특별히 예수님이 요한복음 17장 1절 이하에 마지막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 그 기도가 있는데 그 기도를 보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 가지고 어떻게 살으 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아주 똑똑하게 찾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어떤 목적으로 살았는가 요한복음 17장 1절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 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사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러고 그 뒤에 쭉 계속 되어 있는 말씀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나타내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 하나 아버지가 어떻게 높고 위대하시며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시며 또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어떻게 은혜로우신 분이시고 아브라함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분이시고 그 약속을 어떻게 신실하게 이루신 분이시고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참되신가 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되 그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 그 하나님 아버 지의 아름다우심을 나타내는 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하신 일이 셨고 그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편으로는 빌립보 2장에 말씀하신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자기를 낮추시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높이 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까해서 예수님이 자기를 낮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되기까지 낮아지고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시고 영원히 인성을 벗지 아니하고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그런 낮아지심으로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나님 아버지 를 세상에 나타내고 세상에 증거하는 그 일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또 내가 이미 영광을 받았다 내가 이미 영광을 받고 또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를 높였습니다. 하나님의 그 아름다우심 하나님의 그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어서 사람들이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알고 발견해서 놀래고 감사하고 감격하고 참 하나님 아 버지를 믿고 바라보고 소망하는 가운데에서 구원을 얻게 하고 그래 가지고 또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이런 예수님의 삶이었답니다. 그 러니까 예수님은 조금도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자기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를 아니했습니다. 물론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 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는 말씀이 있지만 그거는 하나님 아버지 의 영광을 위해서 한 그런 기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여러분들 이 깊이 묵상하시고 또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이나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세상에 서 멸시 천대를 받으시고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이 없으시고 세상 에서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한 마디도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제물로 드려서 이 렇게 바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 기 위해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구주이시며 우리 삶의 모본이 되십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도 이제는 성경 말씀과 영감이 있고 우리 주님이 사신 이미 주님의 생애를 배웠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이 홍포 입은 부자처럼 자기를 아름답게 꾸미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그런 일을 우리가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한다고 하면 그렇게 살고난 결 과는 죽고난 뒤에 나타납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어떻게 사치하고 자기를 아름답게 했든지 그것 이 영원한 수치로 또 불가운데서 고통당하는 것으로, 거기에 가보니 까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을 자기의 종으로 부리고 자기 를 위해서 이렇게 부리고 살았지만 거기는 나사로를 거기에 가서도 부려 먹을 줄 알고 아버지여, 나사로를 보내가지고 내 혀 끝에 물 한 방울 이렇게 찍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했지만 아브라함이 거절했습니다. '아, 너 착각하고 있다. 너 오산하고 있다. 여기가 어딘데 여기가 세상인 줄 아나, 죄악 세상에서는 네가 네 마음대로 너를 높이고 이 래 살았지만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고 하늘나라다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자, 그러면 주님만 영화롭 게 하면 우리 자신은 어떻게 하고 그거는 염려하지 마십시고 성경 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에 동참한다 그랬고 우리 주님의 영광에 동참한다 그랬고 또 아버지의 영광에 동참을 한다"고 그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한 분 높이고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고 나타내는 그 일을 통해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자, 누구도 영광을 받겠습니 까 우리도 덩달아서 우리도 거기에 동참을 해 가지고 같이 영광을 받는 것이 우리가 받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아 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영화롭게 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주 되시고 주권 자 되심을 나타내는 것이 뭐 말로만, 물론 말로도 나타내야 되겠지만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다니엘이나 이런 성도들을 보면 그들의 행위 를 통해서 나타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 때에 하나님이 주권자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게 되고 '다니엘의 하나님을 찬송해라 아브라 함의 하나님을 찬송해라 요셉의 하나님을 찬송해라' 요셉이 하나님의 인도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영광을 세상에 드러냈었습니다. 우리가 보면 손양원 목사님이나 주기철 목사님 같은 그런 분들도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이렇게 새옷을 지어 입혀서 영 화스럽게 했는고 하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자 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해서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걸 세상 사람 들이 알고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신지 모릅니다. 참 이상하 지요 하기는 손양원 목사님이 했는데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럴 때에 그러면 손양원 목사님은 영광을 받지 못하겠느냐 하나님 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손양원 목사님도 거기에 동참을 해가지고 영광을 같이 받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영광은 그겁니다. 뭐 하나님이야 어찌 됐든지 간에 예수 믿는 사람이 원수를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모질박스럽게 원수를 갚습니다. 죽이고 또 죽이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아니해서 무덤까지 파 헤 치는, 만약 그런 일을 할지는 몰라도 자기는 기분이 좋을 지는 몰라 도 '네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가 그런 복수의 하나님이고 그 렇게 분을 풀지 못하는 그런 하나님이가' 하기는 내가 했는데 욕은 하나님이 먹는다 이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그것이 수치스러운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고 영원히 그런 행위는 지옥가서 불탈 행위가 될 수밖 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꾸미려고 하지 말고 주님을 영화롭게 주님을 이렇게 꾸며 드 릴려고 하면 자기는 거기에 동참해가지고 우리 주님이 영광을 받을 때 우리도 같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여기에 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또 두 번째는 홍포 입은 부자가 날마다 연락한다고 했습니다. 연락 한다는 말은 매일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즐겁게 잔치한다는 말인데 이 세상에서는 생일 잔치, 환갑 잔치, 무슨 취임 잔치 이런 잔치들이 있지만 이 홍포 입은 부자는 매일입니다. 매일. 매일 먹고 마시고 자 기 욕심을 채우고 자기 하나를 기쁘게 하는 그 일에 참 전심 전력하 고 일생을 다 이렇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음부는 지옥의 전 단계로 지 옥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이 지옥에 가게 되니까 거기에는 물 한방 울도 자기가 마음대로 취할 수가 없고 자기의 혀끝 하나를 잠깐 시 원하게 하는 그런 일도 거기에는 허락이 안됐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먼저 자기 것 먹어 치우고 또 없으면 남의 것이라도 빌려가지고, 요새 참 우리 한국 사람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 만큼 살지만 고 치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 세상 생활도 복받지 못하고 잘되지 못할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거 니꺼 내것 없는 것 같아서 먹는 사람이 최고인 것 같아요. 먼저 먹는 사람이 먼저 그만 남의 것을 취해 가지 고 먹어 치우고 기분 좋으면 그만 그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래 하면 그게 장사가 되겠습니까 경제가 되겠습 니까 이 하나님이 내신 이 세상도 하나님께서 유지가 되려고 하면 다른 사람도 생각하고 이렇게 염치도 차리고 또 세상의 질서도 지켜 야 되는데 사람들이 남은 생각 안하고 자기만 위해서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어떤 사람은 6먹는 이 탐식하는 것. 아, 뭐 생각만. '아침에 일어나 면 어느 집에서 뭘 잘하나, 어디 가면 뭐가 맛있나' 늘 먹는 것만 생각합니다. 뭐 자기 입가지고 먹는 것을 누가 뭐라 하겠습니다만 빌 려서. 남의 것을 탈취해가지고 먹는 그런 일. 또 그것만 하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몸을 망치는 마약. 이거 우리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 부산은 마약 도시라고 우리 한국에서 유명한 이렇게 이름이 난 그런 도시가 되었는데 이것도 결국 감각적인 그 만족 자기 가정이 어찌되든지 자기 일생이 어찌되든지 자기 명예가 어떻게 되 든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육체의 정 욕. 이거는 뭐 남의 여자고 남의 남자고 또 심지어는 남의 딸이고 남 의 아들들이고 또는 심지어는 어린아이고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아니 하고 자기 육체의 정욕 하나 만족시킬려고 사는 이런 세상이 되었지 만, 미안하지만 죽고난 뒤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는 성경에 말씀 하기를 혀 끝에 물한방울 딱 떨어지는 그 시원함,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을 안한다고 했습니다. 불 가운데에서 고통 가운데에서 고민한다 고 했습니다. 얼마동안 영원히 그게 하나님의 보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를 알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 며 사랑의 잔치를 하는 곳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애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애연이라는 말은 사랑의 잔치라는 말인데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한 사람, 두 사람 만나서 뭐가 지고 잔치하는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나눕니다. 예수님의 살의 은 혜를 나눕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 진리의 깨달음의 은혜, 또 성령님의 충만하신 그 은혜를 가지고 사랑의 잔치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 이렇게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사죄의 은혜를 입어서' 매일입니다. 매일. '내 속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뙨 행위가 있으면 주님 앞에 낱낱이 고백하 면 하나님께서 모든 그 더러운 그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하여 주 시고 깨끗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자. 이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살자. 그리하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령님께서,' 여러분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뭐 내가 아무 리 경건 생활하고 불경건을 버리려고 해도 마귀가 얼마나 집요하게 참 못 살게 구는지, 또 작정했다고 또 죄짓고 더 큰 죄를 짓고 이래 가지고 양심에 가책 받고 고민하고 고통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 죄를 예수님께 다 고백하면 용서해 주시고 성령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이래 해서 우리가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따라서 이래 살면 죄를 이 길 수가 있습니다. 어떤 참 몇십 년된 더러운 습관이라도 악습이라도 끊을 수가 있습니다. 누구의 도움으로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령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이 더러운 습성을 끊으려고 하면 끊어집니다. 또 어떤 허물과 죄로 인해서 당한 여러 가지 헝클어지고 잘못된 모든 일도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 해 살면 살살 봄눈 녹듯이 녹아서 다 해결이 되어지고 먼저 마음의 평안과 모든 일이 잘 풀어지는 형통하게 되는 그런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는 성도들의 잔치는 무슨 잔치인고 하 니까 이게 사랑의 잔치입니다. 그 잔치의 음식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의 살, 예수님의 피, 진리, 성령님 이렇게 피와 진리와 성령님이라 말씀하는 것은 주님의 피를 믿고 진리를 믿고 성령님을 믿으면 거기에 따라서 하나님의 온갖 충만 의 좋은 지혜와 능려과 은헤와 축복을 다 받을 수 있는 것을 말씀을 하십니다. 이래 가지고 이 잔치의 주인은 누구신고 하니깐 주님이십니다. 주 님이 피 흘려서 내 죄를 속해 주시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또 형제들을 모아 가지고 '죄 짓고 고민하지 마라. 회개해라 우리 주 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해 달라고 하면 용서해 주시고 너를 모든 더 러운 데서 불의한 데서 건져서 깨끗하게 해준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래 믿어. 믿어봐. 또 하나님께 기도해. 순종해.' '그러면 해 보겠습니다.' 이 주님의 살과 피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고 또 다른 사람 들이 그걸 듣고 믿습니다. 믿으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넘치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음식 먹고난 뒤에 힘이 나듯이 힘과 능 력을 얻어 가지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 욕심하나 만족시키고 자기 하나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 것이 아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참 주님의 사활 대속 공로를 날마다 믿고 진리와 영감에 순종하는 이 생활 하는 것이 이것이 주님의 잔치에 내가 참여하는 것이고 주님으로 더불 어 먹고 마시는 이런 일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있는 고기나 세상에 있는 술이나 좋은 것을 가 지고 자기 육신을 만족 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살았지만 나사로는 거 지 생활하면서, 이거 사람들이 알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뭘 보고 아는고 하니까 천사가 와가지고 죽을 때에 그를 받들어 가지고 아브 라함의 품속에 낙원에 데리고 가서 거기에서 영생복을 누리도록 한 것 그것 보니까 이 나사로는 겉으로는 거지 생활하고 남이 먹고 버 린 것을 먹는 그런 불쌍한 생활을 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주님의 사랑의 잔치에 참여해서 우리 주님 기쁘시 게 하고 주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서 먹고 마시고 남에게 나누어 주는 그런 생활 한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들, 우리 주님 예수님도 세상에 어떻게 사셨는가 여러분들 집에 가서 그거 한 번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말씀을 하시면서 거기에 나타난 여러 가 지 말씀을 종합해 보면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갔다가 돌 아 와서 "예수님, 음식 잡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배 부르다. 나는 이제 안 먹어도 되겠다." 제자 들의 생각이 주님에게 누가 음식을 대접을 했는가 그래 생각을 했지 만, 23절에 보니까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자의 뜻을 행하고 그 뜻을 영원토록 행해서 그 뜻을 완성시키는 그것이 내 양식이라" 그러니까 뭐 있는대로 없는대로 먹고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가지고 마약을 하 고 이래 가지고 그저 자기 하나, 자기 감각적인 것, 욕심 하나 만족 시키려고 하는 이런 삶을 사는 것이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그거는 미안한 말이지만 돼지같은 삶입니다. 멸망의 날, 도살의 날에 자기 몸을 살찌우는 돼지 같은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가지고 살고 뭘 양식으로 먹고 살아야 되는가 하니까 우리 주님도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양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아버지의 뜻을 행하면 양식됩니다. 힘이 되고 그것이 육체의 힘까지도 되고 이래 가지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살았다. 그럼 오늘 우리 믿는 성도들이 뭐 먹고 살아야 되는고 하니까 아 버지가 원하고 원하는 주님의 대속 구원을 내가 받아서 믿고 그 대 속 구원을 남에게 전하고 그래서 나 자신이 경건을 이루어서 믿음의 사람이 되고 경건한 행위를 하나 하면 '아이고 수지 맞았다.' 이게 우리 양심이고 우리 수입이랍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대속 공로를 믿고 회개하고 말씀대로 영감대로 바로 살아 가지고 경건 생활 하면 '아이고 수지 맞았다. 아이고 양식 먹었다. 아이고 참 배부르다.' 이것 이 우리 양식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도 우리 반사 선생님들이 심방하러 갈 때에 피곤하고 힘이 들 지만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또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주님의 은혜와 진리를 받아서 누림으로써 참된 양식을 먹고 참으로 기뻐하고 또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서로 나눌 때, 주님의 말씀의 은헤를 서로 나눌 때, 주님의 성령님의 은사를 서로 나눌 때에 이때가 참 주님 모시 고 사랑의 잔치를 베푸는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 참여해서 참 주님으 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주님의 모든 좋은 것을 내가 받아서 누리는 그런 우리 삶이 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그래야 하늘나라에 가서도 기쁠거라 말입니다. 하늘나라 가보니까 하늘나라는 주님 한분이 왕이십니다. 주님의 말씀 듣고 주님의 은혜 받고 또 주님의 피공로의 은혜 입은 사람으 로서 주님 모시고 사니까 아무런 부족한 것이 없고 힘이 나고 기쁘 고 줄거운 것이 하늘나라인데, 세상에서 말입니다 예배당에 나오는 것이 마치 참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모양으로 억지로 억지로 나왔다가 나와 가지고는 그만 자고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잠이 안오니까 이런 저런 공상이나 생각하고 손톱이나 다듬고 이래 가지고 가는 사람이 천국 가 놓으면 재미있겠 습니까 천하에 재미없고 지루한 곳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옥가는 것이 오히려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나사로는 세상에서는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는 참으로 불쌍 한 생활을 했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을 먹고 사는 것이 틀 림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주시는 그 양식을 먹고 살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때에 마치 다 떨어진 누더기로 우리 주님을 입히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운 그런 일들이 있으면 우리가 그 것을 다 회개를 해야 되겠습니다. 나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욕을 먹 고 나 때문에 주님께 영광이 돌아가지 않는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이거는 그야 말고 홍포입은 부자와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이걸 지금 우리가 회개를 하고 어떻게든지 내가 내 인격이나 내 행위나 내 말이나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눈에 안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참 주님을 믿고 주의 말씀을 따라서, 예를 들면 이웃 구원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 한 번을 했다고 하면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그 사랑s, 하나님의 그 구원이 세상에 나타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겁니다. 이래서 우리가 죽기 전에 내가 훼손했던 내가 가리웠던 주님의 영광을 다 드러내고 나타내고 가도록 이렇게 우리가 작정을 해야 되겠 습니다. 우리는 또 주님을 위한 사랑의 잔치를 베풀어서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됩니다. 우리 주님이 기뻐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이거 뭐 먹는 것은 부족하고 서로 이렇게 선물 주고 받고하는 그 런 것은 없다 하더라도 이 주님의 이 대속의 사랑, 이 주님의 말씀, 성령님의 은사 이것을 우리가 형제들에게 나눕니다. 말로 위로를 하고 격려하고 말씀으로 가르치고 또 내게 적은 물질이라도 있으면 나누 어서 이렇게 주님의 이 대속의 은혜를 서로 먹고 마시고 나누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주님을 배불리게 해 드리는 것. 주님이 참 포식이 되도록 '아, 내가 배부르다. 내가 만족스럽다.' 우리 주님이 만족할 수 있도록 이렇게 주님에게 양식 먹이고 주님 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 우리가 주님에게든지 그만 주님은 제쳐 놓고 참 이 세상으로 자기의 만족을 삼아 가지고 이래 사는 것은 부자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사로가 죽을 때에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순교하신 우리 백목사님이 순교하신 말씀을 들어보면 자기는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게 되면 제일 먼저 나사로 만나 보고 싶답니다. 나사로를 만나가지고 그 앞에 그만 절을 하고 무릎을 끓고 그를 존경하고 그 다음에는 요셉을 만나 보고 싶다. 그 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천하 모든 현실 중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현실 이 제일 귀하고 복된 현실입니다. 아, 병들어도 그게 좋은 현실이고 가난해도 그게 좋은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실생활에 있어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지를 못하는 것이 이게 한탄스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럽니다. '다른 사람은 같이 예수 믿어도 다른 사람 은 부자가 되는데 다른 사람은 모든 일이 잘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참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시는데 왜 나는 복이 없는가, 나는 왜 이렇게 늘 잘못되는가' 원망 불평이 생긴답니다. 또 시기심이 생깁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나 보다 잘될까 시기하는 그런 마음도 생깁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사람들 중에 제일 불쌍한 사람이 나사로 였습니다. 제일 가난한 사람이 나사로였고 제일 멸시 천대를 받는 사람이 나사로였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자기 현실에 대해서 하나도 원망하지 아니하고 불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 께 감사하는 그런 삶을 산 것이 분명합니다. 아, 성경에는 기록 안 되었으니까 불평한 것이 없는 것은 확신하고 감사는 했는가 그거는 기록이 없으니까 모르지만 얼마든지 추론할 수 있답니다. 마치 비유컨대 들판에 핀 꽃 한송이가 사람들의 발 길 에 채이지만 아무리 인간이 그 가치를 몰라주고 참 무시하지만 조물 주 한분만을, 자기를 만드신 주님 한 문만을 생각하면서 때를 따라 또 이렇게 잎이 날때는 잎이 나고 꽃이 필 때는 꽃이 피고 또 질때는 지고 이렇게 자기 의무를 감당하는 것과 같이 나사로는 주님이 어떤 현실을 주시던지 간에 하나도 원망 불평하지 아니하고 자기에 게 제일 좋은 현실로 주는 줄 알고 그는 불평없이 원망없이 주님 섬 기는 이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부자가 자기를 꾸미고 또 자기를 위해서 먹고 마시는 일을 하다가 음부에 가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또 자기 만족을 취할 수 없는
그런데 간 것을 우리가 이렇게 추론해 생각하면 이 나사로는 틀림없이 세상에 사는데 두 가지. 이거 우리가 배운 말씀이고 묵상할 제목입니다. 주님을 아름답게 옷 입혀 드리는 일과 또 주님을 배불리고 주님의 그 잔치에서 주님 을 기쁘시게 하는 일. 그 일을 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품 속에 가서 자, 주님이 가지는 영광에 동참하고 또 주님이 가지신 그 모든 것을 상속 받아 가지고 살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었으니 오늘 우리도 나사로를 본받아서 어떤 어 려운 처지에 있을지라도 주님이 나에게 유익해 주시기 위해서 주신 이 현실인 줄을 확실히 믿고 불평 불만하지 말고 감사하고, 자, 우리 할 일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자기를 꾸미는 일을 하지 말고 자기를 영화롭게 하지 말고 주님 영화롭게 하고 두 번째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을 만족하는 일.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문답 제 일조에 말한대로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 록 즐거워한다. 주님으로 자기 만족을 삼는 것이고 우리 주님이 기뻐하는 그게 내 기쁨이 되는 것이고 우리 주님이 만족하면 그게 내 만족이 되는 것 이지 그걸 내놓고 뭐 술로 밥으로 약으로 또 이 세상의 것으로 자기 를 기쁘게는 것은 지옥갈 일이고 불탈 일이고 다 망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한 분 영화롭게 하는 일과 우리 주님 기쁘시게 하는 이 일만 우리의 천직으로 우리의 삶의 목적으로 이렇게 살고 알 고 살면 이 세상 흔적은 잠깐이라고 했습니다. 부자로 살아도 잠깐, 가난하게 살아도 잠깐. 이것은 그 현실을 통해서 이 경건 이루고 이 두 가지 삶을 이루는 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거 하면 하나님이 필요한 대로 어떤 때는 또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고 아무런 걱정할 것이 없도록 다 해 줄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 래서 최악의 경우에 나사로와 같은 그런 경우에 우리가 빠진다고 하 더라도 우리 원망할 것 없습니다. 불평할 것 없습니다. 우리 할 일은 주님 기쁘시게 하는 일, 주님 높이는 일 이것만 하면 우리에게는 아 브라함의 품, 낙원이 기다리고 있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 복을 우리가 다 받게 되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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